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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카 M의 역사(The history of the Leica M)
* 라이카 M 이야기의 이해를 돕기위해 라이카의 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역사의 이해를 통해 자신이 사용하는 카메라에 좀 더 애정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베타버전'이다. 좀 더 많은 자료의 검증을 거쳐 다시 정리될 것이다. 잘못 정리된 부분도 있겠지만 라이카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는데 크게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1. 라이카의 출발
라이카사(Ernst Leitz Optical Industry)의 역사는 1849년부터 시작된다. 라이카사의 모체가 된 'Optical Institute'는 1849년 C. Kellner에 의해 프랑크푸르트에서 40마일 북쪽에 위치한 웨츨러라는 독일의 한 작은 도시에 설립되었다(사진은 옛 웨츨러 시가지). 현미경과 망원경 생산을 위한 회사였지만, 망원경 생산은 현미경 생산라인으로의 집중을 위해 1855년 중단되었다.
1855년 C. Kellner가 사망하자 그의 동업자였던 Friedrich Christian Belthle는 Kellner의 사업을 이어받았고 Kellner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회사이름을 'Optical Institute Kellner and Belthle'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1865년 한 젊은 기술자가 Kellner에게 고용되었고 그가 바로 후에 라이츠(Leitz)사의 설립자가 되는 에른스트 라이츠(Ernst Leitz)이다. 에른스트 라이츠는 뛰어난 재능으로 현미경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켰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Belthle는 캘너의 사망후 곧 에른스트 라이츠를 그의 새로운 동업자로 선택하었다. 그리고 1869년 Belthle이 사망하자 에른스트 라이츠는 회사를 인수하고 회사를 'Optical Institute of Ernst Leitz'로 다시 개명하였다. 초기 회사의 규모는 크지 작았다. 캘너의 미망인이 회사를 상속 받았던 1855년 종업원의 수는 12명에 불과 하였다. 하지만 라이츠가 인수받은 후 1887년에는 약 120명에 달할 정도로 크게 성장하였다.
에른스트 라이츠는 이제 독자적인 회사의 소유자가 되었지만 모든 것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적지 않은 부채 또한 물려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품질을 자랑하던 현미경의 생산규모를 점진적으로 확대시켜 나아갔고 곧 'Ernst Leitz Wetzlar'는 현미경을 의미하는 하나의 상표로 자리잡게 되었다. 당시 과학, 의료분야에서의 현미경에 대한 수요는 상당했고 1885년까지 일 만대의 라이츠 현미경이 생산되어 팔려나갔다.
1887년에는 수학자 Carl Metz가 렌즈설계를 위해 합류하였다. 그는 더 정밀하고 일관된 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 한층 발전된 렌즈설계를 완성시켰다. 그 결과 '라이츠 현미경'은 고급현미경의 대명사가 되었고 그로부터 급증한 수익은 더 큰 규모의 설비, 더 발전된 생산방법의 개발을 위해 다시 투자되었다. 1989년에는 5만번째의 현미경이 생산되었고, 1989~1911년 사이에는 망원경, 영사기를 비롯한 여러종류의 전문 광학장비가 생산라인에 추가되었다.
2. 진정한 라이카 카메라 역사의 시작 : 라이츠와 바르낙, 베렉의 만남
그러나 여기까지는 라이카카메라의 역사에 있어서 맹아기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라이카카메라의 역사는 에른스트 라이츠(Ernest Leitz)가 오스카 바르낙(Oskar Barnack)과 막스 베렉(Max Berek, 1986-1949)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바르낙은 라이카카메라를 만든 사람이고 베렉은 그 유명한 엘마렌즈의 설계자로 후에 라이카렌즈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사람이다.
진정한 라이카역사의 시작에서 바르낙을 빼어놓을 수 없다. 그는 35mm 소형카메라인 라이카의 원형을 발명하여 오늘날 라이카가 존재하게 한 일등공신이다.
바르낙은 1879년 브란덴부르크 근처에서 태어나 독일 광학산업의 또 하나의 중심지인 예나(Jena)의 짜이스(Zeiss)에서 근무하였다. 짜이스에서 바르낙은 확신을 갖고 짜이스의 경영진에 35mm 소형 카메라의 제작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조용하고 겸손한 성격이었던 그는 짜이스에서 일을 계속 했다. 그 당시는 유망한 사진산업이 성장하기 시작한 때였다. 바르낙(Barnack)은 짜이스에서 일할 당시 친하게 지냈던 메카우(Mechau)와 필름 감광유제의 발전과 라이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1910년 메카우는 짜이스를 떠나 그가 구상했던 신형 영사기의 개발을 약속했던 라이츠로 회사를 옮겼다. 하지만, 메카우가 라이츠로 떠난 후에도 건강이 좋지 않았던 바르낙은 한동안 짜이스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1년 메카우의 추천으로, 후에 영원히 역사에 기억될 카메라 라이카를 발명하게 되는 이 천재적인 젊은 기술자는 라이츠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었다.
웨츨러에서 에밀 메카우는 영화의 각 프레임을 고정시키는 보통의 기구 메커니즘 대신에 회전프리즘을 사용한 영사기의 새로운 형태를 개발하고 있었다. 라이츠에 기계기술자가 더 필요하게 되자 메카우는 그의 오랜 친구를 추천했던 것이다. 바르낙이이 라이츠로 간 것에 대해 라이츠가 먼저 초대를 했다는 말과 바르낙이 먼저 라이츠에 가기를 원한다는 편지를 썼다는 대립되는 글이 있는데, 어느 것이 사실이든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시기에 바르낙과 라이츠는 분명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1911년 한 천재적인 젊은 발명가 바르낙이 웨츨러의 라이츠에 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 바르낙은 예나(Jena)에 있는 짜이스(Zeiss)에서 일할 때, 에밀 메카우라는 기술자와 친하게 지냈는데 그는 영화의 각 프레임을 고정시키는 보통의 기구 메커니즘 대신에 회전프리즘을 사용한 영화용 프로젝터의 개발에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짜이스는 메카우에게 그 기회를 주지 않았다. 결국 1910년 메카우는 짜이스를 떠나 그의 아이디어를 개발할 수 있도록 약속한 웨츨러의 라이츠로 옮겼다. 메카우는 그 공헌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영사기와 텔레비전 분야에서 길이 기록될 만한 매우 뛰어난 발명가였다(Emil Mechau 참조).
바르낙은 뛰어난 기술자인 동시에 또한 사진가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이유에서 소형 라이카를 개발하게된 동기를 가졌다. 첫째, 사진예술의 초창기에 사진가들은 무겁고 큰 삼각대와 암막을 모두 가지고 다녀야 하는13×18cm사이즈의 건판 카메라를 사용해야 했다. 바르낙은 그 자신이 뛰어난 사진가이기도 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누구보다도 이러한 부담스런 작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카메라의 개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웨츨러에서 그의 첫번째 임무는 렌즈연마용 다이야몬드선반을 설계하는 일과 더불어 메카우프로젝터의 영화용 필름을 테스트하는데 필요한 카메라를 제작하는 일이었다. 바르낙은 전체 영화필름의 각 부분의의 적정노출을 시험하기 위하여 작은 스틸카메라를 만들었다. 1905년부터 그는 네거티브의 화면크기를 줄이고 촬영한 다음 사진을 확대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후 만 10년, 라이카의 개발책임자로서 자신의 이론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이 소형의 필름포맷(24 x 36 mm)은 당시로서는 단순히 18 x 24mm 영화용 필름포맷을 두 배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소형카메라가 필름시험장치에서 유래되었든지 아니면 필름시험장치가 소형카메라의 아이디어에서 유래되었든지 간에 이것 또한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카메라의 생산계획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진전이 중단되었다. 그래서 최초의 라이카는 1924년이 될 때까지 연속생산이 되지 못하였고 1925년이 되어서야 출현하였다. 그가 개발한 카메라가 드디어 판매에 들어가자 바르낙은 카메라와 관련된 개발에만 전념하였고, 표준화된 렌즈마운트, 레인지파인더, 그리고 수많은 액세서리 등을 개발하였다. 병약했던 그는 잦은 병치레로 고통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해서 그의 작업실로 되돌아오곤 했다. 그는 건강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을 계속해 나갔으며 현대 기계산업에서 본보기가 되는 커다란 자취를 남기게 되었다. 그는 라이츠사에서의 25년간 일했으며, 1936년 1월16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82년 웨츨러에 그의 기념비가 건립되어 라이츠공장의 맞은편에 있는 공원에 세워졌다. 막스 베렉(Max Berek, 1986-1949) 교수는 1914년 바르낙과 함께 라이카 카메라의 제작에 참여하여 오늘날의 라이카가 있게한 초기의 라이카렌즈를 설계하여 오늘날 라이카 렌즈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초기 leica I에 장착된 Anastigmat 렌즈를 설계했으며 라이카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클래식한 렌즈인 Elmar 50/3.5 렌즈를 설계했다. 물리학자였던 그는 1886년 실레지아(Silesia)에서 태어났고, 1911년 베를린 광물질연구소에서 광학유리에 관한 이론으로 학위를 받았으며, 1912년 라이츠에 왔다.
당시 라이카의 35mm 소형카메라 개발 제작담당이었던 바르낙에게서 새로 제작된 35mm 소형카메라에 장착될 렌즈의 설계를 부탁받은 그는 당시에 유명한 렌즈제작의 기본이 되었던 triplet 이론에 근거하여 f3.5 밝기에 3군5매의 구성을 가진 최초의 라이카 렌즈인 Anastogmat(1924~1925)를 설계하였다. 이 렌즈의 이름은 후에 Ernst Leitz와 Max Berek의 이름을 따서 Elmax(1924~1925)로 바뀌었다. Elmax는 아주 훌륭한 성능을 가진 렌즈였지만 생산비용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일반 소비자들에게 판매되기가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그는 새로운 렌즈재료가 개발되자 렌즈설계의 재구성을 통해 라이카의 역사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렌즈인 엘마(Elmar, 1926-1961)를 탄생시켰다. 라이카의 성공은 그가 설계한 무코팅 4매구성의 50/3.5 엘마 렌즈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엘마는 성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침동식구조로 편리한 휴대성까지 가능케 했다. 라이카 A에 장착되었던 50/3.5 엘마렌즈는 샤프한 렌즈로 무한대에서 고정되는 포커싱 잠금장치를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구조는 라이카 렌즈의 오랜 전통이 되었다.
당시 베렉이 초기 Leica 카메라를 설계할 당시, 그는 이 카메라에 장착될 렌즈를 f3.5 밝기로 설계하였다. 당시의 렌즈재질이나 기술수준에서 이보다 밝은 렌즈의 설계는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킬 수 있었고 그는 당시의 조건하에서 가능한 최선의 렌즈를 설계하려 했던 것이다. 베렉은 렌즈를 설계할 때, 실질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갔다. 그는 완전하고 이상적인 렌즈는 없다고 생각했으며 이같은 사실은 컴퓨터가 전공정에서 이용되는 현대에도 어쩔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당시의 기술적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렌즈를 설계했던 것이다. 사실 훨씬 후에 만들어지는 Summicron f2나 Summilux f1.4 렌즈는 Lak9같은 새로운 렌즈재료의 개발로 가능했다. 스미크론의 출현 이후 엘마는 과거에 비해 사람들의 관심에서 많이 멀어졌지만 만들어진지 수십년이 지난 구형 엘마까지도 지금도 많은 라이카 사용자들에게 훌륭한 실용기로 사랑받고 있다.
이후 라이카시스템의 확장과 더불어 그는 엘마와 다른 설계로 1931년 헥토르렌즈를 제작했고 또다른 설계방식으로 1933년부터 Summar 50mm Lens와 그 뒤를 이어 Summitar, Summarit, 85mm Summarex를 설계했다(일설에 의하면 이들 렌즈의 이름은 그가 아끼던 개의 이름 Hektor와 Rex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이 렌즈들과 뒤이어 새로이 나타나는 렌즈들은 모두 가우스(gauss)방식을 기초로 제작된 것이다. 시간이 감에 따라 라이카 렌즈디자인의 개선과 발전은 계속되었다. 새로 설계, 제작된 렌즈들은 새로운 렌즈재료의 사용으로 기존의 렌즈에 비하여 성능이 향상되었다. 새로운 렌즈재료의 사용과 컴퓨터의 사용은 더 효율적이면서도 더 단순한 구조의 렌즈의 설계를 가능케 했다. 이후 라이카 캐나다공장을 필두로해서 렌즈의 디자인과 생산은 라이카사에서 더 중시되게 되었다(아래의 미들랜드 참조).
그는 40년대 초에는 나찌정권하에서 나찌에 가담할 것을 거부하여, 교수직을 박탈당하는 수난을 당하기도 한 소신있고 양심적인 인물이었다 . 그의 교수직은 전후인 1946년에 복직되었다. 1949년 10월 Freiburg에서 6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920년 Ernst Leitz는 사망하고 그의 아들 Ernst Leitz 2세가 사업을 이어받게 되었다. 사실 에른스트 라이츠 2세가 라이츠 상속의 적자는 아니었다. 그의 형 루드위그 라이츠(Ludwig Leitz)는 현미경 사업의 분화를 통해 라이카가 사진 사업에 뛰어드는데 큰 공헌을 하였었고 라이츠 가문의 가업은 사실 그에게 넘겨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루드위그 라이츠는 1898년 불의의 낙마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만일 이러한 사고만 없었다면 아마도 초기의 모든 라이카카메라에는 'Ernst Leitz' 대신에 'Ludwig Leitz'가 새겨졌을 것이다.
라이츠2세는 사업을 이어받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카메라 사업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용기있는 결정으로 바르낙 카메라의 상업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당시에 이 용기있는 사업가의 결단이 없었다면 라이카는 지금처럼 카메라의 최정상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라이카의 신화를 창조하고 완성해 나가는데 라이츠2세를 포함한 이들 라이츠가문 사람들의 역할을 절대 빼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3. 라이카 카메라의 발전
1913년에 바르낙(Oscar Barnack)은 라이카카메라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UR-Leica 카메라를 발명하였다. Ur-란 최초, 기원 등을 의미하는 하는 복합접두어이다. 이 라이카의 원형 카메라는 1/40초의 고정속도를 가졌으며 영화카메라와 동일하였다. 그러나 라이카가 35mm 영화 필름을 사용한 첫 번째 콤팩트 카메라는 아니었다. 1908년에는 Lleo & Omens에 의해 35mm 카메라가 가장 처음 만들어 졌었다. 또한 이 시기에 다른 회사에서 몇 가지 35mm 스틸카메라가 출시되었었다. Homeos(1914), Mimigraph(1915), Tourist Multiple(1913), Simplex(1914)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다지 큰 성공을 이루지 못하였다. 바르낙의 라이카 역시 불완전하기는 했지만 카메라의 기능이나 미적 디자인 등 여러 면에서 인체공학적으로 이들을 앞섰다(Massimo Bertacchi의 Early 35mm Cameras 참조).
사진: 오리지널 Ur-Leica(Leica Camera AG 소장) 사진출처: History of the Screw Mount Leicas. 훗날 UR - 라이카로 알려진 프로토타입 카메라는 사실은 정확히 두 대를 만들어 그 한대는 바르낙이 사용하였고 나머지 한대는 언스트 라이츠 2세 (Ernst LeitzⅡ)가 사용하였다. 그들은 이 그 카메라를 1914년 봄 미국여행시 자신들이 직접 사용하였다. 재능있는 사진가이기도 했던 바르낙은 이 카메라가 가지고 있던 장점을 잘 이용하였다. 바르낙이 사용하였던 카메라는 바르낙의 사망후 그의 가족이 소장하였었다. 그러나 전쟁기를 Munich에 있는 '도이치박물관'에서 무사히 넘긴후 바르낙의 아들에 의해 팔렸다(전후의 사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후 1960년 다시 경매에 붙여져 팔린 후 지금 세계 어딘가에서 개인소장가에 의해 소장되어 있다. 나머지 한 대는 오늘날 Leica Camara AG가 소장하고 있다.
Ur-Leica (기본 원형, 1913년 생산)와 라이카Ⅰ(1924년의 첫 생산모델)은 외형이 거의 동일하다. 최초의 Ur-Leica는 이미 현대라이카의 몇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24×36mm 필름포맷, 금속몸체, 프레임 카운터, 36매용 카세트, 프레임 타입 뷰화인더를 위한 몸체위의 액세서리슈와 침동식 렌즈 등. 그것은 당시로서는 새로웠고 새로운 사진시대의 전설적인 출발이었다. Ur-Leica의 최초의 렌즈는 50mm Kino-Tessar였다. 사진속의 렌즈는 6매형의 Mikrp-Summar 1:4.5/42mm 렌즈. 그러나 셔터는 아직 겹쳐있는 구조(overlapping)가 아니었기 때문에 필름을 감는 동안은 필름이 빛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렌즈를 덮어야 했다. 그러나 이 최초의 Ur-Leica는 레인지화인더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면서 그 소형 카메라는 발전의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힘들고 길었던 시절, 바르낙은 그 초기디자인의 결점을 점검했고 필요한 개량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진지한 아마추어 사진가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이 직접 카메라를 사용하면서 가능한 모든 결점을 발견해 나갔고 개선시켜 나갔다. 거기에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오랜 시간의 땀과 노력이 요구되었다. 전쟁중에는 라이츠제품에 대해 알려진게 거의 없다. 단지 군용 쌍안경을 제작했으며 또다른 광학제품을 생산한 걸로 추측된다. 분명 바르낙의 카메라작업은 중단되었다. 독일군정보부가 서류를 촬영하기 위해 그의 소형카메라에 관심을 가졌었고 여기에 고무되어 라이츠는 1916년 디자인을 특허출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바르낙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세 번째로 알려진 원형을 제작했다. 그러나 이 카메라는 렌즈가 없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렌즈를 가졌는지 모른다.
1차세계대전 이후 바르낙은 자신이 설계했던 카메라를 상품화 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1920년 독일의 경제상황은 무척이나 어려웠고 판매는 부진하였다. 1920년대 초 인플레이션의 증가와 현미경 생산의 감소로 라이츠는 고용자들을 해고해야하는 위기를 맞이했다. 새로운 제품의 필요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당시 사진계는 붐을 이루었고, 수백만의 아마추어들이 활발히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그는 회의에서 카메라를 생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사실 바르낙의 카메라는 1913년 이후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14부터 1918까지의 1차대전 이후 어려워진 경제적 상황하에서 모험적인 사업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라이츠의 경영진은 바르낙의 카메라를 강경히 반대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카메라 생산을 반대하는 측의 의견은 인플레이션에 대비하기 위하여 사진유리건판을 대량 비축해 두었던 당시 사진기자재 판매상들의 이해관계도 또한 반영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 그 당시에 독일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맞고 있었다. 값싼 35mm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는 35mm필름의 폭발적인 수요를 창출해 낸 반면 전통적인 기자재의 생산이익을 감소시켰다.
논쟁은 몇 시간동안 계속되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모험적인 사업이었기에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아침부터 3시간 30분 동안의 맹렬한 논의 후 평팽했던 의견의 대립이 거의 부정적으로 분위기가 흘러 갈 때, 라이츠에서 라이카카메라의 운명은 최후로 한사람에 의해 결정내려졌다. 마침내 라이츠 2세(Ernst Leitz II)는 말했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바르낙의 카메라를 제조하겠다." 그 당시 청년이었던 언스트 라이츠 3세는 라이츠사의 이사들과 그 문제를 논의했던 그 시기를 ‘가장 길었던 날들’이라고 회상한다. 과거 라이츠 공장건물의 벽에는 1924년 바르낙의 라이카 생산 결정이 이곳에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는 현판이 걸려있다.
1923에는 더욱 발전된 표준형 35mm 카메라가 만들어 졌다. 이것이 Leica Null series camera(0-Series)이다. 이것은 판매용이 아니라 생산전 테스트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선택된 일부 사진가들에게만 제공되었다. 1923년 에른스트 라이츠의 생산결정에 따라 평가용으로 시리얼번호 #101∼125까지 25대의 생산전단계 시리즈(Preproduction Series)를 생산하였다. 초기의 7대는 포컬플레인 셔터였으나 재장전시 자동적으로 닫히진 않았다. 때문에 카메라몸체의 작은 고리에 끈을 단 렌즈캡을 사용하였다. 두 번째로 만들어진 카메라들은 자동으로 닫히는 셔터였으나 이 특징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뷰파인더는 접는 타입과 안으로 끼워 넣는 타입이 있다. 렌즈는 Anastigmat, Elmax, Elmar가 장착되었다.
* 사진: 오리지널 Leica Null-series(Leica Camera AG 소장). 사진출처: History of the Screw Mount Leicas
최초로 상품화된 바르낙의 발명품 Leica I은 1925년 4월 라이프치히 박람회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처음에는 바르낙카메라라고 불러야 했다. 그러나 회사 밖에서 바르낙은 너무도 생소한 이름이었기에 상품화될 카메라의 이름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Leitz Camera에서 두음을 따서 따서 'Leca'라고 불렀다. 첫 번째 팜플랫에도 이 이름이 사용되었지만 곧 발음이 쉽고 더 어감이 좋은 Leica로 바뀌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명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Leica'란 명칭은 레인지파인더가 내장된 라이카Ⅱ가 나오기까지 카메라에 표기되지 않았다. 단지 각 카메라에는 Ernst Leitz와 D.R.P(Deutche Reichs Patent : 독일의장등록)란 문자 그리고 일련번호가 음각되었다. 번호는 내부 부속품에도 부분적으로 표시되었는데 이로써 훗날 어떤 주요부분이 개량되었는지 점검하기가 용이해진 것이다. 공식적인 생산시기는 1925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1925년 봄 라이프찌히 박람회(Leipzig Fair)에 그 카메라가 공식적으로 대중에 선을 보였기 때문이며 실제로는 1924년에 생산되었고 그 해 겨울 몇 대의 카메라가 출시되었다.
* 사진: 라이카 I(A) 오른쪽은 당시 라이카 I의 사용설명서에 있는 사진. 부착 레인지화인더를 장착한 라이카 I(A) 모델이다. Leica I은 모든 35mm 카메라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카메라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35mm 카메라이기 때문이다. Leica I이 없었다면 다른 35mm 카메라들은 오늘날 나타나지 않았거나 현재의 카메라의 형태와는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라이카 I은 라이카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갖는 카메라이다. 그러나 라이카 I 역시 레인지화인더(Rangefinder) 카메라로 부르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라이카 I은 아직 레인지화인더를 갖추지 못했고 정확한 초점조절을 위해서는 'Scale Focussing'에 의존해야 했다. 'Scale Focussing'이란 우측 사진에서 보듯 거리를 측정하는 별도의 레인지화인더를 카메라 위에 부착하여 거리를 잰 후 이를 렌즈 조절링을 조절해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다. 프레임은 수직의 기다란 레인지화인더 옆에 부착된 뷰화인더를 통해 설정한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여자가 카메라를 든 사진에서 카메라위로 막대처럼 길게 올라와 있는 것이 바로 부착 레인지화인더이다. 이것을 촬영자의 방향에서 본 것이 바로 좌측사진이다. 부착 레인지화인더의 하단의 접안부로 피사체를 보면서 상단의 거리측정나사(B)를 돌리면 A와 C로 통해 보여지는 피사체의 이중상이 일치하는 순간이 나타나게 된다. 이때 둥근 거리측정나사위의 거리표시를 통해 피사체와의 정확한 거리를 알 수 있게 된다. 사진의 예에서는 3m가 카메라와 피사체의 정확한 거리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진가는 렌즈의 포커스링을 돌려 거리조절을 3m로 설정하여 놓으면 정확한 초점의 사진을 만들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이것은 비록 렌즈와 거리조절 연동은 되지 않지만 레인지화인더를 외부에 부착해 놓은 것과 같다. 따라서 약간 억지를 부린다면 어떤 면에서는 최초의 레인지화인더 카메라라고 볼 수도 있겠다.
라이카Ⅰ은 모두 금속재질로 무게는 425g이며 A, B, C형의 세가지 종류가 생산되었다. 1925년 처음 출시된 라이카 I(A)는 렌즈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교환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엄격하게 말하면 스크류마운트(screw mount) 바디라고 할 수도 없었다(그러나 1933년까지 생산되었던 C형은 렌즈교환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라이카 I(A)는 초첨거리가 50mm, f3.5인 렌즈가 고정되어 있었고, 1/25~1/500초의 포칼플레인 셔터를 가진 매우 단순한 구조였다. 그 당시 작은 포맷의 롤필름은 6x9cm이였고, 많은 사진가들이 9x12cm 네가티브나 13x18cm 네가티브 또는 더 큰 플레이트를 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작은 금속상자는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라이프치히 박람회의 방문자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었다. 모두들 이러한 작은 사이즈의 네거티브는 대형 사이즈의 네거티브만큼의 사진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25년 850대가 만들어 졌으며, 1926년엔 1550대, 1927년엔 3200대가 판매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라이카는 점차적으로 사진가들에 의해 그 실질적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고 1928년(7600대)부터 급속한 성장을 보여 1929년에는 15000대가 판매되었다. 라이카 I은 카메라 가격이 비쌌던 당시에 총 5만7000대 이상이 생산되었을 만큼 성공작이었다. 라이카 I은 이전까지 생산되었던 어떤 35mm 카메라도 이루지 못했던 상업적 성공을 이룸으로써 사진 역사에서 35mm 카메라를 본격적으로 등장시키는 역사의 커다란 한 획을 그었던 것이다.
1931년도는 모델을 변경한 해로 불황까지 겹쳐서 그 결과 생산량이 1만 1천대에 그치게 되나 1932년 카메라 제작이 전반적으로 재개되면서 매년 평균 3만대에서 3만 5천대의 라이카가 제작되었다. 1936년에 40000대의 생산을 보였고 1938년 44000대의 생산이후 1942년 6000대로 급격히 생산이 감소했다. 1925년 초부터 전쟁이 끝난 해까지(1945년) 총 400,000대 정도의 라이카가 생산되었다.
1928년부터 1936년 바르낙의 사망까지 라이츠의 연구진들은 15가지의 다른 모델들을 개발했다. 각각의 모델들은 몇 가지의 타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바르낙의 사망이후에도 라이카의 제품개발은 쉬지 않고 계속되어졌다. 라이카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향후 모든 개발의 핵심이랄 수 있는 디자인에서 2가지 개념의 도입이었다. 첫 번째는 1930년에 도입된 렌즈 교환방식 마운트의 채택이다(초기에는 카메라에 새겨진 일련번호의 첫 세자리 숫자를 렌즈에 음각시킨 형태로 특정한 카메라에 특별히 맞춰진 일련의 렌즈군에 한해 교환이 가능하였다.). 두 번째는 모든 렌즈에 자동적으로 연동되는 레인지 파인더를 내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1931년 모든 카메라 렌즈가 카메라 바디에 언제든 편리하게 장착될 수 있도록 렌즈와 필름막사이의 거리가 표준화되었고, 일년 후인 1932년 초기렌즈들은 물론 제작된 모든 렌즈의 시리얼번호가 확인될 수 있게 되었고 Leica II model에 레인지화인더를 장착하였다.
* 사진: 라이카 II 모델
1932년 출시된 Leica II는 레인지화인더가 장착되고 35-135mm의 렌즈를 표준화된 방식으로 교환 장착할 수 있는 최초의 카메라였다. 드디어 명실상부한 레인지화인더 카메라가 탄생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사실 콘탁스 I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탁스가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콘탁스의 셔터시스템의 불완전성 때문이었다. Leica II 역시 I과 더불어 라이카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카메라이다. 라이카 II는 레인지화인더, 렌즈교환방식, 50mm 화인더, 1/20 - 1/500의 셔터스피드를 갖춘 최초의 실질적인 시스템 카메라였다. 라이카 II 이전까지는 별도로 부착된 레인지화인더에 의한 'Scale Focussing'에 의존해야 했다. 바디를 덮고 있는 볼커나이트는 아주 질겼고 짜이스 콘탁스 바디의 약하고 부수어지기 쉬운 커버보다 훨씬 우수했다.
당시 라이카에 맞선 짜이스의 카메라는 1932년에 생산된 콘탁스(Contax)였다. 콘탁스는 당시로서는 가장 앞선 카메라로 가장 넓은 레인지화인더기저(100mm)를 가졌으며, 수직주행방식의 11개의 날개(blade)의 금속 포컬 플레인 셔터는 사용에 편리하도록 하나의 셔터다이얼내에서 최고 1/1000의 셔터속도까지 설정할 수 있었다. 거기다 렌즈교환이 가능한 베이요넷 마운트는 20mm에서 500mm에 이르는 12종류의 뛰어난 칼 짜이스 렌즈군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월등히 앞선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콘탁스가 라이카와의 경쟁에서 밀린 이유는 앞서 말한 셔터시스템의 불완전성등의 카메라의 내구성 때문이었다. 바르낙의 라이카는 실질적인 면에서 앞섰다. 아무리 성능좋은 카메라라도 너무 고장이 자주 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라이카는 뛰어난 품질의 사진을 만들어주는 신뢰성 있는 카메라로 인정받으면서 경쟁자들을 하나 둘 제치고 최고의 카메라로 명성을 쌓아 나갔다.
라이카 II의 등장과 더불어 여러가지 악세사리(accessory) 및 교환렌즈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되자 엘마(Elmar) 렌즈 고유의 구성요소를 가지면서 렌즈의 수차를 약간씩 변형시켜 다양한 형태의 초점거리를 갖는 여러 가지 형태의 Elmar design의 렌즈가 50mm 표준렌즈에 이어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Elmar형 렌즈로는 1931년 제작된 35mm 와 135mm 렌즈가 있으며 1932년 제작된 90mm 와 105mm 렌즈가 있다.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도 초기 라이카의 렌즈들은 아주 좋은 품질을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감광유제는 매우 거칠어서 입자들이 보일 정도였다. 거친 입자로 인한 사진의 낮은 화질과 배경의 노이즈로 인해 사진의 디테일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이에대한 대책으로, 라이카 렌즈를 설계한 막스 베렉(Max Berek)은 그 당시 감광유제의 특성에 맞춘 광학적 공식을 선택했다. 당시 라이카 카메라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그 당시 표준이었던 6x9cm 또는 9x12cm의 밀착인화물과 라이카의 24x36mm 필름에서 확대된 인화물이 사진으로서 동등한 품질을 갖는 것이었다. 바르낙과 베렉은 13x18cm 크기의 고품질로 확대된 인화물을 목표로 수많은 테스트를 했다. 그들은 이를 위해 모든 시스템을 정밀하게 설계하고 제작했다.
1930년 1월 18일 라이츠사는 합병되어져서 가족회사에서 G.m.b.H(Gesellshaft mit beschrankter Haftung), 요컨대 미국합작의 주식회사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2차대전 후까지 이 명칭은 카메라에 표기되지 않았고 단지 이전까지 사용해오던 D.R.P 대신 D.B.P(for Deutsches Bundesrepublic Patent)가 쓰였다. 동시에 이 표기는 전쟁전후에 생산된 다른 카메라에도 사용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49년 이후 새로운 모델이 등장하게 되고 새로운 표기가 사용되었다. 라이카는 세계적인 명성의 토대 위에 몇가지 기본 모델의 일관성을 유지하였다. 렌즈도 전통적인 엘마 f3.5 50mm 렌즈에서 35mm 광각 그리고 표준렌즈로부터 73mm, 90mm, 105mm, 135mm, 200mm를 망라한 망원계통의 렌즈로 그 폭을 늘려나갔다.
1933년에는 Leica III를 생산하면서 셔터설계에 저속스피드를 추가하였다.
그리고 1935년에는 고속셔터스피드가 추가된 셔터설계를 가진 Leica IIIa가 생산되었다. 이후 더욱 더 개량된 Leica IIIb (1938)와 Leica IIIc(1940)가 생산되었다. IIIc는 풍부한 생산량으로 인해 오늘날 가장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바르낙 카메라이다.
1949에는 특수한 렌즈재료와 렌즈설계방식을 개발하기 위해 광학실험연구소(Optical Research Laboratory)를 설립되었으며 1950년에는 후레쉬동조접점과 셀프타이머가 내장된 Leica IIIf가 출시되었다. 라이카 IIIf는 세가지 종류(BD: 블랙다이얼, RD: 레드다이얼, RD with ST: 셀프타이머가 내장된 레드다이얼)가 생산되었으며 상당히 많은 량이 생산되어 오늘날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IIIc와 더불어 여러 가지 면에서 스크류마운트 바디의 애용자들에게 실용기로 적합한 카메라이다.
1957년에는 가장 진보된 바르낙 스타일의 카메라이자 마지막 라이카 스크류마운트 기종인 Leica IIIg가 생산되었다. 그것은 IIIf보다 더 진보된 뷰화인더와 후레쉬동조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이 카메라는 오늘날 많은 수집가와 사용자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 라이카 스크류마운트(Screwmount) 바디에 관심이 많은 분은 Christoph Ozdoba의 History of the Screw Mount Leicas와 CameraQuest를 참고하길 바란다. 라이카 스크류마운트 바디 각 기종에 대한 상세한 소개와 설명은 여기서는 하지 않는다.
1차대전 이후부터 1949년까지 전 생산량의 95%가 미국시장으로 수출되었다. 이 시기 이후에는 생산품이 전세계의 시장으로 보내어졌다. 한편 라이츠사는 그들의 가장 중요한 시장이었던 미국시장으로의 수출을 위해 1952년에 Gunther Leitz가 캐나다에 새로운 공장을 설립하는 급진전을 맞게 된다. 당시는 2차세계대전이 끝난지 몇 년되지 않은 허리띠를 졸라매던 시절이었고 동시에 냉전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당시 급격하게 성장하던 미국시장과 수지맞는 장사가 될 수 있었던 미국 군수시장에의 진출은 사진장비업체인 라이츠의 입장에서는 아주 좋은 기회였고 시장에 근접한 공장입지는 당시로서는 매우 현명한 판단이 될 수 있었다.
* Midland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들
※ 미들랜드에 대한 자료는 캐나다 밴쿠버의 Tom Abrahamsson(http://www.rapidwinder.com)씨가 제공해준 자료를 참고했다. Tom의 친절에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점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그렇다면 라이츠는 왜 미국에 공장을 세우지 않고 캐나다에 공장을 세웠는가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설득력있는 설명은 고도로 숙련된 독일 기술자들을 새로운 공장으로 이주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당시 미정부가 미국의 옛적국이었던 독일인들의 미국내의 정착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는 것이다. 만일 당시에 이러한 문제만 없었다면 우리는 ELCAN 대신에 ELUSA를 보게 되었을 것이다. 미들랜드는 토론토에서 근접하여 있었고 그 지질학적 위치가 캐나다에서 지진에 아주 안전한 지대였으므로 공장입지로 선택되었다. 그러한 안정성은 렌즈의 고도로 민감한 테스트에서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떠도는 이야기 하나가 또 하나의 이유로 설명되기도 하는데 야설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나중에 여유가 되면 소개 하겠다.).
카메라와 렌즈의 생산은 독일과 캐나다에서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오늘날 Ernst Leitz Midland Canada가 각인된 캐나다산 IIIf와 IIIg를 찾아볼 수 있으며, 초기의 M 카메라들은 독일산, 캐나다산이 뒤섞여 있는데, 양자를 구별짓는 표시조차 없는 경우도 많아, 시리얼번호를 확인해야만 캐나다산(ELC)을 구별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그런데 이들은 무척 비싸다.).
미들랜드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그곳의 렌즈설계팀으로부터 나왔다. Mandler 박사(그는 아직도 미들랜드에 살고 있다고 한다.)를 포함한 미들랜드의 렌즈 설계팀에 의해 50/1 Noctilux, 75/1.4 Summilux, 35/14 (59년 설계된 초기버전으로 매우 명성이 높은 렌즈의 하나이다. ), 21/2.8, 90/2 초기버전과 바로 이후의 버전 등 뛰어난 많은 렌즈들이 그곳에서 설계되었다. 반면 오랜 동안 웨츨러에서 만들어진 M 렌즈는 오직 50/1.4뿐이었다(21/3.4는 슈나이더 설계이다). 그리고 이외에도 R용 180/3.4 Apo, 100/2,8 Apo-Macro렌즈와 미군용 군사용 광학장비들과 다른 군사용 M 카메라들, 66mm/f2, 75/2.4 APO, 50/2 ELCAN 등과 이외의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많은 렌즈들이 미들랜드에서 생산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많은 렌즈들이 토론토에서 약 두시간 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 미들랜드에서 탄생하였다. 또한 미들랜드로부터 나온 렌즈 부품들에도 많은 경우 'Made in Germany' 표시가 붙혀지기도 하였다.
간혹 많은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독일제와 캐나다제 중 어느것이 더 뛰어난가?" 내가 아는 한 미들랜드의 제품설계와 품질관리는 매우 뛰어났다. 양자 사이의 질적 구별을 짓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라이카 Solm과 미들랜드공장과의 연결은 초기의 90/2 APO-Asph과 Noctilux용 렌즈의 일부를 위한 광학시스템을 마지막으로 단절되었다.
미들렌드에 대한 많은 정보들은 아직 '극비사항'으로 분류돼 일반에는 공개가 되지 않고 있다. 아마도 군수산업과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되어질 뿐이다.
1990년 Hughes 항공사가 라이츠 캐나다를 인수하여 Hughes Leitz Optical Technologies로 개명하고 사업을 확장하였다.1999년 Raytheon은 디지털관련 산업체였던 Texas Instruments와 Hughes Leitz Optical Technologies를 인수하여 ELCAN Optical Techologies라는 이름으로 합병하였다. 현재 ELCAN 광학기술사는 원거리통신산업과 방위산업에 진출해 있다. 생산되는 제품들의 예를 들자면 소총의 조준망원경, 토마호크 미사일의 부품등 살상용 무기에서부터 각종 정밀기계장비들의 부품과 악세사리 등 상당히 다양하다. 과거 캐나다의 공장 신설을 계획하고 추진했던 라이츠 가문의 사람들과 경영진들이 자신들이 추구했던 이상과 오랜 세월의 피와 땀을 통해 축적하였던 광학적 기술, 경험들이 오늘날 정밀한 살상용 무기들에 직접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지 자못 궁금해지기도 한다.
4. 라이카의 전설의 완성 : M3의 출현과 라이카의 전성기
1957년에는 가장 진보된 바르낙 스타일의 카메라이자 마지막 라이카 스크류마운트 기종인 Leica IIIg가 바르낙의 후계자였던 Wagner에 의해 설계되어 생산되었다. 그것은 IIIf보다 더 진보된 뷰화인더와 후레쉬동조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개념하에 생산된 라이카 M3의 등장으로 라이츠는 다시 한번 중요한 방향선택을 해야 했다. 라이츠는 시대의 대세를 따라 Stein의 M3를 주력 상품으로 선택하였다. 결국 Leica IIIg는 1960년 단종되었으며 Wagner가 설계했던 IIIh는 생산되지 않았고, 그는 1966년 라이츠를 떠났다. 바르낙형의 스크류마운트(Screw Mount) 바디를 사랑하는 사용자들에게는 애석한 일이었겠지만 라이츠의 판단은 현명했다고 생각한다.
라이카 역사상 가장 훌륭한 카메라로 평가되는 M3는 1953년부터 생산되었다. 이 카메라는 종래의 카메라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기종으로 M3는 이전까지의 라이카를 실용적인 방향으로 재설계했던 모델이다. 베이요넷 렌즈마운트에 교환렌즈에 따라 프레임이 변하는 아주 밝은 뷰파인더를 내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기술의 채용으로 교환렌즈 장착시 별도의 뷰화인더를 장착해야만 했던 이전까지의 불편함을 제거시켰다. 따라서 M3는 프로사진가들과 렌즈교환이 신속히 이루어지지 않는 스크류 마운트 방식의 카메라에 큰 불편을 느꼈던 사용자들의 커다란 환영을 받었다. Stein은 M3의 설계를 담당했으며 Uhl은 생산과 품질관리를 총지휘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뛰어난 창의력과 지식을 M3 카메라속의 금속과 유리로 변환시켜 넣었다. 아마도 이들이 없었다면 전세계의 사진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형편 없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M3를 디자인뿐만 아니라 품질 면에서 가장 훌륭한 레인지화인더 카메라 또는 모든 카메라중 가장 훌륭한 카메라로 생각하고 있다. M3는 단순히 새로운 형태의 카메라가 아니라 35mm 카메라가 지향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카메라였으며 라이카뿐만 아니라 카메라산업 전체의 발전에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로서 M3는 다른 카메라들에 비해 너무나도 진보된 카메라였으며, 레인지화인더 카메라로서는 전무후무한 판매량을 기록하게 되었다. M3는 22만 5천대 이상 생산되었고 레인지화인더 카메라 역사상 가장 많이 판매된 카메라로 기록되어 있다. 출시후 3년간 10만대 이상의 M3가 판매되었다. 같은 시기에 니콘(Nikon)은 약 6만대의 S2를 판매했고 후에 3만대를 더 판매했다. 그러나 라이츠는 같은 시기에 추가적으로 20만대의 M2와 M3를 판매했다. M3가 출시후 처음 3년간 판매한 숫자를 판매하는 데, M6는 10년도 넘게 걸렸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매우 놀라울 만한 것이다.
..... 이하의 내용은 Leica M 이야기의 나머지 글들을 참고할 것.
5. M3이후의 약사
지난 날을 되돌아보면, 라이카 50주년 당시 라이카가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SLR 카메라의 대량생산과 저렴한 카메라 가격으로 전세계를 공략하던 일본과의 치열한 경쟁이 계속되고 있었고, SLR 카메라의 급속한 개발요구와 레인지화인더 카메라의 불확실한 시장하에서 라이카는 급격한 변화 아니면 카메라의 생산을 중지하는 선택을 해야 했다. 실제로 짜이스(Zeiss)는 이미 91년에 카메라 생산을 중단하였었다. 라이카는 높은 생산원가, 자본의 열세 등의 불리한 상황하에서 생존의 길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과거와 같은 제품의 생산과 품질관리 방식은 경제, 기술환경이 급격히 변한 현대에서 경쟁력을 갖기 어려웠다. 여러차례의 힘든 고비를 넘긴 후에 이제 라이카는 Ernst Leitz의 라이카가 아닌 Leica Camera AG로서 현대적 경영방식과 생산방법으로 거듭나고 있다. 라이카의 전설은 어떻게 보면 단절되었다고 볼 수도 있고 연연히 이어오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 라이카의 거장들의 천재성과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 그리고 장인들의 정성어린 숨결은 세계의 라이카사용자들의 예술에 대한 고뇌와 애정어린 손길속에 라이카 카메라속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다.
. 1957년 Leica사는 M3에 비해 더 저렴한 Leica M2 기종을 생산하였다.
. 1959년 Leica사는 M2를 과학적 목적을 위해 기능적으로 축약한 형태인 Leica M1을 생산하였다.
. 1960년, 1957년부터 생산되었던 마지막 라이카 스크류마운트 기종인 Leica IIIg가 마지막으로 생산되었다(SN#988350). 총 798,200개 정도의 라이카 스크류마운트바디가 생산되었다. Leica IIIg는 바르낙의 후계자였던 Wagner에 의해 설계되었다. 그러나 라이츠는 시대의 대세를 따라 Stein의 M3를 주력 상품으로 선택하였다. 결국 Wagner가 설계했던 IIIh는 생산되지 않았고, 그는 1966년 라이츠를 떠났다.
. 1964년에 라이카사는 라이카의 최초의 일안리플렉스(SLR) 카메라인 Leicaflex를 생산하였다.
. 1967 Leica는 M4를 출시하였다.
. 1968 Leica는 TTL노출계를 내장한 Leicaflex SL을 생산하였다.
. 1971 TTL 노출계를 내장한 최초의 M 카메라 M5를 생산하였다.
. 1973 미놀타와 합작하여 Leica CL, Minolta CL, Leitz-Minolta CL 생산. 후에 Minolta CLE 생산.
. 1974 Leicaflex SL2 생산. 라이카플렉스 SL2는 시장에 나온지 3년만인 1976년에 생산이 중지되었는데 지금은 뛰어난 기계적 완성도로 실용적인 측면과 수집적인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출시된 이후 라이카 50주년에 생산중단된 M5도 마찬가지 경우이다(M5 리뷰 참고).
. 1974년 현미경과 기타 기술장비제작으로 잘 알려져 있는 스위스 회사인 Wild Heerbrugg AG of Switzerland는 당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던 Ernst Leitz Wetzlar 지분의 51%를 획득하였다. 1974년에는 더 좋은 경영조건을 모색하기 위하여 라이츠는 포르투갈 포르토(Porto) 근처의 작은 마을인 Vilanova de Famalicao에 새로운 공장을 설립하였다. 이 현대식 공장에서 Tranvoid 쌍안경과 영사기렌즈, 여러가지 형태의 현미경을 생산했고 라이카 R4와 R4-S를 조립하였다. 이 새로운 공장은 웨츨러의 기존 공장과 캐나다의 미드랜드공장을 효율적인 형태로 통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6 Leica와 Minolta 합작으로 Leica R3 생산시작. R series의 시작. 이후R4, R5, R6, R6.2, R7, R8, R9 생산. R6.2는 완전 기계식이며 R9는 전자식으로 지금도 생산되고 있다.
. 1977 M4-2 생산.
오늘날 M 카메라들의 존재는 상당부분 미들랜드 덕분이다. 월터 크룩(Walter Kluck)은 독일 자르(Saar)의 Ingborg에 있는 작은 라이츠 공장의 책임자였다. 그는 기술자들 이끌고 1952년에 캐나다 온타리오의 미들렌드로 공장설비를 이전하였다(이 가운데는 뛰어난 렌즈설계기술자인 Walter Mandler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라이카의 전성기를 지나면서 라이카에도 시련은 찾아왔다. 1974년 스위스 회사인 Wild Heerbrugg AG of Switzerland는 Ernst Leitz Wetzlar 지분의 51%를 획득하였다. 더구나 당시는 SLR의 거대한 인기에 라이카 M4, M5 등 레인지화인더 기종의 판매는 계속 감소하는 등 라이츠사는 경영의 큰 어려움으로 인해 M 시리즈의 생산중단의 위기로까지 봉착해 있었다. 이 시기에 라이츠 캐나다 미들랜드의 총책임자였던 월터 크룩은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그는 실패한 M5의 생산을 M4의 재생산으로 대체해야 하며 낮은 생산비의 장점을 이용하여 M4-2를 생산할 것을 제안하여 M을 단종시키려는 라이츠 경영진을 겨우 설득시켰다. 결국 그의 이 판단은 옳았고 라이카 M은 위기에서 벗어나 성공적으로 재기할 수 있었다. 월터 크룩의 혜안 그리고 그의 믿음과 인내가 라이카 레인지화인더를 단종에서 구해냈던 것이다.
. 1980 M4-P 생산.
. 1984 더 진보되고 신뢰성있는 노출계를 내장한 Leica M6 생산시작.
. 1986 라이츠가문이 회사의 운영에서 완전히 물러남. Leica GmbH 설립.
. 1987 Ernst Leitz Wetzlar GmbH와 Wild Heerbrugg AG가 합병하여 Wild Leitz 그룹이 됨.
. 1990년 Wild Leitz Holding AG와 Cambridge Instrument Company의 합병으로 새로운 Leica Holding B.V. group이 탄생하였다. 오늘날 라이카사는 현미경, 측량기, 사진측량기의 제조 등 각종 과학용 광학기기들을 제작하고 있다. Zett-Geräte-Werk(전 Zeiss-Ikon)이 Leica Camera 그룹에 흡수되었고 Leica Projektion GmbH가 설립되었다.
. 1990년 캐나다회사는 매각되었고 생산설비는 Wetzlar에서 5마일 정도 떨어진 Solm으로 이전되었다.
. 1996년 라이카사는 Minox GmbH의 카메라 분야를 인수받았다. 라이카카메라 G.m.b.H의 주식은 일반에 공개되었고 지금의 공식명칭은 Leica Camera AG이다.
. 1997년 Leica M6 .85 생산시작
. 1998. M6 TTL .72와 .85 생산시작
. 2000 안경착용자를 위한 M6 TTL .58 출시. 28mm Summicron F2 출시.
. 2003. M7 출시
* 그동안 많은 라이카 특별모델들이 군사적인 목적과 과학적 목적을 위해 생산되었다. 특별생산은 특별한 사건이나 인물, 장소 또는 어떤 관계를 위해 한정된 수로 생산되었다.
레인지화인더 카메라와 SLR 카메라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우수한 기종인가하는 오랜 논쟁은 이제는 불필요할 지도 모른다. 양 기종은 현대사진에 있어 제각기 장점을 가지고 고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일례로 레인지화인더 기종인 라이카 M형은 견고하면서 휴대성이 뛰어나고 21mm에서 135mm에 이르는 초점거리의 범위에서 뛰어난 렌즈군을 이용할 수 있으며, 특히 빛이 강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속사와 정확한 포커싱이 용이한 장점이 있다. 또한 조용한 셔터소리는 보도사진이나 캔디드사진에 아주 이상적이다. 이에 비해 사용범위가 광범위한 SLR 카메라는 아마추어들의 일반사진에서부터 정밀을 요하는 과학사진에 이르기까지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기종이다. SLR의 반사스크린 구조는 피사체를 쉽고 정확하게 포착하도록하여, 접사 또는 망원시 별도의 뷰화인더나 비조플렉스 같은 불편한 기구를 사용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6. '라이카 M의 역사'를 마치면서
라이카가 35mm필름을 사용한 최초의 35mm 카메라는 분명 아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최고의 성공작으로 인정받은 몇 안되는 카메라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라이카는 라이카가 존재하기 시작한 이후 60년 동안 사진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라이카는 35mm 카메라의 시대를 연 새로운 형태의 카메라였을 뿐만아니라 일종의 첫 번째 사진시스템이었다. 라이카는 사진촬영에서 시작하여 확대나 영사기등을 망라한 다양한 사진기자재들도 생산하였는데, 무엇보다 일관성 있게 높은 수준의 제품들을 디자인하고 제작하였다.
수십년간에 걸쳐 라이츠에서 발명되고 생산된 카메라 바디, 렌즈와 방대한 양의 액세서리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단지 목록을 열람함으로써만 현대의 35mm카메라에 사용되는 대부분의 액세서리들이 오래전에 라이카를 위하여 라이츠사에서 제작되고 라이츠사에 의해 실험단계를 거쳤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현대식 SLR 카메라가 출현하기 오래 전에 사람들은 라이카의 렌즈를 교환할 수 있었고 카메라에 내장된 레인지화인더로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오늘날 카메라 시장에는 성능이 매우 뛰어나고 용도가 다양한 첨단의 카메라 장비들이 넘치고 있지만 사실 이같은 첨단장비들의 아이디어나 기계적, 기술적인 기본바탕은 30년 또는 40년 전에 라이카를 통하여 전부 이루어졌었다.
라이카는 몇 사람의 천재성과 지혜가 만들어낸 걸작이다. 오스카 바르낙은 뛰어난 카메라를 막스 베렉은 거기에 어울릴 뛰어난 렌즈를 완벽하게 만들어 내었고 언스트 라이츠 2세는 경영상의 위험을 감수하고 이를 생산하였다. 이들은 모두 다 라이카 카메라의 성공에 있어 비슷한 무게로 공헌하였다. 그리고 Stein은 이전까지 라이카가 쌓아놓은 바탕위에서 역사상 최고의 카메라로 평가받는 M3를 설계해 내었고 Uhl은 라이카의 철저한 생산과 품질관리를 총지휘하였으며, 맨들러박사와 그의 연구팀들이 미들랜드에서 불멸의 라이카렌즈들을 설계해 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뛰어난 창의력과 지식을 라이카의 바디, 렌즈의 금속과 유리로 변환시켜 넣었다. 그리고 미들랜드의 책임자였던 월터 크룩의 혜안 그리고 그의 믿음과 인내가 라이카 레인지화인더를 단종의 위기에서 구해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잊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기여자들이 있다. 바로 라이카를 사용해 수많은 명작을 만들어 냈던 까르띠에 브레송을 비롯한 사진가들과 과거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전세계에 존재해 있었고 지금도 있는 바로 당신과 나를 포함한 라이카의 애용자들이다. 라이카의 전설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들로부터 시작되었고 이들에 의해 꽃 피워졌으며,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현재 라이카의 지분은 상당부분 스위스의 회사에 있고, 엄격하게 말해 독일회사라고 말할 수는 없다. 라이카의 3세대에 이르러 언스트 라이츠 가문은 이제 라이카의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나 버렸고, 애석하게도 우리는 더 이상 라이카 카메라의 몸체에서 "Ernst Leitz"라는 글자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가문의, 그리고 장인으로서의 명예를 걸고 'Leitz'란 이름을 위해 최고의 제품 생산을 경영상의 이익보다 우선시했던 그들에 대한 추억은 오스카 바르낙, 베렉과 더불어 우리들의 가슴속에 남아있을 것이며, 라이카의 전설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을 것이다.
- The history of the Leica 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