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산으로 갑니다/ 송규호
그리워하는 이는 산으로 갑니다.
아쉬워하는 이는 산으로 갑니다.
산이 높아서 산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물결 사나워서 산으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그리워
삶이 그리워서,
그저 산으로 갑니다.
산이라면 어디로 가나 산이옵니다.
사랑을 찾는 이는 산으로 갑니다.
산은 마음의 고향입니다.
소망스러워서
아쉽고 그리워서
그저 산으로 갑니다.
산이라면 어디로 가나 산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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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찰산에 올라/ 송규호
우수영 울돌목은
돌도 울던 옛 싸움터
새로 열린 연륙교
붐비는 구경꾼들
무심한 길 언덕 위에
대첩비만 높았다.
* 첨찰산(尖察山): 전라남도 진도군의 섬 진도에 있는 높이 485m의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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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송규호
무등이 말이 없을 때
나는 기쁘고,
무등이 말이 없을 때
나는 슬프고,
무등이 말이 없을 때
한없이 외롭다.
무등이 다문 입술 여는 날
빛은 세상을 밝히고
그리고 사라진다.
* 무등산(無等山):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화순군 이서면과 경계를 이룬 높이 1187m의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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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산 내리막길/ 송규호
어머님 가신 뒤,
소식 그립더이다.
스쳐간 구름결에
얼비치는 그 모습
누룽지 옴싸 안고
하늘 다시 쳐다보다
헛디딘 내리막길에
그저 주저앉았소.
*운문산(雲門山):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과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경계에 있는 높이 1188m의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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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눈매/ 송규호
발왕아, 옥녀야,
마음이 두터워 발왕이냐,
옥같이 고운 태깔
예쁘다 못해 옥녀더냐.
가난이 죄 되어
돈벌이 떠난 발왕이
기약 없는 세월 속에
이루지 못한 사랑이어라.
오늘도 그저 아련히
전설 속에 바라보는
그리운 눈매
발왕산, 옥녀봉이다.
*발왕산(發旺山):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과 도암면 경계에 있는 높이 1458m의 산.
*옥녀봉(玉女峰): 발왕산 동쪽의 높이 1146m의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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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마음/ 송규호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어찌 분갈이 동백뿐이랴.
소망과 의욕만으로
봄은 꽃을 피우지 않는다.
너와 나를 모르는 서로 다른 맘 바탕에
또 기다림으로 이어지는
아득한 고개, 그리운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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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문삼나무/ 송규호
야쿠시마의 선노인(仙老人)
7천2백 년 묵은 승문삼(繩文杉)나무
그 생명의 숨소리를 들으려 해도
당신은 아무 말이 없고,
사람들은 오늘도 저녁놀을 바라보며
눈물만 글썽글썽 그저 아름답다 하네.
*야쿠시마(屋久島): 일본의 가고시마현(鹿兒島縣)에 속하는 섬. 원시자연림이 있어서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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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마을 배로/ 송규호
여기 배로는
얼음과 곰, 그리고
에스키모의 나라다.
오로라의 세계다.
내내 그리워서
한사코 찾아왔다
서운하게 떠나야 하는
원시의 땅 끝이다.
*배로(Barrow): 미국 알래스카주(州)의 최북단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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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산은/ 송규호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다.
바위는 서로 흘겨보지 않는다.
꽃도 나무도
노루, 토끼, 멧새도
투덜댈 줄 모른다.
그렇기에 산은
깊은 가슴 활짝 열고
영겁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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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송규호
고향이 어디냐고
물을 적마다
정들면 어디든
고향이라 했건만
어머님 급한 전갈에
깜짝 놀란 내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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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인생/ 송규호
앉으면 모란
일어서면 작약
걸어가는 모습일랑
영락없는 나리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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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메 송규호: 1921년 전남 완도군 출생/ 1974년 수필집 [마음의 고향]으로 등단/ 2013년 영면.
수필집 [마음의 고향], [산골에 묻힌 이야기], [추억의 그늘에서], [가랑잎 사연], [소리가 들린다],
[산바람 골바람], [세월의 뒤안길에서], [아득한 길], [구름 따라 고개 넘어], [기다리는 마음],
[달팽이의 잠꼬대], 수필선집[93고갯마루에서].
시집 [풀잎의 노래], 시선집[철새의 날갯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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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규호 선생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그럼에도 항시 몇 번은 뵌 분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분의 제자들의 입을 통해 들은
담박한 모습 때문일 거다.
엊그제도 한 문인께서 말씀하였다.
"스승님 돌아가셔서 모르는 것 물을 데도 없어졌고......"
그 문인도 상당히 꼼꼼하시고, 모르는 것은 끝까지 찾아볼 만한 분이신데
돌아간 스승을 그리는 말씀을 완곡히 하시던 것이다.
아름다운 관계가 점점 사라져가는 요즘
가슴 떨리던 말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