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투란 한자로 花鬪 라고 쓴다. 즉 꽃 싸움이라는 말이다. 우리나라에는 투전이라고 있었는데, 이것이 금지되자, 일본에서 만든 카드게임을 우리 것처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에서의 명칭은 꽃패(花札, 하나후다)이다.
트럼프에서 파생
16세기 전국시대 포루투갈 트럼프를 대체하여 유래
일본의 화투는 16세기 후반 그러니까 일본의 전국시대에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일본에 트럼프 카드가 전래되었다. 트럼프가 가진 고유 놀이법에 따라 즐기다 보니 도박에 가까운 형태로 발전하면서 에도시대에 금지령이 몇 차례 내려지고 이를 피해가기 위한 수단으로 카드를 일본식으로 완전 다른 그림, 일본화를 그려서 만든 것이 지금의 화투라고 한다.
트럼프에서 따왔으나 고유한 특성을 가짐
처음 화투를 만들때 트럼프의 여러가지를 따오게 되었는데, 트럼프의 인덱스는 꽃과 식물로 바뀌고, 트럼프의 수트는 광열단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1:1로 대응되지는 않았으므로 이 과정에서 화투만의 오리지널리티가 생기게 된다. 오노노도후라는 서예가가 아이디어를 제안했다고 알려져 있다.
카루타도 트럼프의 변형
전통 시가를 모은 만연집의 시를 읊으며 짝을 맞추는 카루타라는 놀이도 16세기 트럼프가 일본에 전래되면서 시작된 놀이이다.
우리나라에 화투 문화
1895년의 갑오경장 당시 고종이 투전과 골패 등의 노름을 금지하는 영을 내리는데, 도박 자체를 금지시킨 것이 아닌지라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장사를 하는 중인들과 상인들에 의해 보급된 화투가 대신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는 문헌이 남아있다. 정확히 화투가 언제부터 한반도에 보급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문헌은 존재하지 않으나, 고종 시대에 이미 횡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아마도 헌종이나 철종 시대에 전래가 됬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고종의 제위 41년이 되던 해(1904년, 그러니까 광무 8년) 12월 13일자의 대한매일신보에 "요즘 고위 관리들이 화투를 하도 많이 쳐대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 이것들이 화투를 칠 때는 순검(그러니까 그 당시 경찰관들이지)들이 파수를 보기 때문에 이것들을 잡을 길이 없고 대신에 애꿎은 서민들만 잡혀들어가는 실정이라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라는 기사가 게재될 정도로, 일제시대가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대 유행을 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일본과 한국의 다른 화투의 흥망
화투가 조선왕조 후기에 한반도로 전래되어, 기존의 투전이나 골패 등의 놀이를 빠른 속도로 대체해나가고 또 대한제국 몰락 및 일제에 의한 식민지 시대를 통해 빠른 속도로 서민층에 흡수되었던 것과는 반대로, 일본에서는 서민층에 전래되기 이전에 쇠퇴의 길을 걷는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일제가 조선의 서민들을 이간질시키기 위해서 화투를 장려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작 식민지시대 내내 조선총독부는 모든 종류의 도박을 금지하고 형사처벌도 종종 이루어졌으며, 그 형벌의 강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외부 게임 유입으로 메이지-타이쇼시대에는 쇠퇴
일본에서 화투는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산업화가 빠르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메이지-타이쇼 시대를 거쳐 빠른 속도로 퇴보의 길을 걷는다. 도박성이 강한 게임이라곤 하지만 그 자체가 원래부터 조정대신들이나 고위 무사계급 등, 지배계층의 놀이였기에 민간으로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면도 있었지만, 중국에서 유입된 마작, 조선에서 유입된 투전과 골패, 그리고 근대화를 거치면서 트럼프 카드를 이용한 게임이 더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 화투의 제작과정의 복잡하여 대중화 되지 못함.
화투를 만드는 방식이 대중적이지 못한 것도 일본에서 화투가 퇴보하게 된 원인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플라스틱제와 달리 일본의 화투는 뽕나무 껍질에 점토를 바른 후 한지를 여러 장 겹쳐서 굳히는 형태로 제작된다. 여기에 우키요에와 비슷하게 목판화를 입히는 형식으로 완성되는데, 이는 오늘날의 몇 안되는 화투 메이커들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생산방식이고, 화투 메이커로 시작하여 오늘날에도 화투를 제작하고 있는 일본 굴지의 게임 메이커, 닌텐도 역시 이렇게 생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더 발전한 화투
본 고장인 일본에서는 화투가 "비싸고 고급스러운 물건"이라는 인식 덕분에 쇠퇴의 길을 걸었지만, 반대로 우리나라에서는 고유의 투전과 골패를 대체할 수 있는 획기적인 카드 게임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제조공정이 바뀐 한국의 화투
한국에서도 초창기에는 일본과 동일한 방식으로 생산이 되었지만, 타산이 맞지 않는 전통생산방식을 버리고 플라스틱 카드에 인쇄물을 덧입히는 방식으로 대체된다.
새로운 규칙을 만듬
일본의 화투에는 없는 광이나 쌍피 등의 룰이 적용되고, 띠(청단, 홍단, 초단)의 분류도 일본의 화투에 비해 간략해지는 등, 독자적인 게임으로 발전하게 된다. 일본의 화투는 "광"이 없다. 홍단 3장도 그냥 "홍단"이 아닌 각기 다른 표기로 되어있으며, 청단은 초단과 마찬가지로 그냥 푸른 띠에 불과하다. 청단이 모두 모였을 때 초단보다 강력한 점수를 갖고 홍단에 필적하는 패가 된 건 한국에서 발전한 독자적인 룰이다. 물론, 일본은 쌍피도 없다.
일본은 카루타와 하나후타로 양분화
일본은 만연집을 읊어가면서 짝을 맞추는 카루타는 하나의 예술행위로 발전한다. 하나후타는 정월 초하루에 짝을 맞추며 노는 정도의 전통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일본의 화투대신 마작
일본에서 근대화 이후 국민 도박으로 자리를 잡은 건, 중국에서 건너온 "마작"이었다.
나츠메 소세키의 수필에서 전래
마작은 1910년에 나츠메 소세키가 아사히신문사를 통해서 출간한, 만한여기저기(満韓ところどころ)에서 처음 언급되는데, 1909년 9월에서 10월에 걸쳐 한국과 만주를 여행한 나츠메가 목격한 일담을 주제로 삼은 이 수필이 대히트를 치면서 마작 붐이 일어난다.
메이지, 타이쇼 시대에는 마작을 치는 것 = 젊고 잘나가는 지식인들의 소양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인기를 누렸는데, 지금은 상당히 보수적인 글과 소설을 출간하는 일본의 "문예춘추"사가 사실 일본에서의 마작 붐을 일으킨 원흉 중에 하나다. 타이쇼 시대에 문예춘추는 마작에 얽힌 설화나 마작 공략집 등을 출간하면서 마작 붐을 형성하는데, 종국에는 마작 패를 제작해서 판매하기도 했다. 마작 역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시기에 이르러 "도박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한때는 쇠퇴의 길을 걷기도 했지만, 1960년대에 이르러 일본이 고도성장기에 진입하면서 한국 및 중국과의 왕래가 잦아지기 시작할 무렵, 당시 잘 나가던 일본의 소설가, 이로카와 타케히로(色川武大)가 자신의 다른 필명, 아사다 테츠야(阿佐田 哲也) 명의로 마작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 중국을 오가며서 마작을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한, 1965년부터 75년까지 10년에 걸쳐 연재한 "마작유랑기"라는 소설이 대히트를 치면서 보급되기 시작했고, 이 인기를 바탕으로 마작을 "도박"에서 하나의 "문화"로 바라보는 풍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로카와 타케히로는 "마작은 단순한 도박이 아닌, 중국 5천년 역사를 담은 지적인 게임"이라는 식으로 마작을 찬미해댔고, 그래서 얻은 별명이 바로 마작계의 성인, 즉 작성(雀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