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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오딧세이아』, 유영 옮김, 범우사, 1997. 막상 '사랑과 죽음'이라는 주제아래, 요 며칠 사이에 읽은 다섯 권의 책에 대한 단평을 올리려하니 이만저만 부담이 아니다. 책은 읽었지만, 막상 거기에 대해 뭐라 말하기 어렵고 또 시간이 지나가 버리면 책의 줄거리조차 잊어 버리지 않을까 두려워 서둘러 몇 자라도 적어야 마음이 좀 편안할 것 같기도 해서 노트북을 켰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여전히 부담스러운 일이기만 하다. 또 다섯 권의 책-세 권은 운문, 두 권은 산문-을 '사랑과 죽음'이라는 테마로 묶어 이야기한다는 것도 억지스러운 일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리저리 닥치는 대로 읽은 다섯 권의 책이 하나의 주제아래 고스란히 모여질 법도 하다는 것도 조금은 신기해 보인다. 결론이 어떻게 날 지 모른다. 하지만, 이왕 말을 꺼냈으니 어떻게든 끝낼 수밖에. 고백컨대, 나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오딧세이아』를 최근에야 완독할 수 있었다. 대학 1학년에 입학하기 전에『일리아스』를 읽었고, 이어『오딧세이아』를 집어들었지만, 약 반밖에 읽지 못했다. 그때까지 내가 읽은 곳은 총 24부 중 제 12부, 세이렌과 스퀼레라는 바다 괴물들에 지혜로 맞서 탈출하는 오딧세우스의 마지막 표류담이다. 이 이야기를 끝으로 오딧세우스는 알키오노스 왕의 궁전에서 떠나 아내 페넬로페가 기다리는 고향인 이타카로 떠나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교의 마지막 방학에 읽은『오딧세이아』는 정확히 오딧세우스의 표류담까지였으며, 꼭 서사시의 절반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나머지 후반부는 오딧세우스가 변장한 채 이타카 섬에 잠입하여 아들인 텔레마코스와 몇몇 시종의 도움을 받아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처치하는 이야기이다.『오딧세이아』읽기를 마치고서 나는 왜 이 책을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전부 읽을 수 있었을까 하고 질문해봤다. 10년 동안 나는 이 그리스의 맹인 음유시인의 서사시를 몇 차례 읽으려고 시도했고, 또 실제로 읽기도 했지만, 번번이 12부를 넘지 못하고 책을 덮어야만 했다.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한 적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세이렌들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뱃사공을 유혹하는 장면에 이르면 매번 독서의 암초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세이렌의 이야기는 상당히 매혹적이다. 프랑스 비평가 모리스 블랑쇼는『미래의 책』에서 이 세이렌의 이야기를 토대로 마치 오딧세우스가 귀를 막고 세이렌의 아름답지만 치명적인 음악을 듣는 행위처럼 문학이란 죽음을 통과하는 글쓰기라는 명제를 세운 바 있고, 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계몽의 변증법』에서 서구적 계몽이성의 가장 오래된 판본인 신화를 통해 도구적 이성의 기원을 밝혀낸 바 있다. 오딧세우스는 부하들에게 배의 기둥에 자신을 묶으라고 명령한다. 동시에 부하들의 귀를 막고 노를 젓게 하면서 자신은 홀로 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는 것이다. 한편 이타카는 오딧세우스와 그의 모험담을 들어왔던 수많은 독자들이 꿈꿔왔던 고향에 대한 서구의 오래된 표상이지만, 실제 오딧세우스가 이타카에서 하는 일은 페넬로페의 구혼자들과 그들과 결탁한 못된 시녀들을 모조리 도륙(屠戮)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이타카로 표상되는 고향, 사람들이 고된 여정을 통해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하는 귀향지란 페넬로페의 정절 혹은 사랑에 대한 재확인과 그런 재확인을 얻으려는 오딧세우스의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 펼쳐지는 장이다. 적대적인 타인들을 모조리 죽어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고향과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 예로 페넬로페의 구혼자 중 한 명인 암피노모스는 구혼자중에서는 가장 인덕(人德)이 많은 자였지만, 아테네 여신에겐 다른 구혼자들과 마찬가지로 죽어야 하는 운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오딧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던진 창에 의해 등뒤를 관통 당하고 쓰러진다. 그리고 이들 구혼자들이 모조리 도륙된 후에 그들의 부모들은 오딧세우스에게 항의하러 오지만, 아테네 여신은 이때서야 중재를 해서 더 이상의 살육을 막는다. 구혼자들 역시 오딧세우스만큼이나 이타카 섬 주변에서는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가진 아버지의 사랑스런 아들들이자 마찬가지로 신들을 경배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죽음과 귀향과 사랑과 화해도 한낱 그리스 신들의 운명의 장난이라는 것. 만일『오딧세이아』에서 그리스 신들을 제외한다면,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오딧세우스의 소망 성취담인 희극과 오딧세우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명부로 내려간 자들의 원통한 비극적 이야기로 나누어지지 않을까. 어쨌든, 나는『오딧세이아』를 십여 년 동안 읽었다는 사실에 뭔가 '의미'를 두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토록 멀기만 했던 귀향지 이타카에 대한 십여 년에 가까운 나의 오래된 꿈은 이 서사시를 읽기 시작한 지 십 년 후의 어느 날, 단 하루만의 독서로 무참히 깨지고 말았던 것 같다. '의미'란 그토록 부질없는 것이다. 오랫동안 여러 번 읽은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마음』은 내가 보기엔 비극, 그리스적 의미의 비극 개념에 가장 가까운 소설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말의 비극이다. 이 소설의 절반은 선생의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여기엔 근대인의 내면의 고백으로 치환할 수 없는 관계의 절대성에 대한 문제가 숨겨져 있다. 즉, 두 사람이 한 공간을 동시에 차지할 수 없다는 것, 한 남자가 여자를 차지하면 또 다른 남자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 기표들로 이루어진 상징적 질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언제나 피할 수 없는 자리다툼이 발생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기표의 질서=욕망의 환유체계는 항상 잔혹한 배제와 이에 따른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는 두려움을 언제나 품을 수밖에 없다는 것.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상징계는 언제나 두려운 것, 실재가 귀환하는 틈새를 열어두고 있다. 그리고 그 틈새를 통해 현실 전체는 단 한순간에도 붕괴할 위험에 처해 있다. 한 여자를 두고 친구와 피할 수 없는 대면을 해야하는 선생은 친구인 k를 기만한다. 선생은 k에게 "정신적으로 향상심이 없는 자는 바보다"(203쪽)라는 말을 함으로써 k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며 급기야 k는 자살하고 만다. 선생의 남은 일생이란 지금의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k에게 했던 기만적인 말을 스스로 되돌려 받는 일 뿐이다. 여기서 선생의 자기기만=내면이란 피할 수 없는 삼각 관계(모든 연애는 삼각관계다)의 문제에서 파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마음』에서 타인의 죽음의 대가로 얻어진 사랑이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 혹은 관계 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언제나 타자, 혹은 또 다른 기표의 죽음과 배제를 통해 얻어진 잔혹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문제다. 만일 이 문제를 비난한다면, 그것은 오직 도덕적인 층위에서만 가능하고 또 불완전하다. 사랑 때문에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 그것은 이미 관계 이후의 문제, 즉 내면의 문제다. 근대인의 연애란 자연적인 정념이지만, 그것이 관계의 층위에 들어설 때는 거기엔 항상 냉혹한 측면이 도사린다. 결혼이라는 제도적 장치도 사랑의 이 냉혹함을 결코 막을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에서 가장 잔인한 사람은 선생이라기보다는 선생의 아내와 아내의 어머니 장모, 즉 여자들이다. 이들의 존재로 인해 k와 선생은 자살한다. 하지만 여기엔 인과관계가 성립하지는 않는다. 여자들 때문에 두 남자들이 자살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들이 없었더라면 과연 두 남자들은 자살했을까. 소세키 소설에 나타나는 여성에서 요부(妖婦)의 냄새를 맡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선생의 젊었을 적 아내는 두 남자들의 행동을 보며 웃기만 하는데, 두 남자는 매번 당황해하지만 한번도 그 웃음의 이유를 밝히지 못한다. 여자의 웃음에 숨겨진 '의미'란 없는 것이다. 여자의 웃음의 '의미'를 가정하자마자, 남자들은 자의식의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그리고 이때 요부란, 실체가 아니라, 상징적 질서를 만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채워야 하는 두려운 틈새이며 회피해야 하는 관계의 빈 항이다. 그것은 한 인간의 내면=고백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소세키가 또 다른 소설인『행인(行人)』에서 아내와 동생의 관계를 의심하는 이치로가 동생에게 말한 것처럼, 여자란 한번 그 내면을 파악하려하면 결코 종잡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마음』은 말의 비극이며, 관계의 비극이다.『오딧세이아』의 그리스 신들이 떠나가며 남긴 비극적 운명이 수천년이 지난 후,『마음』으로 회귀한 것 같다. 뿌쉬낀의 운문소설인『예브게니 오네긴』과 레르몬토프의 소설『우리시대의 영웅』의 두 주인공인 오네긴과 페초린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아마 "흥미를 잃었다", "따분하다"일 것 같다. 그들은 왜 그렇게 따분해 할까. 한때는 나폴레옹적 환상과 야망을 품었지만, 이들이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유희뿐이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 오네긴은 "인생이란 것에 완전히 염증"(40쪽)이 나 있다. 그는 나이 마흔이 넘어서 비로소 인생의 젊음을 되찾으려는 파우스트와는 가장 동떨어져 있는 인물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관계들 속에서의 유희밖에 없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상대방의 열정을 불러일으킨 다음 상대방이 다가서면 냉혹하게 물러나기(키에르케고르의『유혹자의 일기』의 주인공이 아마 이들의 선구자격인 인물일 것이다). 이것은 일단 낭만파적 사랑의 구속을 아이러니의 간지(奸智) 속에서 해체시키고자하는 의도로 보인다. 오네긴은 한 여자를 사랑하지만, 결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며 그로 인해 여러 오해가 생긴다. 결국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인 따찌야나 앞에서 그녀의 여동생인 올렌까와 춤을 추게 되어 따찌야나와 올렌까의 약혼자인 친구 렌스끼에게 동시에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오네긴은 결투에서 친구를 살해하고, 그 자신은 먼 방랑길을 떠난다. 후에 사교계의 여왕이 된 따찌야나를 대면한 오네긴은 뒤늦은 사랑을 고백하지만, 이미 모든 것은 늦어버린 뒤였다. 여기에서 진실은 항상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기만 하다.『우리 시대의 영웅』은 정확히『예브게니 오네긴』의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 있다. 주인공 페초린은 오네긴과 어떻게 닮아있고 또 다른가.『예브게니 오네긴』의 마지막 장면에서 오네긴은 비록 뒤늦은 사랑을 고백하긴 하지만, 그는 따찌야나의 사랑의 의미를 가까스로 파악한다. 이 점에서 그는 상황 속에서 진실하다. 키에르케고르를 빌려 말하면, 그는 심미적 인간에서 윤리적 인간으로 거듭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페초린은 오네긴의 악마적인 면모만을 추려온 인물로 보인다. 페초린은 순수하고, 악마적이다. 그는 재치 있는 인물이지만 오네긴적인 유희나 낭만적 아이러니를 갖고 있지 않다. 아이러니가 탕진된 다음, 그에게 남은 것은 인생은 결국 운명이며, 내기일 뿐이라는 무상한 통찰이다. 어떤 위대한 삶의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에겐 현실의 모든 게 그저 따분할 뿐이다. 현실은 삶의 가능성을 탕진시키는 곳에 불과하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 아, 정말 따분하다!"(145쪽) 페초린은 귀족 여인에게 접근하지만, "난 가끔씩 자문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유혹할 생각도 없고 결코 결혼도 하지 않을 아가씨의 사랑을 이토록 고집스럽게 얻으려하는 걸까"(137-8쪽)라고 반문한다. 그 와중에서 페초린은 그녀를 짝사랑하는 친구 그루쉬니쯔키와 결투를 벌여 결국 그를 죽이고 만다. 마찬가지로 날 사랑하느냐고 묻는 귀족 여인에게 페초린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곧 떠난다. 명예롭지 못한 결투의 결과인 친구의 죽음은 그저 헛되기만 하고,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의 가능성이란 처음부터 소진되고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에게 진실이란 사랑에도 죽음에도 없으며, 오직 이런 일을 행한 악마적인 자신을 드러내는 일 뿐이다. 그는 오직 내면 속에서만 진실할 뿐이다. 한때 그와 근무를 같이했다가 만난 퇴역군인 막심 막시미치에게 페초린이 던져준 노트, 페초린의 일기란 그것을 통해서만 수수께끼가 드러나는 악마적인 인간의 내면의 기록이다. 그 내면의 진실여부, 즉 내면 자체의 허위의식이란 그 다음의 문제다. 소세키의『마음』으로 돌아와 생각하면, 선생은 그나마 고백 속에서도 놀랍도록 진실한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에겐 아직 청년기의 순수함이 살아있다. 왜 그가 그에게 접근하려는 주인공인 학생을 굳이 마다하지 않는지도 분명해진다. 그는 학생을 통해 자신의 젊음을 보충하고 싶었던 것이다. 선생이 "아무리 책을 읽어도 그만큼 훌륭해지지 않는다는 생각"(60쪽)이 든다고 젊은 주인공에게 말한 것은 이런 순수함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보인다. 아마 그가 일하지 않고 노는 '고등유민(高等遊民)'이라는 점도 이런 순수함을 한몫 거드는 것 같다. 그의 세대 이후엔 곧 닥칠 불황으로 말미암아 고등유민 따위는 존재할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여기에 비해『마음』과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다야마 가타이의『이불』의 스승은 자신이 공들여 키워놓은 여제자가 남학생과 연애를 시작하자 짐짓 점잖은 체하며 그 관계를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질투의 망상 속에서 끝내 헤어나지 못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불 속에다 자신의 얼굴을 묻고 훌쩍거리는 그의 고백은 추하기만 하고, 상황에서도 결코 진실하지 않다. 그렇게 보면, 오네긴의 낭만적 아이러니의 유희, 페초린의 삶에 대한 악마적 가능성, 선생의 순수함과 함께 근대문학이 출발한다고 볼 때, 근대문학이란 사실 그 종말을 처음부터 내장(內藏)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이네의 시집『노래의 책』이나 그의 서사시 혹은 장시(長詩)인『독일·겨울동화』나 그 밖의 시와 산문들은 나에겐 언제나 낭만주의와 그것을 넘어설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중요한 문학적 전범(典範)으로 보인다.『낭만적 영혼과 꿈』의 저자인 알베르 베갱에게 하이네의 시와 산문은 낭만주의의 위대한 물결이 쇠퇴와 몰락의 징후를 보여주는 예에 불과하지만, 루카치에게 하이네는 몽환과 꿈의 미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독일근대문학의 가능성의 중요한 예다. 사랑과 죽음은 일단 상처받은 젊은 영혼 하이네에게도 시의 주요한 테마처럼 보인다. 그의 시에는 연인의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절규하는 낭만적 영혼이 등장한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유령처럼 연인의 집 근처를 서성거리며, 때론 자신이 수의를 입고 이미 무덤에 들어가 있다고 상상하기도 한다. 극단적인 몽상 속에서 그가 사랑하는 여인은 순결함의 상징에서부터 잔혹한 요부까지 거듭 변신한다. 하이네 시에서 반복되는 사랑과 죽음, 천상으로의 도약과 무덤 속으로의 하강, 그것들은 일단 낭만적 아이러니의 결과다. 하지만, 하이네에겐 사랑과 죽음이 유희를 벌이는 상상의 바깥에서부터 닥쳐오는 현실에 대한 냉혹한 수용의 자세가 있다. 낭만적 아이러니의 유희는 하이네에게 풍자로 바뀌며 풍자는 낭만주의 그 자체를 내부로부터 비판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하이네의 시에는 실연의 아픔을 호소하는 영혼이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냉혹하고도 차가운 현실을 직시하라는 충고처럼 보인다.『노래의 책』은 꿈과 꿈이 깨어나는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고 머뭇거리는 하이네 자신의 모습이 담겨져 있지만, 그는 세상의 속된 충고로부터 끝내 낭만적 영혼을 지켜내면서 동시에 낭만적 영혼에게는 자신이 서 있는 현실의 토대를 스스로 깨닫기를 요청하고 있다. 비현실적인 몽상과 현실 인식 모두란 결국 다른 곳이 아닌 그 자신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오직 낭만주의에서 낭만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나오는 것이다(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젊은 시기의 하이네의 시가 그러하다).「바다 유령」이라는 시를 보도록 하자. 서정적 자아는 홀로 뱃전에 서서 노발리스나 슐레겔과 같은 초기 낭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근원적 고향으로 생각했던 아득한 중세를 떠올리며 바다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나는 뱃전에 엎드려/꿈꾸는 눈길로 거울처럼/맑은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바닷속 깊은 밑바닥까지/점점 깊이깊이 들여다보았다,/처음엔 희뿌연 안개가 낀 듯하더니/차츰차츰 색깔들이 뚜렷해지며/교회의 둥근 지붕과 탑들이 나타났다,"(297쪽). 시 도입부에서 고양되는 서정적 자아의 영탄은 아득한 중세를 동경하는 낭만적 수사로 수십 행을 거듭하다가 "너 영원한 내 사랑아,/너 오래 전에 잃어버린 사랑아,/너 마침내 다시 찾은 사랑아-/"에서 최고조로 이르는데, 서정적 자아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다짐한다. "나 이젠 다시 너를 떠나지 않겠다,/나 네게로 내려가련다./두 팔을 활짝 벌리고/나 너의 가슴 속으로 뛰어내리련다-". 하지만, 시의 중심부에서 최고조에 다다른 서정적 자아의 몽상은 다음과 같은 현실=산문적 어조의 개입으로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앞에서 인용한 시구에 이어진 시의 마지막 구절을 읽어보자. "그러나 바로 그 순간/선장이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나를 뱃전에서 잡아당기면서/그는 화난 듯 웃으면서 소리쳤다:/"박사 양반, 당신 미쳤소?""(300쪽) 이 마지막 구절을 읽을 때, 서정적 자아와 일체가 되었던 독자는 갑작스런 충격과 함께 배반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서정적 자아가 연신 몽상 가득한 영탄 속에서 자신을 점점 망각하다가 급기야 캄캄한 바다의 심연으로 자신을 실제로 밀어 넣을 수도 있다는 사실. 이러한 환기와 효과란 낭만적 아이러니가 낳은 악마의 자식인 잔혹한 풍자 덕택이다. 시의 마지막에서 선장의 개입은 지금까지의 서정적 자아의 몽상이 한낱 스러져버리는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운다. 여기에서 "땅은 프랑스와 러시아 것이고,/바다는 영국 것이다,/꿈의 하늘 나라에서/지배권은 완전히 우리 것이다"(『독일·겨울동화』, 홍성광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4, 38쪽)라는 구절 속에 숨은, 독일의 낙후된 현실과 그러한 현실에 팽배한 독일인의 비현실적인 낭만주의를 풍자하는 후기 하이네의 통찰이 나온다.『노래의 책』에는 독일인의 몽환적 정신을 가득 채운 칸트의 숭고론과 헤겔의 절대정신에 대한 풍자도 나온다.「질문」이라는 시에 등장하는 한 젊은이는 파도와 구름이 가득한 바다에서 "오 내게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어다오,/태곳적부터 풀리지 않는 이 수수께끼를."라고 중얼거리며 수심(愁心)에 가득한 자신의 몽상과 회의를 풀어놓는다. 젊은이의 영탄조는 "말해다오, 인간이란 무엇인가?/어디서 왔는가?/어디로 가는가?/저 위 황금빛 별들에는 누가 살고 있는가?"라는 구절에서 최고조로 이른다. 여기까지 본다면, 이 시구는 칸트가『판단력비판』의 숭고에 관한 장에서 광포한 바다와 회오리바람, 산사태와 숲 속의 거대한 안개를 대면한 자아가 압도적으로 느낄 법한 고양된 감정인 숭고의 체험을 묘사한 것을 그대로 서술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어지는 마지막 시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파도는 끊임없이 웅얼거리기만 할 뿐,/바람은 불고, 구름은 쫓겨간다,/별들은 무심히 차갑게 반짝인다,/그런데 바보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322-3쪽) 첫 시구에서 등장한 "한 젊은이"가 여기에서는 "바보"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항구에서」라는 시에서 이 바보 같은 젊은이는 무대를 바꿔 브레멘의 시청 지하 식당의 포도주 창고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내로 등장한다. 이 사내는 술을 마시면서 자신과 아마도 바닷가에 서 있던 젊은이도 함께 조롱하는 것 같다. 여기서 하이네의 비판은 칸트에서 헤겔로 이동한다. 술잔 속에서 그는 "소우주", "옛날의 민족사와 새로운 민족사,/터키인들과 그리스인들, 헤겔" 등등을 보지만, 실제로 그는 술에 취해서 환영을 보고 있을 뿐이다. 이 주정뱅이는 "내 불멸의 영혼도 비틀거리고/영혼과 함께 나도 비틀거린다"고 비아냥거리며 읊조리지만, 그 순간 그는 포도주 창고 감독에게 이끌려 나오고 있다. 서정적 자아는 이때 포도주 창고 감독에게 다음과 같이 주정한다. "그대 브레멘의 멋진 시청 포도주 창고 감독이여!/그대는 보이는가, 집집 지붕마다 천사들이 앉아서 술에 취해 노래부르는 모습이;/저 하늘에 타오르는 태양은 술에 취해 새빨개진 코일 뿐,/세계 정신의 코다;/그러면 새빨간 세계 정신의 코 주위로/술에 취한 세상 전체가 돈다."(325, 327-8쪽) "새빨간 세계 정신의 코"라는 재미있는 표현에서처럼, 이 시는 헤겔의 세계 정신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하이네가 정작 의도한 것은 그런 관념적인 세계 정신과 같은 학설만 유행하는 독일의 낙후된 봉건적 현실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노래의 책』의 후반부는 이처럼 낭만적 자아와 그런 자아를 풍자하는 또 다른 자아를 무대 위의 두 적대적인 등장인물처럼 배치하는 효과를 꾀하는 시들이 자주 등장한다. 하이네의『노래의 책』은 아마 내가 읽은 독일시 중 횔덜린 시와 함께 오래도록 기억에 남고 또 앞으로도 자주 참조할 시집이 될 것이다. 다섯 권의 책을 읽었지만, 애초 내가 기대했던 '사랑과 죽음'이라는 주제는 어느새 '낭만적 몽상과 현실인식의 길항과 갈등' 정도로 이름붙일만한 주제로 바뀐 것만 같다. 그리고 각각의 작품 사이의 연결고리도 느슨하기만 하다. 아무래도 주제를 애초에 잘못정한 것 같은 느낌이지만, 아직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아직 사랑과 죽음, 이 둘 사이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더 나아가면, 가능성과 현실, 낭만적 꿈과 아이러니 등등에서.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그럴 지 모른다. 내 자아가 분열된 채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리라. 어떻게 하면 둘 사이의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을까, 오딧세우스처럼 귀를 열어놓고 밧줄로 돛대에 몸을 묶은 채 사이렌의 매혹적인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마저도 타자들의 고된 노동을 감수하게 하는 일이라면,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마땅히 돌아갈 고향 이타카도 없이, 여전히, 항해중이다. 다음 기회에 위 작품들에 대해 더 자세히 말했으면 한다. 보론 : 푸쉬킨과 레르몬토프 <오네긴>과 <영웅>에서의 사랑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재미있다. 나는 따찌야나와 베라 모두 아주 마음에 들었다. <영웅>의 뻬초린은 나에겐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의 '적그리스도'인 스타브로킨과도 매우 닮아보였다.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여인이 이 두 구제불능의 인간 곁을 끊임없이 맴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둘다 그 자체로 낭만적=악마적 화신이기 때문이다. 빼초린은 인간적인 것이라고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천사=악마 그 자체였다. 그는 마치 저에겐 영원히 방랑하는 삶을 선고받은 자, 결코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저주받은 불멸의 인간처럼 보인다. 그런 뻬초린의 이미지를 통해 레르몬토프가 말하고자 한 것은, 아마도 사랑의 불변성일 것이다. 요즘 내가 생각하는 것은, 영혼의 불멸=사랑의 영원함을 주장하는 서구의 오래된 철학적/문학적 전통이다. 일종의 '초월성'에 대한 관심이다. 철학에서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불멸의 신체'이나 문학에서 드라큘라 등을 통해 나타난 '불멸의 영혼'이 아마 이런 전통의 화신들일 것이다. 한편 <오네긴>은 나에겐 교양소설의 마지막 가능성처럼 보였지만, <영웅>은 정확히 반(反)교양소설로 보인다. 사랑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성찰의 결과다. 푸슈킨은 성숙을 긍정하지만, 레르몬토프는 부정한다. 산문과 시의 대립? 아마 그럴 지도 모른다. 사랑을 통해 아픈만큼 성숙해진다는 관점과 그것마저 세속적 변덕과 타협에 다름아니라고 일축하는 관점(푸슈킨에겐 이 두 관점이 모두 내재해 있지만, 곧 전자로 나아가고 레르몬토프는 후자의 관점을 고수한다). 나는 일단 어느 편에도 손을 들지 않겠지만, 지금은 레르몬토프나 뻬초린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있다. 문학, 특히 소설은 대단히 세속적인 예술의 장르이며 또 지금까지 나는 그렇게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좀 애매모호한 말이기는 하나, 문학의 형이상학적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난 다음, 거기에 대해 그만큼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고 반성해본다. 내가 보기에 가장 속물적인 문학 장르는 소설, 그 중에서도 특히 일련의 교양소설들이다. 시간과 변화에 너무나도 충실한 세속적 문학적 흐름의 다른 편엔 또 어떤 문학의 신기루가 흔들거리고 있을까? 초월적 문학? 그런 게 있다면, 그 신기루를 찾아 길을 떠나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