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창군(義昌君) 신(臣) 신광(申珖)은 하교(下敎)를 받들어 삼가 쓰고, 유록대부(綏祿大夫) 동양위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東陽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 신 신익성(申翊聖)은 하교를 받들어 전액(篆額)하고, 분충찬모입기정사공신(奮忠贊謨立紀靖社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신풍군(新豊君) 신 장유(張維)는 하교를 받들어 짓다.
숭정(崇禎) 6년 겨울 11월에 성상께서 신 장유에게 다음과 같이 명하시기를, “내가 군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린 지가 이제 12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인빈의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워 새기는 일을 빠뜨리고 있었으니, 이것은 지체한 것이 아니라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장차 좋은 돌을 세우려고 하니, 그대는 그 비명(碑銘)을 지으라.” 하였다. 신이 명을 받들고 보니 두려울 뿐이었다. 삼가 김씨에 대하여 조사하여 보니, 본관(本貫)은 수원(水原)이었으며, 조상 중에서 휘(諱)가 준(浚)인 분이 고려조(高麗朝)에서 벼슬을 하여 수성부원군(隋城府院君)에 봉해졌고 호(號)는 어은(漁隱)이며, 이로부터 여러 대를 전해 내려와 휘가 귀영(貴榮)이신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이 문장과 덕행을 기르셨으니, 이 분이 그의 증조부이시다. 조부의 휘는 순은(順銀)으로 만호(萬戶)를 지내셨고, 아버지의 휘는 한우(漢佑)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어머니 이씨(李氏)는 충의위(忠義衛) 효성(孝性)의 따님으로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며, 가정(嘉靖) 을묘년 2월 갑오일에 빈을 낳으셨다. 빈께서는 어릴 적부터 특이한 기질이 있었으며, 어여쁘고 신중하여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멀리 친구를 따라 놀러 갔었으나 조금도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으셨다. 영인의 표자 숙의 이씨(淑儀李氏)는 명종(明宗)의 후궁(後宮)인데 빈을 데려다 궁중에서 길렀다. 인순왕후(仁順王后)가 보고 기특하게 여기셔서 선조대왕(宣祖大王)의 후궁으로 삼도록 하니, 그 때 나이 겨우 열 네 살이었다. 빈이 내직을 받음으로부터 윗사람에게는 공경으로 대하고, 아랫사람에게는 너그러움을 펴서 두루 융숭하게 보살피고 몸가짐을 더욱 조심하니, 궁중이 모두 화합하고 탄미하여 빈의 거동을 사표(師表)로 삼았다. 만력(萬曆) 계유년에 숙원(淑媛)에 봉해지더니, 직품이 점점 높아져서 귀인(貴人)에까지 올랐다. 의인왕후(懿仁王后)가 환후가 들자 빈이 몸소 간호하시면서, 조석으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으셨다. 왕후가 승하하시자 스스로 눈물을 머금으며 염을 하시니, 그의 예절이 지극하여 빈의 처소에 있는 궁인들이 조금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못하였다. 빈이 잘못을 없음을 포상하여 병오년에 작위를 더하여 인빈이라 하였다. 무신년에 선조(宣祖)께서 승하하시니 빈이 너무 지나치게 슬퍼하였고, 3년이 지나 궁중을 떠나 사제(私第)에 기거하면서 화려한 장식을 버리고, 웃으시되 이를 보이지 않으셨으며, 항상 시종을 부르는 일이 없었다. 남몰래 애통해 하곤 하였는데, 자손들이 더러 예를 갖추어 수연(壽宴)을 열어도 일찍이 한번도 기뻐한 적이 없으셨다. 계축년 10월 29일에 병으로 인하여 졸하시니, 춘추가 59세이셨다. 이해 12월 19일에 양주(楊州) 풍양리(豊壤里) 남향의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빈은 천성이 온화하고 부덕(婦德)이 순박하였으며, 선조대왕에게 은혜를 입은 지 40년이나 되었으나, 스스로 겸양하여 자신을 지키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달라지지 않으셨으며, 평생에 말을 빨리하거나 안색을 붉히는 일도 없었고, 미천한 하인이 잘못하여도 싫은 소리를 하거나 꾸짖는 일이 없으셨으니, 친소(親疎)와 귀천(貴賤)을 따지지 않고 각각 그 마음에 들게 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의 무도함을 당하여 선조대왕의 지속(支屬)들이 모두 다 두려워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벌벌 떨었으나, 빈께서는 법도를 지켜 기거하였으므로 광해군도 또한 공경하고 복종하여 빈이 졸할 때까지 감히 환란을 가하지 않았다. 빈이 졸하고 나서 능창대군(支屬大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빈은 네 아들과 다섯 딸을 기르셨으니, 장남은 의안군(義安君) 성(珹)인데 장가도 가기 전에 요절하였고, 둘째 신성군(信城君) 우(珝) 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신립(申砬)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다음은 원종대왕(元宗大王)이시고, 다음 의창군(義昌君) 광(珖)은 판서 허성(許筬)의 딸에게 장가 드셨다. 큰딸 정신옹주(貞愼翁主)는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주)에게 출가했고, 다음 정혜옹주(貞惠翁主)는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에게, 다음 정숙옹주(貞淑翁主)는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에게, 다음 정안옹주(貞安翁主)는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에게 각각 출가 하였으며, 다음 정휘옹주(貞徽翁主)는 전창군(全昌君) 유정량(柳廷亮)에게 출가했다. 원종대왕은 처음에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졌었다. 부인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 구씨(具氏)는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구사맹(具思孟)의 따님으로서, 세 아들을 낳으셨다. 장남은 곧 우리 전하이시고, 둘째는 능원대군(綾原大君) 보(보)인데 유씨(柳氏)의 딸을 아내로 삼았으며, 다음은 능창군(綾昌君) 전(佺)이다. 능창군은 어려서 뛰어난 재주가 있어 광해군에게 미움을 받아 무고를 당해 귀양을 갔다. 마침내 광해군이 점점 혼미하고 포악해져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여 가두고, 백성들에게 악정을 펴며 기강과 인륜을 무너뜨리니 종사가 점점 위태로워졌다. 천계(天啓) 계해년에 우리 전하는 온 국가의 소망에 따라 혼란을 바로잡아 반정(反正)하여 인목대비를 받들어 복위(復位)시켰다. 인목대비께서는 전하께 명하시어 대통(大統)을 잇도록 하셨다. 을축년 여름에 황제(皇帝)께서 태감(太監) 왕민정(王敏政)호양보(胡良輔)를 보내어 국왕으로 봉하고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하사하였다. 처음에 정원군을 추존하여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으로 삼고, 연주군부인을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으로 삼았다. 얼마의 시일이 지나서 다시 대원군의 존호(尊號)를 원종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元宗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이라 하였고, 부인은 경의정정인헌왕후(敬懿貞靖仁獻王后)라 하여 황조(皇朝)에 허락을 청하였다. 천자(天子)가 조서(詔書)를 내려 추봉(追封)하도록 하고 원종 대왕의 시호를 공량(恭良)이라 하였다. 이에 상께서 유사(有司)를 명하여 인빈의 사당에 기신(忌辰)과 절일(節日)마다 관에서 제구(祭具)를 제공하고 또 묘소에 무덤을 지키는 집 16호를 두었다. 전하는 왕비 한씨(韓氏)를 맞이하니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한준겸(韓浚謙)의 딸로서, 왕세자 애와 차자 봉림대군(鳳林大君) 호(淏)와 인평대군(麟坪大君) 요(㴭)를 낳으셨다. 세자는 판서 강석기(姜碩期)의 딸로 빈궁을 삼아 원손(元孫)을 낳고, 봉림대군은 신풍군(新豊君) 장유(張維)의 딸을 맞이하였으며, 인평대군은 부윤(府尹) 오단(吳端)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신성군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전적(典籍) 안홍량(安弘量)에게 시집갔다. 달성위는 세 아들에 다섯 딸을 낳았는데, 아들 정리(貞履)는 현감(縣監)을 지냈고, 정리(正履)와 진리(晋履)는 선비였으며, 딸은 진사(進士) 김규(金珪)에게 출가했고, 둘째딸은 주부(主簿) 이명인(李命寅)에게, 셋째는 선비 심항(沈伉)에게, 다음 딸은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권우(權堣)에게, 다음 딸은 선비 이만웅(李萬雄)에게로 시집을 갔다. 해숭위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서(墀)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고, 구(坵)는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동양위는 다섯 아들에 세 딸을 낳았는데, 아들 면(冕)은 생원이 되었고 승(昇), 경(炅), 초(最)는 모두 진사가 되고, 향(晑)은 선비이다. 딸은 세마(洗馬) 홍명하(洪命夏)에게 시집갔고, 다음 딸은 진사 강문두(姜文斗)에게, 다음 딸은 생원 김좌명(金佐明)에게 출가했다. 금양위는 아들 세교(世橋)를 낳았는데 선비이다. 전창군은 아들 둘과 딸을 낳으니 아들 염정(念正)과 자흡인데 모두 선비였고, 딸은 진사 이중규(李重揆)에게, 다음 딸은 선비 정화제(鄭華齊)에게 시집갔다. 안홍량은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은 심(淰)은 참봉이고 흡(洽)은 선비이며, 딸은 생원 한이성(韓以成)에게 시집을 갔다. 능원군은 서출로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순(淳), 함, 필(泌)이다. 능창군은 서출로 딸 하나를 두었는데, 선비 허서(許舒)에게 시집 갔다. 서정리(徐貞履)는 아들 둘, 딸 둘을 두었고, 정리는 딸 하나를 두었으며, 김규는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진사 홍석(弘錫)이다. 이명인(李命寅)은 아들 하나, 딸 둘을 낳고, 심항(沈伉)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지유(之游)와 지영(之泳)이며, 권우는 딸 셋을 낳고, 이만웅은 딸 하나를 낳았으며, 윤지는 딸 하나를 낳아 진사 김익겸(金益兼)에게 시집보냈다. 신면(申冕)은 아들 하나, 승은 아들과 딸 각각 하나씩을 낳았고, 경도 딸 하나를 낳았고, 최는 딸 둘을 낳았다. 홍명하는 딸과 아들 각각 하나씩을 낳았고, 강문두는 딸 하나를 낳았으며, 김좌명은 아들과 딸 각각 하나씩을 낳았고, 박세교는 딸 넷을 낳았으며, 유염은 아들과 딸 각각 셋씩을 두었고, 이중규는 아들 둘을 낳았고, 정화제는 딸 하나를 두었으며, 안발은 아들 하나를 두었고, 광은 아들 둘을 두었다. 봉림은 딸 둘을 두었고, 허서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고, 김홍석은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았으며, 김익겸은 두 아들을 두었다. 내가 가만히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는 이치를 살펴보니, 미세한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뚜렷하였다. 인빈의 유순하고 아름다운 규범은 위로 선조의 훌륭한 덕을 받들어서 능히 천체를 맞이하여, 훌륭한 자손을 낳으시어 국가를 중흥하고 사직을 빛내시었다. 이와 같이 성대하게 된 것은 어찌 근본이 없이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周易』에 이르기를, “실행한 것을 살펴서 상서로움을 고찰하라.”하였고, 또 이르기를, “하늘이 도우시어 길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다.” 하였으니, 지금으로 증명해보면 이치는 속일 수가 없는 법이다. 아름답고 아름다워라. 처음에 명종께서 늦도록 아들이 없었으므로, 문정대비(文定大妃)의 근심이 매우 심하였는데, 하룻밤 꿈에 이인(異人)이 말하기를, “상주(尙州) 이모(李某)에게 딸이 있으니, 좋은 날을 받아 맞아 들여라.” 하였다. 꿈을 깬 후 사람을 시켜 물색하여 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는데, 홀연히 중 하나를 만나서 그가 사는 곳을 일러 주어 마침내 찾을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를 후궁으로 맞이하니 이가 이 숙의(李淑儀)이다. 숙의도 끝내 아들이 없었는데 인빈이 실로 숙의로 인하여 임금의 총애를 얻었으며, 그 뒤에 후손이 번창하여 오묘의 통서(統緖)가 마침내 귀결될 곳이 있게 되었다. 문정왕후의 그 날 꿈은 아마도 하늘의 계시일 것이다. 신은 이미 차례대로 위와 같이 열거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별처럼 빛나고 불꽃처럼 밝은 영대(靈臺), 근본이 밝고 밝아 세상에 으뜸이라. 난처럼 향기로우며 옥 같이 깨끗하고, 시에도 밝으시며 예절로 밝으셨네. 청규(靑規) 자리 위에서 은밀히 주상을 모시고, 붉은 칠한 붓으로 스스로 신칙하시었네. 성상의 총애 입고도 놀란 듯 조심하였고, 태평한 삶 속에서도 더욱 자신을 단속하였네. 오직 화목하시고 순하시어 상하를 화목하게 하였어라. 신께서도 이를 들어 아시고 온갖 복을 누리게 하였다네. 자손을 점지하시어 번성하면서도 인자하여, 메뚜기처럼 기린처럼 자손이 무성하였다네. 성자께서는 복을 두터이하고 신손(神孫)은 명을 이으시니, 종묘((宗廟) 사직(社稷)은 다시 빛을 보게 되었고 삼강오륜이 재차 바로잡혔다네. 오래전에 쌓은 선행 그 복을 지금 받고, 나라와 집안에 그 경사스러움 길이 뻗어 내려 지금처럼 아름답게 되었도다. 나라와 가문에 있어 종손(宗孫)과 지손(支孫)이 모두 다 함께 즐거워하였네. 풍악(豊岳)은 울창하고 돌은 우뚝 솟아있는데, 이 돌에 시를 새기니 영원히 무궁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