피맛골 금속활자
피맛골.
서울 종로통 뒷골목이다.
그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로를 행차하는 고관대작들.
평민과 하급관리들은 그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골목을 애용했다.
그 골목이 바로 피맛골이다.
직장인들이 점심 한 끼를 때우고 소주잔을 기울이던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한글 금속활자 1600여점이 쏟아져 나왔다.
세종 때의 활자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선 금속활자인
‘을해자’(1455년)보다 21년 앞선 ‘갑인자’(1434년)로
추정되는 활자도 있다고 한다.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성서보다 최소 16년 앞선다.
역사적인 발굴이다.
활자란 무엇일까.
서적을 대량 보급하는 시대에 만들어지는 문명의 이기다.
경제혁명을 낳은 문명의 이기가 바퀴라면 활자는 지식혁명을
촉발하는 방아쇠다.
세종 26년(1444년) 역사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언문 창제를 멈추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구주(九州)의 풍토는 다르지만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예가 없고,
오직 몽고·서하·여진·일본·서번 같은 곳에 문자가 있지만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라고 했다.
사대주의적 주장이다.
화가 난 세종, 이런 말을 한다.
“너희들이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옛글에 위배된다’고 했는데,
설총의 이두도 음이 다르지 않으냐.
이두를 만든 본뜻이 백성을 편하게 하려는 것이거늘….”
애민 정신이 서려 있다.
그런 세종의 생각은 ‘어제 훈민정음’에도 담겨 있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니라.”
피맛골 금속활자가 보물인 것은 바로 그런 정신을 담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 활자로 책을 만들어 문맹을 없애고자 했을 테니.
어느 나라보다 일찍 금속활자를 만든 조선.
문명은 꽃피었을까. 이후 역사는 발전에 뒤처진 채 시들었다.
이념의 도그마에 갇힌 조선.
청에서 유행하던 패관소설의 유입까지 막았다.
화석처럼 굳은 이념에 젖어 혁신과 변혁의 기회를 놓쳤다.
피맛골 금속활자에는 그런 ‘슬픈 역사’도 담겨 있다.
지금은 어떨까. 이념에 뒤덮인 정치 지형.
그 미래는 무엇일까.
강호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