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선 시집 해설>
기억하기와 기다리기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는 “시는 감정의 유로”라고 설명했다.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넘쳐 그것이 말로 표현되면 바로 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연스럽게 흘러넘쳐 나오는 말들은 대개가 다 사랑의 감정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사랑의 감정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며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시나 노래를 포함해서 세상에는 사랑에 대한 말들이 차고 넘치도록 많다.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사랑의 시를 쓰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사랑의 말을 속삭이고 있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랑의 말들을 상투적이거나 낡은 것이라고 함부로 폄하할 수는 없다. 수없이 반복되어 말해지는 이 사랑의 언어들은 사실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또 무엇을 말하느냐에 따라 그것의 빛깔과 농도는 다 다른 것이다. 사실 세상에는 이 사랑의 말만큼이나 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고 그만큼 그것들은 다 나름의 존재 이유를 가진 진정한 것이다. 사랑을 다룬 노래나 시가 오늘도 누군가에 의해 쓰여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김영선 시인은 이 사랑의 언어를 다룰 줄 아는 시인이다. 김영선 시인은 그만의 언어를 통해 일상에서 그리고 과거의 기억에서 사랑의 흔적을 찾는다. 이 시집의 시들은 바로 이 흔적의 기록이다. 시인은 이런 시 쓰기를 통해 사랑과 삶에 대한 의미를 성찰하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2. 기억하기와 사랑하기
기억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너무도 중요한 일이다. 기억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지금 여기의 내가 나인 이유는 내가 경험한 기억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또는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아니면 누군가의 연인으로서의 나는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한 기억들이 있기 때문에 나를 증명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와의 사랑은 이 기억으로 존재한다. 기억되는 것이므로 사랑이기도 하지만 사랑이므로 기억되는 것이다.
꽃이 모두 열매를
맺지는 않는다
아름다운 날
누구의 뜰을
붉게 물들이고
열매보다 치열한
핏빛으로 피어
눈길 사로잡는 시절
우리가 기억하는 너는
어느 결실보다
소중히 간직되어
다시 피어나기를 소망하며
그리워하느니
그리하여
맺지 말고
늘
사랑만 하여라
- 「백일홍」 전문
이 시에서의 “백일홍”은 사랑의 비유적 표현이다. 그런데 그 사랑은 기억으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사실 사랑이 소중한 이유는 그것이 “소중히 간직되어 / 다시 피어나기를 소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랑을 한없이 그리워한다. 아무리 오래 피어있는 백일홍이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지고 말고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기억으로만 가지고 있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기억 속의 모든 사랑은 아련하고 아름답다. 시인은 기억으로 남게 될 사랑을 안타까워 한다. 그래서 백일홍에게 “맺지 말고 / 늘 / 사랑만” 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아마 이 권유는 시인이 자신에게 던지는 말일 것이다. 피었다가 지고 마는 사랑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지금 여기에서의 사랑이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아름다움이건 사랑이건 모두 시효가 있는 법이다.
화병의 꽃이 기쁨이라고요?
나는
꽃이 슬퍼요
내게 온 그 순간부터
죽어가고 있잖아요
비어있는 달과
죽어가는 꽃과
시드는 나
- 「정물화」 부분
꽃이 오는 것은 기쁨이다. 그것은 사랑이 가장 아름답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시간은 죽어가고 소멸해 가는 시간의 시작이기도 하다. 사랑도 꽃도 다 변하고 시들기 마련이다. 사랑이 계속되기를 우리는 누구나 바라지만 그런 사랑은 존재하지 않고 온전한 사랑은 기억 속에 남아있는 사랑일 뿐이다. 다음 시가 이를 잘 보여준다.
낡은 사진첩 속에 추억은
반갑습니다
힘든 시절에도 지었던 웃음
간직해 두었더니
꺼내보면 고마움에
행복해져요
딸아이 울음을 담아 놓고
까닭은 잊었어도
달려가 달래줄 사랑은 여전하지요
...(중략)...
나와 그의 젊은 날을 보여주며
둘러앉은 가족에게
자랑으로 펼쳐 보일 시간들이
고맙습니다
- 「사진」 부분
사진은 지난 시간을 기록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시인은 빛바랜 사진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가족과 함께했던 사랑의 시간들을 반추하고 있다.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과거의 모습과 그것에 대한 추억만이 아니다. 그 추억을 만든 사람들과의 사랑의 기억이 더 중요하다. 사랑을 확인한다는 것은 이렇게 과거 함께 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기도 하고, 나누었던 사랑의 시간을 같이 공유했음을 다시 환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일이고, 기억한다는 것은 그 기억하는 대상과의 사랑이 있어 가능하다.
다음 시는 이런 사랑과 기억과의 관계를 손수건이라는 적절한 소재를 통해 잘 형상화하고 있다.
색 바래고 얇아진 손수건을 접으며
눈물이 난다
젖은 곳, 흘린 땀, 눈물도 닦아주던
고운 무늬가 색바랜 낯으로 힘없이 접혀
만남과 이별
감격과 슬픔
서운함까지 받아내어
나이 들고 있구나
꽃무늬 잔잔히
아름답던 시절부터
나를 받아주던 너에게
이제 닦는 일은 접어두려 한다
소중히 챙기며 함께하리
다림질로 너의 가슴을 펴주며
어루만지리
이젠 나를 위로했던 너를 위해
내가 너를 닦아주며
너와의 추억을 기억하리
흐르는 눈물조차 보이지 않으며
접어둔 시간을 펼쳐
추억하며
벗하리
- 「손수건」 전문
흔히 사람들은 사랑했던 사람과 관계된 물건을 버림으로써 그 사람과의 사랑을 정리하고는 한다. 그 물건들은 바로 사랑의 기억을 환기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위 시에서의 손수건도 아마 그런 물건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 손수건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서 손수건은 사랑했던 사람을 떠올리는 물건이면서 동시에 오래 간직해 온 사랑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와의 추억을 기억하는 것으로써 그와 가졌던 사랑의 의미를 현재의 의미로 승화시키고 있다. 다림질로 손수건을 펴주듯이 지나간 세월을 마음속으로 어루만지는 것으로서 기억으로 남은 사랑의 소중한 추억을 지금의 삶의 행복으로 바꾸고자 한다. 사물의 이미지와 속성을 시적 표현으로 잘 활용하여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기억은 잊혀진 사랑을 환기하여 행복을 되찾는 힘이 되기도 한다.
다음 시는 좀 더 감각적인 시적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가슴을 열어보라
휘어진 채 말라버린
찬란한 은빛 축제
낱낱이 들려주는
너의 전설
바다의 사랑
뜬 눈으로 간직한 채
이제야 들려주는
은밀한 밀애
달이 뜨면 뭍으로
떼 지어 와선
먼 바다는 놓아두고
검은 바위에
스스로를 던지는 몸부림
뛰어오르던 욕망은
볕에 널어
오래도록 간직한 바다 향기
고스란히 우려내는
진실
한 숟갈
- 「제주 멸치」 전문
감각적인 이미지를 잘 활용한 작품이다. 바짝 마른 “제주 멸치”는 기억들을 응축하고 있는 어떤 정신의 상징이다. 우리들의 기억 속에는 젊은 날의 방황과 욕망과 사랑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시인은 그것을 멸치의 몸으로 대신해서 표현해 준다. 마른 멸치의 몸에는 멸치가 일생 동안 겪은 삶의 모든 기억들이 스며있다. 아니 그 기억의 정수가 굳어진 것이 바로 마른 멸치의 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멸치는 바로 시인의 정서적 등가물이다. 시인 역시 젊은 시절 욕망과 방황을 경험하며 지금에 왔다. 그리고 그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멸치에게 “바다의 사랑”이듯이 누군가와의 사랑의 기억이다. 그리하여 멸치가 이 모든 삶의 기억을 우려내어 깊은 맛의 국물을 만들 듯이 우리는 모두 이 사랑의 기억으로 삶의 풍성함을 간직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생각하고 있다.
3. 기다리기와 사랑하기
앞서 기억과 사랑에 대해 얘기했다. 하지만 기억은 항상 불안정한 것이다. 기억은 사라지기도 하고 잘못된 것으로 남아 있기도 하고, 또 같은 경험을 하고도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기억들 사이에는 항상 간격이 존재한다.
너는 모르리
한여름 그늘에 서서
뜨거웠던 청춘을
떠올리는 마음을
너는 모르리
갈대가 속을 비워두고
바람을 기다린다는 것을
너는 모르리
아무도 걷지 않는 흰 벌판을
차마 밟지 못해 서성이는
무모한 기다림을
너는 모르리
봄이 오면 살얼음 녹듯 용서할
너의 무심한 시간을
너는 모르리
부패하지 않을 그리움을 위해
얼음을 채우며 살고 있다는 것을
- 「너는 모르리」 전문
시인은 사랑하던 사람과 함께 했던 한여름의 뜨거운 청춘을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갈대에 부는 바람처럼 두 사람 사이에 빈 시간이 존재하게 된 것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시인은 그와의 사이에 훈풍이 불어 다시 봄이 되기를 소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기억 속에 남은 이러한 사랑의 흔적을 “너”로 호명된 그 사람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각자의 기억에 남은 과거의 시간들은 각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모르는 그 안타까운 사랑의 기억은 그리움을 만들어 낸다. 나의 “무모한 기다림”을 알지 못하는 “너의 무심 시간”과 나의 기억과의 거리는 아쉬움을 남기고 그 아쉬움이 무엇인가로 채워지기를 바란다. 그리움과 그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기다림은 이렇게 만들어 진다. 시인은 이런 그리움을 “부패하지 않을 그리움을 위해 / 얼음을 채우며 있다는 것을”이라고 아주 감각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생생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아직 삶의 희망과 활력을 잃지 않게 될 것임을 시인은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이 그리움을 다음 시에서는 좀 더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다.
별을 따러 가자고
별똥별을 주으러 가자고?
별은 바라보는 것인데
너무 멀어
만질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어두울수록 빛나는 별처럼
감춰진 사랑으로
틈만 나면
빛을 내는
그리움
- 「그리움」 전문
그리움의 실체는 바로 감춰진 사랑이다. 사랑을 쉽게 드러내거나 사랑을 사랑이라 말해버리면 사랑을 그 빛을 잃어버린다. 사랑이 빛을 내려면 그 사랑은 어두운 밤하늘에 감춰진 별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은 빛을 낸다. 이 감춰진 사랑이 바로 그리움이다.
다음 시는 그리움을 비유를 통해 좀 더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누군가 방금
너를 두고 떠났구나
떠난 이를 향해
흔드는 아쉬운 몸짓
네가 하늘로 밀어 올린
수많은 설레임을
모두가 기억한다
바람에 스스로 흔들리며
누구든 내게 오라
비워둔 자리
언제나
네 무릎에 앉으면
등 뒤에서 밀어주며
안심을 전해주던
그 시절이
그립다
- 「그네」 전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어쩌면 진정한 사랑일 수 있다는 것을 이 시는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사랑을 처음 하게 될 때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을 지나고 보면 그가 나를 그네처럼 밀어내고 있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처음에 그 거리와 간극을 참을 수 없게 된다. 그로 인해 싸우기도 하고 갈등도 하고 스스로 고민에도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어느 순간 그 거리와 간극의 고통이 무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네를 타면 두려움이 밀려도다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시인은 이별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누구든 내게 오라 / 비워둔 자리”이고 더 큰 사랑을 위해 나를 저 멀리 밀어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별과 만남의 쓰라린 경험을 좀 더 안전한 그네타기 놀이로 재현하고 있다. 그네는 그리움으로 더 멀리 나갔다가 그리움으로 다시 돌아오는 사랑의 아이러니를 표현해 주는 훌륭한 비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바람이
길을 묻는다
늘
흔들리기만 하더니
이제
마음을 정했나 보다
멀리
높이 날아
이제야
너에게로
가려나 보다
- 「가을바람 · 1」 전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존재하는 만큼 나와 당신은 떨어져 있지만, 그러나 시인은 결국 “너에게 가”는 사랑을 확인한다. 아니 그것이 사랑이길 희망한다. 그리움이 오랜 기다림으로 익어가면 결국은 어떤 확신과 결단으로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고 시인은 생각하고 또 믿고 있다. 흔들리며 그리워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마음을 정”한 것은 “멀리 / 높이 날아” 너에게로 가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었다.
4. 맺으며
사랑을 이야기하고 노래한다는 것은 진부한 일인지도 모른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사랑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그 흔한 사랑을 자신의 말로 얼마나 진지하게 표현할 수 있느냐이다. 김영선 시인은 자칫 상투적이고 진부할 수 있는 사랑을 소재로 자기만의 목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시인은 그 목소리를 통해 사랑이 주는 쓸쓸함과 고통과 행복을 다채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 기억의 창고 속에서 우리는 다시 사랑을 환기하고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다음 시와 같이 과거의 봄을 다시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누가 뜯다 남긴
쑥밭에 가면
아직 남은 봄나물이 기다린다니
내일
아니 지금
누구 나랑
남겨진 봄 주우러
함께 갑시다
- 「가는 봄」 부분
이 시집의 시들이 많은 독자들의 마음에 이 봄을 새롭게 불러올 수 있길 바라면서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