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땐 커보이기만 하던 오피스텔이 부산서 미리 올라온 친척들로 온통 북적대어서 현관앞까지 잠자리가 되어 버렸다.
결혼식 전날 잠을 못자면 화장도 잘 안받고 당일날 피곤해서 고생한다면 엄마는 나를 일찌감치 침대안으로 밀어 넣으셨다.
거실의 불이 꺼지고도 무얼하는지 싱크대앞에서 내내 부시럭대던 엄마는 비좁은 잠자리틈에 끼어들려 하고 있었다.
그런 엄마를 억지로 내 옆에 눕게 했다.
결혼 발표 이후 오히려 나보다 들떠 있는 엄마였다.
그럴만도 하리라.
엄마의 소원대로 인물 좋겠다, 집안 좋겠다,품성 좋겠다,게다가 딸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사위를 얻게 됐으니 말이다.
또한 감회가 남다를 것이었다.
불임이라는 치명적인 신체 결함을 딛고 얻은 외동딸이었다.
제속으로 낳은 자식보다 더 애지중지 키운 딸이었다.
이제껏 부모속을 한번도 썩여본 적이 없는 순종적인 딸이었다.
ㅡ 네가 착해서 복을 받는게다...
엄마는 내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으셨다.
어릴 때 한번은 엄마한테 물었다.
ㅡ 엄마. 아빠랑 엄마는 쌍커풀이 있는데 난 왜 없어?
난 쌍커풀 있는게 더 예쁘고 좋은데...
ㅡ 원래 쌍커풀 없는게 우성이란다.
네 이모도 봐라.
쌍커풀이 없잖니.
ㅡ 우성이 뭐야?
ㅡ 응. 사람에겐 우성과 열성 인자가 있는데 우성은 좋은 성질이고,
열성은 안좋은 성질인거지.
그러니까 우리 연두는 아빠와 엄마한테 있는 좋은 성질만 받은거야.
연두는 쌍커풀이 없어서 더 이쁜 눈이란다.
엄마는 우리 연두눈이 너무 이뻐서 부러운걸.
그러던 엄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내게 쌍커풀 수술을 해주겠노라고 하셨다.
나는 무섭다며 끝내 싫다 했지만 그것이 며칠전 이웃집 아주머니가 놀러 와서는 나를 두고 한말이 가슴에 박혀 있어서란걸 알고 있었다.
ㅡ 이집 딸은 아빠, 엄마를 하나도 안닮았네.
사랑하는 엄마.
그동안 줏어온 아이를 키우면서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사셨을까.
정작 자신이 직접 낳은 아이가 어느 한군데 닮은 구석이 없다면 그저 듣고 넘어갈 말들도 자신이 직접 낳은 아이가 아니기에 상처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런 상처와 아픔들을 홀로 견디며 살았을 엄마.
갑자기 엄마의 보이지 않는 설움이 내 가슴에도 느껴져 나는 엄마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이젠 말라버린 엄마의 가슴.
나오지도 않는 젖을 물리며 아파했을 가슴.
왈칵 눈물이 솟았다.
"얘가..."
"엄마...미안해..."
"결혼하면 철난다더니.
울지마. 눈 부으면 내일 화장할때 애먹는다.
어서자. 내일 아침에 일찍 가야 한다며."
"엄마..."
"왜?"
"내가 아빠,엄마 사랑하는거 알지?"
"어이구,점점."
"진심이야.
엄마...나 그냥 결혼 안하고 아빠 엄마랑 같이 살면 안될까?"
"아빠 엄마 사랑한다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주는게 네 할 도리인거야.
아직도 결혼하는게 그렇게 겁나니?"
"....."
"겁낼거 하나도 없다.
다 그렇게 사는거란다.
엄마는 스무살에 결혼해서 네 나이에 널 낳았단다.
결혼할 때나 널 낳을 때나 항상 두렵고 무서웠었지.
그런데 널 낳고난 후부터 그런 근심 걱정들은 깡그리 날아가 버리게 되더구나.
아마 널 키우느라 절로 잊어 버리게 된것일테지.
부모에게 자식이란 그런것이란다.
어떤 시름도 다 잊게 해주는게 자식이란다.
너도 이담에 자식낳아보면 지금 겪게되는 불안이나 걱정들은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게 될게다.
여자란 시부모 공경 잘하고 남편 잘 섬기면 똑같이 대우받는거야.
살면서 정말 어렵고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엄마한테 얘기하구.
아빠랑 엄마는 항상 네 편이란거 알지?"
그러나 나는 그동안 키워주신 부모의 은공도, 날 끝까지 지키려던 제원의 사랑도, 이제까지 서로에게 비밀이란 없는 자매같은 도송의 우정도 모두 저버리고, 다음날 아침, 예식장 미용실로 가는 대신 곧장 터미널로 가서 광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고야 말았다.
밤새 잠을 설친 탓일까.
버스에 앉은지 얼마 안되어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안내방송에 깜짝 놀라 눈을 뜨니 어느새 광주땅이었다.
시계를 보니 11시.
지금쯤 집안이 발칵 뒤집혔을 것이었다.
아침에 예식장 미용실에서 만나기로 한 도송은 기다려도 내가 오질 않자 집으로 전화를 했을 것이고, 집에서는 벌써 나갔다 그랬을 것이고, 제원에게 급히 연락을 취했을 것이고...
그 이후의 일들은 안봐도 훤했다.
결혼 당일날, 미용실에서 이미 꽃단장을 하고 있어야 할 신부가 깜쪽같이 사라져 버렸으니...
혹시 중간에서 사고라도 난걸 아닐까.
모두들 걱정하고 있을게 분명하였다.
아니면...제원오빠나 도송은 눈치채고 있을런지도.
마음이 무거워지다가 이내 가슴에 묻은 슬픔의 찌꺼지들을 훌훌 털어냈다.
어쨋든 결혼식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살 것 같았다.
모든 일은 돌아간 후에 감당하자.
지금은...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나의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겨난 것일까.
이건 내 일생 일대의 파란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을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바로 나라니.
나는 현실에서의 탈출구를 찾은 십대처럼 통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먼저 공장으로 찾아가 선미에게 포장한 옷을 건넸다.
과분해 하는 그녀에게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목포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러 나왔다.
알아본 바로는 목포에서 XX섬으로 출발하는 배는 오후 3시 반이 마지막이었다.
실지로는 한시간 가량의 거리지만 여러 섬들을 경유하고 종점인 섬이라 3시간이나 걸린다는 것이었다.
배가 정시에 출발하여 1시간 가량 지났을 무렵 미리 멀미약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착할 때까지 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나중엔 너무 기진맥진해 있어서 마지막까지 배를 함께 타고 있던 노부부의 부축을 받고 내려야 했을 정도였다.
배에서 내리고서도 현기증과 메스꺼움때문에 서 있기조차 힘들어서 한동안 앉아 있어야 했다.
"어떻게 이 먼데까지 아가씨 혼자 온거래유?
혹시 황선상 만나러 왔남유?"
부축을 해주었던 부부 중에 아주머니가 태신을 알고 있는듯 물었다.
"네.. 집이 어딘지 아세요?"
"그라믄유. 바로 우리랑 이웃잉께.
일어날 수 있겄시유?"
아주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일어나 걸었다.
부두를 지나 모퉁이를 돌자 넓은 백사장이 나왔고, 산아래로 옹기종기 낮은 지붕의 집들이 보였다.
어촌이라 그런지 하나같이 지붕위에 커다란 돌을 매달아 놓은 것이 이색적인 마을이었다.
마치 한폭의 그림 속에 들어온 착각이 들 정도로 조용하고 아름다운 섬이었다.
부부가 다른 집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대문도 없이 그저 울타리로 돌담을 쌓은 것뿐 겨우 방 한칸과 부엌이 이어져 있는 작은 토담집.
"황선상 계신가?"
거친 바닷내가 물씬 풍기는 아저씨가 큰 소리로 방을 향해 물었지만 잠잠했다.
"아마 낚시간 모양인디.
올때가 다 되았응께 쪼매 방에 드가서 기다려 보시요이."
부부가 돌아간 후 조심스레 방안으로 들어갔다.
밥상을 대신삼은 책상과 벽에 걸린 옷걸이와 한쪽으로 개놓은 이부자리가 다인 방안은 생각보다 조금 커보였다.
아마도 달리 가구가 없어서일거란 생각을 하며 가방을 한쪽에 밀어놓고 바닥에 누웠다.
아직도 배를 타고 있는 것처럼 울렁거림이 남아 있어서 자꾸 현기증이 났다.
밖에 인기척이 나길래 일어나 앉았더니 그 아주머니가 사발을 방안에 쓱 밀어 넣는다.
"이거 먹으믄 금새 괘안아질거유."
무슨 약인지도 모르고 나는 단숨에 사발을 들이켰다.
울렁거림만 가시게 해준다면 마다할게 없을 터였다.
입안 가득 쌉싸름하고 떫은 맛이 돌아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오히려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주머니가 돌아간 후 십분도 안돼서 신기하게도 약효가 나타났다.
울렁거림과 메스꺼움 그리고 현기증까지 말끔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시간은 7시가 지나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 해변가로 걸어 내려갔다.
이미 해가 지고 있는 바닷가.
바닷물이 온통 다홍빛이었다.
짭짤한 바닷내음과 얼굴을 휘감고 지나가는 바닷바람이 상쾌했다.
몇 번 심호흡을 깊이 해보고는 쭈그리고 앉아 모래를 만져보았다.
깨처럼 고운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흘러 내렸다.
그 위에 황. 태. 신...이라고 이름을 적어 보았다.
그리고 그 밑에 진. 연. 두...라고 적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걸 보고 그는 또 무어라 할까.
오늘은 이미 늦어서 안되고, 내일이면 여지없이 쫒겨나는 것은 아닐까.
그가 반갑게 맞아주리란 건 기대하지 않지만 또다시 비참한 기분으로 돌아서야 할까봐 나는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내내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또한 지금쯤 서울에 있을 가족들과 제원과 도송인 어떡하고 있을까.
다시 무거운 걱정거리로 내 가슴을 압박해왔다.
생각을 애써 떨쳐 버리려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일어났을때 저멀리 해변가를 따라 누군가가 걸어오는게 보였다.
한손엔 긴 낚시대를 들고 다른 한손엔 어망을 든 남자는 분명 태신일 것이었다.
그가 이쪽을 알아 봤는지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석양을 뒤로 한채 드디어 내앞에 섰을 때, 그는 보기좋게 그을려 예전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잠시 나를 말없이 내려다 보고 섰던 그가 바다로 고개를 돌리며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웃어주니 다행이네.
난 또 쫒겨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여긴 절대 못 찾을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못말리겠구나."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다소 마음이 놓였다.
"세상 끝이라도 찾아냈을거야.
너한테 꼭 물어볼 말이 있거든."
"일단 들어가자."
그가 앞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 마을앞을 지나 돌담을 지나 작은 마당으로 들어섰고, 그는 낚싯대와 어망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