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타 여행
이충이
우리가 일주일 내내 머물렀던 크레타 섬은 찬란한 5천년 역사의 기록이었다. 섬은 크레타문명을 기원전부터 세기말까지 보존했다. 우리는 하냐 공항에 내려 버스 편으로 에게해 남쪽 해변도로를 따라 이라클리온 시내로 들어갔다.
크레타섬에 도착한 다음 날, 유스호스텔 근처 거리를 지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집을 찾았다. 좁은 길을 따라가자 아담한 건물의 현관이 보였다. 현관에 들어서자 이 집의 관리인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청년 카잔차키스가 터키로부터 해방을 위하여 싸웠던 게릴라시절의 흑백사진이 벽면에 여러 장 걸려있었다. 흑백사진 속의 맑은 눈빛이 매우 날카로웠다. 좁은 거실로 들어서자 세계 여러 나랏말로 번역된 책들이 가득 전시되어 있었다. 이미 고려원에서 출판한 "영혼의 자서전", "희랍인 조르바" 등의 한국판 번역본들은 한 권도 전시되어 있지 않았다.
카잔차키스는 크레타섬의 이라클리온 시내에서 남쪽으로 십킬로 정도 떨어진 메시아 마을 밀티에에서 태어났다. 열정적이고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에 그는 그리스의 해방을 위해 싸웠다. 또한 2차대전이 끝난 후, 그리스 정부를 위해 성실히 봉사했다. 그러나 그는 말년을 유럽을 전전하다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까다로운 생애를 마감했다.
시내에 한국식당이 있다고 해서 크노소스 유물의 모조품 가게들이 밀집한 골목길을 한참 비집고 찾아갔다. 좁은 골목길은 깨끗하고 한가했다. 한국식당이라는 말만 들어도 반갑고 입맛 돋는 점심을 생각했다. 즐거운 점심을 잔뜩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베트남인이 경영하는 식당이었다. 연전에 한국인이 운영하던 식당을 인수한 상황이었다. 베트남 음식으로 한끼 점심을 먹었다. 우리가 더 가보고 싶은 곳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지였다. 평화롭고 한가로운 오후, 이라클리온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성루에 올랐다.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서 상쾌했다. 퍽 멋있는 성루 위 그의 묘지에 올라섰다. 돌계단을 하나씩 조심스레 밟고 오를 때 돌 틈서리에 곱게 피었던 노란 꽃의 의미를 이내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다른 꽃무리와 나무십자가와 더불어 있는 묘비명 ‘나는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으며 나는 무엇에게서도 도망하지 않는 나는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그의 깨끗한 말이었다.
이라클리온 시내를 거닐면 ‘바 조르바’나 ‘타베르나 조르바’라는 가게를 보게 된다. 이것은 카잔차키스의 소설 주인공 이름이다. 소박하고 대담하면서 인습적인 지방색을 잘 드러낸 소설 속의 남자들이다. 이들은 아직도 거리에서 소박한 일을 꾸미고 있었다.
우리는 며칠간의 아테네행사를 잘 끝냈다. 그 다음 그리스가 제공한 비행기편으로 크레타에 도착했다. 우리는 가벼운 기분으로 ‘시의 축제’를 위한 행사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농산물 가격폭락에 항의하는 농민들은 세계의 시인들과 함께 나타나는 정부관리들을 만나고자 했다. 우리가 버스를 타고 이라클리온 시내로 들어서자 곧바로 진입로에 쌓아놓았던 폐타이어에 불을 질렀다. 불길을 앞세우고 길을 막자 우리는 버스 속에 갇히고 말았다. 그 다음날까지 부두 근처에서 농민들의 시위는 계속되었다. 그리스인보다 더 그리스적이라는 크레타 사내들이 떼를 지어서 우후 소리를 질러댔다. 내가 보기에 과격하지 않은 시위였다. 자기들의 절실한 요구와 뜻을 전달하는 표현방법으로 보였다. 붉은 태양이 사라지는 저녁까지 침묵의 시위가 계속되었다.
크노소스 궁전에서 발견한 미노아 문명과 다른 지역의 유적들을 포함해 크레타문명이라 부른다. 크레타사람들은 올리브와 포도를 경작하는 온순하고 소박한 성격과 해적의 후예다운 막힘 없는 대담한 성격을 함께 지녔다. 일천 년의 로마 지배와 4백 년의 터키 지배로부터 그리스문화를 지키며 독립을 쟁취한 민족이다. 그 강인한 사람들이 살아남는 세상에서 에게해의 남쪽 가운데 떠있는 크레타섬에 서면 그들의 끈질긴 역사를 볼 수 있다.
두 번째 날 오후, 크레타문명에 대한 책을 받았다. 찬란한 미노아의 역사를 다시 한번 인식했다. 잠시 시간을 내서 사람 발길이 뜸한 거리를 산책하면서 서늘한 밤공기를 만끽했다. 나는 평화로운 어둠의 침묵과 함께 바다 밑으로 침몰했다. 우리와 전혀 다른 세계의 크레타문명을 만났다.
미노스 왕국이 그리스 아테네를 지배했다는 신화는 막대한 힘을 가진 국가였다는 상징이다. 크레타의 미노스 왕은 ‘칼날이 두 개인 도끼’ 즉 신관과 인간의 권력을 가진 절대자였다. 크노소스 왕궁은 ‘칼날이 두 개인 도끼의 집’이며 절대자인 왕의 거처였다. 이 강대한 권력을 가진 나라의 파시파 왕비가 거대한 흰 수소와 관계를 맺어 머리는 소이고 몸은 사람인 괴물 마노타우로스를 낳았다. 두려운 미노스 왕은 건축가 다이다로스를 시켜 미궁을 만든다. 그리고 괴물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가장 깊숙한 방에 가둔다. ‘칼날이 두 개인 도끼의 집’에는 크노소스와 그의 아들 미노타우로스가 함께 산다. 그래서 크노소스의 왕궁과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아테네의 청년 테세우스는 괴물의 제물로 바쳐진다. 그러나 그는 미노스 왕의 딸인 아리아 도네의 도움으로 괴물을 죽이고 무사히 그 궁을 빠져나온다.
셋째 날이 되었다. 오전 일찍부터 크노소스 궁전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던 우리 일행 중 어느 누구도 피곤하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미로를 헤매다 미궁의 마지막 방에서 보았던 5천년 전의 돌고래들이 벽면을 타고 유영하는 모습에 당황했었다. 아직도 그 곳에 5천년 전의 돌고래 떼가 살고 있었다. 그 방에서 살던 여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관람객들이 한 줄로 서서 좁은 통로를 따라가며 방마다 들여다보고 한 시대의 사라진 연인들을 찾고 있었다. 그토록 만나보고 싶었던 그들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았던 흔적은 찾아 볼 수 있었다. 어두운 지하에서 밝은 지상으로 빠져나와 흩어져 있는 5천 년의 돌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한순간일지라도 몸과 마음의 편안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일순의 여유로움도 소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따가운 햇빛을 피해 앉아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기도 했다. 우리가 반나절 동안 무엇 때문에 지하 궁전을 헤집고 다녔는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5천 년 동안 지하에 묻혔던 빛의 깊이를 조금 알아 볼 수 있었던 눈뜸이었다. 한번도 알아보지 못 했던 미지의 눈밝힘이며 끝없는 갈증이었다. 미로를 헤매며 빠져나갈 길을 수없이 찾았다. 그러나 미궁 속에서 아무 대상도 알아볼 수 없었던 내 미련함에 절망하기도 했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빠져나와 출구 앞에 서서 갈증을 삭히려고 휴대용 식수를 벌컥벌컥 마시던 순간이었다. 내 시야 멀리 들어온 길 건너쪽 올리브 과수원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올리브과수원에 3주일이 지나도록 만나지 못했던 내 여자들의 빛나는 눈빛이 뚜렷이 보였다.
며칠이 지났다. 밤새 뒤척이다가 일찍 잠이 깬 아침, 고요한 이라클리온 시가지와 일부 남아있는 성채 끝의 한적한 부두를 아무 생각 없이 배회하던 일도 생각난다. 이라클리온 박물관을 관람했을 때 선명한 색깔로 살아나는 파랑새를 보았다. 크노소스 궁전의 벽화에서 복원한 수소도 거기에 있었다. 궁전의 여자들이 사용했던 장신구가 많이 발굴‧보존되어 있었다. 순금은 제의귀걸이, 팔찌, 목걸이, 발걸이 등이 얼마나 정교하고 섬세한지 신비스러웠다. 이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했던 미노아 시대 왕실의 여자는 얼마나 아름답고 세련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박물관 앞뜰 벤치에서 한국청년을 만났다. 제대를 한 다음 복학할 때까지 그 동안의 시간을 이용해서 배낭여행을 한다고 했다. 우리는 박물관 바깥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보석 같은 섬을 흰 파도가 쉴새없이 씻어주고 있었다. 그리스의 어디를 가거나-젊은 여자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크레타 처녀들은 키가 호리호리하고 자태가 매우 아름다웠다. 예나 지금이나 크레타 사람들은 자연스럽긴 하지만 결코 순박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들은 새로운 생명을 낳는 위대한 어머니를 최고의 신으로 숭배했다. 그리고 수소의 거대한 성기와 고개를 쳐든 뱀의 형상도 남자의 상징으로 숭배했다. 그들은 왕궁을 지하 4층으로 건축하면서 밑층에 햇빛이 들도록 설계하고 욕조와 상하수도와 수세식 변소까지 설치한 5천년 전의 문명인이었다.
거대한 크노소스 궁전의 폐허는 미노스 왕국의 찬란했던 미노아 문명을 증명했다. 크레타의 역사는 전설이 아닌 현실로 그들의 후예들과 함께 현존한다. 그러나 미노스가 실존했던 왕명인지 왕가의 명칭인지 그 누구도 확실히 모른다.
또 며칠이 지났다. 깨끗한 해변가 마을 말리아에서 유럽인 피서객들과 섞여 해수욕을 했다. 좋은 음식을 먹으며 한가로이 지냈다. 외부 세계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메리아는 유럽인들의 손꼽히는 휴양지였다. 고요하며 정말 크레타다운 바다풍경이 펼쳐진 곳이다.
아주 멀지 않은 남쪽으로 내려가면 한때 지진으로 무너졌다가 다시 재건된 페스토스 유적지가 있다. 기원전 21세기 당시 미노아 문명의 페스토스는 크노소스 다음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우리는 페스토스 유적지와 만년설이 쌓였다는 이다산을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매일 늦은 저녁부터 깊은 밤까지 근처 말리아 유적지의 커다란 정원에서 시낭송회와 음악회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방과 화랑, 창고 등이 남아있는 말리아 마을은 나무가 울창해 정원을 감싸듯 둘러싸여 있다. 유적지는 크노소스 왕궁과 마찬가지로 미노아 시대의 형태와 거의 비슷했다. 그것은 그리스의 고고학자 하지다키스가 발굴했다.
우리는 안내를 받아서 그리스가 보석처럼 아끼는 여러 유적지와 한적한 마을들을 찾아다녔다. 제각기 다른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모인 시인들과 함께 며칠을 보냈다. 우리는 결국 크레타인들과 함께 5천년의 아무게 아무게 대장이 먼저 걸어갔던 그 길을 찾아다닌 셈이다. 여기서 우리란 이번 세계시인회의에 참가한 시인들을 말한다.
드디어 몇쨋날, 아름다운 에게해의 남쪽 또다른 해변가에 도착했다. 에게해의 해질녘, 그 매혹적인 크레타섬 해변과 닉소스 카르파트 등 키클라데스 제도의 섬들과 바닷물 속의 발바닥 간지러운 한때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발랄하고 신선한 처녀들의 몸짓을 기억한다. 물결이 잔잔한 해면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솟아오르는 경쾌한 동작의 반복과 석양빛에 드러난 그녀들의 붉고 투명한 몸매가 너무 강렬했다. 우리는 전라의 곡선이 선명한 젖부들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이슬을 머금은 장미화의 치오른 극도였다.
우리는 몇 년 전 이오니아해의 코루프섬에서 그랬듯이 지중해의 해변 어디서나 여자들의 투명한 반라의 욕정이 치솟는 밋밋함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어디서나 낯설음이 앞선 까닭은 문화의 이질성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다른 사회에서 잃은 것보다는 얻는 것이 더 많았다. 우리는 빛나는 태양과 깊고 푸른 지중해와 수천 년 동안 서 있는 기둥들과 선대들을 아무게 아무게 대장이라고 부르는 해적 같은 사내들과 몇천 년 전 신화 속의 아무게 아무게 신들에게 잡혀온 꽃같은 여자들과 그물이 쳐진 올리브나무의 과수원을 가슴 깊이 오래도록 간직해야 했다.
우리는 미처 보지 못한 미련을 남겨놓고 크레타섬을 떠났다. 플라톤이 만년에 남긴 불가사의한 기록, 아틀란티스 문명이 오늘에 발굴된 에게해 문명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크노소스 궁전의 발굴로 고도의 문명유적이 발견되었다. 페스토스 궁전과 말리아 궁전 등 크레타 문명뿐만 아니라 근처 산도리니섬의 아크로티리 유적 발굴이 에게해의 일대가 고도의 문명지이지 않았나 추측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크레타 섬에서 스쳐지나갔거나 마주쳤던 그리스인, 터키인, 아랍인들은 그들의 후예들이다. 에게해의 꿈같은 섬 앞에 섬들과 보석처럼 소중한 지혜의 아테네에 발 닿는 데마다 돌기둥이 즐비한 땅 아래와 땅 위를 한정없이 밟아 보고 싶다. 비행기편으로 아테네에 돌아와 하루를 쉬고 동서양의 세계가 공존하는 이스탄불을 향해 출발하였다.
<199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