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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오가(禪宗五家) 경계(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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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시(禪詩)의 심미경계
선시(禪詩)는 한마디로 선사상을 담고 있는 시다. 따라서 선시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선종이 추구하는 바와 일치하는 명심견성(明心見性)이다. 좀더 구체화하면 속진에 묻혀 잃어버리고 만 본래면목(本來面目)1)을 되찾는 일이다. ‘본래면목’은 선자(禪者)가 추구하는 근본 대사이며 제1의 궁극적인 관심사다. 선종 제6대 조사 조계혜능 대사(638∼713)가 돈오 남종선의 핵심 사상으로 주창한 본래면목은 후일 임제의현 선사와 서암사언 스님이 각각 제시한 ‘무위진인(無位眞人)’, ‘주인공’으로 장자의 ‘혼돈(混沌)’, 하이데거의 ‘존재(Dasein)’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철학이 흔히 말하는 이 같은 본래적 자아를 선종은 본성·본심·제1의제(第一義諦)·자성(自性)·불성·열반묘심이라고도 칭한다. 존재의 본질인 본래면목이 인위에 의해 상실되는 장자의 우화 ‘혼돈칠규(混沌七竅)’를 한번 살펴보자. “남쪽 바다를 다스리는 신 숙(풫)과 북쪽 바다를 다스리는 신 홀(忽), 중앙을 다스리는 신 혼돈이 있었는데 하루는 혼돈이 숙과 홀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후의를 갚으려고 의논을 했다. 인간은 모두 7개의 구멍을 갖고 보고, 듣고, 먹고, 숨쉬고 있는데 혼돈만은 그것들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둘이서 혼돈에게 하루에 한 구멍씩 일주일에 걸쳐 7개의 구멍을 뚫어 주기로 했다. 그런데 마지막 구멍을 뚫고 난 일곱번째 날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장자·응제왕편》에 나오는 이 우화는 청정한 본래의 자성(혼돈)이 인위적인 조작, 곧 인간의 의식작용과 사려분별이라는 속진에 의해 죽어버리고 마는 본래면목의 상실을 잘 그려내고 있다. 순수 자아의 회복은 생사·고저·장단 등으로 사물과 현상을 구분하는 상대적이고 이원적인 지식을 철저히 떨어내고 한 생각을 쉬는 일념불생(一念不生)의 경계에 도달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선이 말하는 이 같은 휴헐(休歇)은 고목처럼 몰의식의 공(空)에 빠지는 게 아니라 생과 사라는 양변(兩邊)을 다 버리고 둘을 하나로 어우르며, 하나를 둘로 양립시킬 수도 있는 중도에 서서 양변을 출입하는 데 언제나 자재(自在)로운 ‘절대 자유’를 말한다. 선종은 고목사회(枯木死灰)의 무기공(無記空)을 절대 금기시하고 생명의 원래 모습이 마치 물고기가 물 속을 헤엄치며 놀듯이 활발한 생명철학을 해탈의 종착점으로 삼는다. 선이 그처럼 갈구해 마지않는 ‘해탈’이니 ‘열반’이니 하는 것도 자재와 창의를 본질로 하는 생명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이는 상대적인 지식을 내던지고 적나라하며 선탈(酒脫)한 정신적 원래 모습을 되찾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른바 확철대오를 통해 얻는 생명 원래의 모습이 갖는 특질은 징명(澄明)·각오·원만·초월이다. 상대적인 분별심(分別心)을 버리는 것이 곧 해탈이고 생명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첩경임은 6조 혜능 대사의 선사상을 일관하고 있는 핵심이다. 6조가 5조 홍인을 찾아가 8개월의 행자 생활 중 놀랍게도 돈오견성의 선법을 인가받는 극적인 계기에 등장하는 득법게의 “불성은 늘 청정하다(佛性常淸淨)”2)라는 구절은 바로 깨끗함과 더러움이라는 상대적인 이분법의 분별심을 박살낸 돈오 남종선의 출발점이다. 홍인의 맏상좌인 신수 스님의 득법게가 말하는 “때때로 부지런히 먼지를 털어내자(時時拂拭)”에 대비되는 혜능의 득법게는 깨끗함과 더러움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의식적으로 티끌과 먼지를 털어내는 이원적 세계관을 한 칼에 목잘라 버리고 만다. 후일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本來無一物)”3)로 개작된 혜능의 ‘불성상청정’은 신수의 게송 마지막 구절 “티끌과 먼지가 없도록 하라(莫使有塵埃)”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드높은 경계다. ‘상청정’은 정과 부정(不淨)이라는 상대적 의식을 깔고 있는 ‘진애’에 비해 시공을 초월한 절대성과 본래성으로 신수의 상대적인 이원론을 뛰어넘고 있다. 혜능은 앞에 ‘상’자를 덧붙여 ‘청정’의 시공 초월을 환히 밝혔다. 이처럼 혜능선(慧能禪)이 현실 속의 살아 있는 인간에 무게를 두고 설파하는 존재의 본질인 자성은 본래 갖추어 가지고 있는 ‘깨달음(覺悟)’이라는 그 속성을 통해 부처라는 인격체를 만들어낸다. 반야(지혜)와 함께 선사상의 양대 주춧돌인 불성이라는 것도 쉽게 말하면 평범한 ‘인간성’이다. 선이라는 생명철학이 구체화시켜 제시한 인격을 순수한 인간성을 따라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이른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의 일상 속 중생이다. 선은 이러한 이상적 선자의 인격으로 살아가는 자유인의 삶을 ‘임운자재(任運自在)’·‘수연방광(隨緣放曠)’·‘임성소요(任性逍遙)’·‘수연소요(隨緣逍遙)’라는 말로 압축해 표현한다. 사물의 본성적 운행(運行)을 따르는 자유인에게는 ‘눈은 옆으로, 코는 수직으로 각각 붙어 있고(眼橫鼻直)’,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으며(柳綠花紅)’, ‘산은 산이고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인 경계가 별달리 기특한 일도 아니다. 오직 그 운행을 따르며 혼연일체가 돼 만물여아동근(萬物與我同根)의 우주 대화합이라는 오케스트라를 연주할 뿐이다. 이러한 연주에서 흘러나오는 화음이 바로 ‘번뇌가 곧 보리’인 묘체이며 그 화음 속의 일상 행위 하나 하나는 선이 갈구해 마지않는 심적 근원처에서 흘러나오는 선경(禪境)이 된다. 번뇌는 인간의 생존상태다. 우리는 번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따라서 번뇌를 없애는 게 아니라 다만 보리로 바꾸면 된다. 본래면목의 심미경계는 만고장공(萬古長空)의 허공 속에 이는 하루 아침의 바람과 달(一朝風月)에서 순간(풍월) 속의 영원을 보며, 생(순간)과 사(영원)를 초월한다. 선은 학인들의 지성과 망견(妄見)을 깨부수기 위해 멀리 인도불교의 유마거사가 확립한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제시해 역설적인 대응으로 이원론적인 상대적 망견과 분별심을 내는 사로(思路)를 차단해 버린다. 한 중으로부터 “부처란 어떤 것이냐”는 질문을 받은 운문종 개산조인 운문문언 선사(864∼949)는 “마른 똥막대기(乾屎첀)”라고 대답, 성(聖 : 부처)과 범(凡 : 중생)을 이분화시켜 구분하는 중의 분별심을 박살내 버렸다. 이는 가장 더럽고 추한 것이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역설의 논리다. 한 중으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은 동산수초 선사(910∼990)는 “삼베 서근(麻三斤)”이라고 대답했다. 귀성 선사는 한 중이 “어떤 것이 청정법신이냐”고 묻자 “똥뒷간의 구더기”라고 답했다. 모두가 깨끗함과 더러움, 성현과 범부라는 구분을 뛰어넘어 하나로 일원화시켜 “중생이 곧 부처”라는 등식(等式)을 이끌어내고 있다. 선은 주관적 유심론의 입장에서 범과 성을 초월하는 중도적 일원론을 전개, 대립적인 양변을 회통하는 원융으로서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의 묘기를 연출한다. 근래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역설의 논리도 바로 보편 속의 특수성, 특수성 속의 보편성을 설파하는 이 같은 선문(禪門)의 대법논리와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선학과 선시는 이 같은 역설의 논리에 시학(詩學)의 반츤법(反?法)을 아울러 시끄러움 속의 적정(寂靜), 일상 속의 해탈, 사바 속의 서방정토를 구현하는 실천 구조를 구축한다. “매미 우는 소리에 숲은 더욱 고요하고(蟬塞林逾靜), 새들의 지저귐 때문에 산이 한층 깊고 그윽함(鳥鳴山更幽)”을 느끼게 하는 시의 반츤법이 왕유의 선시 〈새우는 개울가(鳥鳴澗)〉와 유종원의 선시 〈눈내리는 강가(江雪)〉에서는 각각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야심한 밤… 봄날의 개울가에서 때때로 울어대는 새들의 울음소리(人閑桂花落…時鳴春澗中)”, “눈 덮힌 산에는 새들의 발길조차 끊겼지만… 대모자에 도롱이를 두른 늙은 낚시꾼은 홀로 눈내리는 얼어붙은 강물을 깨고 낚시를 하는(千山鳥飛絶, 萬徑人踪灰,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 정경으로 이어진다. 이들 선시는 주체적 자아를 확립, 고요함 속의 움직임을 본질로 하는 생명의 역동성을 그림처럼 그려내 보이면서 인간 본래면목을 가시화시켜 준다. 공이 아니면서 공인 진공(眞空)의 세계와 입세간(入世間)이 곧 출세간(出世間)인 초월의 경지에 서서 ‘어디에서든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 모두가 진리의 땅(隨處作主 立處皆眞)’이 된다는 게 바로 선의 본래면목이 연출해 내는 심미경계다.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의 패러독스도 바로 이 같은 경계다. 우리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에는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상대적 개념이라는 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혜능의 ‘무일물(無一物)’과 ‘상청정(常淸淨)’은 바로 이 같은 부모미생전의 본래면목이다. 여기에는 선도 악도, 시(是)도 비(非)도, 청정도 불청정도, 미망도 깨달음도 없다. 오직 허공처럼 텅 비어 있으면서 만상을 품안에 감싸안는 너그러움만이 존재한다. 이것이 ‘불성상청정’이 설파하는 선지(禪旨)이며 정예(淨穢)를 넘어선 초절대의 심미경계다. 중당(中唐) 이래로 불교 선종의 주류는 혜능의 남종이 주류를 이루어 왔고 오늘날 우리가 얘기하는 선과 한국의 선종(조계종)도 역시 혜능의 선법을 정맥으로 계승한 돈오 남종선이다. 따라서 선시·선문학의 접근에는 선의 대명사인 남종 선사상 이해가 전제될 수밖에 없다. 선사상과 선시의 연계성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다. 농민 종교로 출발했던 남종선이 당말·송대(宋代)를 거치면서 사대부들의 종욕주의(縱欲主義)·초탈심 등과 어우러져 문인선화(文人禪化) 하는 가운데 강서시파(江西詩派)라는 선시 장르를 형성하기도 했고 찬란한 꽃을 피워 불후의 선종미학을 남겨 한·중·일 동북아 3국의 시학에 이어져 오고 있다. 선시의 심미경계는 곧 선종의 심미 감오(感悟)와 일치한다. 선적인 감오의 기초는 일찍이 임제종 황룡파의 청원유신 선사(?∼1117)가 설파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경계다. 그는 깨달음의 과정을 3단계로 나누어 미오(未悟) 시절에는 산과 물을 확연히 구분, “산은 물이 아니고 산”일 뿐인 단순한 범부의 분별적 긍정성에 안주했다. 초오(初悟) 때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구별과 긍정을 상실한 부정성(否定性)에만 오직 집착했다고 술회했다. 제3단계의 철오(徹悟)를 하고 나니 제2단계를 초월한 구별과 긍정성을 가진 “산은 산일 뿐이고 물은 물일 뿐”인 경계였다는 것이다. 이는 상대적인 긍정과 부정을 뛰어넘은 절대 긍정의 경지로서 이른바 존재의 심연인 진공의 세계다. 자아(1단계)가 무아(2단계)로 비약했으나 아직도 주체와 객체의 이원적 대립이 지워지지 않은 유(有)에 반대되는 만물개공(萬物皆空)이다. 이를 선학에서는 파주(把住 : 부정)라고 하는데 여기에 머물면 공이 함몰당하고 마는 낙공(落空)이 된다. 이러한 분별심의 부정적 ‘무분별’은 상대적 분별에 대한 또 하나의 다른 분별일 뿐이다. 여기서 관념적인 부정은 다시 한번 부정돼 공(空)이 공 자신을 밀어내 버리고 그 부정을 통과한 ‘무분별의 분별’을 하는 진아(眞我)로서 만물의 실존을 긍정, 포용하는 방행(放行 : 긍정)에 도달한 것이 제3단계 자유 해탈의 심미경계인 “산은 단지 산(山只是山)”이다. 제1단계는 소박한 범부의 무지적인 마음의 감오(感悟)가 보는 산수이고 제2단계는 철학적 개념 세계의 감응이며, 제3단계는 자연현상에 대한 ‘즉물즉진(卽物卽眞)’의 감오다. 제3단계는 자연 산수의 원시적 존재를 무조건적으로 인가(認可)한다. 여기서는 모든 언어문자는 포기되고 순수한 심령 활동만이 주객을 넘어선 공간에서 활보한다. 이것이 이른바 노장과 현학(玄學)을 융섭한 선종의 뜻을 얻으면 말은 버리고 ‘득의이망언(得意而忘言)’이고 기봉(機鋒)이 번뜩이는 언외지의(言外之意)의 상징 체계를 존중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선경(禪境)이다. 왕유·유종원·소동파·황정견 등 많은 당송대 문인들의 선심(禪心)을 담은 산수시는 성색(聲色)의 관조를 빚어 공(空)에 대한 관조를 실현하고 있다. 일찍이 백장회해·황벽희운 선사 등이 설파한 “일체의 색이 모두 부처의 색이고, 일체의 소리가 부처의 설법 소리(一切色是佛色 一切聲是佛聲)”라는 선가의 공관(空觀)은 자연적 색채와 동정(動靜)에 대한 문인들의 민감성과 치밀성을 배양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중국의 유마힐을 자처, 호를 스스로 ‘마힐’이라 한 왕유의 산수시 〈녹채(鹿柴)〉·〈조명간〉·〈산중(山中)〉이나 소동파의 개오시 〈계성산색(溪聲山色)〉 등은 이를 증명해 보이는 좋은 예다. 남종 청원 법계의 선승인 화정선자 화상의 〈노젓는 노래(撥掉歌)〉에는 텅 비었으되 비어 있지 않은 공 속의 불공(不空)을 읊조린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밤은 깊어 물은 찬데 고기들은 입질을 하지 않는구나. 선자 화상의 낚싯배는 밝은 달빛이 가득히 차 있는 공선(空船)이되 불공의 만선이다. 강가의 뱃사공으로 끝내 산중 은거한 선자 화상의 선거우의(船居愚意)를 잘 묘사하고 있는 이 시 속의 공관(空觀) 관조는 바로 왕유의 산수시 〈산중〉과 상통한다. 산속 길에는 원래 비가 오지 않았지만, 〈산중〉에 나오는 이 구절은 색(空翠)이 옷을 적시는 공의 형상화, ‘공의 시화(詩化)’4)를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 보인다. 깨침의 미학은 곧 공의 미학이며 공을 간파하는 감성경험이다. 선시는 경계(순수현상)을 빌어 마음을 관조한다. 이른바 사물을 통해 정신을 그려내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의 미학이며 선시들의 펼쳐 보이는 심령의 회화화다. 깨달음이란 공에 대한 직관이며 가상(假象)을 투과해 상 밖의 진실에 도달, 그 진실이 발하는 찰나적인 광명 앞에서 불성에 바탕한 나를 정립하는 것이 나라는 개체의 자유경계다. 당송 8대가를 비롯한 수많은 문인들이 시승·화승(畵僧)들과 교류하면서 자신들의 시·서·화에 필요한 선사상과 작법 등을 상호 보완해 나갔다. 시성(詩聖) 두보와 시선 이태백, 시불(詩佛) 왕유는 물론 백거이·소동파·황산곡(정견) 등은 선종 족보에도 각각 흥선유관·소각상총·회당조심 선사의 재가 제자로 올라 있고 때때로 선적(禪寂)에 침잠해 많은 선시들을 남겼다. 두보는 말년에 호북성 기주의 양자강 기슭에 칩거하면서 선적을 즐겼다. 그는 이 무렵 〈추일기부영회봉기정감이빈객일백운(秋日夔府횩懷奉寄鄭監李賓客一百韻)〉이라는 장시에서 다음과 같은 시구를 남겼다. 몸은 쌍봉사에 맡기고, 쌍봉사는 두보가 머물던 기주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동산법문(東山法門)의 도량인 현 호북성 황매현의 오조사(사조사)다. 7조는 지금에도 논란이 거듭되고 있는 수수께끼이나 최근 선학자들의 연구로는 북종(北宗)의 보적 선사라는 결론이다. 당시 선종의 상황은 북종이 주도했고 보적 선사가 선종 제7조로 공인된 사실도 있었기 때문이다. 두보가 “북종선의 신심돈독한 보적의 재가제자로 보적의 비문을 지은 시인 이옹, 의복 선사의 비문을 쓴 엄무, 역시 보적의 유발 상좌인 방관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는 점5)도 이 같은 고증을 뒷받침한다. 어쨌든 이 시구는 두보의 간절한 선심(禪心)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동파의 〈계성산색〉은 선가의 공관을 색화(色化)한 사족에 필요없는 직설적인 예다.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모두 부처의 설법 법음인데, 〈계성산색〉의 7언 절구 중 앞의 두 구절이다. 백장·황벽 선사가 설파한 “일체의 색깔과 소리가 모두 부처의 성색”이라는 법음의 번안판이다. 선종 미학의 핵심 축인 심(心 : 순수직관)과 경(境 : 순수현상)의 관계는 “마음(순수직관)이 곧 부처(心是佛)”라는 선지(禪旨)로서 종합적인 결론을 내린다. 마음을 따라 변화하는 ‘경’의 직관이 곧 선적인 심미 경험의 기초가 된다. 이것이 선이라는 주관적 유심주의가 빚어내는 선미학이고 시문학과의 통로다. 선의 수행방법론인 직관적 관조와 직각적(直覺的) 체오, 영감 등은 시작(詩作)의 핵심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은 언설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불립문자의 진리라는 우주 저 너머 광역(廣域)의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설불가설(說不可說)’의 방식으로 시적(詩的)인 절제된 표현과 암시·비유·은유·상징 등을 즐겨 사용한다. 시는 선객에게 마치 비단 위에 꽃을 더한 것과 같고, 송대 선종 거사 원호문의 〈숭산 전시자에게 주는 시(贈嵩山雋侍者學詩)〉에 나오는 구절이다.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는 명쾌한 설파다.화두를 탄생시킨 선문답과 자신의 깨침을 묘사한 개오시(開悟詩, 일명 오도송), 게송이라는 설법시, 임종게(臨終偈, 일명 열반송) 등과 같은 선시는 모두가 그 밑바탕에 본래면목을 찾으려는 몸부림을 담고 있다. 선시들을 화두 중심으로 그룹화 시켜 ▲본래면목 의상군(意象群)=‘본지풍광(本地風光)’·‘본래인(本來人)’·‘본분사(本分事)’, ▲무위진인 의상군=‘주인공’·‘불병자(不病者)’ ▲이것, 그것 의상군=‘유일인(有一人)’·‘이(伊)’ ▲부모미생시 의상군=‘흑두미생아시(黑豆未生芽時)’·‘고범미괘시(古帆未掛時)’ ▲심월, 심경(心鏡) 의상군=‘고경(古鏡)’·‘심주(心珠)’ ▲촌사불괘(寸絲不掛) 의상군=‘방하착(放下着)’·‘일물부장래(一物不將來)’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6) 선종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5가 7종(五家七宗)이 각기의 기봉과 문정설시(門庭說施)를 자랑하면서 쏟아낸 선시들의 경계를 각 종파별로 요약해 믿고자 한다. 2. 임제종 선시 임제종은 남종 5가 7종 중 조동종과 함께 가장 유장한 역사를 이어오면서 오늘의 동아시아 3국 선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도 바로 임제종 법맥을 잇고 임제종풍의 선종이다. 고려말 태고보우국사(1301∼1382)가 중국 임제종 양기파 호구범계의 석옥청공화상에게 〈태고암가〉를 보이고 법을 인가 받아옴으로써 한국불교 선종의 법통은 남종 정맥의 임제선법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가풍으로 이어오고 있다. 이에 앞서 신라말 고려초 선종 전래 당시 개산한 9개 선종사찰(九山禪門)의 법맥 전승도 임제종의 법원인 남악-마조 법계가 7개로 절대 다수였다. 11세기 이후의 한·중·일 선불교는 임제종(양기종)일색이었다. 단적으로 선림에 회자돼 온 “임제종 천하, 조동종 한 구석(臨天下 洞一隅)”라는 일구가 이를 대변한다. 임제종은 조사선(祖師禪)의 가장 강력한 후계자다. 임제의 선사상은 조사선이 거듭 강조하는 주체성의 구체적 내용인 자신·자주·자유의 3자정신에 입각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의 자유주의와 ‘무위진인(無位眞人)’을 통해 ‘중생이 곧 부처(衆生是佛)’임을 실현하는 인불평등(人佛平等)의 평등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인격적 자아를 완성함으로써 내재적 초월을 달성하고자 하는 임제선의 핵심축은 사람(人)과 마음이다. 《임제록》에는 ‘人’이 1백96회나 등장, ‘인’을 통한 불법의 육화(肉化)를 시도하고 있다. 또 임제가 말하는 ‘心’은 시공과의 관계를 가진 현실 생활 속의 생각을 일으키는 마음 이른바 ‘당하(當下)의 마음’을 말한다. 임제는 현실 속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현실 속 인간을 해방시키는 방법으로 그의 스승인 황벽희운 선사가 거듭 강조한 “마음이 곧 부처(心是佛)”라는 선요(禪要)에 입각한 해방사상을 정립했다. 임제의 해방사상은 무위진인(자유인)이라는 중생 속에서 함께 숨쉬며 살아 활동하는 육체를 가진 부처를 제시했다는, 주체적 자각이 없는 인간은 사람으로서의 존재가치가 없다는 단호한 입장이다. 봉림 : 시험삼아 물어볼 일이 있는데 좋습니까. 봉림 스님이 문답을 그만두자 임제는 한 수의 게송을 지었다. 절대의 도(道)는 평등마저도 초월하여 온누리를 감싸지 않음이 없나니, 임제는 본래 구족한 진성(眞性)을 분별심으로 파괴하는 어리석음을 “멀정한 살을 긁어 상처 내는” 자승자박으로 비유한다. 봉림이 ‘달’로서 반야지혜의 본체 자성을, 집착에 얽매이어 미망에 빠진 중생을 물 속 고기로 각각 상징화하자 임제는 미망이란 자심(自心)의 분별에 의해 생겨난 것일 뿐이라고 받아넘기면서 봉림을 밧줄로 옭아맨다. 임제는 이어 달밝은 밤 산 위에 올라 한바탕 크게 웃어댐으로써 온 우주와 한 몸이 된 가운데 독보자재(獨步自在)했던 약산유엄사의 〈산정대소〉고사를 빗대어 평등마저도 뛰어넘는 절대 진리의 대기대용(大機大用)을 게송으로 펼쳐 보인다. 임제의 대승리다. 이 선문답은 임제선의 심오한 선학적 탁마와 시적 소양, 단도직입의 준렬한 기봉을 체현하고 있다. 임제종 선승들은 자기 종파의 종요(宗要)를 설파하는 철학적인 종강시(宗綱詩)와 송고시·선학시 등을 많이 남겼다. 임제선의 학인 접인법(接引法)인 ‘사할(四喝)’과 ‘사료간(四料簡)’, ‘사조용(四照用)’ 등에 대한 종강시로는 임제와 분양선소·불감혜근 선사 등의 게송이 뛰어나다. 임제종 종강시의 독특한 풍모는 그 의상(意象)의 “몽룡성과 불가해성·다의성(多義性)”이다.7) 그래서 임제종 종강시는 독자들에게 많은 상상을 해볼 수 있는 공간과 여운을 남겨준다. 임제종 선학시의 주제는 ‘확철대오해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사람이 진짜 귀한 사람(無事是貴人)’, ‘절대 평등의 지위에 있는 진인(無位眞人)’ 등으로 압축된다. ‘귀인’은 자성원만·조작이 없는 무위,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는 평상심, 모든 구하는 바를 멈춘 휴헐(休歇)을 통한 무사, 스승과 경론 등에 의지하지 않는 자주성을 그 특성으로 한다. 임제선의 사상적 정수인 ‘무위진인’은 흔히 말하는 ‘도인(道人)’, 자성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다. 6조 혜능의 “법은 원래가 세간 속에 있다(法元在世間)”는 시법이 마조의 홍주선(洪州禪)에서 ‘평상심’으로 발전되고 홍주선의 충실한 후계자인 임제의현에 이르러는 ‘무위진인’과 ‘입처개진’으로 나타났다. 혜능-마조-임제를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이러한 선사상은 한마디로 인간의 일상 생활 전부가 여여한 불법 진리의 현현이고 진리적 가치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임제선은 “집을 떠나 객지의 여로를 헤매지 말라(離家舍不在途中)”고 누누이 역설한다. 이는 집안의 일상 생활 중에 초월이 존재하고 있다는 타이름이며 ‘가사(家舍)’는 평등 세계이지만 ‘도중(途中)’은 불평등 세계라는 설파다. 임제선은 특히 인간과 부처가 평등하다는 ‘인불평등(人佛平等)사상’에 철저하다. 송고시로는 공안집의 효시인 분양선소의 《송고백칙(頌古百則)》이 가장 유명하다. 이 밖에도 원오극근·운봉문열·취암가진·도오오진송고도 있다. ‘백장야압(百丈野鴨)’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채다일사(採茶 事)’ ‘영운도화(굵雲桃花)’ 같은 공안들에 대한 이들의 송고시는 선림에서 많은 칭송을 받는 주옥 같은 선시들이다. 구체적인 평석이나 감상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3. 위앙종 선시 기와 조각이 대나무를 치는 한 소리 요란하게 울려 나의 일체 지해의 상을 망각케 했네. 위앙종 향엄지한 선사(?∼898)의 개오시다. 향엄은 선종 5가 중 가장 먼저 개산한 위앙종 창시자 위산영우·앙산혜적 선사와 함께 초기 위앙종을 이끈 걸출한 선승이다. 그는 원래는 백장회해 선사 문하에서 위산과 사형사제간으로 동문 수학하면서 하나를 물으면 열을 대답하는 총명하고 영리한 수재였으나 선적인 깨달음은 사형이었던 위산의 인도를 받아 개오의 문을 열고 위산을 스승으로 받들었다. 선종사는 위앙종 개산조를 위산과 앙산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은 향엄의 공헌도 앙산에 못지 않다는 게 현 중국 선학계의 일치된 견해다. 백장이 천화하자 향엄은 위산으로 가서 수행정진하던 중 하루는 위산스님께 오도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이때 위산은 향엄에게 “네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라.”고 일렀다. 향엄은 자신이 통독한 불경들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 답을 끝내 찾지 못하자 절밥이나 축내는 중노릇을 이젠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바랑을 꾸려 환속할 요량으로 산문을 떠났다. 도중에 혜충 국사 도량인 하남성 백애산 당자곡의 향엄사나 한번 둘러보려고 들어가 묵던 중 어느 날 마당을 쓸다가 빗자루에 쓸려나간 기와 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쳐 ‘딱’하는 소리를 듣고 홀연히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을 깨친 후 ‘향엄격죽(香嚴擊竹)’이라는 유명한 선림 공안으로 전해오는 위와 같은 개오시를 읊었다. 향엄이 기와 조각의 격죽 소리를 통해 깨친 ‘망지(忘知)’의 경계는 지성적, 논리적 지식과 계율에 얽매인 지루한 수행의 결과가 아니라 광활한 선도(禪道)를 접촉한 정감에서 얻은 ‘무의식적인 심령체험’이었다. 이것이 바로 선의 최고 경계다. 선이 추구하는 자성은 마치 “맑고 맑은 가을 연못에 비친 달이나 심야의 정적을 뚫고 울며 퍼지는 종소리”8) 같은 초탈지심(超脫之心)의 초연한 심태(心態)를 통해서만 접촉할 수 있다. 향엄의 귀에 들린 “격죽성은 천뢰(天쿂 : 진여·불법)였으며 그는 돌연 진여를 접촉하는 순간 모든 심념(心念)의 활동이 정지되면서 천기(天機)를 얻었던 것”9)이다. 무아지경의 초탈지심(超脫之心)에 침잠하고자 하는 심미경계에서 볼 때 선경(禪境)과 시경(詩境)은 일치한다. 도연명의 〈음주〉에 나오는 “동쪽 울타리 밑에서 (술을 담그려) 국화꽃을 따다가 문득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는 구절이나 오랫동안 병을 앓고 난 후 누각에 올라 생명의 약동을 보고 춘의(春意)를 묘사한 사령운의 “연못가의 봄풀은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정원의 버드나무는 새들이 모여들어 지저귀는 소리와 더불어 변해가고 있다(池塘生春草 園柳變鳴禽)”는 시구, 왕유의 〈종남별업(終南別業)〉에 나오는 “물소리가 다하는 곳까지 가고, 때로는 앉아서 뭉개뭉개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보기도 한다(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는 구절 등은 모두가 물아양망(物我兩忘)의 초연한 경계로 선이 추구하는 ‘수월상망(水月相忘)’이나 ‘영심한담(影心寒潭)’의 경계와 상통하는 초탈지심의 심미경계다. 기러기 하늘을 나니, 깨친 자가 가지는 무념·무주·무상의 심태를 읊은 묘각 선사의 게송이다. 기러기와 강물은 모두가 티끌만큼의 집착도 어떤 것도 구하는 바 없는 무심의 경계에서 서로를 받아들인다. 도연명이 국화를 따라가 문득 남산을 쳐다보는 무심의 경계도 이와 같은 것이다. (바람에 흔들거리는) 대나무 그림자 돌계단을 쓸어내지만 먼지 하나 날지 않고, 지선 선사가 학인을 계도한 게송이다. 물과 달, 그림자와 물이 서로를 잊고 무아지경의 심태로 어우러지는 정경이다. 선이 추구하는 열반이란 현실 세계와 객관 세계에 대한 초연한 심태다. 여기서 분명히 밝혀둘 점은 선자와 시인의 초연이 결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도, 은둔주의적인 피세(避世)도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결코 인생과 세계를 허무화하지 않는다. 공관(體)과 직관(用)을 융합시켜 자연을 심미하는 시정화의(詩情畵意) 속에서 적의회심(適意會心)하는 삶을 살 뿐이다. 선자와 시인의 자연 심미는 회심의 중요 내용이 된다. “천추에 늘 새롭기만 한 다섯 글자의 명구(萬古千秋五字新)”라는 평을 받은 “지당생춘초”도 바로 이 같은 자연 심미다. 자기 본성(개성)에 적합한 생활 방식을 따라 살아 나가는 것, 다시 말해 인생의 아름다움을 심미하는 가운데 생명의 가치를 진정으로 향수하는 삶이 곧 적의인생이고 적의회심이다. 적의회심은 위진남북조 시기 왕필이 정립한 현학(玄學)의 체용일여론을 받아들여 개성과 정감을 중시한 혜능선의 양대 특징 중 하나다. 특징의 다른 하나는 노·장에 뿌리를 둔 천인합일 사상이다. 위앙종은 특히 이 같은 체용론에 아주 투철하다. 선이 거듭 갈파하는 무심·무념·무주는 바로 이 같은 수월상망의 경계다. 노자와 장자의 천인합일 사상은 소농으로 전락한 귀족·은사 계층의 자유 사상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혜능선도 같은 맥락에서 소농과 한문(寒門 : 서민) 출신의 신진 사대부들이 지향하는 자유를 종교의 형식으로 대변했다. 후기 선종에서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이 깨달음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종욕주의가 보편화돼 초탈심과 함께 선적 자유의 중요 내용으로 사대부들을 사로잡았다. 〈향엄격죽〉은 사형 앙산이 그의 오도를 검증하는 과정에서 유명한 조사선(돈오)과 여래선(점오)의 분류를 최초로 제기, 오늘에까지 끊임없이 선림의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앙산은 향엄이 격죽 소리에 깨쳤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서 “네가 다다른 심득(心得)의 경계가 어떠냐”고 물었다. 향엄은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고, 올해의 가난이 진짜 가난이다. 작년 가난은 송곳 세울 만한 땅은 있었지만, 올해엔 송곳조차도 없네.”라는 게송으로 답했다. 앙산이 이 게송을 듣고 “자네는 여래선의 경지에는 도달했지만 아직 조사선에는 멀구먼”이라고 평하자 향엄은 다시 다음 게송을 읊었다. 나는 기(機) 하나 있거니, 앙산은 그제서야 “자네가 조사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니 크게 기쁘네.”라고 칭찬했다. 앞의 게송은 “가난-진짜 가난”, “송곳 세울 틈(땅)은 있다-송곳조차 없다”는 점진적이고 계단식인 진행으로 점수점오다. 그러나 뒤의 게송은 “눈 깜짝할 사이에 견성”하는 돈오돈수다. 조사선의 돈오는 속성적인 회심방법이다. 돈오는 인인개유불성론(人人皆有佛性論)이 보편적 사회심리에 영합,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본성에 주의를 기울여 고난도의 문제였던 성불의 길을 간이직절(簡易直切)로 도달케 했다. 이 같은 돈오적 사유는 염증나도록 번뇌한 불교교리를 포기하고 곧바로 성불할 수 있는 첩경을 개발, 후대 선사상과 문화 예술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선적 체험(깨달음)이란 비지성적이고 비논리적인 원시 경계와 심미 경계에 대한 순간적 체험이다. 봄날의 연못가 잡풀에서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을 보고서 순간적으로 생명의 환희와 만물의 실존을 감오하는 시심(詩心)이 바로 선심(禪心)이다. 이 같은 속성(速成)의 돈오는 혜능선의 기반인 소농의 자립 경제 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부지런히 경작해도 먹고 살기에 급급한 소농 경제체제의 농민들에게는 점진적이고 계단적인 오랜 기간의 수행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한 순간에 깨치는 돈오가 딱 들어맞는 해탈 법문이었다. 돈오라는 감성적, 직관적 체험은 시와 그림 같은 예술 창작의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돈오에 이르는 기연(機緣)은 1차성(원시성·일상성)과 개체성·직접성·돌발성·불가 중복성(일회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찰나간의 돈오에는 깨닫는 주체(體)와 그 대상(用)이 하나로 통일돼 독특한 생명 활동을 전개한다. 왕유의 〈녹채〉나 〈조명간〉·〈종남별업〉 같은 짤막한 산수시들은 사물을 빌어 정신을 그려낸 선시들로 이러한 생명 활동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위앙종 선시들은 ‘무심이 곧 도(無心是道)’인 선리를 설파하는 시선감오(詩禪感悟)가 예리하고 능소구민(能所俱泯)·일초직입(一超直入)·일용시도(日用是道)·성색초월·원융호섭의 선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성색초월에서는 망념의 사로를 차단키 위한 촉배관(觸背關 : 긍정‘觸’과 부정 ‘背’의 이원적 대립 개념을 제시해 학인을 만물일여의 경계로 이끄는 대법)을 능란하게 구사한다. 예로는 〈위산수고우(펨山水┍牛)〉·〈향엄상수(香嚴上樹)〉 같은 공안들이 있다. 위앙종은 체용쌍창(體用雙彰)·상즉자재(相卽自在) 등을 통해 ‘심령’을 하나의 펄펄 뛰는 살아 있는 유기체로 묶어내는 원융호섭의 선적이고 시적인 감오를 보여준다. 앙산혜적과 삼성혜연이 선문답을 했다. 앙산이 삼성에게 “자네 이름이 뭐지?”라고 묻자 혜연은 “혜적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어 앙산이 “혜적은 내 이름이다.”라고 했다. 삼성이 다시 “내 이름은 혜연이다.”라고 하니 앙산은 한바탕 크게 웃으며 문답을 끝냈다. 〈내가 혜적(我是慧寂)〉이라는 이 공안은 삼성의 대답이 포인트다. “나는 혜적이다.”라는 대답은 주체와 객체를 다 던져버려 너와 나의 구분이 없어진 ‘인경구탈(人境俱奪)’의 평등한 본체적 경계이고, “나는 혜연이다.”는 대답은 너와 나의 차별을 인정하는 ‘인경구불탈’의 다양한 현상계에 대한 긍정이다. 이처럼 본체적 입장의 자타불이(自他不二) 평등(부정)과 현상계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차별(긍정)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상즉자재는 모든 현상 세계의 차별상을 진아(眞我)라는 본체의 현현(現顯)으로 본다. 여기서는 이상과 현실, 평등과 차별이 서로 각기의 위치를 지키면서 필요에 따라 상호 융섭한다. 위앙종의 종풍은 친절, 세밀하고 스승과 제자의 응수가 부창부수(夫唱婦隨)로 척척 들어맞는 게 그 특징이다. 위앙 문풍은 임제와는 달리 온화하고 선비적이다. 그래서 위앙종 선사들은 학인을 제정하는 데 과격한 방할을 휘두르지 않고 설득조로 이끌어준다. 위앙종 선시들의 시정(詩情)도 이 같은 문풍을 따라 절제된 철학적 사변의 심미경계와 감오가 주축을 이룬다. 4. 조동종 선시 남종선의 청원-석두 법계를 대표하는 조동종은 남악-마조 법계의 세간 속 화광동진(和光同塵) 문풍과는 달리 심산유곡의 산거(山居) 낙도를 즐기는 산간 불교의 풍모를 보여준다. 따라서 조동종 선사들은 자연친화적이고 문학성이 아주 짙다. 이들에게 있어 자연 친화는 깨침의 조건이기도 하다. 청원 법계의 운문종과 법인종에도 문재가 뛰어난 선승들이 많다. 운문종의 설두중현 선사와 조동종의 굉지정각 화상 등이 각각 남긴 《벽암록》의 전신인 《송고백칙(頌古百則)》과 송고집 《종용록》 등은 뛰어난 문학성을 가진 주옥 같은 선시들을 담고 있다. 오늘에도 선문의 제1서로 한·중·일 3국의 선림에서 애독되고 있는 《벽암록》은 저자가 임제종의 원오극근 선사지만 한 단계 거슬러 올라가면 그 뿌리를 설두중현의 번뜩이는 문재에 두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조동선의 종요(宗要)는 화엄사상의 이사무애(理事無碍)와 상통하는 ‘편정회호론(偏正回互論)’으로 집약된다. 같은 맥락의 종요로 ‘군신오위’·‘공훈오위’·‘오상시(五相詩)’ 등이 있다. 모두가 본체계와 현상계의 원만한 통일, 이른바 진망화합구조(眞妄和合構造)의 선리를 설파하고 있다. 동산양개(807∼869)와 그의 제자 조산본적(840∼901)이 개산한 조동종은 그 번성함이 임제종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오위론(五位論)·회호설(回互說) 등과 같은 독특한 종요가 시가를 통해 광범하게 유포돼 오늘에까지 전래되고 있다. 조동종의 편정회호론은 거슬러 올라가면 석두희천 선사의 《참동계(參同契)》에 뿌리를 두고 발전시킨 선법 이론이다. 석두의 《참동계》는 위진남북조 시기의 도교 도사였던 위백양의 《참월계(參月契)》를 참고해 명명한 선요(禪要)다. ‘참’은 차별·현상계를, ‘동’은 평등·본체계를, ‘계’는 통일을 각각 뜻한다. 화엄사상의 이사원융을 변형시켜 전개한 선학 이론이다. 형형색색의 우주만물은, 《참동계》의 회호론을 대표하는 구절이다. 우주 삼라만상은 마치 그물망처럼 얽혀 상섭해 하나의 그물(통일)이 되기도 하고 각기 한 올의 망줄로서 독자적 개체(분립)가 되기도 하듯이 본체계(理·空)와 현상계(事·色)는 서로 의존해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상호 용입 작용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이사간의 한계를 분명히 하면서 일반과 특수, 생과 사, 현실과 이상으로 분립한다는 것이다. 주체와 객체가 서로 용입(溶入)해 각기의 개체성을 버리고 존재의 본원인 ‘공’으로 돌아가 통일될 때의 무의식, 비의식(非意識) 상태의 경계가 바로 오도(悟道)고 해탈이다. 동산의 〈편정오위론〉에서 정(正)은 본체·어둠·부정·흑·평등·죽음·공·이(理)를, 편(偏)은 현상·밝음·긍정·백·차별·삶·색·사(事)를 각각 상징한다. 조동종 선사들은 명암·색공·이사의 상섭을 통한 불가분립과 객체적인 독립관계를 은쟁반 속의 흰 눈(銀碗盛雪)·밝은 달빛 아래의 백로(明月藏鷺) 등으로 비유한다. 편정회호론은 차별 속에서 평등을, 평등 속에서 차별을 보라는 가르침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간 만사를 허무화하지 않는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절대유(絶對有)를 가지고 차별상으로 뒤덮인 현상을 기꺼이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현상계는 그 이면의 본체계에서 보면 공과 분립시킬 수 없는 허상이고 가짜지만 그 공의 작용에서 보면 현상계와 본체계는 서로 다른 독립성과 개별성을 갖는다. 6조 혜능 대사는 일찍이 남종선의 종강을 “무념과 무상·무주를 각각 종(宗)과 체(體)·본(本)”10)으로 제시한 바 있다. 무상을 본체로 삼는다는 말은 “기존의 개념(相)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체험을 통해 얻은 창조적 지혜를 판단의 준거로 삼는다”11)는 선언이다. 조동종은 가짜와 진짜, 본질과 현상, 실상과 가상의 모순된 이원론을 통일하기 위한 선학 이론으로 편정회호라는 진망화합구조를 구축했다. 동산의 편정오위론은 정중편(正中偏 : 理에 편중)·편중정(偏中正 : 事에 편중)·정중래(正中來 : 理事통일)·겸중지(兼中至 : 보살의 중생제도)·겸중도(兼中到 : 만법을 뛰어넘은 무애도인)으로 나뉘어 편정의 회호와 그 완성을 각각 게송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동산의 그의 개오시인 〈과수게(過水偈)〉가 편과 정의 회호를 웅변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동서고금에서 뛰어난 철학시로 평가받는 〈과수게〉는 진망(眞妄)으로 분할되는 나와 물 속에 비친 나의 그림자 관계를 편정회호론으로 상섭시켜 본체계로의 통일과 현상계에서의 독자적 분립을 시학적 미감이 넘치는 필치로 설파하고 있다. 다른 데서 도를 구하지 말라. 동산의 〈과수게〉다. 게송의 ‘그(渠)’는 개울물 속에 비친 가아(用)고 ‘나(我)’는 오도한 진아(體)다. 본체의 작용이 빚어내는 그림자는 우주 만물의 하나로 독립적인 개체일 수도 있지만 그 존재의 본원인 본체계로 돌아가면 진아 하나뿐이고 가상이라는 체용회호론이다. 현상계의 만물은 진짜와 가짜가 공존하는 진망화합구조 속에서 비로소 긍정돼 우리의 현실적인 삶에 가치들을 부여할 수 있게 된다. 선시의 감성적 심미경험(득오)은 공관(體)과 직관(用)이 어우러져 진망화합을 만들어내는 경계를 체감하는 것이다. 시의 심미경계도 이와 같다. 조동종 선사들은 종요인 회호론과 촉목보리(觸目菩提)·능소구민·체용불이·수연임운 같은 선리나 오도의 경계를 설파하는 데 옅은 연기(輕煙)·옅은 안개(薄霧)·흰 구름이나 밝은 달(皓月)·찬 바위(寒岩)·산꼭대기(山頂)·돌계집(石女)·목인(木人) 등을 각각 변화하는 현상계의 사상(事象)과 절대적 본체의 상징으로 즐겨 사용한다. 석녀와 목인은 무의식의 수면상태, 곧 분별 의식이 일어나기 이전의 원본적 혼돈, 즉 의식작용이 생겨나기 이전의 절대 공경(空境)을 상징한다. 선사들이 흔히 즐겨 사용하는 “석녀가 노래를 하고, 목인이 춤을 춘다”는 말은 청정 본체에 분별의식(노래·춤)이 생겨났음을 뜻한다. 선수 선사는 현상이 본체를 가리우고 있음을 “옅은 연기가 밝은 달을 가리우고 옅은 안개가 바위를 덮고 있는 것(輕煙籠皓月 薄霧鎖寒岩)”으로 비유했다. 선문답과 법문·게송 등에 자주 등장하는 ‘거북의 털과 토끼의 뿔(龜毛兎角)’도 본체계와 현상계의 비유적 상징이다. 거북과 토끼는 본체와 도(道)를, 털과 뿔은 현상과 가아(假我)를 각각 상징한다. 원래 거북은 털이 없고 토끼는 뿔이 없다. 따라서 거북의 털과 토끼의 뿔을 구하려 하는 어리석음은 ‘미망의 아집’을 비유한다. “거북의 털이 석자가 길었다.”는 게송의 읊조림은 번뇌망상의 아집이 많이 자랐음을 질책하는 상징적 표현이다. 조동종의 풍부한 문학성은 다른 종파에서 볼 수 없는 많은 본체와 현상에 관련한 상징적 의상(意象)들을 가지고 있다. 조동종의 의상들을 상징체계별로 살펴보면, ① 철학 의상 ② 의식(意識) 의상 ③ 산수 의상 ④ 인물 의상 ⑤ 기타 의상 조동종풍은 농부처럼 순박하면서도 꽤나 철학적이고 주도면밀한 것이 그 특징이다. 체용일여를 설파하는데 “흰 눈 위의 검은 닭”, “한 여름의 눈서리”, “불 속의 연꽃”, “화로 속의 붉은 불꽃 위를 흐르는 푸른 물” 등으로 본체계와 계합한 절대 자유의 경지를 드러내 보인다. 동산은 〈현중명서(玄中銘序)〉에서 “맑은 바람은 풀을 넘어뜨리되 요란하게 흔들지 않고, 밝은 달빛은 하늘을 가득 채우되 강렬하게 비치지는 않는다(淸風偃草而不搖 皓月普天而非照)”는 시구로 동정일여와 체용의 혼연(混然)을 설파했다. 주체적 능동성과 충만한 자유 의지의 확립은 선사들의 오도 목적이다. 오도의 계기와 그 목표에 도달한 경계를 묘사한 선시들은 사물의 상호 의존성을 얽어맨 그물이라는 경(境) 가운데 존재하는 각개 사물의 독립적 실존을 인정함으로써 “푸른 대나무가 모두 부처의 법신이고 울긋불긋 되어 있는 꽃들이 반야지혜(靑靑翠竹盡是法身 郁郁黃花無非般若)” 아님이 없는 깨침의 미학이라는 ‘공의 미학’을 만들어낸다. (계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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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 오가의 시가(詩歌) 경계(2) |
이은윤 |
5. 운문종 선시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6) 선사가 개산한 운문종은 당말오대(唐末五代)에서 원초(元初)까지 200년밖에 존속하지 못한 선종 종파지만 그 문풍은 후일 양기종(楊岐宗 ; 임제종)에 흡수돼 사대부들의 인격 도야에 크게 공헌했다. 자연 진여(眞如)를 관조하는 시선(詩禪) 감오(感悟)와 뛰어난 문학성은 격렬한 언사로 정식(情識) 망상을 단절시키는 종풍과 함께 선림을 풍미했으며 오늘에도 많은 선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운문의 제자들로는 향림징원(香林澄遠)·덕산연밀(德山緣密)·동산수초(洞山守初)·쌍천사관(雙泉師寬)·파릉호감(巴陵顥鑑) 등과 같은 종장(宗匠)들이 운문의 풍격을 그대로 계승해 종풍을 크게 떨치면서 운문종 중흥을 이끌었다. 향림징원-지문광조(智門光祚)-설두중현(雪竇重顯)으로 이어진 법맥은 운문종의 정맥을 이루면서 뛰어난 문재를 발휘했다. 설두중현의 송고(頌古)를 전신으로 하는 《벽암록》의 1백개 공안(화두) 중에는 운문종 선사들의 화두가 단연 압도적으로 많다. 운문종의 종풍은 간명직절(簡明直截)하고 기봉이 험절하며 사려분별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게 특징이다. 임제종처럼 방할(棒喝)이 난무하는 준엄함도 없고, 조동종처럼 면밀하지도 않지만 격렬한 언사로 간단 명쾌하게 망상의 사로(思路)를 찰나에 깨부순다. 상근기가 아니면 접근하기 어려운 운문종풍의 귀결점은 망상을 일으키는 사변을 번개처럼 차단하고 자신의 마음을 관조하는 반관자심(返觀自心)에 모아진다. 선림은 운문종풍을 ‘운문천자(雲門天子)’ ‘운문일곡(雲門一曲)’이라는 찬사를 동원해 칭송했다. ‘천자’는 마치 천자(황제)의 조칙처럼 한 번에 만기(萬機)를 결정한다는 칭송이고, ‘일곡’은 화하(華夏)의 옛 음악처럼 곡조와 부르기가 어렵고 듣는 사람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찬사다. 한 학인이 운문 선사를 찾아가 물었다. 운문의 대답은 산수에 나타나 있는 진여(불법 진리)를 보라는 가르침이다. 선자들에게 자연은 ‘마음의 방’이다. 운문은 참선자라면 모름지기 자연의 신령스런 빛에 온몸을 노출시켜 일광욕을 하라고 타이른다. 그 이유는 자연이야말로 깨침의 문턱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도의 편재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설법이다. 운문종의 종요는 유명한 ‘운문 3구’로 요약된다. 운문이 제시한 함개건곤(涵盖乾坤)·목기수량(目機銖兩)·불섭세연(不涉世緣)을 제자 덕산연밀이 함개건곤(涵盖乾坤)·절단중류(截斷衆流)·수파축랑(隨波逐浪)으로 정리한 운문 3구는 운문종 시가를 일관하고 있는 시선감오의 요체이기도 하다. 함개건곤은 절대 진리는 우주만물에 두루 편재한다는 진리관이고, 절단중류는 학인의 번뇌망상을 단칼에 끊어 언어문자를 초절한 내심 돈오를 이끄는 기량이다. 수파축랑은 학인의 능력에 맞추어 설법을 자재롭고 활발하게 전개하는 교수법을 말한다. 20세기 중국 불학의 대가인 여징은 “함개는 보편·정체(理)를, 절류는 단면·개체(事)를 뜻한다.”2)고 풀이한다. 선림은 운문 3구에 ‘운문검(雲門劍)’ ‘취모검(吹毛劍 : 머리칼도 단번에 자르는 날카로운 칼)’이라는 명예로운 별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달마가 중국에 와서 전파하고자 한 불법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운문과 한 학인의 선문답이다. 운문종 선사들에게는 “푸른 대나무와 울긋불긋 피어 있는 꽃들이 모두 오색 영롱한 마니주(佛心)가 되며(慈濟聰), 화단에 활짝 핀 작약꽃이 청정법신(운문문언)”이 된다. 이들은 봄날의 산과 가을의 맑은 물을 관조하는 풍월산수에서 영원 절대의 자성을 감오하는 시정(詩情)을 귀히 여긴다. 파초잎 위를 딩구는 빗방울에서 자성의 현현을 보고 허공에 흩날리는 흰 눈, 광야를 나는 기러기, 동서로 흘러가는 조각 구름 등을 관조하면서 유한 담백한 심경을 보듬는다. 운문종은 활짝 피어 있는 복숭아꽃을 보는 순간 깨침의 문을 연 영운지근(靈雲志勤) 선사의 ‘도화오도(挑花悟道)’를 매우 추숭(推崇)하며 “대지에 가득한 붉은 꽃향기 쓸어내는 사람 없는(紅香滿地無人掃)” 자연 풍광을 무척이나 아낀다. 밤에는 암자의 대밭 뒤를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듣고, 운문종 경흠(竟欽) 선사의 게송이다. 운문종은 자연만상에서 직감하는 즉물즉진(卽物卽眞)의 감오를 중시한다. 용흠의 마음을 비운 안일한 텅빈 심령과 담백한 유한(悠閑)은 운문종 선사들이 거듭 강조하는 선심(禪心)이고 시정이다. “옛 부처(聖)와 법당의 기둥(凡)이 서로 교섭하는데 이게 무슨 작용인가?” 운문이 자문자답한 선문답이다. 부처(고불)의 세계와 일상인(노주)의 생활이 전혀 다를 게 없다는 설법이다. 남산의 구름과 북산의 비는 둘이 아니다. 다만 구름이 비로 바뀌었을 뿐이다. ‘남산운기 북산하우’는 운문보다 훨씬 앞서 말년에는 선종에 귀의, 호를 ‘향산거사(香山居士)’라 자호했던 백거이(白居易)의 선시 〈도광선사에게 붙임(寄韜光禪師)〉에 나왔던 선림의 명구다. 백거이는 이 시에서 이렇게 읊조렸다. 동쪽 계곡물이 흐르니 서쪽 계곡에 물이 불어나고, 번뇌가 들끓는 평범한 세속 세계로 깊숙이 들어가 번뇌 속에서 보리를 증득하는 ‘번뇌가 곧 보리’인 도리를 시화한 것이다. 선은 평등과 차별을 하나로 통일, 각기 둘로 구분되는 분별의 세계를 초월하는 사사무애의 법계를 통해 오탁과 고통 중에서 생명의 영성(靈性) 승화를 획득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자연 산수에서 진여를 감오하는 데는 화려한 꽃이나 아름다운 풍경만이 아니라 똥막대기·대소변 같은 오물도 똑같은 자성의 현현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부처란 마른 똥막대기(똥덩어리)’라는 세속의 사유체계를 뛰어넘은 초불월조(超佛越祖)의 법문이 나오는 것이다. 차별과 평등이라는 분별의식을 다 던져버린 초절대(超絶對)의 공령(空靈)한 경계에서는 밥먹고 옷입는 일, 대소변 보는 일과 같은 일상생활 모두가 수행의 중요 덕목이며 잠자고 일하는 일상이 곧 수행시간이 된다. “후일 동산의 종지를 물으면 어찌 답을 할까요?” 운문종 동산효총(洞山曉聰, ?∼1030) 선사와 한 학인의 선문답이다. 한마디로 평상의 일용사가 곧 진리라는 얘기다. “흰 구름 걷히면 밝은 달을 보고, 낙엽 지면 겨울 옷 다듬이질 하는 소리를 듣는 일상의 삶”이 곧 불법 진리를 따라 사는 적의인생(適意人生)인 것이다. 운문은 “옷입고 밥먹고 대소변 보는 일을 제외하고는 별달리 기특한 일이 없다. 이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구함은 망상이고 부처를 져버리는 일이다.”라고 설파했다. 오도의 경계에서는 비 오니 강물 불어나고, 바람 부니 나무 흔들리는 게 바로 부처(佛)고 법(法)이다. 운문종은 성경(聖境)을 내던지고 그 방하(放下)조차도 또 다시 버려 방하했다는 생각의 흔적조차도 남아 있지 않은 부주열반(不住涅槃)의 경계를 지향한다. 이것이 바로 6조 혜능대사가 설파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경지다. 운문종의 시가들은 무사(無事) 충만의 법열을 느끼는 오심(悟心)조차도 자연스럽게 없어지고 오직 순수하게 천운(天運)을 따를 뿐인 자재한 득도자의 심경을 읊조린다. 선사들은 본심의 편재성과 자족성(自足性)을 강조하거나 ‘일체현성’의 본래면목을 들어 보일 때 9×9=81, 6×6=36과 같은 곱셈법을 곧잘 사용한다. 운문은 “무엇이 최초의 한마디(불법 진리)냐”는 질문을 받고 “구구는 팔십일이다.”고 대답했다. 이 같은 불변의 진리인 곱셈법은 “조작과 수식의 오염이 없는 본래면목, 즉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원래의 벌거숭이 상태인 참모습(原眞態)”3)를 뜻한다. 운문종에는 체용불이(體用不二), 주객혼연 등을 드러내 보이는 기특한 표현이 많다. 운문은 “쌀가마가 사람을 지고 간다” “사람이 찻잎을 따는데 찻잎이 사람을 딴다” “사람이 밥을 먹는데 밥이 사람을 먹는다”는 설법으로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완전 소멸시킨 혼연일체의 원융경(圓融境)을 펼쳐 보인다. 평생을 취중에 살면서 취중에 분별심을 없앴다. 깨고 난 지금은 어떠냐 하면 버드나무 늘어진 언덕의 아침 바람이고 지다 남은 달이다. 깨침과 미망이라는 분별심을 없앤 미오일여(迷悟一如)의 경계다. 일체의 사념을 놓아버린 취중의 무분별심과 산수에서 진여를 직관하는 물아양망의 감오는 같은 것이다. 운문은 학인들의 질문에 “드러내라(露)” “해골(쩩)” “넓다(普)”와 같은 한 글자로 망상과 정식을 일거에 부수고 언어를 초월한 본심의 철견으로 이끌었다. 이른바 운문의 유명한 ‘일자관(一字關)’인데 간단명료한 문풍을 잘 드러내 보인 기량이다. 그는 “부처를 죽인 자는 어데서 참회를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로(露)’라고 대답, 논리를 따지는 사변적인 지식을 차단하고 그만한 경지면 큰 길로 나가 중생을 제도하라고 했다. 덕산·임제와 함께 ‘살불살조’를 외친 가불매조(呵佛罵祖)의 3대 명수인 운문은 “무엇이 취모검(반야지혜)이냐”는 질문에 ‘격(쩩)’이라고 대답, 한 칼에 목이 잘려 피가 뚝뚝 떨어지는 해골로서 단칼에 번뇌를 쳐내는 절단중류의 가풍을 드러냈다. “운거는 선을 모른다. 오직 발을 닦고 침상에 올라 잠을 잘 뿐이다. 동아(冬瓜 : 긴 호박의 일종)는 곧고 표주박은 꾸불꾸불하다.” 대도는 없는 곳이 없이 온 우주에 가득 차 있다. 선도 평범한 일상 속에 들어 있다. 공연히 성스럽다느니, 고귀하다느니 하면서 우상화해 놓고 미련을 갖는 것은 망상이다. 운문종은 산수의 진여성을 시가를 통해 보다 구체화하고 형상화한다. 운문종의 시선감오(詩禪感悟)는 일용시도(日用是道)와 수월상망(水月相忘), 의로(意路)단절 등을 통해 본래면목을 되찾게 하는 접인에서 보여주는 수연적성(隨緣適性)의 미감이 그 특징이다. 이 같은 미감은 선림의 시가에 풍요한 정신적 재원을 제공했다. 6. 법안종 선시 법안종(法眼宗)은 선종 5가 중 가장 늦게 개산한 종파이다. 청량문익(淸凉文益, 885∼985)이 창종한 법안종은 오대의 남당(南唐) 주군 이경이 문익에게 ‘법안선사’라는 시호를 내린 데서 종파 이름이 유래했다. 법안종의 종안(宗眼)은 진여 본체의 편재성에 강조점을 두고 눈앞의 일체 자연 현상에서 당하(當下)에 진여를 느끼고 깨달아 본체로 회귀할 것을 촉구하는 “현성(現成)”4)이다. 법안문익 선사가 창도한 일체현성은 “유식관과 이사론(理事論)”5)에 기초하고 있는 법안종의 핵심 선지(禪旨)다. 따라서 법안종의 시선감오도 종요(宗要)인 ‘일체현성’이 주류를 이룬다. 법안종은 능엄삼매·금강반야·능가유식·원각요의·유마불이·화엄법계 사상 등과 같은 교학의 가르침을 광범하게 흡수해 제3세 법맥인 영명연수(永明延壽) 선사에 이르러 선교융합의 선지를 정립했다. 결과적으로는 교종과 구분되는 선종의 특색을 상실하는 자기 모순을 초래, 존립 기반이 흔들리고 미감 넘치는 법안종의 시선감오도 단명으로 종막을 내리고 말았다. 종풍은 운문종의 간명함과 조동종의 세밀함을 아우르고 있으며 학인을 대하는 접화언구는 평범하다. 종요의 핵심은 반야무지(般若無知)를 초석으로 한 ‘문성오도(聞聲悟道) 견색명심(見色明心)’으로 개괄된다. 반야무지는 법안종 선시 색상에 짙게 배어 있는 특징적인 컬러이기도 하다. 승조의 《반야무지론》을 그대로 수용한 법안종의 반야무지(般若無知)는 한마디로 신비적인 직관을 말한다. ‘무지’는 일체를 하나로 꿰뚫어 통찰함으로서 알지 못하는 게 없는 ‘무소부지(無所不知)’의 지혜다. 논리적 사유와 추리작용, 주객을 가르는 분석 등에 의해 습득되는 편면적인 세속의 지식·지해(知解)와는 전혀 다른 전체적이고 통일적인 지혜가 반야무지다. 무소부지의 지혜가 관조하는 대상은 구체적 객관 사물이 아니라 무상(無相)의 진제(眞諦)다. 이같은 관조는 감각적 사유나 언어문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속의 지식이 갖는 편면성을 초월한 대전(大全)의 지식인 ‘일체지(一切知)’라는 ‘무지의 지’는 늘 허정의 심경을 유지하고 예민한 통찰력을 가짐으로써 세속의 지식이 전개하는 인식활동과는 다른 신비한 직각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직관에 바탕한 ‘촉목보리(觸目菩提)’ ‘직각의상(直覺意象)’은 법안종 선시가 가지고 있는 미감의 특징이기도 하다. 사량계교(思量計較)를 통해 얻는 세속의 지식은 부분적이고 유한적이며, 불연속적이지만 반야무지는 전체적이고 무한적이며, 연속적이다. 세속적인 지견(知見)을 깨끗이 제거해 버리면 외재적 자연 산수는 관조의 주체에게 더 이상 색상(色相)이 아니라 관조자의 아름다운 내재적 불성이 된다. 이것이 바로 촉목보리라는 직각이다. “어떤 것이 연수 선법의 묘처(妙處)입니까?” 연수 선사와 한 학인의 선문답이다. 연수가 주석했던 절강성 항주 정자사 앞에는 지금도 관광명소로 유명한 서호가 있다. 연수가 말한 ‘호수’는 청정무염의 자성을, ‘바람’은 번뇌망상이 들끊는 마음의 동요를 각각 상징한다. 사물을 비교 분석하고 상대적으로 구분하는 세속 지해가 발동해 번뇌망상의 바람을 일으키면 자성이라는 호수면은 평정을 잃고 파도하게 된다. 세속지(世俗知)와 관조 주체의 신념의식을 제거하고 눈앞의 사물을 통찰하면 보고 듣는 것 모두가 자성(불성)의 유로(流露) 아님이 없는 촉목보리가 된다. 이것이 바로 ‘색즉시공’의 견색명심이다. 색상을 버리고 사물을 관조하는 데서 곧바로 깨치는 촉목보리는 법안종 선시의 중요한 미감적 특색이기도 하다. “삼라만상이 선재동자의 종사(宗師)요, 삼업(三業)과 미혹이 보현보살의 경계다.” 도항(道恒) 선사의 법문이다. 법안종 선사들은 사량계교와 추론적 사유는 진제를 져버리는 ‘패륜’이라고 단언한다. 의념(意念)으로 보는 사물의 색(色)과 상(相)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눈에 들어오는 것 모두가 보리 아님이 없고 산수자연이 모두 불성의 현현이라는 설법이다. 법안종 2세인 천태덕소(天台德韶) 선사는 “산하대지가 진짜 선지식으로 늘 법문을 하고 있고 시시각각 사람을 제도한다.”고 설파했고, 본선(本先) 선사는 “깊은 산 속의 새 우는 소리, 계곡 물에서 뛰노는 물고기, 하늘을 흘러가는 조각구름, 폭포 떨어지는 소리가 네가 득도를 위해 들어가야 할 곳이 아니냐.”고 일깨워 주었다. “어떤 것이 부처의 마음입니까?” 법안종 혜달(慧達) 선사와 한 학인의 선문답이다. 자연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 있는 진여를 보라는 얘기다. 무정물(無情物)도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불법 진리를 설하고 있다는 법안종의 ‘무정설법’은 자연 산수야말로 여법한 진여라고 거듭 강조한다. 시인, 묵객들도 청산녹수가 펼쳐 보이는 산수 진여를 귀히 여겨 빈번히 읊조린다. 청산은 붓을 들어 그린 그림이 아니어도 천추에 뛰어난 그림이요, 시인, 묵객들이 자연 산수에서 느끼는 시정화의(詩情畵意)와 선승들이 산수를 관조하면서 감오하는 깨침은 다 같이 물아일여(物我一如)와 직관을 필요충분 조건으로 한다. 선경(禪境)과 시경(詩境)이 산수 진여를 관조하는 목적과 방법은 일치한다. 깊은 숲속 새들의 지저귐이 생황의 연주소리요, 법안문익의 선시다. 선승도, 시인도 물아일여의 심경으로 산수 진여를 직관하면서 마음에 깊히 느끼어 깨달으면 오도를 증득하고 예술적 영감을 얻게 된다. 예술의 영감과 선의 돈오는 다 같이 신비스러운 직관이다. 법안이 지장계침(地藏桂琛) 선사의 인도로 오도할 때의 이야기다. 법안이 지장원에 묵다가 행각의 여로를 떠나자 계침 선사는 앞마당까지 나와 전송을 했다. 이때 계침은 그에게 정원의 큰 돌을 가리키면서 “저 돌이 네 마음 속에 있느냐, 아니면 네 마음 밖에 있느냐.”고 물었다. 법안은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을 강조하는 유식학에 달통해 있었지만 오도하지 못한 채 헤매다가 계침이 몰아 넣은 이같은 사유의 함정에 빠져 헤매다가 돌연 깨쳤다. 계침은 이 질문을 통해 ‘안’과 ‘밖’이라는 대립개념을 제시해 견성을 가로막는 사변적 지식을 부정한다. 즉 ‘무(無)’에도 ‘유(有)’에도 떨어지지 않는 게 명심견성이라는 가르침이다. 이것이 ‘중도(中道)가 곧 부처’라는 도리다. 마음 안과 마음 밖으로 나누는 내외 구별은 논리적, 지성적 사변이 가지고 있는 함정이며 모순이다. 여기서 ‘심내(心內)다’ ‘심외(心外)다’ 하는 대답은 모두 한쪽 편면만 본 것이 되고 만다. 계침은 승조(僧肇) 대사가 “만물은 나와 한 뿌리(萬物與我同根)”라고 설파한 일원론을 “산하대지와 자기는 동일하다”는 말로 번안해 시중(示衆)했다. 법안은 후일 한 속인 선비가 그림을 선물하자 받고 나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쇄구결은 불법 진리는 심의식(心意識)의 경계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지성적인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설법이다. “어떤 것이 분명한 한마디입니까?” 법안종 선지식들은 시의(詩意) 넘치는 한마디 쇄구결로 분별심을 차단해 텅 비고 고요한 심령으로 이끌어 주는 예리하고 통쾌한 기봉(機鋒)을 멋지게 휘두른다. 법안종의 ‘본래현성’에 기초한 ‘일체현성(一切現成)’ 종풍은 법안종 선시의 일용시도(日用是道)와 범성일여(凡聖一如)·이사원융(理事圓融)·삼계유심(三界唯心)의 미감적 특징을 북돋우는 영양소다. 법안에게 개오의 문을 열어준 계침 선사의 가르침에 나오는 정원의 돌은 지연으로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고, 일체처에 있다. 심내, 심외라는 양변에 집착하는 것은 모두가 편견이다. 처처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만난다. 신조본여(神照本如) 선사의 개오시다(《오등회원》 권6). 각자가 모두 다 가지고 있는 불성은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는 구족한 천부적인 인간의 각성(覺性)이라는 얘기다. 법안종의 ‘일체현성’ 종요는 본여 선사의 본래현성을 계승한 선요(禪要)다. 다만 일체현성은 진여 본체의 편재성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데 비해 본래현성은 선적 깨달음의 주체가 가지고 있는 불성의 원본 구족에 강조점을 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불성은 본래부터 완성품이기 때문에 오직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돈오가 필요할 뿐, 사량계교로는 불성에의 도달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현성’은 조작된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 이루어진 것, 타고난 것이라는 뜻인데, 흔히 선이 말하는 무위법(無爲法)·무사(無事)와 같은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법안종 징식(澄湜) 선사와 한 학인의 선문답이다. 중생이 곧 부처라는 가르침이다. 혜초(慧超) 스님으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은 법안은 “네가 바로 혜초다”라고 대답, 개개인 모두가 부처님을 일깨웠다. ‘번뇌가 곧 보리’고 ‘중생이 곧 부처’임을 깨닫는 관건은 수연임운(隨緣任運) 하는 가운데서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모두 소멸시키고 현성 세계의 평범한 사물들에서 영원한 진리를 발견, 감수하는 즉물즉진(卽物卽眞)이다. 이것이 바로 승조가 강조한 ‘현실 세계의 번뇌를 떠나지 않고 보리열반을 증득해야 한다’는 반야무지론의 실천구조다. 한편 법안종 선시들의 생생한 실생활적 감오는 독자들이 푸근한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는 시정(詩情)을 만끽하게 했다. 사물로 변신한 법신이 만상 가운데 또렷이 나타나 있기 때문에 만상은 결코 부정되지 않는다. 법신과 만상은 둘로 나누어 파악할 수도, 만상을 떠나 법신을 파악할 수도 없다는 견색명심(見色明心)의 ‘색’은 자연산수의 색뿐만 아니라 ‘여색(女色)’까지도 포함한다. 분별심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여색도 마음을 밝히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6)는 것이다. 7. 양기종 선시 양기방회(楊岐方會, 996∼1049) 선사를 개산조로 하는 임제종 양기파는 송대 이후 임제종을 대표해온 선종 종파다. 따라서 송대 이후의 임제종은 그 이름이 ‘양기종(楊岐宗)’으로 바뀌었던 셈이다. “어떤 것이 양기의 깨친 바 경계인가?” 양기와 한 학인의 문답이다. 독송음풍(獨松吟風), 원숭이 울음이 다 마하반야를 설하고 있다는 얘기다. 심성이 맑은 자만이 이에 감응할 수 있다는 일깨움을 함축하고 있는 법문이다. 과연 양기의 경계는 ‘시정화의(詩情畵意)’가 충만한 시적인 경지다. “어떤 것이 경계 중에 있는 사람(깨달은 사람)입니까?” 역시 양기와 한 학인의 선문답이다. 가난한 아가씨는 산에 가서 산나물과 산과일을 따고, 목동은 풀과 물이 풍성한 초원에서 방목을 하는 게 본분사(本分事)다. 양기의 대답은 빈녀(貧女)와 목동이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평범한 일상을 빌어 인성(人性) 회귀를 촉구한다. 양기는 나물 캐고 방목하는 흔한 일용을 철리화(哲理化), 선오화(禪悟化)한 시구로 학인을 일깨운다. 불성이니, 자성이니 하는 철리는 바로 일상생활 가운데서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는 인성에 다름 아니다. 양기종 선시의 시어(詩語)들은 하나같이 형상을 갖추고, 생동감이 넘치며, 함축적이고, 다의적(多意的)인 게 특징이다. 원오는 ‘춘색’이라는 평등(부처)을 통해 상대적 대립 개념(분별심)의 산물인 장단을 깨부수고, 대혜는 ‘술’을 통해 자타라는 이원적 대립을 초월했다. 번뇌망상을 일으키는 분별심의 근원인 이원적 대립 개념을 뛰어넘는 철학적 사변을 춘색과 나뭇가지, 이가와 장가의 취기 같은 생동감 넘치는 구체적 형상으로 쉽게 설파하고 있다. 거기에다 운치 있는 시정(詩情)까지 곁들이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선이 절대 금기시하는 사유체계인 상대적 대립 개념에 대한 멋진 초월이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천하의 사람들을 다 밟아 죽였다는 격찬을 받은 양기의 유명한 ‘세 발 당나귀(三脚驢子)’라는 화두다. ‘삼각려자’는 깨달음의 신성한 경계를 상징한다. 깨치지 못한 사람은 그 당나귀를 탈 수가 없다. 실제로 세 발 나귀는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 속엔 없다. 그래서 세 발 나귀는 이성의 초월, 세속에는 없는 ‘공(空)’을 상징한다. 양기는 색깔도 모양도 없는 공을 세 발 나귀로 형상화했다. 재치 문답의 개그 같은 ‘세 발 나귀’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도, 보이지도 않는 전혀 무의미한 무의지(無意旨)고 비지성적인 넌센스다. 그러나 지성(이성)을 초월해 존재하는 세 발 나귀가 걸어가면서 발자국을 남기는 것은 공(空)과 유(有)가 하나로 통일된 평등일여의 세계다. 남북·춘추·희비·동정이 대립하지 않고 원융일체가 되는 이런 세계는 세 발 나귀라는 깨달음의 경계가 아니고는 만들어내지 못한다. 양기는 ‘세 발 나귀’라는 예술 형상으로 구체화한 반야검을 이용, 상대적인 대립 의식을 단칼에 목자르고 대사(大死) 후의 부활로 이끈다. 부활한 생명은 영원하다. 지극한 음악은 음율이 없고 기묘한 곡은 소리가 아니다.(至音絶韻 妙曲非聲) 용문청원(龍門淸遠) 선사의 설법이다. ‘묘곡’은 세속적인 5음 6율의 밖에 있고 ‘지음’은 세속적 구분인 5음 6율의 속박을 받지 않는 절대일여의 경계라는 얘기다. 즉 선은 언어문자를 초월해 있다는 암시다. 선사들은 선이란 말로 설명될 수 없다는 ‘선불가설(禪不可說)’을 설파할 때 “수미산 정상에 파도 일고 바다 밑에서 불꽃이 타오른다.”는 역설(逆說)을 흔히 동원한다. 선은 초논리, 초지성의 영역이라는 얘기다. 선적인 깨침의 경지는 오직 마음과 사물(心法), 주관과 객관(能所)를 모두 버리고 오직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직각적 방법에 의해서만 그 실체 파악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선은 언어문자의 공부가 아니라 직관 훈련이다. “유구(有句)와 무구(無句)의 관계는 등나무 넝쿨이 나무에 의지해 뻗어 있다고 하는데 그 뜻이 무엇입니까?” 지우 선사와 한 학인의 선문답이다. 선과 언어문자의 관계를 물은 질문에 대한 지우의 답은 당 시인 우량리의 〈춘산야월(春山夜月)〉에 나오는 시구를 인용, 언어로는 절대 선의 본체에 도달할 수 없음을 설파하고 있다. 물 속의 달을 아무리 꼭 움켜쥐어 봐도 달은 손안에 들어오지 않고 꽃향기 역시 옷을 적시지만 손안에 넣을 순 없다. 달과 꽃향기라는 선의 요체는 손(언어문자)이라는 도구로는 움켜쥘 수가 없다. 양기종 선요(禪要)의 최대 강조점은 현실 생활과 수행 생활을 분리하지 않는 정예불이(淨穢不二)·미오일체(迷悟一體)의 진망화합 구조에 바탕을 둔 생활불교다. 양기종은 임제의 ‘입처개진(立處皆眞)’ 선지를 계승, 철저한 현실생활의 중시와 실천불교를 거듭 강조하면서 실제 생활 가운데서의 성불을 요구했다. 마음과 정신이 안정되고 통일되면 시끄러운 시장바닥에 살더라도 심산유곡의 편안하고 고요함과 같다는 설법이다. 백운수단(白雲守端) 선사는 “눈썹은 바로 눈 위에 있다(眉毛在眼上).”고 설파, 진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일상 속에 있음을 일깨웠다. 그러나 우리는 눈이 눈썹을 보지 못하듯이 가까운 곳에 편재한 진리를 보지 못한다. 공자도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가까이에 있다고 설파했다. 진망불이(眞妄不二)를 설파한 법문으로는 오조법연(五祖法演) 선사의 〈천녀이온(?女離魂)〉(《무문관》 35칙)이라는 유명한 화두가 있다. 남쪽으로 뻗은 매화나무 가지는 꽃이 일찍 피고 북쪽으로 뻗은 가지는 꽃이 늦게 핀다. 그러나 뿌리는 하나다. ‘일찍’과 ‘늦게’라는 현상계의 구분은 생명의 근원인 뿌리로 돌아가면 두 개의 구분이 없고 오직 하나뿐이다. 일찍이 승조 대사는 “진여 불성은 현실 세계를 떠나 있지 않으며 만법 존재는 진실한 본성의 체현처(體現處)다.”라고 설파했다. 6조 혜능 조사의 설법집인 《단경》의 출현이 가지는 중요한 의의 중의 하나도 현실 생활과 불교 이상의 통일이다. 원오 스님은 “불법은 곧 세속법이며 세속법이 곧 불법(佛法卽是世法 世法卽是佛法)”이라고 번안, 세속 생활과 불가 생활이 각기 다른 둘이 아님을 설파했다. 종고 스님은 선학과 사대부의 거사 불교를 결합시켜 유가의 입세(立世)주의와 선가의 제도(濟度)정신을 함축한 선불교를 지향했다. 양기종은 현실 생활을 직지, 만법 존재의 ‘일체현성’을 통합하고 수연임운(隨緣任運)하는 삶을 수행과 해탈의 원칙으로 하고 있다. 백운수단 선사는 전래의 4홍서원을 ① 배고프면 밥을 먹고(饑來要喫飯), ② 추우면 옷을 껴입고(寒到卽添衣), ③ 졸리면 다리를 뻗고 잠자고(困時伸脚睡), ④ 더우면 바람을 쏘인다(熱處愛風吹)로 대체해 제시했다. 현실 생활을 직지한 명언이다. 백운수단은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을 외치며 심혈을 기울여 찾고 탐구하는 선도(禪道)를 집착을 일으키는 일체의 사려가 없는 현실 생활로 대체했다. 법연 스님은 “눈은 옆으로 찢어져 있고 코는 수직으로 붙어 있다(眼橫鼻直)”는 말로 일체의 사유적인 가르침이 필요 없는 자연스럽고 원진적(原眞的)인 일체현성을 일깨웠다. 문제는 ‘안횡비직’이라는 사실을 즉각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는 또 “산중을 걷는 사람 스스로 평상심이니 험로이지만 마음이 편안하다(山中人自正 險路心亦平)”라고 읊조렸다. 캄캄한 밤 험산의 낭떠러지 길을 걷는다. 만개한 산꽃들의 향기가 진동하고 병풍처럼 둘러친 흰 바위 절경이 시선을 끈다. 산 경치에 미혹돼 눈을 팔다가 추락한다. 이럴 때 한번 곁눈질로 보고는 그러려니 하는 평상심으로 묵묵히 걸으면 그 평상심이라는 마음의 달빛이 환히 비추어 주어 험로를 안전하게 주파할 수 있다. 물론 걸음을 정지하고 감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지는 곧 죽음이다. 평형의 심리상태를 유지한 평상심으로 티끌과 먼지 덮인 세속을 살면서 그 오탁악세에 결코 물들지 않는 게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의 실천구조다. 지금까지는 운률을 뽐내고 풍류를 아껴오면서, 사람들이 밖에서 진리를 찾고자 함을 여러 번 조소했다. 그는 코를 막는 순간 분뇨 냄새가 없어지자 정예불이를 깨쳐 천차만별의 차별상을 모두 해소하고 깨끗함과 더러움이 하나로 통일된 원융한 경지의 일체현성을 감오했던 것이다. 양기종은 만법이 다 진실한 본성을 체현하고 있는 입처즉진(立處卽眞)의 선리를 설파하는 데 은밀한 남녀간의 정감 어린 애정을 묘사한 염정시(艶情詩)를 곧잘 활용한다. 남녀간의 애정도 만법의 하나고 진실한 본성의 체현이라는 것이다. 원오 스님은 개오시에서 ‘청춘 소녀의 아름다움 추구’를 선자의 본심 회귀 열망에 비유한 유명한 일구를 남겼다. 양기종은 인간의 본심·본성을 ‘한 뙈기의 밭(一片田地)’으로 비유한다. 임제종 선시의 환향·귀가는 생명의 원천인 본래면목으로 돌아가는 전형적인 비유적 상징이다. 반본환원(返本還源)은 적회(寂灰 : 죽음)에로의 귀향이 아니라 참신한 선적 깨달음에서 얻은 새 생명으로의 귀환이다. 양기종 선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입처즉진의 자신감을 수립한 선자로서 저잣거리를 누비면서 화광동진(和光同塵)하는 선풍과 맥락을 같이 한 생동감 넘치는 시취(詩趣)다. 양기종 선인들은 깊은 시학 소양을 갖추고 접기(接機) 설법이나 공안 거량에 고전 시사(詩詞)의 명구나 자신의 시어를 동원, 시선일여의 접화경(接化境)을 펼친다. 양기종이 특히 강조하는 이원적 대립 개념의 초월과 주체적 자신감, 일체현성의 촉목보리·입처즉진은 중국 선학사와 시학사의 찬란한 한 페이지로 남아 오늘에까지도 많은 선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8. 황룡종 선시 황룡혜남(黃龍慧南, 1002∼1069) 선사가 개산한 임제종 황룡파는 시흥 넘치는 선승과 거사가 기라성같이 나열해 있다. 회당조심(晦堂祖心)·동림상총(洞林常總)·진정극문·도솔종열(兜率從悅)·별봉조진(別峰祖珍)·각범혜홍(覺範慧洪)·청원유신(靑原惟信)·보은법상(保恩法常) 선사 등과 소동파(蘇東坡)·황산곡(黃山谷)·장상영(張商永) 거사 등의 번뜩이는 문재와 시학 소양은 시학사에도 찬란한 금자탑을 남겼다. 혜홍(慧洪) 스님의 문집인 《냉재야화(冷齋夜話)》(10권)는 엄우(嚴羽)의 《창랑시화(滄浪詩話)》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시선 교류의 고전이며 소·황은 당송 8대가에 속하는 송대의 걸출한 시인들이다. 황산곡은 여본중(呂本中)과 함께 자연산수에서 느낀 감오를 중시하는 ‘강서시파(江西詩派)’라는 선시 시단을 형성, 선과 시가 어우러진 탁월한 ‘인격 정신’을 제시했다. 산곡의 인격정신은 이미 도신·홍인·혜능 조사와 백장 선사 등에서 보여진 바 있는 일상생활 중에서 자성 심지(心地)가 일대의 광명을 발하는 초탈 자심(自心)을 말한다. 이게 바로 선경(禪境)이다. 선경이란 정욕(情欲)이 그친 심리 상태를 말한다. 황룡종 시선 감오의 두드러진 특징은 ‘황룡종 3요 묘지’에서 비롯하는 용맹 분방한 기질과 전고(典故)의 창조적 운용, 구중궁궐의 궁녀가 품은 연정을 선리와 상통시킨 염정우화(艶情寓話) 등을 통한 ‘물 속의 소금 맛’ 같은 미감이다. 회당조심은 “사자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다 남긴 고기를 결코 먹지 않으며, 독수리는 죽은 토끼를 낚아채지 않는다(獅子不食彫殘 快鷹不打死兎).”는 설법으로 학인들의 자신감과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웅맹분방한 기개를 찬양했다. 이 같은 분망한 기질은 황룡종 선시에 취의(醉意)와 광태를 유발시켰다. 황룡종의 분방함과 호방함은 마침내 심문분(心聞賁) 선사에 이르러 세 가지 예술 비평을 통해 3대 묘지의 선요를 개방함으로써 그 결정판을 내놓았다. ‘3요 묘지’의 제1요(要)는 ‘이백의 시가(李白詩歌)’고, 제2요는 ‘공손의 검무(公孫劍舞)’, 제3요는 ‘장전의 초서(張顚草書)’다. 시선 이백의 분방한 시가와 공손의 혼을 빼는 검무, 장전의 신비한 초서는 성당(盛唐) 시기의 시가·무용·서법이다. 심문 선사는 이백의 격정과 공손의 하늘 높이 뛰어오르는 기세, 장전의 날으는 듯한 신운(神韻)을 황룡종 선요의 세 가지 요점과 비교해 평했던 것이다. 3요 묘지가 추구하는 정신적 지향점은 참선자의 무한한 주체성 개척에 있다. 광무는 참 생명의 분발을 촉구하고 있다. 한 칼에 8만4천 대군을 소탕하듯 정식(情識)과 더러운 먼지로 뒤덮인 의식을 완전 소탕해야만 본래의 청정한 평상심을 계속 지켜 나갈 수 있다. 평상심이 보지(保持)되면 신부는 당나귀를 타고 노파는 나귀 고삐를 끌 때처럼 신부와 노파라는 분별심이 없어진 순진 무구한 선경의 정상에 도달한다. 9월 9일 중양절에는 무엇이 불성의 의미를 드러내는 현현일까? 죽엽과 사람에 이미 분별이 있을 수 없으니, 국화꽃도 이를 따라 피지 못하는구나. 별봉조진 선사의 시법이다. ‘죽엽’ 이하의 두 구는 두보의 시 〈구일(九日)〉에서 인용한 것이다. ‘죽엽’은 맛 좋은 미주를 가리킨다. 당시 두보는 병환으로 음주가 불가능해 이미 술을 마시지 못하는 가운데서 담담한 국화 감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술을 마시며 국화를 감상하던 지난날의 풍류를 아쉬워하는 두보는 ‘내가 술을 마시지 못하니 국화도 따라서 꽃을 피우지 못한다’는 희화적이고 해학적인 구기(口氣)를 농하고 있다. 조진은 이 시법에서 두보의 시를 빌어 불성은 결코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현실 인간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리(禪理)를 설파한다. 인간이 아픈 게 곧 부처의 아픔이다. 회당조심과 진정극문·감당문준·별봉조진 선사 등은 황룡종 고전 인용의 명수였다. 선리 설파에 이같이 고전 시사(詩詞)를 끌어들인 전고의 창조적 운용은 황룡종 선시의 예술적 표현력을 풍부하게 했고 의취(義趣) 심원한 설법의 예술적 매력을 한층 드높였다. 고전 시사의 신비롭고 고상한 운치는 백화난만한 춘색 같은 예술적 효과를 냈다. 황룡종 선자들의 전고는 물 속의 소금 맛 같은 짜릿한 미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선의 심미정취는 영정(寧靜)·쾌담(恬淡)·몽롱(朦朧)·유원(悠遠)·공령(空靈)으로 요약된다. 황룡종은 이같은 선의 심미 정취를 그려내는 의상으로 늦은 봄·잔화(殘花)·두견새·늦가을·서풍·낙엽·세모·풍설·유랑자·기러기 등을 활용한다. 봄은 이미 저물어 꽃잎이 흩날리는 가운데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마치 꽃잎의 붉은 비에 비쳐 마치 붉은 비가 내리는 듯하구나. 남북을 오가는 사람들 어떤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어떤 사람은 돌아가지 않는데, 범경(梵卿) 선사의 게송이다. 시정 넘치는 법문이다. 늦은 봄 지는 꽃잎이 비오듯 떨어지고 두견새는 피를 토하며 울어대는데 학인들은 도를 닦는 답시고 동서남북 유랑행각이 분주하다. 늦봄 낙화라는 자연 경관은 시인의 생명과 연계돼 이질동구(異質同構)의 의경을 보여주면서 선자는 모름지기 맑고 평안하며 고요한 본래면목(고향)으로 되돌아가는 반조를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함축하고 있다. “마음이 미혹하면 법화에 굴림을 당하고 마음을 깨치면 법화를 굴린다는 뜻이 뭡니까?” 혜천(惠泉) 선사와 한 학인의 선문답이다. 혜천의 답은 한 편의 시다. 혜천의 대답은 당 두순학의 〈춘궁원(春宮怨)〉의 명구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혜천은 봄날의 풍광을 빌어 미오와 깨달음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사랑하는 애인과 생이별하고 궁중으로 들어간 궁녀는 구중궁궐에 갇혀 성은도 입지 못한 채 깊은 원망과 한 많은 비정의 나날을 보낸다. 새 울고 꽃피는 화사한 봄날이 와도 그 경관을 기꺼이 감상하지 못하고 ‘님’생각에 더욱 마음 아파하면서 구중궁궐이 그저 원망스럽기만 하다. 마음에 득실을 따지는 공리적 계산을 담고서 눈앞의 사물을 보면 곧 미오가 된다. 경전에 굴림을 당해 현전(現前)의 아름다운 경치를 제대로 감수치 못한다면 마치 한 많은 궁녀의 봄날 유원(幽怨)이나 다름 없다. 득실의 망념을 벗어나 눈앞의 대상에 기꺼이 감응하면 두두물물이 진리고 현전한 경관 가운데서 유열과 쾌락을 느낄 수 있다는 법문이다. 황룡종 선시에는 산거(山居)와 목우를 등장시켜 어떠한 구속도 없는 자유를 누리는 도인을 나타내는 의취가 풍미한다. 높은 산꼭대기의 한 칸 초옥, 지지(志芝) 선사의 게송이다. 노승의 산꼭대기 초옥에는 찾아오는 사람 없고 오직 흰 구름만 때때로 오간다. 지난 밤 급히 몰아치고 간 풍우는 산의 푸르름을 더해 주었지만 풍우가 보여준 바쁜 쾌질의 속도가 감히 어찌 노승의 느릿한 한가로움과 자적보다 값지다 할 수 있겠는가. 황룡종 선시는 일용시도(日用是道)보다 촉목보리의 감오를 중시한다. ‘일용시도’는 일상생활 중의 감오에 중점을 두지만 촉목보리는 자연산수에서 느끼는 감오에 중점을 둔다. 황산곡의 개오 이야기를 보자. 그가 회당조심 선사를 찾아와 선법의 요체를 묻자 회당은 “내 자네한테 숨긴 게 없다.”고 가르쳐 주었다. 산곡은 나름으로 이해한 회당의 가르침을 여러 번 설명해 보려 했으나 매번 입을 열기만 하면 “그게 아니다.”라고 꾸짖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산곡이 스님을 따라 산행을 하면서 시봉 노릇을 했다. 마침 물푸레나무 꽃이 만개해 그 향기가 온 계곡을 꽉 채우고 있었다. 이때 회당이 산곡에게 물었다. “물푸레나무 꽃향기가 나지 않느냐?” 진여 법성으로서의 자연산수는 모든 사람의 면전에 명명백백히 나타나 있다. 회당은 산곡에게 말한다. 일출·운산(雲散)·화소(花笑)·새들의 울음·가을 산·낙엽·푸른 하늘·보름달·푸른 대나무·노란 꽃 등등 어느 하나 내가 너한테 숨긴 게 없지 않느냐고. 장구성(張九成) 거사의 은사인 도솔종영 선사는 자연에서 감오한 동정일여의 촉목보리를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그림자가 계단을 쓸어내지만 계단의 먼지는 전혀 움직임이 없다. 선사들의 생사 심미관을 대표하는 ‘안영한담(雁影寒潭)’도 자연에서 감오하는 촉목보리다. 기러기 날아갈 때 강물에 그림자 비친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기러기가 날아가 버리면 없어진다. 이때 강물은 기러기 그림자를 더 이상 붙잡아 두려하지 않는다. 기러기 또한 강물에 그림자 드리울 생각 전혀 없다. 그저 날아가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생사도 이 같은 수월상망(水月相忘)의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면 쉽게 초월할 수가 있다. 계곡물 소리가 모두 부처님의 8만4천 법문인데, 소동파가 동림상총 선사로부터 받은 ‘무정설법(無情說法)’ 화두를 참구하던 중 여산 폭포 앞을 지나다가 폭포 소리를 듣고 깨친 후 읊조린 〈계성산색(溪聲山色)〉이라는 개오시다. 역시 자연에서 진여 법성을 감오하는 촉목보리다. 황룡종의 거물 거사로 재상까지 지내고 나름의 선사상을 정립해 가지고 있던 도솔종열 선사의 제자 장상영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선사상은 세간과 출세간을 회통하는 선불교의 실천으로 유교와 불교의 통일을 주장했다. 유신의 ‘견수 3계단’은 황룡종뿐만 아니라 남종선의 독특한 심미 감오를 드러낸 선종 미학의 명구로 널리 인용되고 있다. 그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가 갖는 뚜렷한 세 가지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9. 결어 선종의 인식방법인 ‘이물관물(以物觀物)’은 시학 발전, 특히 심미감을 심화시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초지성·초공리(超功利)·무의식 상태서 자아를 물화(物化)시키는 ‘이물관물’을 비롯한 촉목보리·상대적 대립의 초월 등과 같은 선사상이 시학에 끼친 영향은 유협의 《문심조룡(文心彫龍)》과 엄우의 《창랑시화》라는 시학서가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이물관물’은 공리관념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일반의 ‘이아관물(以我觀物)’과는 전혀 다른 심미적인 관물방식이다. 심미시파는 선종의 흥취와 묘오·직관적 감오 등을 빌어 예술의 이상을 실현하면서 시가 이론체계를 정립했다. 시학의 심미 이상도 선이 ‘만고장공 일조풍월(萬古長空 一朝風月)’을 통해 순간 속에서 영원을 추구하는 선의 심미 체험과 일치한다. 선이 지향하는 생활방식은 시인의 심미적 자각을 유발, 시인의 심미 추구 의욕을 촉진시켰다. 선은 인간의 심성을 정화하고 숭고한 정신 세계를 소조(塑造)하는 공정이다. 시와 예술의 존재 이유도 전적으로 선과 일치한다. 하늘처럼 높기만 한 불교 이상을 현실화시켜 재가 수행과 거사 불교로 생활 불교화한 선종의 시정 넘치는 촉목보리와 일용시도는 사대부들의 구미에 딱 맞아 떨어졌다. 선사상은 세속적인 물질 생활을 선뜻 포기하기 싫어하면서도 한편으로 고상하고 우아한 공령적(空靈的) 정신을 향수하고자 하는 사대부들의 인생 태도를 수용하는 안성맞춤의 의탁처였던 것이다. 물론 남종선의 출발은 농민과 유민을 배경으로 한 ‘농민선’이었다. 그러나 점차 신흥 사대부들의 이 같은 욕구와 융합하면서 ‘사대부선’으로 바뀌어 시선 교류라는 커다란 선림의 물줄기를 형성했다. 시와 선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적지 않다. 그러나 당송대의 시학에 관한 한 선을 떠나 시를 논하기 어렵다. 선의 심미 직각은 예술 직각을 고양시켜 시·서·화 등의 예술 창조의 기적을 탄생시켰다. 오늘날에도 선서화·선시라는 말을 곧잘 사용한다. 모두가 시선 교류의 역사가 남겨 놓은 그림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