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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군경 시집 해설(08. 5. 31)
절제와 버림의 미학
-성군경의 시세계
1.
문학이 위기이다. 특히 시가 소외되고 있다. 시가 우선은 현실에서 멀어지고, 다음은 독자 대중에게서 멀어지고 결국은 스스로에게 소외되고 있다. 전면적인 시의 위기이다. 사실, 문학의 위기나 시가 위기라는 풍문(?)이 우리 문단에 떠돌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지금 새삼스럽게 ‘시의 위기, 문학의 위기’ 운운하는 것은 뒷북치는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단순히 뒷북이라고 하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오늘날 한국문학의 특히 한국시의 위기는 상상 이상으로 깊어 보인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업詩業 종사자들이 병증을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단 1%의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집요하게 따지고 물어야 한다. 뒷부분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나는 성군경 시인의 시집『거울 속 구름』 출간과 시작 활동을 이 한국시의 회생가능성과 연관해서 이해하려고 한다.
가령 지난 80년대 도종환 시인『접시꽃 당신』을 비롯한 몇몇 시집이 100만 권이 넘게 팔리고 신경림의 『농무』나 여타 인기 있는 시인들의 시집이 수십 만 권씩 쉽게 팔린 것에 비교해 보면 20년이 지난 오늘의 사태는, 시집 판매에 한정해서만 말한다면 말 그대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실제로 시집이 어느 정도 팔리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나는 지난 5월20일(2008년) 서울 교보문고 매장 직원에게 직접 물어 본 바 있다. 이때 이 문학파트 담당자의 말이 대략 1년에 국내, 외국 시인 합쳐서 6만여 권이 팔린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아주 인기 시인의 경우 출판사에서 50권의 시집을 받고, 그 외 시인의 경우 20권 안팎으로 시집을 인수해 진열대에 전시한다고 한다. 국내 최대 오프라인 서점의 판매량이 이 정도이나 영풍문고나, 온라인 서점에서 팔리는 시집 수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모두 합쳐 10만 권 내외가 될 것이다.
이제 우리 시단도 미국이나 유럽과 같은 문화 선진국처럼 시인이 자신의 시집을 자비로 5백-1천여 권 정도 찍어 동호인들끼리 서로 돌려보는 그런 상황에 직면한 것일까? 문인단체의 회원 수나 자료를 보면 지난 시대에 비해 90년대 이후 등단한 시인의 수는 많이 증가했다. 그런데도 시집 판매량이 격감한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문단의 많은 논자들이 시가 현실을 외면하면서 독자들에게서 멀어졌다는 진단을 내 놓고 있다. 나 역시 이런 견해에 동의한다. 80년대 왜곡되고 부패한 현실의 모순에 시인들이 직접적으로 대응했을 때, 시의 위의威儀는 살아있었고 시인도 사회적 존재로 인정받았다.
90년대 후반 문민정부의 절차적 민주주의 성취와 89년 소련의 현실사회주의의 패퇴로 인해 우리 문학이 현실에서 등을 돌리고 내면으로 빠져들기 시작하는 순간, 시도 독자에게서 멀어진 게 사실이다. 게다가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세계와 우주를 근본적으로 바라보고 성찰하는 농경문화적 감수성이 사라지고, 찰나적이고 소비적인 IT문화라는 새로운 유형의 감수성이 사회를 지배하고, 국내의 경우 IMF사태 이후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전일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문화 장르 가운데서도 자본과 가장 친화력이 없는 ‘시’는 완전히 변방으로 밀려난 꼴이 되었다. IT산업 가운데서도 게임 산업이나 영상문화는 그래도 기본적으로 ‘서사구조’를 요구하게 되니까 소설은 여전히 어느 정도 상업적 유인誘引을 유지하고 있지만 시는 완전히 자본주의체제의 버림받는 사생아 꼴이 되어 버렸다.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시의 부활(?)’을 외치면서 한국문단에 나타난 시인이 바로 성군경 시인이다. 일려진 바처럼 성 시인은 치과의사이다. 시작활동과 직업은 그리 뚜렷한 상관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일찍이 우리 문단에도 치과의사나 의료인 출신 시인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고교시절부터 문학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오던 성군경 시인은 문학잡지의 신인상이나 신춘문예와 같은 전통적인 의미의 문단등단을 택하는 대신, 일찌기 인터넷을 통해 스스로 詩作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파악한 우리문단은 소위 전래적인 방법으로 문단에 등단해서 전문작가의 길을 걷는 문인(시인)군과 인터넷을 통해 문단 등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는 문인 등 두 부류로 나눠져 있다. 그런데 인터넷으로만 소통하고 연대하고 작품을 발표하는 시인의 수가 뜻밖에도 예상 외로 많고 또 이들의 수준이 기존문단의 수준과도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지금 독자들에게 외면 받고 스스로 소외되어 죽어가는 우리시단의 새로운 소생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과 교통하고 연대해서 ‘낙동강문학회’라는 소위 문학동호인 단체를 결성하게 된다. 이 단체에서 주로 하는 일은 우리 시와 독자들 간의 소통의 문제이다. 이것은 점차 대중성을 상실해가는 우리 문학의 과제에 속하는 데 성군경 시인이 주도하고 있는 낙동강문학회는 기관지 성격의 계간『낙동강문학』을 발간하고, 파주 통일로에서 ‘통일문학제’를 열고 경남 우포늪에서 ‘생태문학제’를 열었으며, 낙동강 하류 물금정수장과 무주 덕유산 등지에서 시화전과 시낭송회을 열고, 대구 앞산 고산골에서도 시민을 대상으로 배너시화전 및 시낭송회를 여는 등 전국적으로 수십 회 이상의 대중행사를 열면서 독자들과 시의 소통을 꽤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연변지역의 문인들까지도 모국어의 영역 안에서 연대할 수 있는 틀이 없을까 고심하면서 교류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 낙동강문학을 한국시민문학협회(韓國市民文學協會)로 확대하고 전국적으로 인터넷으로 연결된 문인들을 네트워킹하여 『시민문학』이라는 잡지까지 내고 있다. 이들이 하는 문학소통행위에 대해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기존 문단에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고 있고, 이들의 행사 진행방식이나 수준이 아직까지는 다소 거칠고 서투른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는 이들의 문학대중화운동과 문학소통 실험이 어느 시점에 가면 반드시 성과를 얻고 침체된 한국의 기성문단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내가 곁에서 지켜 본 바로는 이 모든 행사의 기획이나 아이디어 제공의 중심에 성군경 시인이 있다.
문학에 대한 그의 열정은 뜨겁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그의 직업이 풍기는 ‘차가운 인간’의 이미지를 휴머니티가 있는 순정한 시심으로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생활에서도 그가 알게 모르게 주변을 도와주는 따듯한 선행을 목격한 적도 많다. 아마 이런 타인에 대한, 약한 자에 대한 측은지심이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될 듯한 시 쓰기와 문학 활동에 그를 잡아두는 한 이유인 것 같기도 하다.
또 하나 성군경의 시를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며칠 전에 1주기 기념행사가 있었던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이다. 알려진 바처럼 권정생은 한국의 대표적인 아동문학가이면서 살아온 삶의 행로가 聖人의 느낌까지도 풍긴다는 평가를 받는 사상가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철저히 고립되었고 외롭고 가난한 것이었다. 댓 평짜리 오두막에서 평생을 살면서 양복 한 번, 구두 한 켤레를 신어보지 않고 스스로 ‘극빈’을 지키면서 살다가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는 문학과 삶은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슬픔과 두려움을 간직한 사람들에게, 지상의 평화와 통일을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강자의 폭력과 파괴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아니 사람뿐 아니라 벌레와 새와 쥐와 개구리, 세상의모든 약자에게 진실한 친구이자 이웃이었던 존재를 가리키는 영원한 기호”(염무웅)가 되었다.
그리고 “가난하고 늙고 병든 아동문학가는 이 사회에서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잘못이다. 버림받고, 병들고 가난한 자가 세상과 잘 어울린다는 것 자체가 기만이다. 그는 매우 위험하고 불온한 사상가였고, 반역자였으며, 혁명이 사라진 시대의 혁명가였다. ‘위대한 부정의 정신’의 소유자였다”(이대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지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관료화시킨다. 한 치의 여유도 없이 팽팽한 경쟁의 원리가 지배하고 효율과 속도의 도그마가 사회를 비인간적인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 경쟁과 효율에서 이탈하는 순간 누구라도 이 사회에서 버려진 존재가 된다. 그에게 선과 악이라는 가치판단은 무용지물이다. 오로지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고 효율을 통해 이윤을 얻어야 물질적으로 풍요한 삶을 살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 정신 영역의 성감대이자 최첨단이라 불리는 詩가 온전히 위치할 자리가 있을까? 가장 비자본적 장르라는 시가 설 땅은 비좁아 보인다.
앞서 권정생 선생을 언급한 바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시는 바로 효율과 관료체제가 지배하는 이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에서 스스로 자신을 유폐하지 않고서는 존재하기 힘든 양식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문단도 이미 이런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에 순응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단이라는 양태에 편입되지 않고 떨어져서 나름대로 소통작업을 하고 있는 성군경 시의 위치가 어떻게 보면 위기에 빠진 시와 문단의 활로를 뚫는 데 역설적이게도 더 큰 가능성인지도 모른다. 이런 뜻에서 나는 성군경 시인의 문학 활동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기대를 가지고 있다. 한국문학사를 보더라도 당대 문단에서 멀찌기 떨어져 있었던 만해나 소월, 육사 같은 이의 작품이 ‘발가락이 닮았다’ 나 ‘메밀꽃 필 무렵’이나 읽고 있던 당시 우리 문단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나는 이런 가능성을 외우 성군경의 활동에서 기대하며 주목하는 것이다.
2.
성군경 시인의 시집『거울 속 구름』에는 시인의 다양한 관심이 표출되어 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이 세계를 통찰하는 날카로운 인식의 시도 있고(<영천댐 옆 삼귀리 정류장>, <체 게바라와 윤심덕>), 치열한 자기성찰의 시도 있으며(<거울 속 구름>, <하루 하루>), 가족들이 등장하는 따듯한 일상시(<할인마트에서>, <세치>)와 소녀 취향의 감수성이 짙게 드리워진 센티멘탈리즘 시도 있다.
우선 시집의 표제시인 <거울 속 구름>을 보자.
내가 지금 무얼 하는지
뻥 뚫린 하늘의 흰 구름은
제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을까
좋아하고 싫어하는
광기 어린 삶을 살다
불현듯이 손가락도 까닥거리기 싫을 때
요즘은 참 불경기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끔씩 묵은 사진첩을 꺼내어 본다
그땐 내가 참 괜찮았구나
순진하고 기특하기까지 했지
만약 지금 사진을 찍으면 어떤 모습일까
거울 속 내 모습은
나 몰래 조금씩 바뀌어 간다
거울을 보며
램브란트처럼 자화상을 그려보고 싶다.
내가 있는 곳은 여기이고 내 죄는 이것이고
이만큼이나 된다고 고백성사라도 하고 싶다.
-<거울 속 구름> 전문
자고 나면 끊임없이 생기는 눈꼽
내가 이 집에 있은 지 몇 년이 되었나
내게 있는 묵은 짐이 아깝고도 귀찮다
고독이 밀린 빚처럼 머무는
하루하루가 때론 가혹하게 다가온다
오늘도 낯선 나라로 떠난다
매일 매일 덧칠해야 사는 세상
지금 나의 옷 색깔이 미더스의 손처럼
바람이 저주로 변한 황금빛 늪은 아닐까
붓고 흔들리는 치아를 뽑기 전에
직접 내 눈으로 한번보고 싶다
거울 앞에서 입을 벌려
내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오늘 하루를 또 찬찬하게 빗어본다
-<하루 하루> 전문
“좋아하고 싫어하는/ 광기 어린 삶을 살다/ 불현듯이 손가락도 까닥거리기 싫을 때/ 요즘은 참 불경기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 시의 화자는 “가끔씩 묵은 사진첩을 꺼내어 본다” 그 사진 속의 나는 한 때 “순진하고 기특하기까지 했지”만 지금은 어떨지에 대한 자기 성찰이 이어진다. 그리나 그 성찰은 자기변명이 아니라 냉정한 자기 응시이다. 그래서 시의 화자는 “거울 속 내 모습은/나 몰래 조금씩 바뀌어 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마침내 “내가 있는 곳은 여기이고 내 죄는 이것이고/ 이만큼이나 된다고 고백성사라도 하고 싶다.”는 자기 고백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한 때 누구나 순정하고 꿈을 갖고 있다. 그러나 힘든 세파를 살아가면서 그 꿈을 그대로 고이 간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많은 평범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변화를 스스로가 눈치 채지 못하고 허망한 미망 속에서 살아간다. 그 미망은 “지금 나의 옷 색깔이 미더스의 손처럼/바람이 저주로 변한 황금빛 늪은 아닐까”에서처럼 미더스의 손과 황금빛 늪으로 상징되는 자본과 세속적인 성공에 대한 기대일지 모른다. “매일 매일 덧칠해야 사는 세상” 인간들의 이 성공과 황금에 대한 기대는 인간 자신의 얼굴을 ‘야만의 얼굴’로 점차 변모시킨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어릴 때 모습처럼 여전히 “순진하고 기특”한 줄로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이런 기만적인 일상성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이 바로 <거울 속 구름>과 <하루 하루>가 주장하는 시심이다.
이 시를 보면서 과연 나는 얼마나 “거울 속 내 모습은/나 몰래 조금씩 바뀌어 간다” 사실을 냉철히 자각하면서 “거울 앞에서 입을 벌려/내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며/오늘 하루를 또 찬찬하게 빗어” 보겠다는 의지로 살고 있는지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시인의 이러한 자기성찰의 시심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 필연적으로 더 넓은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 확대된다.
살아 있다면
가만히 있어도 무슨 일 일어날 테지.
매번 스쳐가는 일상이 같지는 않아
나는 지금 예전의 다리 앞에 서있다.
멸종되어 화석만 남은 네안데르탈인을 우연히 발견한
현 인류 호모사피엔스는 신기한 듯 논문을 쓴다
서양에서는 라콘느 강, 동양에서는 요단강.
이 강을 건너려면 눈꺼풀위에 금화를 올리고
손에는 엽전을 쥐어 준다
영천댐을 가로지르는 삼귀리 다리
100원짜리 동전을
손에 쥐고 천천히 걸어가 보았다
댐의 물은 갈수기라서 그런지 녹조를 띠며 메말라 있었고
물이 줄면서 드러나는 바닥이 층층 계단을 이루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몇 계단을 만들어 왔을까
녹조가 짙은 물속에 남아있는 물고기는
빵조각 하나를 위하여 도덕과 지식을 내팽개친
아우슈비츠수용소의 형상을 하고 있으리라
시야에 들어오는 붉은 산들
앞으로 열 번만 산이 붉게 변하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
차를 세워 놓은 다리 이쪽은 이승, 저쪽은 저승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건너본다
인적 없는 다리를 빠져 나오니 좁은 길이 나오고
눈에 들어오는 야트막한 집들
군데군데 심어진 나무에는 사과가 한가로이 달려있다
어쩌면 모든 일들은 두려움에서 출발할는지도 모른다
지금 걱정하는 일들이 정말로 일어날 것인가
두려움과 행복의 상관관계는 빛과 그림자이리라
그때 문득,
눈에 들어오는 글씨 ‘삼귀리 정류장’
겨우 비를 피할 수 있는 낡은 나무의자에는
다 팔아도 몇 만 원 될 것 같지 않은
자신의 몸뚱이만한 보따리를 옆에 놓고
검게 바랜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시선을 고정한 채
가을석양처럼 무념한 표정의 할머니가 앉아있었다
-<영천댐 옆 삼귀리 정류장>전문
이 시에서 시의 화자는 영천댐 속의 “녹조가 짙은 물속에 남아있는 물고기는/ 빵조각 하나를 위하여 도덕과 지식을 내팽개친/ 아우슈비츠수용소의 형상을 하고 있으리라”고 추측한다. 그러면서 “서양에서는 라콘느 강, 동양에서는 요단강./ 이 강을 건너려면 눈꺼풀위에 금화를 올리고/ 손에는 엽전을 쥐어 준다‘는 죽음의 의식에서 가지 돈을 챙기는 인간들의 이 돈에 대한 집요한, 혹은 기이한 풍속을 떠올리고 자신 역시 “영천댐을 가로지르는 삼귀리 다리”를 “100원짜리 동전을 /손에 쥐고 천천히 걸어가 보”ㄴ다. 그 배경으로 “다 팔아도 몇 만 원 될 것 같지 않은/ 자신의 몸뚱이만한 보따리를 옆에 놓고/ 검게 바랜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시선을 고정한 채/ 가을석양처럼 무념한 표정의 할머니가 앉아있었다”는 장면을 제시한다.
이 시의 중심 이디엄은 ‘돈’ 이다. 빵조각 하나를 위해 도덕과 지식을 내팽개친 물고기는 인간, 특히 ‘지식인’의 초상에 대한 비유인지 모른다. 그 빵을 위해 지옥의 또 다른 이름인 ‘아우슈비츠’를 연출하는 인간들의 참상을 이 시는 가리키고 있고, 그 참상의 중심에는 고뇌하는 시적화자 모습이 어른거린다.
그런데 이 시의 끝부분에 등장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이채롭다. 생의 고단을 드러내는 표지인 검게 바랜 수건이나, 무표정 역시 자본에 지치며 평생을 살아온 인간 군상의 보편적 표정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오늘날 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강력한 파열음을 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 시를 보자.
강자의 의무는 겸손이요
약자의 의무는 비굴하지 않아야 하는 것
역사는 이런 원칙에 충실한 사람을 존경한다
끊임없이 던져지는 변화 속에 나약한 무지는
끈기 없는 사람을 손쉬운 타협의 길로 이끌고
어설픈 또 다른 '체 게바라'를 탄생시킨다
어쩌면 반목이 역사를 만들지도 모른다
혁명은 개혁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름답다
혁명 후 수확물에 대한 탐닉은
또 다른 교만과 비굴을 부르게 될 것이다
진정한 사랑의 화신인 윤심덕이
현해탄을 남자의 넓은 가슴으로 여길 때
정복한 쿠바를 카스트로에게 맡기고
반겨주는 이, 별로 없는 또 다른 광야 볼리비아로
홀연히 말을 몰고 떠난 '체 게바라'
-<체 게바라와 윤심덕>부분
알려진 바처럼 체 게바라는 혁명가이고, 윤심덕은 음악가이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자기 세계를 어쩌면 가장 치열하게 살다 간 사람일 것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장 폴 사르트르가 20세기에 ‘가장 완전한 사람’ 이라고 평가한 ‘체’ 는 말할 것도 없고, 비련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현해탄에 몸을 던진 윤심덕의 지순한 사랑은 어떻게 보면 이것 역시 자기방식대로의 가장 완벽한 자신의 구현인지 모른다.
체와 윤심덕 이 두 사람의 완벽한 자기 구현의 다른 이름은 사랑이고, 이 사랑은 체 게바라가 쿠바를 카스트로에게 남겨주고 다시 볼리비아로 떠나듯이 자신을 비울 때만이 진정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끝없는 소유와 그 소유를 위한 욕망의 더께에 의해 구성된다. 이 사실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천댐 옆 삼귀리 정류장>와 <체 게바라와 윤심덕>은 전혀 다른 시적 소재를 취하고 있지만, 이 두 편의 시가 주장하는 바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난 절제와 버림의 미학, 혹은 앞서 권정생의 예에서 보듯 자발적 가난, 혹은 자발적 극빈의 미학인지도 모른다.
아내랑 의기양양 전화를 한다
무료한 시간을 눈요기로 때우자고
함께 간 대형 할인마트
당당한 몸짓으로 손수레를 밀고
점령지에 들어선 장수처럼
식민지에 쌓여있는 전리품 거만하게 휘둘러보고
왕비님이 취하실 공물이 무엇이냐고 늠름하게 물어 본다
싼 물건을 고를라하면 일부러 호기 있게 비싼 물건을 집어보고
한 개를 사려고하면 넉넉하게 사라고 호통 치고
손수레 안에 나의 과시 조공이 가득히 채워져 갈 때
더욱 멋진 남편이 되리라 기대하면서
아내가 원하는 것보다 최대한 더 넉넉하게
넓은 매장 안을 주름 잡는다
-<할인마트에서>부분
퍼머용 부러쉬로 어설프게 머리칼을
쓰러 넘기다 언뜻 발견하는 흰 머리칼
많은 것을 보고 느낀 사고의 지친 겹
어느새 장골처럼 보이는
두 아들의 다툼이 소중하고
흐트러진 아내의 얼굴 모습에서
나의 체온을 느낀다
새치가 내 온 머리를 덮어도
내가 전부가 될 수 없고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며
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새치>전문
성군경의 시가 자본주의 비판이나, 자기성찰과 같은 거대담론(?)류만 있는 것은 아니다.<할인마트에서> <새치>에서 볼 수 있듯이 잔잔하고 소소한 가족사, 집안에서 자상한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모습도 드러내고 있다. 펀(fun)과 위트를 느끼게 하는 <할인마트에서>에서도 그렇고 “어느새 장골처럼 보이는/두 아들의 다툼이 소중하”다고 느끼고 “흐트러진 아내의 얼굴 모습에서/ 나의 체온을 느끼”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심정을 그린 <새치>를 보면 가정적이고 따뜻한 시인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
어떤 게 성군경 시의 본령이 될지는 앞으로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그가 느닷없이(?) 시단에 뛰어들어 나름대로 위기에 처한 우리 시와 독자 사이의 소통을 중심에 두고 벌이는 문학적 실험이나 문학에 대한 뜨거운 열의는 이 시인의 앞날이 결코 간단치는 않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 기대는 반드시 내가 그의 친구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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