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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구만리 장천 나는 새야
일요일이어서 홍이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길거리에 아이들이 노는데 저만큼 주갑이 보따리 하나를 들고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주갑이아제? 어디 가요?" "저기, 저어기." 팔을 들고 허공을 가리키며 벌죽 웃는다. "저기, 저어기, 어딘데?" "강가에 간당게로." "강가에? 뭐하고 갑니까?" "그거사 뭐," "그라믄 나도 따라갈라요." "니가?" "야." "아따, 그리 허자고." 이번에는 시꺼멓게 담뱃진에 절은, 들쑥날쑥한 이빨을 드러내놓고 웃는다. 홍이는 주갑이가 좋다. 아버지처럼 무섭지 않아서 좋았고 엄마들처럼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좋았다. 그가 하는 말이면 어쩐지 우습고 재미가 난다. 길모퉁이를 돌아갔을 때 "홍아, 이 보따리 좀 받더라고." 하며 주갑은 들고 온 보따리를 홍이에게 건네준다. 그러고 나서 때묻은 주머니를 끄른다. "이보랑께." 잡화상 앞이다. 계집아이가 삐죽 얼굴을 내민다. "여기 돈 두 푼인디 눈깔사탕 돈대로만 주시요잉." 그새 며칠 동안 집 짓는 곳을 찾아다니며 날품을 팔더니 돈푼 생겼다고 걸핏하면 홍이에게 군것을 사주곤 했었다. 그러면 홍이는 으레 그러려니 사양 없이 받아먹는 것이다. 주갑은 보따리를 되받아 들고 홍이는 신문지 조각에 싼 사탕을 쥐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강가에까지 갔을 때 "주갑이아제." "워찌 그려?" "정말로 우리 내일 촌으로 가요?" "간당게로, 니 아부지가 그런다 혔응게로 틀림없이 가기는 갈 것이여." "그라믄 나는 핵교도 못 가겄소." "그놈의 공부 헌다고 벼슬헐 거란가? 성명 삼 자만 쓰면 된다 말씨." "아제는 성명 삼 잔가 뭐? 성명 두 자 아니요? 주갑, 나도 이홍." "이잉 안 그려. 주씨 성에다 갑이니께로 성명 삼 자 아니더라고?" 홍이는 개글개글 웃는다. 웃다가 다시 시무룩해지며 "핵교 못 가믄 정호도 못 보고..." "정호가 누군디?" "우리 반에서 젤 공부 잘하고 또오 나하고 젤 친한 동무요." "처처에 사람은 살고 있잉게로 맨들면 되는 거여. 걱정허지 말어." "옴마도 보고 저블 기고..." "그건 그려. 내가 생각혀도 국밥집 니 엄니 데려갔이면 좋겄는디." 그 말 대꾸는 없다. 강가 모래밭을 밟고 가던 주갑은 "홍아." "야?" "넌, 저어기 저기, 풀밭에 가서 나비나 잡고 놀들 않겄어?" "나비가 있어야제요." "그라면... 옳지! 여치가 있을 긴디 가보더라고." 주갑은 별나게 갑친다. "와요?" "허 이눔아아가 어른 말 들어야 헌당게로?" 여간 엄격하지가 않다. "나 좀 있다 널 부를 것이니 어른 말 듣더라고." 홍이는 시부롱해서 내려온 곳을 되잡아 풀밭 쪽으로 간다. "홍아-" 홍이 휙 돌아본다. "눈깔사탕 빨고 이잉-" 홍이는 풀밭에 와서 펄썩 주저앉으며 사탕 한 알을 입에 넣는다. 따돌리려 드는 주갑이 섭섭해서가 아니다. 눈물이 날 것 같다. 길에서 아이들과 놀 적에는 그렇지도 않았는데 내일 떠난다는 생각을 하니 슬퍼진다. '와 가겟집 옴마한텐 못 가라 카노. 와 아부지는 성만 낼까? 가겠집 옴마한텐 한분 가보지도 않고, 이렇기 말도 없이 떠나믄 정호가 나를 나쁘다 할 기고. 손가락 걸어서 지하고 나하고 맹세를 했는데 말이다. 선생님도 그렇고 김생원도 그렇고... 아부지는 와 그렇게 성만 낼까.' 사탕이 녹아서 침이 흐르려 한다. 얼른 침을 삼킨다. 그러나 홍이는 이내 달디단 사탕맛과 여치를 잡느라고 시간 가는 것을 잊고 슬픈 생각도 잊는다. 풀냄새도 좋고 발등을 간질여주는 풀의 촉감도 기분에 좋다. 뒹굴어보기도 하고 벅수를 넘어보기도 하고 풀꽃을 따서 신발에 소복이 담아보기도 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홍아-이-" 주갑이 부르는 소리에 놀라서 일어선다. "여기 있소오-" 신발을 들고 홍이 쫓아 내려간다. 신발에 담았던 풀꽃들이, 그새 시들어서 모래밭 위에 더러 떨어진다. "하 참, 몸이 날아갈 것같이 개볍네. 이러크름 좋은 거를..." 눈이 둥그래져서 홍이는 주갑이를 쳐다본다. 전혀 딴 사람이 거기 서 있는 것 같다. "매욕하고 머리도 감고, 홍아? 이자는 사람겉이 뵈들 않더라고? 그렇지야?" "옷도 갈아입었소?" "하모. 무명옷으로 갈아입었제. 여름도 설설 물러갔잉게로." 주갑이 싱글벙글 웃는다. 단정하게 빗어올린 상투하며 땟국이 빠져버린 얼굴, 그리고 흰 베옷은... 학이 한 마리 거기 서 있는 것 같다. 입술은 푸르스름하다. 강물이 차가웠던 게다. 제삿날이면 옷 갈아입고 망건 위에 갓을 쓰고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홍이 마음에 자랑스러움이 넘쳤었다. 마찬가지로 지금 학같이 슬기롭게 보이는 주갑이아제, 왠지 가슴이 찐해진다. "이자부터 벗은 옷을 빨아야제." 엄지손가락으로 코끝을 퉁긴다. 본시대로의 주갑이다. 그 꼴은. "우리 옹마보고 빨아돌라 카믄. 남자가 우찌..." 홍이는 민망해진다. "아니여, 남자가 우찌랑이? 그 따위 소린 약은 버려지가 허는 말인디 공자왈 선비들 양기로 모자래서 엄살 떤 거란 말씨." "양기가 머요?" "그건 니가 상투 찌르게 되면 저절로 알게 되여." 주갑은 물가에 주질러앉는다. 조그맣게 된 토막 비누를 꺼내여 빨래를 시작한다. 홍이는 옆에 쭈그리고 앉는다. 가죽과 뼈뿐인, 그러나 뼈마디가 굵은 손이 익숙하게 비누질을 하고, 주무르고 비비고, "아제요." "말하더라고." "맹세를 안 지키믄 죽어 저승에 가서 세를 뺀다 카든데," "그려." "그라믄 우짜꼬? 나 정호하고 맹세를 했는데." 홍이는 울상이 된다. "무신 맹세를 혔는디?" "후제, 크믄 말 타고 총 들고 독립운동하자고." "후제 일 아니랑가?" 주갑은 껄걸 웃는다. "하지마는 촌에 가서 공부도 안 하고 촌놈 되믄 말을 우찌 탈 기요? 총은 우찌 쏘고? 우리 선생님이 그러는데 배워야 나라를 찾는다고," "지이기럴! 아따야아 안 배워도 동학난리 때 이 주갑이 총 쏘았당께. 말이사 안 타보았지마는, 자고로 식자우환이란 말이 있덜 않더라고? 니 거 무른 대가리에 식자깨나 들었다고 벌써 우환인 기여. 하늘 보고 땅 보고 절기를 알면 세상 이치는 거기 다 있다 그 말인디, 애라 모르겄다." 하더니 주갑은 "새가 새가 날아든다아-" 별안간 목을 뽑는다. 어찌나 목소리가 크든지 홍이는 깜짝 놀란다.
새가 새가 날아든다아 온갖 새가 날아든다 남풍 쫓아 떨치나니 구만리 장천에 대붕새 문황이 나 계시니 기상조양의 봉황새애 문한기후 깊은 회포오 울고 남은 공작새 소선적벽 칠월야 ....
기막히는 목청이다. 쩌렁쩌렁 산천을 울리는가 하면 애연하게 올라가고 침통하게 내려오는, 자유자재로 굴리는 가락가락 - 신이나서 앉은 채 어깨를 들석이기도 하고 목의 복숭아뼈가 전율하기도 하고 일손을 멈추며 얼굴을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본다. 구만리 장천을 나는 대붕새를 생각함인가, 만경창파 녹수상에 원불상리 원앙새를 생각함인가, 스르르 눈을 감고 눈꼬리에 한 줄기 눈물이 흐르듯.
성성제혈 염화지 귀촉도 불여귀이
홍이는 나른한 채 신발에 남아 있는 풀꽃을 모아 다발을 지어서 강물에 퐁당퐁당 담그곤 한다. 이따금 지나가는 뗏목배 나룻배 사공과 선객들 중에 좋다! 잘한다! 소리가 들려오고 뱃전을 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삿갓을 쓴 청인 사공들은 대개 이쪽을 응시한 채 가버리고 혹은 제 할 일만 하기도 하고.
야월공산 저문 날에 저 두견이 울음 운다아 이산으로 오며 귀촉도 저산으로 가며 귀촉도 짝을 지어서 우르-음 운다아 이이이이잇 이이잇 이, 이, 이
주갑이는 다 빤 옷을 모래 위에 펴놓고 물가로 돌아온다. 곰방대를 꺼내어 담배를 넣는다. 손등은 까맣고 물에 불은 손바닥이 희여끄름하다. "주갑이아제." "워째 그려?" "주갑이아제는 아들 없소?" "있었제." "어디에?" "그거는 지금 모르겄구마." "그라믄 미적단이 데리갔소?" "아니제. 전생에 있었다 그거여. 아들만 있었간디? 딸도 있었고 마누래도 있었고 사방처마에 풍겡이 빙글빙글 도는 기와집에 살았었구마. 앞뒤로 기화요초는 우거지고오 나무가 너불너불 춤을 춤시로, 새들은 사철을 지저귀고 비단 보로 위에는 나는 이러크름 앉아서." 허리를 쭉 편다. "치이 거짓말," 주갑은 곰방대를 물고 불을 붙인다. "들판에서 깜박깜박허는 별을 치다봄시로 그런 생각을 허는 것도 재미진 일이니께. 심심허거나 배가 고플 적에, 치불 적에 그런 생각허믄 배고픈 것 치분 것 더러 잊을 수 있다 그 말인디 홍이도 후제 그런 일이 있일 것 겉으면 그리 해보더라고?" "주갑이아제, 배 많이 고파봤소?" "하모. 배 많이 고파봤제. 헌디 굶는다고 사람으 목심이 관대로 없어 안 지니께 조화가 요상타 그거 아녀?" 주갑은 킬킬 웃는 것 같더니 성급하게 담뱃대를 빨아당긴다. 꺼지려던 담뱃불이 희미하게 피어나고 주갑이 콧구멍에서 연기가 풀려나온다. "뭐니뭐니 허도 배고픈 정 아는 그게 사람으로서는 제일로 가는 정인디, 혀서 나도 니 아부지를 믿고 정이 들어서 따라가는 거 거로 시작된다 그거여. 저기 보더라고. 저기 물새도 모이 찾아서 지 새끼 먼저 먹이는 거, 어디 사람뿐이간디?" 두 다리를 세우고 무릎 위에 턱을 괴고 앉아서 풀꽃 한 송이를 띄워 보내고 있던 홍이 얼굴을 들면서 "아, 나도 아요!" "뭐를?" "주갑이아제." "말허라니께." "길상이아제 아요?" "모르는디?" "우리 선생님하고 친하고 또 나를 귀여워하고 또오 자알 생기고 또 공부 많이 하고." 하다가 킬킬 웃는다. "언젠가 말이요? 작년인가, 아부지 심부름을 갔는데 길상이아제 방으로 간께 흐흐흐흣... 길상이아제 방으로 간께 말입니다. 아제가 들창문에 문구멍을 뚫어놓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소. 아제, 하고 불렀더니 손을 흔들믄서 가만히 있으라 안 캅니까?" "워째 그러더랑가?" "그러더니 아제는 나를 번쩍 안아서 들창문 문구멍에 눈을 갖다 대주느 거 아니겄소?" "뭐가 있었지야?" "참새요" "참새애?" "야. 참새들이 모여서 수수알갱이를 묵고 있는데 모두 새끼들을 데리고 안 있겄소? 어미 참새도 여러 마리고 새끼 참새는 더 많아요. 참 신기롭더마요." "으음." "길상이아제가 수수알갱이를 준 거라요. 그런데 길상이아제는 홍아! 야? 한께 참새란 놈이 저리 사람을 안 믿으까? 문을 열고 내다보믄 다 달아나거든. 지금도 쫑긋쫑긋 사방에다 정신 파니라고 어미는 제대로 묵지도 못한다 말이다. 벌써 여러 날짼데 도무지 나하고는 친하려 안 하거든, 함시로 슬픈 얼굴을 하드라 말입니다. 나도 그때 문구멍에서 새끼 주둥이 열고 모이 먹이는 것 똑똑히 봤소." 주갑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이른 새벽, 어둠이 걷혀지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할 무렵이다. 실하게 꼰 새끼줄로 멜빵을 삼아 짐을 짊어진 용이와 주갑이, 옷보퉁이를 이고 간장이 든 두루미병 하나를 든 임이네. 그리고 조그맣게 만든 보따리를 짊어진 홍이는 흡사 바랑을 짊어진 새끼중 같았다. 이들 일행은 야간도주라도 하는 것처럼 소리없이 움막을 나서는 것이었다. 장거리를 피해서 사잇길로, 희미한 불빛을 밟으며 간다. 임이네는 못내 머리끄덩이가 뒤로 끌리는 것 같은 심정을 버리지 못한다. '머 거기가 천 리 만 리 밖이라든가? 오고가고 이백릿길 설마한들 다시 못 올라더나?' 거둬들이지 못한, 얼마간의 빚 준 돈 때문에 그렇다. 공노인네 객줏집 앞을 지나간다. '못 받는 돈이사 그렇고, 그년 오지기 당하는 기이 고소해서 내사마 춤이라도 추고 접다. 그만 말라져 죽어부리라 이년아! 내 낭군 내 자식이 어디로 갈 기든고? 머리카락으로 신을 삼아 보지? 지 사람 되고 지 자식 될 기든가. 이자는 홍이아배도 아주 끊어부리기로 단을 내린 모앵이니, 흥! 공가놈 늙은 것도 그렇지. 누가 자개만치 꾀가 없이까바? 사람을 사알살 꼬시더마는 내가 언제 난 여자라고? 그러크름 사람을 괄시하고 구박허더마는, 나는 내 낭군 내 자식하고 떴다 봐라 하고 떠난다 말이다.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되고, 얼매나 속이 씨언하노.' 그러나 누가 있어 남편을 따라 통포슬로 가겠느냐. 아니면 대신 월선이를 보내고 너는 남아 그 가게를 차지하겠느냐, 어느 편을 택하겠느냐 하고 말한다면 임이네는 과연 어느 편을 택했을까? 사실 그의 독백이라는 것도 평소의 야멸찬 말재간에 비하면 맥이 빠져 있고 마음과 말이 따로따로 노는 느낌이 적지 않다. 임이네는 앞서가는 용이 뒷모습을 흘낏 쳐다본다. 짐 위에 올려놓은 바가지 두 짝이 조금씩 흔들리고 널찍한 어깨도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두 사내는 말없이 걷는다. 홍이도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걷고 있다. '저놈의 흑덩어리는 와 달고 가는 거지?' 춤을 추고 싶다 하지만 역시 기분이 안 좋은 거다. 주갑이를 빌어 꼬투리를 잡으려는 것이다. 며칠을 있으면서 임이네는 주갑에게 여간 거만했던 것이 아니다. 얼빠진 못난 사내로 치부했으며, 때문에 날품을 팔아 밥값을 냈어도 심드렁하게 굴었고 용이는 모르는 그 돈이 제 주머니 속에 들어갔고, 주갑이 밥그릇에 밥을 담을 때는 밑빠진 그릇에다 밥을 담듯이 조심조심, 그러고도 주걱 잡은 손은 망설이는 것이었다. 좀더 적게 담을 수는 없을까 하고, 옛날 윤보 목수를 홀아비에 가난뱅이 무식꾼 쟁이받이 이상으로 생각지 않고 업신여겼듯이. '덩신 같은 년. 지 주제에 장사라고? 내가 있어서 손발이 맞았이니께 그만치라도 돈을 벌었지. 세상에 그런 벅수가 어디 있노. 돈이 들고나는 것도 모름시로 만판 해봐야 남 좋은 일 시키는 기지 머. 송애 그년의 가시나만 호박구덩이에 굴렀다. 고 가시나아도 약아빠져서 자알 해처묵을 기구마는.' 배가 아프다. 배가 아파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월선이 돈을 번 게 아니라 임이네 자신이 돈을 벌었다는 내막은 내막인 채 내버려두고 송애도 생쥐처럼 돈을 물어낼 것이라는 것은 생각만 해도 억울하다.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월선에 대한 미움이 송애에게로 옮겨간다. 철천지 원수같이 미워진다. '발톱만한 제집아년이 간덩이가 부풀게 생겼고나. 고 가시나아 앞길도 뻔하지 뻔해. 시집도 안 갔으믄서, 하기사 누가 아냐? 객줏집에서 컸으니께 뭇 사나들이 들랑거리는 객줏집이고 보믄 말이 가시나지. 지가 무신, 정차 잘돼바야 기생이고 색주가밖에 더 되랄고?' 미움은 자꾸자꾸 피어오른다. 뭉게구름같이 부풀어오른다. 억울하고 괴씸하다. 신경질이 치밀어서 이고 가는 보통이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어진다. '거기는 장차 젤 좋은 자리가 된답매. 가만 누버서 돈 버는 장소랑이. 국밥집으 아주망이 쇠스라앙으 돈 긁으 거라, 무시기 그런 말들 모두 하지 않겠음?": 새벽바람을 마시며 가는 임이네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온다. 수결을 태산준령을 넘는 듯 거칠어진다. 남편 자식도 갖고, 국밥집도 갖고 월선이는 죽어버리고 미운 사람들도 다 죽어버리고 그래주었으면 임이네는 오죽이나 좋았을까. 참으로 욕망 무한, 슬픔없는 목숨이며 비렁땅 꽃 한 포기 새 한 마리 없는 황막한 인생이다. 시내를 막 벗어나려 했을 때다. 용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마치 그러기로 미리 약속이나 돼 있었던 것처럼 주갑이도 걸음을 딱 멈추기는 멈췄으되 용이를 쳐다보지는 못하고 목을 뽑으며 보이지 않는 강변 쪽을 바라본다. 용이는 길 한켠에 가서 다리를 꺾고 비스듬히 드러눕듯 몸을 넘어뜨리며 어깨에 걸린 새끼멜빵을 벗긴다. 짐을 내려놓고 일어선 용이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주서방." "야." 주갑의 음성은 계집아이처럼 가냘프고 기어든다. "여기서 좀 기다리주겄소?" "그, 그렇기 허겄소!" 기어들던 목소리가 용수철 모양으로 튀어오른다. "홍아." "야." "니 날 따라가자." "어디로요?" "암말 말고, 가자." 평생 없었던 일이다. 용이는 아들의 손목을 잡았다. 뒤늦게 무엇인가를 깨달은 임이네 "홍이 데꼬, 어,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임자는 여기 주서방하고 기다리는 기이 좋겄고." "안 하랄요! 나도 따라갈랍니다. 내가 가서 안 될 곳이 어디 있소." "따라가야?" 되묻는데 무시무시한 분위기다. 움직이는 않는데도 전신을 후들후들 떠는 것만 같다. 임이네는 물러선다. "나, 나, 내가 가믄 우떨 기라고, 우, 우째서 그라요." "너 신상을 생각해서 그런다." "그기이 무신 말이지요?" "두말 마라. 홍이하고 월선이를 데리고 내 종적을 감추어부리믄 니는 혼자 살겄제?" "야? 뭐라꼬요?" "그렇기 안 되기를 원하거든 여기 기다리고 있어라. 가자, 홍아." "아부지." "와야?" "이 짐은 우짜고요?" "이 짐은 짊어지고 가자. 그거는 니 소용품이니께ㅣ." 홍이는 매인 양새끼처럼 아비를 따라간다. "홍아-" 뒤에서 울부짖는다. "옴마아-" 홍이는 손등으로 눈물을 씻으며 아비를 따라 걷는다. "홍아- 공부 잘혀어! 총 들고 말 타게 말이여-" 주갑의 고함이 귀청을 친다. 국밥집에 갔을 때 월선이는 없었다. 송애가 자다 일어나며 어디갔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홍이 니는 여기 있거라." 홍이를 가겟방에 남겨두고 용이는 어둠을 헤치듯 뛰어간다. 그는 움막으로 가는 것이다. 걷다가 뛰다가 미치광이 같다. 움막의 거적을 걷고 들어서며 "월선아!" 씽 하니 되돌아오는 정적과 어둠, "월선아!" 캄캄한 움막 안을 더듬는다. 미친 듯이 해맨다. "워, 월선아-" 손 끝에 닿는 굳어진 몸뚱이, 낚아채고 뜨겁게 포옹하고 흐느껴 운다. "지가 여기 있는 거를 우떻게 알았소?" 여자의 목소리는 싸늘하다. "니는 내가 떠나는 거를 우찌 알았노." "꿈을 꾸었소." 낮게 웃는다. "호랭이 새끼는 산으로 가고 오리 새끼는 물로 간다 하더마요." "그거는, 그거는 다아 우리하고 상관이 없는 얘기다." 여자 얼굴에 입맞춤하며 뜨거운 눈물로 얼굴을 적신다. "이리 될 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소. 지가 들어서 당신 신세를 궂힌 것도 다 알고 있소. 버리고 가, 가소." "..." 비바람이었다. 뇌성벽력이었다. 휩쓸고 가는 사내의 정열, 그것은 경건한 의식이다. 참으로 여러 해 만에. 밀려갔던 조수가 천천히 다시 되돌아온다. 조용하게 슬프게. 물 부피는 불어나서 방천벽에 금을 그으며 조용하게 슬프게 올라온다. 충만하고 넘친다. "가게에 홍이 데리다놨다." "야?" "심이 들겄지마는 공부시키고 니가 키워라." "참말이요?" "음." "지 엄마가," "데리고 가믄 아이는 버린다. 내가 그곳에 가기는 가되 가을 한철 있일 기고 곧 산으로 갈 기구마." "산에는 머 할라꼬 가시오." "벌목꾼들 벌이가 좋다더마. 겨울 보내고 산에서 내리올 적에는 이리로 오께. 여름 한철은 가서 농사지어주고 내 맘 알겄나?" "야." 월선이는 사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운다. "니가 알았으믄 됐다. 우리가 더 이상 머를 바라겄노. 나를 위해 모질게 맘을 묵을라 캤더마는... 결국에는 이렇기밖에 못 살 긴갑다. 그라고 내 간 뒤 객줏집 어른께 내가 그 동안 저지른 일들, 내 잘못을 잘 알고 있더라고, 무신 면목이 있어 인사를 하겄느냐고 니가 잘 말해라." 용이로서는 긴 얘기였다. 꽤 곰상스럽게 타이르는 투이기도 했다. 움막 사이로 희미한 새벽빛이 새어든다. 역두 쪽에서 말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개울가에 짐을 풀어놓고 점심 요기를 끝낸 일행은 각기 제마음대로 시선을 던지고 있다가 용이는 담배를 붙여물었고 임이네는 개울물에 얼굴을 씻기 시작한다. 팡파짐한 엉덩이는 아직 탄력에 넘쳐 있다. 서른아홉, 황혼은 바라보는 무르익은 나이. 흐르는 시냇물같이 활기차고, 자식과 이별하고 온 슬픔이 없을 리 없겠는데 시냇물같이 바위벽같이 여자의 모습은 자연 그것으로만 보인다. 머리에 쓴 수건을 벗겨 상기된 얼굴을 닦는다. 그러자 주갑이 훌쩍 일어서며 밥을 다 비워버린 양푼을 절렁 든다. 개울 옆에 가서 물을 퍼서 마신다. 입가에 흐르는 물방울을 손등으로 닦고 별안간 양푼을 치켜들고 주먹으로 치기 시작한다. 쇠붙이 아닌 주먹에서 뭐 그리 희한한 소리가 날 리도 없겠는데 그러나 장단이 썩 잘 맞고 곁들여서 그 일품의 노래를 뽑으니 임이네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용이는 변화 없는 표정이 한참을 혼자서 신을 내던 주갑이는 "형씨." "와요." "나 이래봬도 어떤 여자한테 옷 한 불 얻어입은 일이 있어지라우." "흠." "아마 그 여자가 나헌티 반혀서 그랬나비여." "눈이 멀었든 게지." "눈이 멀었든 게 아녀. 귀가 밝았다 그거여." "흠." "그게 또 기생이다 그 말인디, 하기사 기생 퇴물이었제. 주막서 술쪽 든 신세가 되얐으니 기생 퇴물이라, 아 그 기생 퇴물이 귀가 밝더라 그 말이요." "하든 가락이 있어 그랬겄지." "하모니라우. 바로 그거여. 그래 뭐래는고 허니, 아깝도다. 명창이 됐을 것인디 이 손이 이리 험허게 되얐으니 만고풍상 다 겪었소잉. 함시로 내 손을, 이 내 손을 어루만지더라 그거여." "흠." 용이는 귀담아 듣고 있지도 않는 듯 먼 곳을 바라보며 담배만 피운다. "그리하여, 며칠을 공짜로 주막에서 묵음시로 가는세 베옷 한 불을 얻어입었지라우." "함께 살지 그랬소?" "한데 그게..." 주갑이는 장난스럽게 웃는다. "반해서 옷까지 해주었으믄...." 용이의 말은 어디까지나 건성이다. "귀만 밝아서는 안 되겠더라 그거요?" 느닷없이 임이네가 말참견이다. 용이 눈에 조소가 지나간다. 새벽길에서 홍아 - 하며 울부짖던 소리가 멀리서 차츰차츰 꼬리를 감추듯 용이 마음에서 아픔이 사라진다. "홀가분해졌다." "야?" 주갑이 되물었으나 용이는 대꾸 없이 담배통을 돌에 대고 뚜드린다. "아짐씨, 귀만 밝아서는 안 되겄다 그게 아니랑께요." 주갑은 임이네에게 말머리를 돌린다. "쪼그랑할매더라 그 말이어라우." 용이 웃는다. 화가 나서 웃고 서글퍼서 웃고 자기 자신이 옹졸해서 웃고 주갑이 부러워서 웃고, 임이네는 샐쭉해진다. 방심한 사이, 뭔지 주갑이한테 말려든 기분이 들었다. 성난 임이네 얼굴에 곁눈질을 하며 주갑은 다시 양푼을 치기 시작한다. "양푼 쭈그러지겄소!..." 임이네가 팩 소리를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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