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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천도교의 총본산 교당이며, 일제 때 항일운동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조선 말의 혼란한 사회상과 더불어 기존 종교인 불교ㆍ유교ㆍ선교ㆍ천신숭배사상은 그 존재 가치가 약해졌다. 이때 서학(西學) 천주교의 유입은 서민층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에 대응하여 나타난 것이 동학(東學)이다. 최제우(崔濟愚)는 1860년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을 선포하고 동학을 창시하였다. 손병희(孫秉熙)는 동학의 3대 교주로서,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중앙대교당의 건립은 손병희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일제는 이 건물의 건립에 갖은 방해를 하였지만, 300만 교도의 성금으로 건립되었다. 신도 1호당 10원씩 모금하기로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한다. 대지는 윤치오가(尹致旿家)의 1,500평이 할애되었다.
1918년 12월 1일에 개기식(開基式)을 거행했으나, 1919년 3ㆍ1운동으로 공사가 지체되었다. 1919년 7월 일본인 나까무라 헤이요시(中村與資平)에게 건축설계를 의뢰하여 1921년 2월 28일 준공되었다. 지상 2층 그리고 탑부 4층, 연면적 280.68평이다. 1층은 700.83㎡(212평), 2층은 150.74㎡(45.6평), 3층은 47.74㎡(14.44평), 4층은 23.97㎡(7.84평)였다. 시공자는 중국인 장시영(張時英), 총 감독관은 일본인 기사(技師) 고곡호시(古谷虎市)였다. 공사비는 당시 화폐로 22만원이 소요되었다.
설계자 나까무라는 1905년 동경제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진야갈서설계사무소(辰野葛西設計事務所)에 입사하였다. 이 사무소는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본점을 설계하였는데, 나까무라는 1908년 이 공사의 공무원(工務員)으로 한국에 왔다. 그는 1912년 조선은행이 준공된 후 서울에 잔류하고 봉래동에서 설계사무실을 설립했다. 그는 숙명여고(淑明女高, 1920), 조선상공회의소(朝鮮商工會議所, 1920)와 군산ㆍ예산ㆍ대구 등지의 은행 지점 건물 등 많은 설계를 했다. 그는 대교당이 준공될 무렵 도쿄(東京)로 돌아갔다. 이 건물은 그의 한국 내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는 아르누보(Art Nouveau)의 한 부류인 비엔나 쎄제션(Vienna Secession)풍의 건축이며, 강렬한 적벽돌 외장이 주조를 이루고, 일부분에 화강석을 써서 강조하였다. 평면은 T자형으로, 일반적인 기독교 교회당과는 다르다. 정면성을 강조하도록 장방형 매스를 좌우로 길게 배치하고 그 후면에 강당을 붙인 형태이다.
건물 정면은 좌우 대칭이다. 기단부는 화강석을 볼륨 있게 사용하였다. 중앙 현관부는 화강석의 반원 아치를 들여쌓은 출입문(figure portal, 고딕양식 성당의 주출입문 형식인 장식문)을 두고, 이 현관의 양끝에 화강석의 장식적인 부축벽을 세웠다. 전면 1층 창은 머리 부분에 화강석을 3개씩 끼운 방형 창이며 , 2층 창은 7개의 화강석을 끼운 반원 아치창이다. 정면 중앙에는 탑이 서 있다. 이 탑의 중앙부에는 반원 아치의 큰 창이 있고 그 상부에 3개의 작은 반원 아치창을 내었으며, 그 지붕은 바로크풍이다. 건물 내외부에 한민족을 상징하는 박달나무꽃과 무궁화 등을 조각하였다.
본 건물은 한국에서 태동한 종교인 천도교의 중앙대교당으로, 교당의 역할 뿐만 아니라 민족종교를 전파하고, 어린이운동도 펼친 민족문화의 산실이었다.
이 건물이 계획되던 1910년대 말에는 이미 천주교의 대성당인 명동성당이 존재했다. 명동성당이 정통 고딕양식으로 건축된 것에 비하여 이 교당은 절충적인 양식을 나타내고 있지만, 명동성당을 능가하려는 의지가 중앙탑을 중심으로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건물이 준공되자 당시 한 언론은 이 건물을 명동성당․조선총독부 청사와 함께 서울의 3대 건물의 하나로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