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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글에 이어서...)
<천공카드와 자카드 직조기>
1789년 7월 14일, 분노한 파리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이후 <인권 선언>을 탄생 시켰고, 프랑스 혁명 전쟁을 치루며 루이 16세와 그의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를 단두대의 제물로 바치고 프랑스를 공화국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혁명정부의 공포정치와 혼탁한 권력 다툼 속에서 주변국과의 전쟁은 프랑스의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한 군인이 등장하며 이탈리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며 자신의 불량사전을 선전했던 그 사람 (-_-),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1769년~1821년)였습니다.
1798년 이집트로 원정을 갔던 나폴레옹은 우여곡절 끝에 1799년 귀국하여 브뤼메르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통령정부'를 수립하며 통령이 되었습니다.
1804년,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와 나폴레옹 전쟁에 대하여 흥미로운 글을 많이 쓰는 블로거를 소개합니다. 나폴레옹에 대해 흥미있는 사람들은 방문해 보기를...
(Nasica의 뜻은? : http://blog.daum.net/nasica/6862475)
1798년 이집트 원정을 떠났던 나폴레옹은 귀국하면서 이집트의 멋진 비단 숄을 들여옵니다. 이는 곧 프랑스 사교계에 엄청난 유행을 몰고 왔으며, 대량생산을 위해 종이판의 구멍으로만 바늘이 통과해 숄을 짜는 직조기의 발명으로 이어졌습니다.
1801년, 프랑스 리옹 출생의 발명가 조셉 마리 자카드(Joseph Marie Jacquard, 1752~1834)가 자신의 방직기계에 섬유 패턴을 자동으로 짜 넣기 위해 "천공카드(punched card)" 시스템을 개발하게 됩니다. 그는 이 기계를 1801년 만국박람회에 선보이며 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당시 방직기계는 실을 자동으로 끌어와 천을 짜는 여러 개의 쇠막대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자카드는 이 쇠막대들의 움직임을 통제하면 특정 색상의 실을 끌어 올 때 자동으로 섬유 패턴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착안합니다. 즉, 빳빳한 종이에 구멍을 뚫어 쇠막대와 실 사이에 놓으면, 구멍이 뚫린 부분은 실이 엮어 지고, 구멍이 뚫리지 않은 부분은 쇠막대가 가로막혀 실이 엮이지 않는 것이죠. 이렇게 매번 다른 색깔의 실을 엮을 때마다 새로운 카드를 넣어주면 원하는 대로 패턴이 짜 맞춰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천공카드 시스템은 방직 패턴을 카드에 뚫린 여러 개의 구멍으로 '미리 해석'해, 옷감 패턴이 자동으로 짜이게 했습니다. 말하자면, 자카드의 천공카드는 가장 기본적 형태의 '기계적 프로그래밍(programming)'이었죠. 천공카드 시스템은 미국 만화나 서부 영화에 등장하는 '자동 연주 피아노(player piano)'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자동 연주 피아노 역시 악보를 카드 위의 구멍들로 '프로그래밍'해 피아노가 저절로 곡을 연주할 수 있게 했던 것이죠.
천공카드 시스템의 발명은 섬유산업에 일대 변혁을 몰고 왔을 뿐 아니라, 현대 컴퓨팅 기술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끼쳤습니다. 천공카드의 원리는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와 허먼 홀러리스(Herman Hollerith)에 의해 응용돼 데이터를 산출하고 컴퓨터를 프로그래밍하는 등, 초기 컴퓨터를 위한 중요한 핵심 기술로 자리잡게됩니다.
<배비지의 차분기관, 해석기관>
찰스 배비지의 생애는 '괴짜'라는 한마디말로 요약됩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2년 뒤인 1791년 영국 런던 남쪽의 작은 도시 에서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871년 80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잇따라 천재다운 번뜩이는 머리와 상식에 어긋난 처신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중년이후 한 시절 그는 이름난 수학자와 색다른 디퍼런스 엔진을 개발중인 부유한 발명가로 알려진 런던 사교계의 명물이었습니다. 그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는 진화론의 찰스 다윈, 소설가 찰스 디킨스, 미국의 시인 헬로 롱펠로우, 메어리셜리(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데이빗 브루스터(광학연구로 유명. 브루스터각, 브루스터 법칙으로 유명함), 찰즈 휘트스톤(전기 연구로 유명), 데이빗 패러데이(물리학의 전자기학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이 있음. 패러데이효과등의 발견으로 유명) 등의 명사들도 자주 참석했었습니다. 이 파티에서 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알아 주었던 '에이다 러브레이스'도 만나게 되었지요.(그렇다고 우리나라 막장드라마 같은 ㅂㄹ같은건 아니었다고... -_-;)
배비지는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강했답니다. 장난감을 사주면 내부 구조를 알고 싶어했고 곧 분해했습니다. 그는 몸이 약했으나 머리가 아주 좋았습니다.10대 초반 수학에 미쳐 한밤중에도 문제를 풀었고 발명에 몰두하여 물 위를 걸을수 있는 장치를 만든다고 열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적 배비지의 또 다른 취미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악마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자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고 주기도문을 거꾸로 외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악마는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학교교육 대신 개인 교습를 받은 배비지는 1810년 19세 때 수학과 화학을 배우기 위해 아이작 뉴튼이 다닌 명문 칼리지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진학했습니다. 관심이 워낙 다양했던 배비지는 엉뚱한 행동도 자주 했다고 합니다. 섭씨 124도의 온도에 순간적으로 접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날 것인가를 실험하기 위해 직접 오븐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위험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금새 수학 교수들의 실력이 자기만 못한 것을 알아차리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배비지는 뜻맞는 친구들과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더욱 현명하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고 서약했습니다. 이들은 곧 해석협회를 만들고 미분에 관한 기호에서 뉴턴의 방식보다 독일의 라이프니츠 방식이 더욱 합리적이라는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영국과 독일의 자존심이 걸린 이 논쟁에서 배비지와 친구들은 합리를 앞세워 독일편에 섰고, 끝내는 dx처리를 앞세워 dx처럼 표시하는 라이프니츠 방식으로 바꾸게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1814년 23세이던 배비지는 너그러운 성품을 가진 금발여성과 결혼했지만 남편으로서는 제멋대로여서 배비지 부인은 크게 마음을 상할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배비지는 대학시절부터 새로운 계산기를 구상했습니다. 그 무렵 과학과 수학 계산에서는 정확하지 못한 수표(數表)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확한 항해를 위한 계산에도 천문도와 곱셈표, 대수(對數)와 사인, 코사인 같은 삼각함수표, 대기의 밀도와 중력에 관한 표들을 이용했습니다.
아버지에 의지한 채 직장도 없이 우편제도 연구, 잠수실험, 과학적인 가짜 거지 식별법 등 색다르거나 터무니없는 일에 열중하던 배비지는 학생때부터 생각했던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새 계산기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1822년에 배비지는 기계식 디지털 계산기인 ‘차분기관(difference engine)’을 발표했는데, 배비지의 차분기관은 기존의 기계식 계산기와 달리 로그 함수와 삼각 함수의 계산이 가능했습니다. 차분기관은 핸들을 돌려 작동했지만, 천공 카드(일정한 패턴의 구멍을 뚫어 데이터를 기록하는 종이 카드)를 이용해 디지털 데이터(0과 1)를 기록할 수 있다는 점이 오늘날의 컴퓨터와 유사한 점이었습니다.
왕립천문학회를 비롯하여 학계의 인정을 받는 배비지는 32세이던 1823년 새 계산기를 만들겠다고 정부에 지원을 신청했습니다. 그는 자기 연구가 바다의 나라 영국에 필요한 항해술과 대포의 탄도 계산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배비지는 정부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연구 지원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정부가 개인의 연구를 도와준 첫 케이스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영국 정부는 처음에는 이 연구를 지원했지만 배비지가 이 기계를 만들지는 않고 계속 추가 지원금을 요구하자 지원을 철회하였습니다. 배비지는 더 일반적인 연산이 가능한 해석기관의 연구를 계속했지만 1847년부터 1849년 사이에는 차분기관의 설계를 발전시켜 "차분기관 2호"를 설계했습니다.
배비지는 1837년에는 방정식을 순차적으로 풀 수 있도록 고안된 좀 더 범용적인 기계식 자동계산기인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을 설계하였습니다.
해석기관의 논리적 설계 자체는 매우 현대적이었으며, 약 100년 뒤의 첫 범용 컴퓨터의 모습을 예측하였습니다. 이 자동 계산기는 ①수를 저장하는 장치(기억) ②저장된 수치간의 계산을 하는 장치(연산) ③기계의 동작을 제어하는 장치(제어) ④입출력 장치로 이루어져 오늘날 사용하는 자동 컴퓨터의 모든 기본 요소를 갖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기계부품 제작 기술의 한계로 인해 실물을 제작하지는 못했습니다. 해석기관은 컴퓨터 역사에서 중요한 발전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업적으로 배비지는 '컴퓨터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었지요.
존 그레이엄-커밍의 TED 강연 : 제작되지 못한 최고의 기계
http://www.ted.com/talks/lang/ko/john_graham_cumming_the_greatest_machine_that_never_was.html
<최초의 프로그래머, 에이다 러브레이스>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 1815-1852)는 1815년 12월 10일, 시인 바이런과 앤 이사벨라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바이런의 누나인 Augusta Leigh의 별명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바이런은 이듬해 봄에 영국을 영영 떠났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에이다가 9살이 되던 해인 1824년에 사망했습니다.
에이다는 찰스 베비지와 사회적으로, 그리고 베비지의 차분기관(Difference Engine)과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과 관련해 여러 번 만나고 서신을 교환했습니다. 베비지는 에이다의 재능과 글쓰기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그녀를 숫자의 마술사(Enchantress of Numbers)라고 불렀답니다.
1842년 베비지와 함께 해석기관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 <베비지의 해석기관에 대한 분석(Observations on Mr. Babbage’s Analytical Engine)>을 출판하게 됩니다. 이 책에서 에이다는 해석기관의 개념을 설명하며 프로그래밍 언어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개념인 루프(loop), 서브루틴(subroutine), 점프(jump)와 조건식 IF문을 고안해 냅니다. 이를 바탕으로 미래에는 프로그램을 통해 음악을 작곡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도 가능할 것으로 예견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후세에 앨런 튜링 등 많은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에이다 러브레이스를 세계최초의 프로그래머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 에이다 러브레이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말년에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1852년 11월 27일, 36살의 나이에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ㅠㅠ) 그녀는 노팅햄(Nottingham) 허크놀(Hucknall)의 성 막달레나 교회(Church of St. Mary Magdalene)에, 아버지 옆에 묻혔습니다.
1970년대 말, 미 국방성에서 새로운 프로그래밍 언어를 발표하였을 때 그들은 에이다 러브레이스가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끼친 업적을 기려 그 이름을 에이다(ADA)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영국 컴퓨터 협회(British Computer Society)는 매년 그녀의 이름으로 메달을 수여한다고합니다.
<홀러리스의 펀칭카드시스템(PCS)>
1700년대 말부터 미국은 10년 주기로 인구 조사(census)를 실시하였습니다. 11번째 인구 조사가 실시됐던 것은 1880년. 그러나 조사가 끝난 지 무려 7년이 지났지만 결과는 감감 무소식이었습니다. 기다리다 못한 인구조사국 조사국장은 전국적으로 새로운 인구 조사 통계 처리 방식을 공모했습니다(1887년).
이 때 1등으로 당선된 사람이 독일계 미국인 통계학자 허만 홀러리스(Herman Hollerith, 1860-1929)였습니다.
홀러리스는 1000원짜리 지폐 크기 만한 종이에 10여 개의 구멍을 뚫어 인종, 연령, 직업 등 여러 가지 자료를 나타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생각을 기초로 홀러리스는 천공 카드 시스템(PCS : Punched Card System)과 함께 태뷸레이터라는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태뷸레이터는 구멍을 뚫어 표시한 천공 카드를 읽어 통계를 낼 수 있는 장치였습니다. 그가 만든 천공 카드에는 20개씩 12줄 모두 240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홀러리스의 기계 덕분에 미국 인구 조사는 6주만에, 최종 결과는 3년만에 나오게 됐습니다. 이 기계의 발명으로 성공을 거둔 홀러리스는 1896년에 ‘태뷸레이팅 머신 컴패니(Tabulating Machine Company)’라는 회사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천공 카드와 제표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연 1천 달라에 자신의 기계를 관청과 기업에 임대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돈벌이가 되는 것은 펀치카드였지요.
펀치카드는 대량으로 필요했고 딱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점~. 카드 사업이 워낙 돈벌이가 됐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기계를 무료로 대여해주기도 했습니다(이런 상술이 그때도... -_-). 세기말 TMC는 그들의 펀치카드기계를 많은 유럽 국가에 수출했습니다.
1911년 홀러리스는 기업을 뉴욕의 금융가 찰스 플린트에게 매각했고, 이후 이 회사는 다른 2개의 회사와 합병되면서 1914년에 Computing-Tabulating-Recording Company(C-T-R Co.)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플린트는 1914년 토머스 왓슨 (Thomas John Watson, Sr. 1874 ~1956)을 최고경영자로 고용했습니다
홀러리스는 몇 년 더 CTR의 컨설턴트로 머물러 있다가 1921년에 은퇴했습니다. 그는 1929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C-T-R은 훗날 세계적인 컴퓨터 회사로 성장한 IBM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홀러리스와 IBM 관련 참조 글 : IBM - 펀치카드 기계에서 대형컴퓨터로)
<플레밍, 진공관을 발명하다.>
전자공학에서 진공관(眞空管, vacuum tube)은 일반적으로 진공의 공간에서 전자의 운동을 조종함으로써 신호를 증폭하거나 변경하는 데 사용하는 장치입니다. 진공관이라는 이름 말고도 전자관(Electronic tube), 열전자관(Thermionic valve), 라디오 벨브(Radio valve)로 부르기도 합니다.
한 때 대부분의 전자 장치에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대부분의 전자 장치에서 더 작고 더 값싼 트랜지스터 또는 반도체, 집적회로 등으로 대체되었으며, 진공관은 높은 주파의 큰 전력을 쓰는 전자 장치에만 쓰이고 있습니다.
존 앰브로즈 플레밍 경(Sir John Ambrose Fleming, 1849년 ~1945년)은 영국의 전기기술자이며 물리학자입니다.
플레밍의 법칙을 고안한 것과 2극진공관의 발명으로 유명합니다.
랭커스터 출생으로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 UCL)에서 공부하였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등에서 가르치는 한편 마르코니 무선회사, 에디슨 전신회사, 후에 에디슨 전등회사 등의 자문역으로 일하였습니다. 1885년부터 런던대학교 최초의 전기공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1885년 플레밍의 법칙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법칙은 전류·자장·도체 운동의 3방향에 관한 것으로, 플레밍의 오른손 법칙과 플레밍의 왼손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이클 패러데이에 의하여 발견된 전자기유도 현상(모터와 발전기 등의 기초원리)을 판단하기 쉽도록 인간의 손 모양으로 표시한 것입니다. 그가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때에 몇번이고 전자기유도 현상을 설명해도 "전류에 의하여 발생하는 자장"과 "자장에 의하여 발생하는 전류"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을 위하여 고안한 것이었습니다.(손을 보며 설명해도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_-;)
무선통신의 개발자 굴리엘모 마르코니와 공동연구를 행하여 1901년 대서양횡단무선통신 실험에 협력하여 1906년에는 안테나의 지향성에 관한 이론화를 하였습니다.
1904년에는 2극 진공관의 정류작용을 발견하고, 2극 진공관을 처음으로 만들어내어 진공관 기술에 기여하였습니다.
1929년 Knight Bachelor(기사작위)에 서임되었습니다.
<비운의 천재, 앨런 튜링의 "튜링 기계">
앨런 튜링(Alan Mathison Turing, 1912년 ~ 1954년)은 영국의 수학자, 암호학자, 논리학자입니다. 특히 컴퓨터 과학에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에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튜링 테스트와 튜링 기계의 고안으로 특히 유명합니다. 계산기 학회에서 컴퓨터 과학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 매년 수상하는 튜링상은 그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앨런 튜링의 부모는 원래 영국령 식민지 인도에서 그를 가졌지만, 영국으로 돌아와 1912년 6월 23일 런던에서 앨런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아직 근무가 끝나지 않아 어머니와 함께 다시 인도로 건너갔고, 앨런은 형 존과 함께 퇴역 대령의 집에 맡겨졌습니다. 그 뒤로 부모는 인도와 영국을 오가다가 마침내 1916년부터 어머니가 영국에 장시간 머물며 아들들을 키웠습니다.
튜링은 무척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능과 지력을 보였답니다. 하지만 학창시절에는 너저분한 외모에 말을 더듬고 영어와 라틴어를 몹시 싫어하는 외곬의 괴짜였습니다.
193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컬리지에 입학해서 수학을 공부했는데, 수치해석을 비롯해서 확률론과 통계학, 수이론, 군론에 특히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1935년부터는 대학원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2년 뒤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문제의 응용에 관하여 (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라는 빼어난 논문을 발표해서 학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논문에서는 컴퓨터의 기본 구상이 최초로 선보였는데, ‘튜링 기계'라 불리는 가상의 연산 기계가 그것이었습니다.
읽기와 쓰기, 제어 센터, 이 세 가지만 있으면 모든 계산 가능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이 튜링의 핵심 개념인데, 오늘날의 컴퓨터는 튜링의 보편만능기계를 그대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 논문이 계기가 되어 튜링은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연구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알론조 처치 교수 밑에서 공부했고, 1938년에 기존의 튜링기계를 보강한 하이퍼계산(Hypercomputuation)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뒤 강의를 맡아달라는 대학 측의 제안을 뿌리치고 영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튜링은 영국이 전쟁에 돌입한 지 하루 만인 1939년 9월 4일, 런던 북쪽의 블레츨리 파크에 위치한 ‘정부암호학교’의 암호해독반 수학팀장으로 스카우트되었습니다. 그의 천재적 두뇌와 튜링기계의 구상, 그리고 그처럼 한 가지 일에 골똘히 파고드는 성격이 독일군의 암호 체계를 깨뜨리는 데 유용할 거라는 판단에서였습니다. 튜링은 시끌벅적한 암호학교 안에서 이방인처럼 지냈습니다. 일에만 파묻힌 채 군대 내 규칙이나 법규는 깡그리 무시했습니다. 또 자기보다 지적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향한 경멸감과 군대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고, 법적으로 동성애가 금지된 시절이었음에도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거침없이 발설하였습니다. 그는 독일군의 에니그마 암호를 이론적으로 해독해내었으며, 그 이론에 따른 해독기 'The Bombe'를 개발하여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는데 크게 공헌을 했습니다.
전쟁 후 튜링은 국립물리학연구소에서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 팀장으로 일하다가 1948년에 맨체스터 대학의 컴퓨터연구소 부소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튜링테스트"라는 실험을 하며 '인간의 뇌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였습니다.
1951년 튜링은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삶이 그에게 부여한 마지막 보상이었습니다. 이듬해부터 급격한 추락이 시작되었습니다.
동성애자였던 튜링은 19세 청년을 우연히 만나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범죄 집단과 어울린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습니다. 주말에 청년을 혼자 두고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집이 온통 다 털려버렸습니다. 그는 즉시 경찰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청년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순진하게도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그대로 불어 버렸습니다. 자유로운 지식인들과 어울리던 습관대로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내뱉었지만, 그것은 세상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철부지 짓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성문란 혐의로 고소당했고, 법원에서 화학적 거세를 선고받았습니다(@_@). 영국 정부도 튜링을 컴퓨터연구소 부소장직에서 해임했습니다. 이로써 튜링은 컴퓨터 개발에서 완전히 손을 뗐습니다.
1년 동안 여성호르몬을 복용하는 동안 그는 거의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고, 그 기간이 끝나자 그의 삶은 반년밖에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1954년 6월 7일, 튜링은 42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과에다 독약을 주사한 뒤 동화 속의 백설공주처럼 사과를 깨문 것이었습니다.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고, 현대 컴퓨터공학에 초석을 놓은 인물치고는 너무도 외롭고 허무한 죽음이었습니다. 튜링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일을 했는지는 1974년까지 극히 일부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었습니다.
튜링은 컴퓨터공학과 정보공학의 기본 이론을 대부분 다 만든 컴퓨터 과학의 이론적 아버지였고, 이론생물학에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비록 오랜 세월 명성이 묻혀 있었지만, 20여년 전부터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은 튜링 탄생 100주년으로 세계적으로 그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가 열리고, 학술지 [네이처]는 튜링을 표지모델로 내세워 고인을 추모했습니다.
미국 계산기학회에서는 1966년부터 튜링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로 컴퓨터 과학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튜링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흔히 컴퓨터 과학 분야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상입니다. 그리고 튜링테스트를 통과한 인공지능에게는 뢰브너 상이 수여됩니다.
일각에서는 애플컴퓨터사의 로고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도 튜링을 추모하는 뜻에서 나왔을 거라고 추정하는데, 애플사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런 해석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컴퓨터 분야에서 그의 공이 막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요?
튜링의 사과에 대한 EBS 지식채널-e의 동영상
이렇게 플레밍의 진공관의 개발과 튜링의 튜링기계 발표로 인해 현대적인 컴퓨터의 핵심 부품 및 기본 동작원리가 확립되었습니다.
<현대적 전자식 컴퓨터의 개발>
1939년,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의 존 아타나소프(John Vincent Atanasoff, 1903~1995)와 그의 조수였던 클리포드 베리(Clifford Berry, 1918~1963)는 ‘아타나소프 베리 컴퓨터(Atanasoff-Berry Computer)’라는 세계 최초의 완전한 전자식 컴퓨터를 발표했습니다.
약자인 ‘ABC’로 더 많이 불린 이 컴퓨터는 1939년에 시험모델이 제작되어 최초 가동 실험을 했으며, 1942년에 완성품이 발표되었습니다.
ABC는 280개의 진공관과 1.6km 이상의 케이블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무게는 320kg 정도였습니다.
이 컴퓨터는 옆에서 카드 천공기를 돌릴 사람이 필요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ABC는 디지털(2진수) 방식의 데이터를 사용하며, 기계적인 장치(톱니 등) 없이 완전한 전자식으로 연산을 했습니다.
그 외에 연산부(프로세서)와 저장부(메모리)가 분리되어 있는 등, 현재 사용하는 컴퓨터와 유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실험적인 의미가 강했기 때문에 실용성은 없었습니다.
현대적인 의미의 컴퓨터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과 대전 기간 중에 급격히 발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자회로가 기계식 연산장치를 대체하고 디지털 회로가 아날로그 회로를 대체하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연대에 따라 조금씩 이루어졌기 때문에 "최초의 컴퓨터"가 무엇인지 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2차대전과 그 전후의 기간 동안 초기 컴퓨터의 발전은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 흐름은 독일의 공학자 콘라드 주제의 연구인데, 그의 연구는 오랫동안 학계의 주류인 미국에 잊혀져 있었습니다.
두번째 흐름은 영국의 콜로서스 컴퓨터이나, 군사적인 이유로 수십년간 기밀에 붙여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의 두 흐름은 미국의 연구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요. 2진법을 전자계산기에 도입한 벨 연구소의 조지 스티비츠 또한 현대 전자식 컴퓨터의 아버지 가운데 한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독일에서 독립적으로 연구를 진행한 공학자 콘라드 주제(Konrad Zuse, 1910~1995)는 1936년 제한적인 프로그래밍 기능과 메모리를 갖춘 계산기 Z 시리즈의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Z 시리즈의 첫 작품인 Z1은 1938년에 완성되었는데, 이진수로 동작하였지만 기계식이었고, 부품의 정밀도의 문제로 정확히 동작하지 않았습니다.
후속작인 Z3는 1941년에 전화 교환기 부품을 사용해 완성되었습니다. Z3는 천공카드로 프로그래밍 할 수 있는 전자/기계식 컴퓨터로 최초의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범용 디지털 컴퓨터가 되었습니다. Z3는 현대의 컴퓨터와 많은 부분에서 유사했으며, 부동소수점 연산 등에 있어 많은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또한 구현하기 어려운 십진법 연산(배비지의 설계에는 십진법이 사용되었음)을 버리고 이진법 연산을 사용하여 보다 단순하고 신뢰성이 높도록 설계되었습니다.
Z3는 조건 분기문이 없어 처음에는 튜링 기계가 아닌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1990년대에 Z3가 튜링 완전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콘라드 주제는 최초의 고수준 프로그래밍 언어라 여겨지는 플랑칼퀼(Plankalkül) 또한 설계하였으나, 실제로 구현하지는 못했습니다. 플랑칼퀼은 주제 사후 5년이 지난 2000년에 베를린 자유대학 연구팀에 의해 구현되었습니다.
주제의 연구는 2차대전 중 연합국의 폭격으로 기계 일부가 손실되면서 잠시 후퇴하였기 때문에, 영국과 미국에서는 그의 연구를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IBM은 그의 연구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전쟁 직후인 1946년 그의 특허 일부를 취득하는 조건으로 주제가 설립한 회사를 후원하였습니다.
2차대전 기간 동안, 블레칠리 파크(영국 육군 암호국의 별명)에서는 독일의 군사 암호 시스템을 해독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독일의 암호화 타자기인 '에니그마'는 전자기계식 계산기인 "봄베"(bombe)의 도움으로 해독되었습니다. 폴란드 수학자인 마리안 르쥐스키가 설계하고 앨런 튜링과 고든 웰치먼이 전자적으로 개선한 봄베는 1941년부터 암호 해독에 사용되었습니다.
독일의 또다른 암호화 타자기 시리즈인 로렌츠 SZ 40/42 시리즈는 에니그마와 많은 부분에서 달랐습니다. 이 암호 시스템을 해독하기 위해 막스 뉴먼 교수와 동료 연구자들은 콜로서스 컴퓨터를 설계하였습니다. 토미 플라워스(Tommy Flowers, 1905~1998)가 1943년 3월에서 12월에 걸쳐 콜로서스 1호를 제작하였고, 1944년 1월에 블레칠리 파크에 설치했습니다.
도청한 독일군의 교신 내용을 종이 테이프에 천공한 기호 형태로 콜로서스에 넣게됩니다. 그러면 콜로서스는 1초에 5000단어라는 빠른 속도로 암호를 조사했습니다. 콜로서스에는 이미 알려진 암호가 입력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기계는 새로 입력된 암호와 이미 알고 있던 암호를 비교했습니다.
1944년 봄 영국은 ‘콜로서스’를 이용해 독일군의 교신 암호를 푸는데 성공, 6월 6일 2차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했습니다.
엄청난 숫자의 진공관 부품을 가진 콜로서스는 종이 테이프로 입력을 받아 다양한 종류의 논리 연산을 할 수 있었지만, 튜링 완전은 아니었습니다. 한대의 콜로서스 1호기와, 9대의 콜로서스 2호기가 제작되었으나, 1970년대까지 모두 군사 기밀로 붙여져 있었습니다. 또한 영국 수상 원스턴 처칠은 냉전 중에 로렌츠 암호를 해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기 위해 수명이 다한 콜로서스 컴퓨터를 완전히 파괴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때문에 콜로서스 컴퓨터의 존재는 한동안 컴퓨터의 역사에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원래대로 복원된 콜로서스 한대가 블레칠리 파크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1944년 아이비엠(IBM)사와 하버드대학 하워드 에이컨(Howard Aiken : 1900-1973)은 계전기를 사용하여 1초에 덧셈을 3번 할 수 있는 전자디지털 컴퓨터 마크-원(MARK-I)을 만들었습니다. 마크-원은 배비지의 해석기관 설계개념을 계전기와 스위치·전동기 등으로 구현한 것인데, 3,000여 개의 계전기와 기어로 만들어 천공된 종이테이프로 제어되는 자동순차적 제어방식이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계적 제약 때문에 연산처리 속도는 매우 느렸습니다.
194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에커트(John Presper Eckert, 1919~1995)와 J. W. 모클리(John William Mauchly, 1907~1980)는 에니악(ENIAC:Electronic Numerical Integrater And Computer)이라는 다용도 디지털 컴퓨터를 개발했습니다.
에니악은 초당 5,000번 이상의 계산을 하는 등, 이전까지 사용하던 컴퓨터보다 1,000배 이상 높은 성능을 발휘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성능을 발휘하기 위해 에니악은 1만 7천 개 이상의 진공관과 7만개 이상의 저항기로 구성되었으며, 총 무게가 30톤에 이르렀습니다. 게다가 고장도 잦아서 매주 2~3번씩 진공관을 교체해야 했으며 전력 소모도 150킬로와트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국방부에서는 에니악의 높은 성능에 주목, 탄도 계산, 날씨 예측, 원자폭탄 개발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습니다. 에니악의 등장은 당시 큰 화제가 되었기에 한때는 에니악이 세계 최초의 컴퓨터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법정 공방 끝에 에니악이 아닌 ABC가 세계 최초의 컴퓨터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에니악을 비롯한 당시의 컴퓨터는 새로운 작업을 할 때마다 회로 및 기억장치를 바꿔 끼워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1945년 헝가리 출신의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 1903~1957)은 컴퓨터 내부의 기억장치에 소프트웨어 방식의 프로그램을 내장, 소프트웨어만 바꾸면 여러 가지 작업에 대응할 수 있는 프로그램 내장 방식 컴퓨터의 개념을 발표하였는데, 그의 제안을 바탕으로 에드박(EDVAC)이 설계되었으나 특허권 문제로 개발이 늦어졌습니다.
그리하여 1949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윌키스(Maurice Wilkes) 등이 만든 에드삭(EDSAC : Electronic Delay Storage Automatic Calculator)이 최초로 프로그램 내장방식과 이진법을 채택한 디지털 컴퓨터가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1952년 노이만이 자신이 제안한 전자식 프로그램 내장방식인 에드박(EDVAC: Electronic Discrete Variable Automatic Computer)을 만들었습니다.
ABC와 에니악의 등장, 그리고 폰 노이만형 컴퓨터의 개발로 인해 실용적인 컴퓨터의 기본 개념은 거의 확립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1950년대부터는 이를 직접 민간 부문에 판매하고자 하는 경쟁, 즉 컴퓨터의 상용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최초의 상용 컴퓨터는 1950년에 완성되어 이듬해(1951년)부터 출시를 시작한 레밍턴 랜드(Remington Rand)사의 유니박-원(UNIVAC: Universal Automatic Computer)입니다. 유니박 I은 대당 16만 달러에 판매되었습니다.
그 뒤 프린스턴고등연구소에서 노이만의 지도 아래 제작된 이아스(IAS) 컴퓨터를 비롯하여 차례로 매사추세츠공대의 월윈드(Whirlwind), 에커르트와 모클리의 바이낙(BINAC), 일리노이대학의 일리악(ILLIAC), 랜드회사의 조니악(JOHNIAC) 등이 제작되었습니다.
<유니박 I(1950년)> |
<애플 II(1977년)> |
유니박 I 이후에도 여러 가지 상용 컴퓨터가 등장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컴퓨터는 너무 비싼데다 덩치도 커서 여전히 정부기관이나 기업에서만 쓰였습니다.
하지만 1977년, 미국의 애플(Apple)사에서 ‘애플 II’라는 소형 컴퓨터를 출시하면서 컴퓨터의 대중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애플 II는 크기가 작고 사용법도 간편했으며, 가격도 1,300달러 근처로 싼 편이라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PC(Personal Computer: 개인용 컴퓨터)의 규격은 1981년, 미국 IBM사에서 ‘IBM 퍼스널 컴퓨터(Personal Computer) 5150’를 출시하면서 정착되었습니다.
<1981년에 IBM 퍼스널 컴퓨터가 출시되면서 오늘날 사용하는 PC의 개념이 정착되었다>
IBM PC는 비교적 값이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부품으로 구성되었으며, 내부 구조 역시 완전히 공개함으로써 IBM 외의 다른 회사, 혹은 개인이 직접 IBM PC와 호환되는 기종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런 특징을 바탕으로 IBM PC 및 그 호환 기종들은 이전에 나온 애플 II를 완전히 밀어내고 개인용 컴퓨터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현재 사용하는 PC들도 기본적인 아키텍처(Architecture: 시스템 전반의 구조 및 설계방식)는 여전히 IBM PC 호환 규격을 따르고 있습니다.
(컴퓨터 개발의 추가적인 내용이 담긴 글 : 컴퓨터 / 일반인에게 컴퓨터가 왜 필요한가 - 네이버지식백과)
컴퓨터가 만들어지기까지는 많은 인물들의 역사적 발명과 기술의 축적이 필요했습니다.
천재적 영감으로 떠오른 자동계산기-컴퓨터의 아이디어라도 그 시대의 기술적 한계로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가 가진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불우하게 생을 마감하는 안타까운 인물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인물은 단순하지만 획기적인 아이디어 하나로 엄청난 부를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어쨋든 그들이 애쓰고 노력하며 만들어 온 컴퓨터와 그 기술 덕분에 오늘날의 우리는 편리한 도구로서 컴퓨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컴퓨터를 만든 영웅들, 그들에게 고마움의 마음을 보냅니다.
이번 공부 내용을 요점 정리 해두었습니다.
<요점정리>
◆ 컴퓨터의 발달
※ 프로그램 내장방식 :
● EDSAC, UNIVAC-1, EDVAC 등에서 사용
● 1946년 폰 노이만(Neumann, J. Von)에 의해 제창된 방식
● 처리할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주기억장치에 저장시킨 후 저장된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명령 처리 순서에 맞게 하나씩 수행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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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천공카드가 컴퓨터로.. 어떻게 보면 관련이 없어보이는데 신기합니다..
제가 더 어릴적에 아버지가 쓰시던 컴퓨터가 생각나네요
네, 이렇게 어떤 사건이 다른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나비효과'라고 하였는데, 요즘은 '핀볼효과'라는 말을 더 많이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