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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인천] 09년 여름호 기고
배다리가 배출한 인물들
이 원 규
배다리는 지난날 교육문화의 중심으로 인천 정신의 심장부와 같은 곳이었다. 배다리가 가진 뿌리 깊은 유서(由緖)에는 한국 근현대사에 명멸한 인물들도 포함된다. 태생과 생애가 배다리와 밀접했던 분들을 찾아보면 출중한 인물들이 무수히 많다. 빛나는 밤 별빛 같은 인물들이 배다리 인근에서 태어나고 공부한 뒤 각계를 대표하는 존재로 활동했다. 그것은 배다리의 영광이자 인천의 영광이었다.
배다리 인근에서 태어나 성장했거나 배다리를 지키며 산 분, 영화여학교 출신, 창영초등학교(옛 인천공립보통학교. 이하 창영학교로 표기) 출신, 그리고 인천상업중학과 인천고교(이하 인상과 인고로 표기) 출신 들을 찾아 정리했다. 필자가 보고 들은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인천광역시사』, 경인일보 특별취재팀의『인천의 인물 100인』, 고일의『인천석금』, 신태범의『인천 한 세기』, (사)인천광역시여성단체협의회의『역사 속의 인천 여성』, 조우성의『인천 야구 한 세기』, 그리고 이성진의 논문 <해방기 인천 좌익운동가 박남칠 연구> 등 여러 자료들을 참고하였다.
배다리 출신으로 첫 번째로 꼽을 분은 아무래도 동아일보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유명한 이길용(李吉用 1899~?)이다. 그는 경남 마산 출생이나 유년기에 인천으로 이사 와서 우각리(牛角里 현 창영동)에 살았다. 영화학교를 거쳐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멤버로 활동했다. 철도국 역무원으로 일하다가 3․1운동 이후 임시정부의 비밀문서를 철도편으로 탁송한 일로 옥고를 치렀다.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기자로 일했으며, 1936년 8월 25일 베를린올림픽의 영웅 손기정 선수 기사를 실으면서 손 선수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지워서 게재했다. 6․25 동란 중 납북되었다.
하상훈(河相勳 1881~1964)은 배다리에서 활동한 행적이 두드러진 분이다.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부친이 인천으로 와서 터진개(신포동)에서 객주를 열면서 이주했다. 내리에 있던 영화학교를 나와 배다리 인물은 아니나, 배다리에 있던 기독교사회관을 중심으로 기독청년회 활동을 한 주인공이다.
임영균(林榮均 1903~1969)도 주목할 인물이다. 인천에서 출생해 3․1만세 시위에 참가해 옥고를 치렀으며 경성치과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멤버였으며 정노풍․고유섭․조진만 등과 문학동인 활동도 했다. 배다리에 인천 최초의 치과병원을 열었는데 특이한 것은 치과 개원의이면서 병원 옆에 인천양조장을 세워 사업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언론인으로도 활동해『경기매일신문』과『주간인천』을 창간하기도 했다.
시인 김차영(金次榮 1922~1999)은 강화 출신이나 인천문학사의 중요한 족적을 배다리 부근 창영동에 남겼다. 그 기록이 단편적이나마 다음과 같이 『인천시사』에 전한다.
'8·15 광복 후 5년 간, 다시 말해 광복된 해부터 6·25전쟁이 발발하기까지는 해방된 열기에 들떠 있는 채 인천에서도 활발한 문학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활동을 시작한 문인은 김차영, 배인철 등의 시인들이었다. 김차영은 광복 후 인천에서 최초로 『문예탑』이라는 문예지 성격의 동인지를 발간했는데, 비록 등사판으로 제작했지만 광복 후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최초의 문예동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된 바로 그날 창영동에서 문예 동호인회의 첫 모임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는 송준호․김차영․우봉준․신영순․한재홍․윤기홍 등이 참석했다. 이들이 주도한 ‘신문화협회’라는 동호인회에서 『문예탑』을 펴낸 것이다. 그러나 인천에도 ‘문학가동맹’이라는 좌익계 문학단체가 결성되면서 신문화협회 동인에 속해 있던 많은 사람들을 흡수해 간 바람에 신문화협회는 자연히 와해되었다고 김차영은 술회하였다.'
김차영과 함께 창영동에서 문예동호인회 모임을 주도한 배인철(裵仁哲 1920~1947)은 특유의 흑인시(黑人詩)로 유명했다. 중앙고보와 일본 니혼(日本)대학 영문과를 나와 시인으로 활동했다. 1945년 인천에서 신예술가협회를 조직했으며 기관지『신예술』을 발간했다. 인천에서 제일 큰 일본식 요정 긴스이(銀水)를 인수해 ‘예술가의 집’ 간판을 걸고 인천과 서울의 예술가들을 초치했다. 흑인시를 주로 썼는데 분단된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실제적 의미를 흑인병사의 자아를 통해 형상화한 것이었다. 서울 남산에서 불의의 저격탄을 맞아 암살당할 때까지 <노예해안>, <흑인녀>, <조 루이스에게> 등 5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소설가 한남철(韓南哲 1937~1993)은 서울에서 출생했으나 가문의 근거지는 인천과 강화였다.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 인천 창영동에 살았다. 인천중학을 나왔으며 서울대 철학과를 중퇴했다. 1958년 약관의 나이에『사상계』에 단편소설 <실의(失意)>가 당선되어 등단했고 그 인연으로 다음해 사상계사에 입사했다. 그 후 <강설>, <바닷가 소년>, <별장이 있는 풍경> 등을 내놓아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인간이 한계상황에 부딪혔을 때의 심리와 죽음의식, 한국적인 정한의 세계를 자신의 전기적 사실에 반영시켜 형상화했다. 본명은 한남규(韓南圭)이다.
사이클 선수로 이름을 떨친 김호순도 배다리에서 활동했다. 사이클 운동의 선구자는 1920년대에 활동한 엄복동이지만, 광복 후의 명성은 인천 출신 김호순이 받았다. 그는 창영학교 앞에서 아우인 김호진과 함께 자전거포를 운영했고 1956년 멜버른올림픽과 1958년 제3회 동경아시안 게임 사이클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도쿄아시안게임에서는 사이클 도로부문에서 동메달을 차지했다.
영화여학교 출신을 이야기하려면 존스(G. H.Jones 한국명 조원시趙元時) 목사 부부부터 말해야 한다. 존스 목사는 1867년 미국 뉴욕 주 출생으로 1888년 선교사로 파견되어 왔다. 1892년 인천지방 선교부 책임자로 부임,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선교와 교육활동을 전개했다. 1892년 한국 최초의 미션스쿨인 영화학교를 내리교회 구내에 설립했고 1897년에는 우각리에 선교사 주택을 세웠으며, 3년 뒤 제물포웨슬레기념학교를 설립했다.
존스 부인은 1897년 남녀 학생들을 분리하기 위해 영화여학교를 별도로 설립하였다. 교사들은 존스 부인을 비롯하여 박용래․유진익․정재관․송수산나 등이었다. 그리고 1904년 배다리 인근 싸리재에 새 교사를 짓고 이사했고, 1909년 우각리로 다시 옮겼다.
인천의 근대 인물들 중에는 영화학교 출신이 많다. 애초에는 내리에 있었으므로 엄밀하게 보면 배다리 출신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영화여학교의 경우 1904년 우각리로 이사했기 때문에 그 이후 배출된 여성 인사들은 배다리 출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영화여학교 출신으로 제일 먼저 꼽을 인물은 김애식(金愛息 김엘리스. 1890~1950)이다. 한국 최초로 정규 서양음악을 전공한 분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때문에 피아노와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한 한국 최초의 여성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1914년 이화학당 제1회 대학부 졸업생이 되었다. 대학과가 전문학교로 발족될 때 음악과를 창설해 초대 학장을 맡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 11월까지 모교에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미 공군의 오폭으로 사망했다.
초창기 영화의 인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있으니 그분이 하복순(1896~?) 이다. 태생은 답동이나 1909년 4월 영화여자소학교에 입학해 이듬해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1914년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하고 1919년 대학과를 졸업했다. 3․1 만세운동 당시 김활란 등이 주동이 되어 조직한 이문회(以文會)의 회장 자격으로 학생들 앞에 나서서 뽕나무 가지 하나를 부러뜨리며 “뭉쳐서 하나가 되어야 행동에 성공할 수 있다”며 학생들을 만세 운동에 선동한 일화가 유명하다. 이 자리에서 후배 유관순이 크게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영화 출신 중에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유명한 사람은 김활란(金活蘭 1899~1970) 총장일 것이다. 김 총장은 금곡리(배다리)에서 출생하여 영화여학교를 나왔다. 1919년 이화여전을 마치고 동교 예과 및 고등과 교수로 있다가, 1924년 미국에 유학, 콜롬비아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9년에서 1945년까지 이화여전 교장, 재단이사장을 역임했고, 광복 후 이화여자대학 총장 겸 재단이사장에 취임했다. 대한적십자 부총재를 지냈으며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단장을 지내는 등 일제에 협력한 일 때문에 친일인물로 평가되는 아쉬움이 있다.
서은숙(徐銀淑 1900~1977)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율목동에서 출생, 영화여학교를 거쳐 평생 이화여대에 몸담았다. 1928년 미국 신시내티 사범대학과 컬럼비아 사범대학원을 졸업했다. 김활란보다 한 살 적지만 영화여학교와 이화여전의 다섯 해 후배였다. 평생 유아교육에 정성을 기울여 그 방면의 선구자로서 길을 열었다. 1965년 이화여대 총장 서리와 학교법인 이화학원의 이사장을 지냈다.
장명덕(1901~1990)은 소래 무지리 출생이다. 영화여자소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여 고향 무지리에서 살다가 협성여자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오빠인 장기진은 인천창영교회 창립 장로이기도 하다.
김애마(金愛麻 1903∼1996) 역시 인천 율목동 출신으로 영화여자소학교를 나왔다. 미국에 유학하여 1936년 내셔널대학을 졸업했다. 1940년 경성여자전문학교 보육부장을 거쳐 1945년 광복이 되자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부장이 됐다. 1946년에는 미 군정청 문교교육 심의의원에 위촉됐고, 같은 해 이화여대 총무처장에 취임했다가 총장서리를 역임했다. 1951년에는 이화여자대학 사범대학장에 취임했고, 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YMCA연합회장을 역임했다. 김활란, 서은숙, 김영의와 함께 인천 출신 이화인 4대 여걸로 꼽히고 있다.
김영의(金永義 1908∼1985년)는 12세 되던 1920년에 영화여학교를 졸업했다. 1929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한 후, 1935년 미국 뉴욕의 줄리어드 음악학교를 이수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복귀했다. 1945년 동 전문학교가 대학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음악과장이 되었다. 1946년 다시 도미하여 줄리어드 연구원에서 연수를 마치고 1950년 이화대학교 예술원장으로 복귀했고, 1966년에는 이대 음악대학장에 취임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모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황예도(1909~?)는 신화수리 출생으로 역시 영화여자소학교를 나왔는데 장명덕과 비슷하게 협성여자신학교를 나왔다. 화도교회, 창영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1936년 인천에 계명학원을 설립하여 인천에 널리 알려진 이순희(1906년~?)도 영화학교를 거쳐 이화여고보를 나왔다. 옛 알렌 별장을 매입해 학원을 확장, 운영하였으나 해방이 되면서 학원생들을 신흥초등학교과 축현초등학교에 분리 전학시키고 문을 닫았다. 이후 대한부인회 초대 인천지부장을 역임했으며 1948년 인천 최초의 여성 입후보자로 제헌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또 한 명 영화 출신 이옥녀(李玉女 1910~1987)는 강화 출신이나 영화여자보통학교와 일본 와세다대학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뒤 박창례와 함께 도산정(桃山町 현 도원동) 보각사 강당 일부를 빌어 관서학원이라는 간판을 걸고 성냥공장 정미소 노동자를 모아 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박창례와 함께 설립한 동명국민학교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특히 평생 교육 동지인 박창례는 대인 관계가 넓고 화통한 까닭에 교장을, 이순녀는 꼼꼼하고 온화한 까닭에 교감을 맡아 교사에게나 학부모에게나 학생에게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안인애(安仁愛 1893~?)는 1918년 배화학당을 졸업하던 1918년 9월 영화여자소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3․1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문과 비라를 넣은 가방을 영화여학교로 운반하려다가 일경의 검문을 운 좋게 피한 뒤 방향을 바꿔 고향 황해도 장연으로 가져가 집집마다 살포한 경력이 있다. 이길용․송의근 등과 내리교회 엡윗청년회 활동을 펼쳤다. 1927년 근우회 인천지회 조직에도 참여했으며 1946년 계명학원 설립자 이순희, 한글 점자 창안자 박두성의 부인 김경내 등과 인천애국부인회를 발족시키기도 했다.
생존해 있는 원로 여배우 황정순(黃貞順 1925~ )의 실제 출생지는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이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가 있는 인천으로 오면서 후일 영화학교에 입학했다. 4학년 때, 영화학교의 일본인 선생이 싫어 인근 학교(창영학교인 듯)로 전학을 했다고 구술하는데, 그 무렵 서울 수학여행에서 유명한 와이즈 뮐러 주연의 ‘타잔’ 영화에 영향을 받아 배우에 대한 선망을 가지게 되면서 가출, 결국 15세 때인 1940년 서울 동양극장 내에 설립된 극단 ‘청춘좌’에 입단하면서 배우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한국의 모범적인 가정부인 이미지로 세인의 사랑을 받았다.
창영학교 출신과 인상․인고 출신도 다사제제(多士濟濟)하다. 특히 당시의 창영 출신들 다수가 인상으로 진학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창영 출신과 인상 출신을 한데 묶어 배다리 출신, 혹은 배다리 관련 인물로 기술한다. 염두에 둘 것은 인상이 배다리에서 가까운 현재의 송림초등학교 자리로 이사한 것이 1922년, 율목동으로 이사한 것이 1933년이므로 인상․인고 출신은 1922년 이후 졸업한 경우에 배다리 출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창영만 나왔거나 관련이 있는 분으로는 우선 인천지역에 3․1만세운동의 불을 처음 지핀 김명진(金明辰)․이만용(李萬用)․박철준(朴喆俊)․손창신(孫昌新) 열사들을 들 수 있다. 모두 당시 4년제 창영학교 3, 4년생들로서 1919년 3월 6일 인상과 공동보조를 취하면서 인천지역 최초로 일제에 항거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들 중 김명진은 두 학교의 동맹휴학을 주동하고, 학교와 경찰서 간 연락 전화선을 절단하는 등 죄목이 중하여 체포된 뒤 재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기도 했다. 1995년 3월 6일 창영초등학교 총동창회에서는 교정에 ‘삼일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발상지’라는 기념비를 세워 ‘선배들의 애국충정을 빛내고 후학들에게 나라사랑의 교훈을 삼고자’한다는 비문과 함께 이들 배다리 인물 4인 선배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창영학교 교장이었던 조석기(趙碩基 1899~1976)도 대표적인 배다리 인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경북 영양 출신으로 제일고보 사범과를 나와 고향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중단하고 경북의전을 다녔다. 그 후 다시 교육계에 투신, 경기도에 교사로 부임했다. 1945년 서곶심상소학교 교장으로 해방을 맞은 그는 1946년 창영학교 교장으로 부임, 1961년까지 15년을 일하면서 근대교육 최고의 산실로 만들어 갔다. 어린이대의원회, 어린이신문, 어린이방송국, 어린이우체국, 어린이은행 등을 만들고 야구부, 축구부, 연극부 등 다양한 클럽활동을 하게 했다.
조진만(趙鎭萬 1903~1972)은 인천 출생으로 창영학교를 나왔다. 1920년대에 곽상훈․고유섭 등과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를 조직했다. 1927년 해주지방법원 판사로 법관생활을 시작했고 1943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했다. 1951년 법무부장관이 되었으며 1961년 대법원장을 지냈다.
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였던 고일(高逸 1903~1973)은 서울 출생이나 부친의 고향 인천으로 왔다. 창영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양정고보에 진학했다. 3․1 만세운동에 참가했고,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총무 겸 문예부장을 맡았다. 공립보통학교 교원, 인천부청 직원 등을 거쳐 『조선일보』인천 주재 기자, 『시대일보』인천 주재 기자를 지냈다. 그 후 사회운동, 민족운동에 투신하고 신간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투옥과 망명을 겪었다. 8ㆍ15 광복 후 인천시립도서관장을 지냈고 『대중일보』편집국장을 지냈다. 인천향토사 연구의 초석을 놓았으며 유명한『인천석금』을 남겼다.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은 창영 출신으로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를 나와 미학연구실 조수로 근무하며 미술사 연구에 몰입한 이후 한국의 고미술사 연구의 거목이 되었다. 1933년 개성부립박물관장에 임명됐다. 논문 <미학의 사적개관>, <송도고적 순례> 등을 발표해 주목 받았으며, <조선탑파의 양식 변천>(1943. 도쿄 일본어학연구대회 발표)은 한국 고미술사의 최고 저술로 인정된다.
창영학교를 거쳐 인상을 나온 분들도 많다.
주정기(朱定基)는 생몰년 미상이다. 개항 후 인천에서 성공한 정미업자로서 인천 갑부 10걸에 꼽히는 명기, 봉기, 정기, 원기 4형제분 중의 셋째이다. 1915년 창영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인상에 진학했다. 미상조합장과 인천상공회의소 한국인 측 부회장을 맡은 큰형 명기의 뒤를 이어 인천상공회의소 상무의원을 맡아 활약했다. 1924년 창립된 제물포청년회에 임영균․ 이길용․이승엽․고일 등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이승엽(李承燁 1905~1953)은 고유섭과 창영학교 동기동창이며 인상을 거친 인물이다. 1919년 인상의 3․1만세 운동을 주도해 퇴학당하고 일본 도쿄 세이코쿠(正則)영어학교, 경성의 보성법률학교에서 수학했다. 1923년 조선공산당청년동맹에 가입하고, 1925년 제물포청년회 집행위원장을 지내며 인천의 청년운동을 주도했다. 이해 제1차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했다. 그리고 인천청년연맹, 인천무산청년동맹, 인천노동총동맹 등을 조직해 이끌었다. 1926년 '제2차 조공 검거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석방된 뒤 활발하게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 조선공산당의 거물로 커 갔으며 1932년, 1937년 검거되어 복역했다.
8․15 광복 후에는 박헌영 계와 합류하여 재건파 조선공산당 정치국원에 선임되고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사법부장 대리를 지내기도 했다. 1946년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 경기도당위원장,『해방신문』주필 등을 지내다가 1948년 박헌영의 지시로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사법상을 역임하였다. 1950년 6 ·25전쟁 시 서울시 임시인민위원장을 지내고 이듬해 노동당 비서가 되었으나, 1953년 8월 남로당계 숙청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형이 집행되었다.
주원기(朱元基 1910∼?)는 앞 절의 주정기 바로 밑인 주씨 가문의 4형제 중 막내로, 창영학교와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했다. 형들과 함께 가업인 정미소 경영에 합류해 환일정미소(丸一精米所)와 그 후의 협신정미소(協信精米所) 경영에 수완을 발휘했다. 초대 인천시의회 교육문화분과위원장과 경기도의회 부의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광복 후 곽상훈(郭尙勳)으로부터 보이스카우트 운동을 인계받아 중앙본부 사무총장을 맡기도 했다.
인천 체육의 선구자인 정용복(丁龍福 1910~1977)은 충남 서산 출생으로 소년기에 인천으로 이주, 창영학교와 인상을 거쳐 니혼(日本)대학에 유학했다. 보이스카웃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1954년 인천공설운동장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비평가 김동석(金東錫 1912~1953)도 배다리 출신이다. 싸리재에 살았으며 창영학교를 나와 인상에 입학했다가 서울중앙고보에 편입학했다.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고 1937년 『동아일보』에 평론 <조선 시의 편영>이 당선되었다. 광복 직후 잡지『상아탑』을 발간했으며 시집『해변의 시』,『길』등을 상재했다. 그리고 1947년에 평론집『예술과 생활』1949년에 『부르조아의 인간상』을 발간했다. 1949년 경 월북한 것으로 추정되며, 6․25전쟁 중 인민군 소좌 신분으로 남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신태환(申泰煥 1912~1993)은 인천에서 출생해 창영학교와 인상을 나왔다. 그 후 경성고등상업학교를 거쳐 도쿄상과대학 본과 입시에 합격했다. 85명의 합격자 중 조선인은 혼자였다. 졸업 후 귀국하여 연희전문 교수로 일했으며 교환 교수로 미국에 가서 시카고 대학 교수로 일하다가 돌아와 서울대학교 교수로 갔다. 케인즈 경제 이론을 한국에 도입했으며 건설부장관, 국토통일원장관, 그리고 서울대 총장을 지냈다.
불세출의 극작가로 일컬어지는 함세덕(咸世德 1915~1950)은 화평동 태생이다. 유년기에 전남 목포로 이주해 목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창영학교로 전학하고 인상을 나왔다. 1936년 희곡 <산허구리>를 『조선문학』에 발표했으며, 193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승(童僧)>이 당선되었다. 이후 활발한 극작 활동을 하다가 광복을 맞았으나 1947년 월북했다.
박영성(朴瑛星 1928~1996) 화백은 원래 충청남도 태안 출생이다. 어렸을 때에 인천으로 이주해 와서 창영학교와 인상을 졸업하고 6․25 전란을 전후하여 서울대 미대에 진학했다. 창영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1966년까지 동산고등학교 교사를 지내기도 했고, 이후 서울에서 몇몇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1980년부터 1993년까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는데 특히 수채화에 있어 독보적이라고 할 만큼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인천이 낳은 한국 수채화의 개척자라는 평을 들었다.
인상만 나왔거나 관련된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이원옥(李元玉 1890~1981)은 인천 태생으로 인상의 전신인 인천일어학교(日語學校) 1회 졸업생이다. 이 학교가 실업학교로 바뀌기 전인 1908년에 학교의 직원으로 들어가 1949년 정년퇴임 때까지 42년 간 봉직한 인상․인고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평직원에서 교장으로 승진된 보기 드문 인고의 터줏대감이기도 하다. 광복 직후인 1945년에는 정태영․권정석 등과 함께 인천향교(仁川鄕校)를 복구하고 향교복구기성회 초대 부회장을 맡았으며, 제2대 전교(典校)까지 맡아 인천향교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권정석(權正奭 1908∼1979)은 인천 태생으로 인상을 나왔다. 광복 후 한국은행 인천지점장을 지냈으며 대한제도사(大韓製陶社)를 운영하기도 했다. 1952년 인천시의회 초대 의원에 당선되어 산업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54년에는 출범한 인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에 피선되어 내리 3대에 걸쳐 회장을 역임했다. 1959년에는 조선제강 회장에 선임되는 등 평생을 인천 상공업 발전에 기여했다.
한상억(韓相億 1915~2002)은 강화 출신으로 인상을 나왔다. 금융업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광복 후 시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김차영․ 표양문․ 최태호 등과 ‘시와 산문 동인’을 조직하고 동인지를 간행했다. 1948년 『주간인천』 주필이 되어 언론인으로도 활동을 시작했다. 향토 언론과 문단을 지키면서 경기도예총회장과 인천시사편찬위원을 역임했다. 최영섭 작곡의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사자로 유명하며 노래비가 새얼문화재단에 의해 구월동 문화회관 광장에 세워졌다.
오화섭(吳華燮 1916~1979)은 남동구 출생으로 인상 33회 졸업생이다. 1940년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 영문과 졸업하고, 1941년 동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광복 후 김동석 등과 고려대학 교수를 지냈다. 수복 후 잠시 모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부산대 교수를 거쳐 연세대학 교수로 전임했다. 영어영문학회장, 한국 셰익스피어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부인은 성악가로 유명한 박노경(朴魯慶)이었다.
김선웅(1919~1978)은 인고가 낳은 인천 야구의 기념비적 존재요 인상․인고 야구의 대부라고 할 수 있다. 1937년 전조선야구대회에서 인고 팀이 우승하면서 전조선대표가 되어 고시엔(甲子園) 대회에 출전했다. 광복 후 인고 야구팀이 부활하자 자청해서 야구 감독을 맡아 무적의 명문 인천고 야구팀 육성에 헌신했다.
이밖의 분들은 순수하게 창영학교만 나온 분들이다.
박남칠(朴南七 1902~1950)은 배다리 인근 용동에서 출생했다. 고유섭․ 이승엽 등과 동기동창으로 1918년 창영학교를 졸업했다. 경성의 YMCA 중학부를 다녔는데 죽산 조봉암이 동기생이었다. 재학 당시 각종 강연회와 토론회, 특히 신흥우 목사와 이대위의 영향으로 기독교 사회주의를 접했다. 그 후 내리교회에서 엡왯청년회를 이끌며 청년운동과 인천의 노동운동에도 참여했다. 부친 박삼홍의 정미업을 물려받아 크게 성장시키며 인천정미업계의 거물로 성장했고 상공회의소 평의원과 인천미곡상조합장을 지냈다. 광복 직후 죽산 조봉암과 인천자치회를 결성했으며 건준(建準) 인천지부 결성을 주도하였다. 좌익운동의 지도자가 되었고 1947년 체포되어 복역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은신해 있다가 우익세력에 의해 체포되어 월미도에서 처형당했다.
동명학원 설립자인 박창례(朴昌禮 1910~1993)는 창영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정신여학교와 일본 와세다대학 2년 과정을 나왔다. 고향 인천에서 성냥공장과 선미공장 여공들을 모아 야학을 열고 동명학원을 세웠다. 1945년 광복 후 학교를 송림동으로 이전하고 정규 사립 초등학교로 인가를 받아 명문학교로 키웠다.
시인이자 향토사학자였던 최성연(崔聖淵 1914~2000)은 중구 율목동 출신으로, 창영학교와 경성제2고보(현 경복고교)를 졸업하고 영림서에서 일했다. 1947년 동아일보사 인천지사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영화 <심판자>를 제작했다. 1955년『동아일보』문예창작 현상 공모에서 시조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그 후 인천 향토사 연구에 몰두하여 개항기 인천에 세워진 양관(洋館)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한 역작 『개항과 양관역정』을 상재했다.
조각가 조규봉(曺圭奉 1917~1997)은 화수동 출신이다. 창영학교 재학 시부터 미술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으며 도쿄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에 본격적인 조각예술 공부를 했다. 1944년 귀국해 서울과 인천에서 활동했고 해방공간에 월북했다.
김은하(金殷夏 1923~2003) 전 국회 부의장 역시 창영 출신이다. 김 의원은 제헌국회 이래 단 한 분, 순 인천 태생 국회의원이었다. 1952년 초대 인천시의원 선거에 최연소, 최다 득표로 당선된 후 국회의원에 도전하여 6대부터 11대까지 내리 7선을 기록했다. 1980년대까지 남구 숭의동 209번지에 18대에 걸쳐 삶의 터전을 이룬 유서 깊은 인천의 대표적인 명가 출신이다. 1988년 야권 통합 실패의 책임을 통감하고 스스로 제13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해 진퇴를 분명히 한 깨끗한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여행가 김찬삼(金燦三 1926~2003)은 황해도 신천 출신으로 유년기에 인천으로 와서 창영학교와 인중을 다녔다. 서울대를 나와 인천고교 등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세계일주 무전여행을 하여 한국인들에게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어 주었다. 총 20차에 걸쳐서 세계여행을 했으며『끝없는 여로』등 여러 권의 여행기를 남겼다.
인천 야구의 슈퍼스타 박현식(朴賢植 1929~2005)은 평남 진남포 출생이나 7세 때 인천으로 이주하여 창영학교를 나와 동산중에 진학했다. 1945년 창단한 동산중학 야구팀 1기로 인천 야구를 전국 최강으로 군림케 했다. 부동의 국가대표 4번 타자로 후에 인천에 창단된 최초의 프로야구팀 삼미슈퍼스타즈의 초대 감독을 맡았다.
강재구(姜在求 1937~1965) 소령은 창영초등학교, 인천중학교, 서울고등학교를 나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16기생으로 졸업했다. 1965년 정부의 월남파병 결정 이후 파병을 자원하여 맹호부대 제1연대 10중대장으로서 홍천(洪川) 부근에서 수류탄 투척훈련을 하던 중 부하의 실수로 수류탄이 중대원 가운데로 떨어지자 몸으로 덮쳐 부하들의 생명을 구하고 산화했다.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졌고 소령으로 추서되었으며 육군사관학교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생몰 연대는 불명하나 배다리 인물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의성사숙을 경영한 김병훈이다. 지조가 높고, 청빈한 양반으로 박학다재하고 강직, 청렴한 인격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금곡동 창영학교 현 강당 서쪽에 ‘의성사숙’을 연 것은 대략 1910년 무렵이다. 중국의 유교 철학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고,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쳤는가 하면, 동양화와 서체도 가르쳤다고 한다. “삼현 육각의 재능을 가진 취헌 산생도 말년에는 ‘밀턴’처럼 소경이 되었다. 내동 한 모퉁이 좁은 방에서 청빈한 말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인천석금』에 기록되어 있다.
박정화(朴貞華 1894~?) 수녀는 금곡리 70번지 출생이다. 박문여고를 나와 서울 명동 천주교성당 내 수녀원에 들어가 수녀가 되었다. 반일 독립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받았던 배다리 출신 인물이다.
생몰년을 확인할 수 없는 인물로 장건식(張健植)이 있는데 1914년 창영 제5회 졸업생으로 나와 있다. 이길용 · 이건우 · 고일 · 이승엽 등과 제물포청년회를 조직하고 동인지『제물포』를 발간하는 등 문예 활동을 했다. 후일 군 장성으로 진급한 뒤 예편하고 국방부 차관보를 지냈다.
배다리를 지켜온 대표적인 생존 인물로 현재 지성소아과 원장으로 계신 김관철 (金寬哲 1919~ ) 박사가 유명하다. 평양 출신으로 평양고보와 평양의전을 나온 김 박사는 1947년 월남한 뒤 인천 배다리에 지성의원을 열었다. 그리고 터줏대감처럼 인천과 배다리를 지켜 왔다. 인천시의회 의원, 라이온스 클럽 총재를 지냈다. 회고록『인술 찾아 80평생』이 있다.
또 한 분 야구계 원로 유완식(劉完植 1919~ )은 황해도 배천 출생이나 유년기에 인천으로 와서 1932년 창영학교를 나왔다. 일본 오사카(大阪)상고에서 야구선수로 활약했으며 초창기 일본 프로야구 ‘한큐(阪急) 브레이브스’ 팀에서 포수로 활약했다.
창영 출신으로는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崔永燮 1929~ )이 여전히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다. 강화 출신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창영으로 전학해 와서 인천중학교로 진학했다. 2000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광장에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새얼문화재단에 의해 세워졌다.
그밖에 배다리와 깊이 관련된 인물로는 심정구 전 국회의원, 오광철 전 인천일보 주필, 이기상 영진공사 회장,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나근형 인천시 교육감, 신용석 아시아올림픽평의회부회장, 장평순 교원그룹 회장 등을 들 수 있다. 이분들은 배다리 주변에서 성장하거나 창영, 인천고 등을 졸업했으며 배다리가 가진 유서와 인천 정신 속에서 성장한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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