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있다. 그 길을 걸어갈 것인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욕망은 현재의 길에 대한 불만족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더 나빠졌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항상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 어디에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인간의 욕망은 지극히 이기적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터널을 통과한다. 치히로도 그랬다. 그 터널이 비록 본인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낯선 시골로 이사가는, 이제 겨우 10살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자 그곳은 설국이었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노밸문학상 수상작 [雪國]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터널은 일종의 통과제의다. 그것은 俗의 세계에서 聖의 세계로 전이되는 길목에 다름아니다. 터널은 이쪽과 저쪽을 구분지어 주는 하나의 상징이며 두 세계 사이의 충돌을 부드럽게 연결지어주는 완충장치이다. 그러므로 치히로와 그의 부모들이 낯선 터널을 통과한 뒤 마주치는 푸른 풀밭 위의 바람이나 폐허가 된 건물들은 일행들에게 낯선 서먹함을 줄 수는 있어도 두려움의 존재로 그들을 가로막지는 못한다.
아무도 없는 거리. 길 양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음식점들. 냄새를 먼저 맡고 일행들을 끌고 가는 사람은 아버지다. 그는 탐욕스럽게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음식을 발견하며 가족들에게 음식을 권한다. 주인은 보이지 않지만 어머니는 기꺼이 의자에 앉아 먼저 음식을 먹는다. 그러나 치히로는 먹지 않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뻔뻔해진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낯선 세계에 쉽게 동화되고 적응하며 생존의 방법을 찾는다. 치히로가 음식먹기에 동참을 거부하는 것은 아직 세계의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날이 어두워지자, 지금까지 치히로가 본 세계와는 또 다른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진다. 푸른 풀밭과 작은 계곡 위로는 거대한 물이 가득 차서, 환하게 불밝힌 배가 강의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온다. 그 배에는 가면만 둥둥 떠다니는 유령들이 가득하지만 그들은 치히로가 서 있는 뭍에 닿는 순간 형체를 갖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치히로의 몸은 점점 투명해진다. 이 세계에서 사라져가는 것이다. 그때 나타난 하쿠는 치히로에게 길섶의 작은 열매를 따주며 먹으라고 말한다. [이 세계의 것을 먹지 않으면 넌 이 세계에서 사라지는거야]
만약 미소년 하쿠가 없었다면 치히로는 그대로 사라졌을 것이다. 하쿠는 왜 치히로를 구해주었을까? 낯선 존재들이 서로에게 이끌린다는 것은 어떤 인연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 치히로는 하쿠의 안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 지금 그들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무의식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다. 탐욕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우던 치히로의 부모가 살찐 돼지로 변신했지만, 여기저기 800여 정령들이 발없는 걸음으로 부유하는 귀신들의 휴양지인 이곳에서 치히로는 더 이상 인간의 냄새를 내뿜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하쿠는 치히로에게 생존의 비법을 가르쳐준다.
자, 이곳은 정령들의 휴양지이다. 휴양지의 중심공간은 마녀 유바바가 지배하는 목욕탕이다. 목욕탕은 물과 불이 만나는 곳이다. 필요로 하는 것은 물이지만, 그 뜨거운 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불이 필요하다. 치히로가 처음 일하는 곳은 목욕탕의 보일러실이다. 팔이 여섯 개인 보일러 영감 밑에서 그녀는 겨우 일자리를 얻어 생존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물과 불에 관한 영화이다. 정화의 물과 욕망의 불. 탐욕스러운 욕망의 불을 다스리는, 깨끗하고 정갈한 물의 이미지. 세상은 정화되어야 할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 영화의 주공간인 유바바의 목욕탕은 거대한 물 위에 떠 있는 집이다. 그 집에는 한자로 기름 油자를 쓴, [油屋]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목욕탕 굴뚝에서는 쉬지 않고 검은 연기가 흘러나온다. [유옥]의 맨 꼭대기층에 거주하는 유바바의 방 내부에도 벽난로가 있다. 항상 유바바의 등 뒤 배경으로 등장하는 불꽃 타다다닥 거리는 벽난로는 유바바를 욕망의 화신, 불의 이미지 속에 위치하게 한다.
그러나 치히로는 목욕탕의 때를 닦고 손님들을 위해 물을 채운다. 늘 그녀는 물과 함께 있다. 더러운 오물로 가득한 오물신이 탕 안으로 들어갔을 때, 돈을 지불한다며 손바닥 가득 오물을 토해놓는 오물신을 위해 치히로는 열심히 청소를 하고 깨끗한 약수를 붓는다. 물의 정화작용은 어떤 더러움도 씻어낸다. 오물신은 사실은 강의 신이었다. 내부에 가득 쌓아둔 더러운 폐물들을 바닥에 토해낸 뒤 새롭게 탄생한 강의 신은, 치히로에게 선물을 주고 사라진다. 그것은 보은의 표시이면서 동시에 물의 이미지 한 복판으로 치히로를 초대하는 행위이다. 강의 신이 준 선물은 쓰디쓴 열매같은 것이다. 그 속에는 생명의 힘이 담겨 있다,
갈 수만 있고 되돌아올 수는 없는 기차. 그 기차를 타고 [늪의 바닥] 역을 향하여 가는 치히로. 늪은 단단한 흙과 부드러운 물이 만나는 이미지이다. 기차가 지나가는 철로의 밑부분은 투명한 물에 잠겨 있다. 기차는 바퀴 부분을 물에 잠기고 나머지는 하늘을 향해 몸을 드러내면서 지나간다. 이처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모든 것은 경계에 있다. 물과 불, 이쪽과 저쪽, 단단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등장인물들은 떠돈다.
과연 [늪의 바닥]을 지나 사라지는 기차의 앞 부분에는 [중도]라는 단어가 한자로 크게 쓰여 있다. [중도]라는 기차를 타고 [늪의 바닥] 역을 출발하여 마녀 유바바의 쌍동이 언니를 찾아가는 치히로의 모험에 가득찬 여행은, 보일러 아범이 지적했듯이 사랑에 의한 선택이다. 치히로는 자신을 구해주었던 하쿠에 대한 보은의 차원보다, 언젠가 그를 만난 것 같은 낯익음, 그리고 그때 싹틔워졌던 풋풋한 사랑의 힘에 더 의지하고 있다.
풍부한 시적 상징과 비유로 행간의 여백을 폭넓게 확장시키며 우리 앞에 꿈과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 놓는 미야자끼 하야오는, 자신이 평생을 지속하면서 쌓아놓은 이미지들을 충출동시켜 이 한 편의 영화에 집대성해 놓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 대신 하늘과 물이 맞닿은 둥근 수평선이 감싸고 있다. 미야자끼 하야오가 생성시킨 이미지들은 그 경계를 흔들면서 미묘한 자장을 형성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폭넓은 의미망을 확보하는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은 우리들을 존재의 근원으로 데리고 간다.
그렇다. 아직 우리는 가지 않은 길이 많고, 가야할 길이 많이 있다. 치히로 가족이 다시 터널을 통과하여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행위는 퇴행의 그것은 물론 아니다. 비록 치히로 부모들은 자신들이 돼지가 되었던 사실도 기억 못하지만 그들은 이제 삶의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고 있는 것이다.
센과 치히로는 동인이명이다. 치히로는 유바바의 지배를 받으면서 센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그러나 치히로는 자신의 본명을 잊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온 곳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은, 이름의 소중한 가치와 명예를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보내는 미야자끼 하야오의 경종이다. 유바바가 정령들의 휴양지를 통치하는 방법도 이름을 빼앗는 것이다. 다시는 빼앗기지 말자. 우리들의 소중한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