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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섭 (한국경제신문 가치혁신연구소 선임연구원)
“그 장난감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요?” 1876년, 당시 최대 전신회사였던 미국 웨스턴 유니언 윌리엄 오톤 사장이 전화기에 대한 특허 인수 제안을 거절하며 남긴 유명한 말이다. 이 회사는 오톤 사장의 결정적인 판단 착오로 35년 뒤 전화 회사인 AT&T에 인수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언론들은 종종 근시안적인 경영진의 대표적인 예로 웨스턴 유니언의 사례를 든다. 자만심으로 가득 찬 무능력한 사장이 앞으로 업계 판도를 바꿔놓을 획기적인 발명을 놓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의 시각은 다르다. 실제 문제의 본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웨스턴 유니언의 경영진은 충분히 합리적이었으며, 오히려 이 때문에 전화의 중요성을 간과했다는 얘기다. 우량 고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최고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전략을 추구하다 보니 회사를 몰락으로 이끄는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웨스턴 유니언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기업들이 비슷한 길을 걸었다. 할인점 월마트에 무릎을 꿇은 백화점 시어스, 미니컴퓨터의 출현을 간과해 메인프레임 컴퓨터 시장에서 밀려난 IBM, 트랜지스터 등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위상이 추락한 진공관 업체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잘 나가던 기업들이 왜 몰락하나
파괴적 혁신은 신규 시장을 창출하거나 기존 시장을 재편하는 혁신을 말한다. 기존 제품을 개선하는 ‘존속적 혁신(sustaining innovation)’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기업은 경쟁자보다 더 좋은 제품을 제공해 더 높은 가격과 이윤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존속적 혁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소비자들이 필요로 하는 기술 수준과 적정 가격을 넘어선 제품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때 더 싸고, 더 단순하고, 더 작고, 더 편리한 제품이나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들고 나온 신생 기업들이 등장해 서서히 시장을 잠식하고 결국에는 기존 기업을 거꾸러뜨리는 일이 반복된다(파괴적 혁신).
얼핏 역설적으로 들리는 파괴적 혁신 이론은 크리스텐슨 교수가 97년에 첫 출간한 『성공기업의 딜레마(The Innovator's Dilemma)』에서 산업 내 후발주자가 선도기업을 추월하는 현상을 분석한 뒤 내놓은 이론이다. 그는 이를 통해 경영전략론의 대가인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마이클 포터 교수, 블루오션전략을 창시한 프랑스 인시아드 경영대학원의 김위찬, 르네 마보안 교수 등과 함께 세계적인 경영 사상가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두번째 저서인 『성장과 혁신(The Innovator's Solution)』에서 파괴적 혁신 이론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켰으며, 이 책에선 이를 통해 주요 산업의 미래를 예측했다.
파괴적 혁신 이론이 주목받는 이유는 웨스턴 유니언의 실수가 현재에도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기업들이 향후 업계의 판도를 뒤바꿔 놓을 만한 기술이나 발명을 “장난감 같다”고 비아냥거리며 무시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책은 기업들이 치명적인 실수를 막고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해 파괴적 혁신 이론을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실전적 매뉴얼을 담고 있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산업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분석 틀과 도구들을 제시한다. 제2부는 교육, 항공, 건강관리, 반도체, 통신 등 5개 산업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통해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과 미래 기업의 성공 모델을 제시한다.
비소비자(nonconsumer)와 파괴적 성장
1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비소비자(nonconsumer)’다. 이는 어떤 제품도 소비하지 않거나 불편한 환경에서만 소비하는 고객을 말한다. 예컨대 모스 부호를 훈련받은 전문가가 자리를 비워 전보를 보내지 못하는 사람은 전신의 비소비자이며, 수속 절차가 번거로워 비행기를 타지 않고 자동차나 기차로 여행하는 사람은 비행기의 비소비자다. 블루오션전략의 핵심 개념인 ‘비고객(noncustomer)’과 매우 유사한 개념이다. 비소비자 집단을 눈여겨보면 파괴적 혁신의 신호를 포착할 수 있다.
기존 제품으로 충분히 만족을 주지 못하는 일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으면, 과거에는 몰랐으며 전통적인 시장조사를 통해서도 드러나지 않았던 신규 시장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또 비소비자로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신규 고객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안을 찾을 수 있다.
파괴적 혁신의 첫번째 패턴은 기존 고객보다 비소비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경쟁과 관련돼 있다. 신규 시장에서 파괴적 혁신을 이루는 기업들은 고객들이 일을 보다 쉽게 처리할 수 있도록 구하기 쉽고 성능이 좋으며 비교적 단순하고 친근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내놓는다. 전신과는 달리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끼리 대화가 가능하게 한 전화가 좋은 예다.
비소비자를 사로잡는 방법을 파악한 뒤에는 기존 고객들에 대해 평가해야 한다. 기존 고객은 현재의 제품에 충분히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불만족 고객(undershot customer)’과 제품에 충분한 정도 이상으로 만족하는 ‘초과 만족 고객(overshot customer)’으로 나뉜다. 불만족 고객을 공략하기 위해선 고급 시장을 겨냥한 존속적 혁신, 초과 만족 고객의 공략을 위해선 로엔드 시장의 파괴적 혁신을 시도할 수 있다.
왜 파괴적 혁신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가
그렇다면 기존 기업들은 왜 ‘파괴적 기술’에 투자해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는가. 초기 단계에서는 ‘파괴적 기술’의 시장 규모가 너무 작고, 전망도 불투명해 투자할 가치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설사 가치를 느낀다 해도 파괴적 기술을 그들의 프로세스와 가치 때문에 가장 크고 확실한 시장에 억지로 ‘끼워 넣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혁신 제품을 변형해 기존 영업 모델에 끼워 맞추게 되면 제품이 갖고 있는 파괴적 에너지가 사라지고 만다. 진공관 제조 업체들이 트랜지스터를 자사 제품에 끼워 넣으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면 기존 기업의 파괴적 혁신은 불가능한가. 방법은 있다. 기존 고객과 프로세스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적인 조직을 구축하면 파괴적 혁신을 추진할 수 있다. IBM이 플로리다에 독립법인을 설립해 성공적으로 PC업계에 진입한 것이나 HP가 아이다호주 보이시에 독립법인을 설립해 잉크젯 사업에 뛰어든 게 좋은 사례다. 내부적으로 파괴적 혁신을 관리하는 데 필요한 반복적 프로세스를 개발하는 것도 또 다른 방법이다. 기존 기업의 프로세스와 가치로는 파괴적 혁신과 존속적 혁신을 동시에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속적 혁신에만 매달린 일본 기업들
이 책의 2부에선 혁신이 산업을 어떻게 재편할 것인지, 이들 산업을 이끌어 갈 기업들은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특히 기업뿐 아니라 국가의 거시 경제 전략을 어떻게 수립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까지도 제시하고 있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할 경우 파괴를 용이하게 하고 촉진하는 경제 시스템을 가진 국가들의 장기적인 성장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본의 경우 파괴적 혁신을 등에 업고 경제 기적을 이뤘지만 이후 존속적 시장에 집중한 나머지 경제 침체에 빠지게 됐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일본 기업들에게는 파괴적 시장 기회가 너무 작고 불분명해 보였기에 흥미를 끌지 못했다. 이런 회사들은 잘 다듬어진 꼼꼼한 계획 과정을 통해 기존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었지만 공격적인 신규 시장 창출은 불가능했다. 한마디로 파괴의 순환 구조가 지속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와 달리 미국은 파괴적 혁신이 반복되면서 자생력을 갖게 됐다는 게 크리스텐슨 교수의 분석이다. 한국에 대해서는 “저임금의 이점이 사라짐에 따라 새로운 파괴적 공격 기업들을 개발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의 개혁, 특히 통신관련 산업에 대한 혁신 장려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며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학교의 파괴
교육 산업의 미래를 다룬 5장은 변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는 국내 교육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고등교육에도 비소비자와 초과 만족 고객들이 존재한다는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며 이 기회를 포착해 파괴적 혁신을 이룬 사례로 미국 피닉스 대학과 콩코드 법대의 온라인 교육과정을 들고 있다. 이들 대학은 자신이 원하는 때와 장소를 골라서 교육을 받지 못하는 ‘교육의 비소비자’를 공략해 성공을 거뒀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또 기업교육이 전통적인 MBA 프로그램에 잠재적인 파괴적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한다. 파괴적인 기회들이 전통적 교육 시스템에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가장 저명한 대학들의 경우 역시 수십 년 동안은 안전할지 몰라도 신규 교육기관들에 의해 주도권을 상실할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건강관리 산업의 미래를 다룬 8장은 파괴적 혁신 이론이 산업의 종류와 무관하게 예외 없이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장에선 가정에서 편안히 임신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준 가정용 임신 진단 키트, 당뇨병 환자들의 자가 치료를 용이하게 해준 혈당계 등을 예로 들며 건강관리 산업에서 파괴적 혁신은 더 저렴하고 효과적인 치료를 가능하게 한다고 진단한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성공적인 파괴적 혁신이 결국 치료를 예방으로 옮기고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건강을 더 잘 관리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데이터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
이 책의 목표는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해석하는 능력을 지속적으로 키우는 것이다. 파괴적 혁신 이론은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빠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 조기에 신호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미래를 보는 통찰력을 길러 준다.
미래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전례 없는 파괴적 혁신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점치긴 매우 어렵다. 그래서 상당수 경영자들은 새로운 기획을 전형적인 틀에 맞춰 끼워 넣고 수치를 맞추느라 시간을 보낸다. 크리스텐슨 교수가 다음과 같은 당부로 책을 마무리한 이유는 존속성 혁신의 유혹에서 벗어나야만 미래를 보는 혜안을 갖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은 아닐까.
“‘확실한’ 데이터를 거론하면서 여러분의 생각을 반박하는 사람들에게 주눅 들지 말라. 명심할 점은 정말로 확실한 데이터는 오직 과거에만 | | |
첫댓글 한경에 막내동생도 새내기 기자하고 있답니다. 반갑네요.
한경...홧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