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신약에 있는 우리 사람의 영(4)/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2:3-4)
<성령을 나타냄>
고린도전서 2장 3-4절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말한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사도 바울이 처음에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그의 말과 전도함에 있어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까봐 심히 두려워하고 떨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나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심히 전율한다.
사도 바울의 말과 전도함은 그의 지식이나 생각에서 난 것이 아니라 성령의 해방과 나타남이었으므로 능력이 있었다. 사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라는 이 말씀에 가장 도전을 받아왔다.
성경을 영으로 읽을 때나, 설교할 때나, 말씀 묵상과 글을 쓸 때, 찬송할 때, 사람을 만날 때, 영으로 기도할 때, 심지어 일 할 때 조차도, 그 무엇을 하든지 성령의 나타남에 의지해야 한다. 우리의 지혜나 능변이나 학식이나 재간으로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영을 통하여 성령을 나타내야만 한다.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
고린도전서 2장 11절은 “사람의 것들을 사람의 속에 있는 사람의 영 외에 어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것들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원문 참조)고 말한다.
사람의 영은 사람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 그것은 사람의 일의 가장 깊은 부분을 꿰뚫는 기능이 있지만, 사람의 생각은 다만 표면적인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님의 영만이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알 수 있다.
고린도의 믿는 이들은 사람의 영과 하나님의 영을 소홀히 여기고, 오히려 철학을 따라 생각 안에서 살았다. 비록 사람이 생각을 통해 어떤 사정을 알지만, 실제로 사람의 생각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 생각 속에 지식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직 사람의 영만이 사람의 사정을 알고 그 자신을 알게한다. 사람의 영은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고 직관하는 부분이다. 방언은 성령께서 우리가 거듭나서, 우리의 죽었던 영(靈)의 기능이 소생하고 성령이 사람의 영에 거처를 정했을 때 우리 영의 기도이며 증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른다. 오직 사람의 영만이 사람의 사정을 안다. 당신은 당신의 영으로 가야 한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아내와 어떤 문제가 있다면 당신은 당신의 영으로 가야 한다.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의 영은 안다. 당신의 영은 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남편에게, 당신의 아내에게, 자녀에게, 형제에게, 교회의 문제나 교회의 일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분명하지 않다면 당신의 영으로 가라! 사람의 영은 사람의 실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사정과 사람의 사정과 상황과 사람의 상태를 영 안에서 사람에게 계시한다(고전 2:11-12).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의 사정과 하나님의 사정을 알려면 우리의 영으로 가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의 사정을 알고 하나님의 사정을 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영으로 가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영 안의 사람이며 영적인 사람이고, 혼적인 사람이 아니다. 혼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다(고전 2:14). 혼적인 사람은 그의 지성에 의해 통제된다. 영으로 돌이킬 때,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 된다.
<세 종류의 사람들>
고린도전서 2장 13-16절은 “13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말로 해석하는 것이니라.
14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혼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니라.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것들이 영적으로만 분별(판단)되기 때문이니라.
15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아서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고(원문 참조) 말한다.
고린도전서 3장 1-3절은 ”1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 같이 하였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지금까지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능히 못하기 때문이라.
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하였도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지 아니하느냐?“(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유다서 19절은 ”이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이들이며, 혼적인 이들이고 영을 갖지 못한 이들이다“고 (원문 참조) 말한다.
고린도전서 2장 13-16절과 3장 1-3절에는 영적인 사람과 혼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의 세 부류가 있다. 혼적인 사람은 그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지를 따라 사는 사람이다. 영이 죽어 있으므로 그는 그의 영을 주의하지 않거나 영을 모른다.
애석하게도 믿는 이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영을 주의하지 않거나 잘 모르고 있다. 혼적인 사람은 그의 혼을 따라 살고 일하고 행한다. 육적인 사람은 타락한 육신(육체)의 정욕, 곧 육신을 따라 행하고 사는 사람이다.
고린도전서 2장 13절의 중점은 영적인 말로 영적인 것들을 말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영적인 것들, 곧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성령께서 가르치신 영적인 말씀으로 말했다. 곧 영적인 것들을 말하는 영적인 말을 강조한다.
14-15절은 영적인 대상, 곧 영적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영적인 사람을 강조한다. 수단도 대상도 모두 영적이어야 한다.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사람에게 영적인 말로 해야 한다. 그러나 혼적인 사람은 변화되지 않은 타고난 사람이다.
생각, 감정, 의지 곧 혼이 그의 온 존재를 다스리는 사람이고, 혼으로 말미암아 살고, 영을 무시하고, 영을 사용하지 않고, 심지어 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유19).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지 않으며, 그러한 일들을 알 수도 없고, 오히려 그것들을 거절한다.
표적을 요구했던 종교적인 유대인들과 지혜를 찾던 철학적인 헬라인들(고전1:22)은 그러한 타고난 혼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적인 일들이 어리석은 것이었다(고전1:23). 14절의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만“은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기능을 완전히 발휘함으로써, 사람의 혼이 다스리고 통제하는 것을 영으로 대치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오직 이러한 영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판단할 수 있다.
자신의 영에 의하여 다스림 받고 통제받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영의 모든 일은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알려면, 사람은 반드시 사람의 영을 사용해야 한다(요한 4:24).
영적인 사람은 자기의 혼(자아)을 부인하는 사람이고, 혼을 따라 살지 않고 자신의 영, 곧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활력을 얻은 거듭난 영이 자신의 온 존재를 다스리도록 허락하는 사람이다. 나아가 그는 그러한 영을 따라 움직이며 행동하면서 영에 의해서 산다(롬8:4).
이러한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판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영적인 지각을 위해 조성된 역량이 영의 기능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하나이므로, 그분께서 소유하신 모든 기능을 우리도 가지고 있다(16).
혼의 생각은 인지하는 기능, 곧 이해하는 기관이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생각이라는 기관이 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아시는 것을 우리도 알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생명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각도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에서부터 우리의 생각을 적시어서 우리의 생각을 그분의 생각과 하나가 되게 하신다. 고전3장1절에서 영적인 사람이란 육체를 따라 행동하거나 혼 생명을 따라 활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을 따라 사는 사람, 곧 하나님의 영과 연합된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육체적인(fleshy)”은 육체로 조성된 상태를 가리킨다. “육체에 속한”은 육체의 본성에 영향을 받고 육체의 특성에 참여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믿는 이들이 전적으로 육체에 속했고 육체로 조성되었으며 또한 바로 그 육체라고 여겼다.
시기와 분쟁은 육체의 본성의 표현이고 특징이다. 타락한 모든 사람이 바로 육체이다(롬3:20; 갈2:16). 그러므로 사람을 따르는 것은 육체를 따르는 것이다.
고린도의 믿는 이들 가운데 있었던 시기와 분쟁은 그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거듭난 사람의 영을 따르지 않고, 타락한 사람의 육체를 따라 행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이지 않고 육체에 속해 있었으며, 하나님을 따라 행하지 않고 사람을 따라 행했다. 고전3:1-3절은 고린도의 믿는 이들이 생명 안에서 자라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은 여전히 단단한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곧 생명이 자라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기들, 곧 영적이지 않고 육체적인 사람들로 남아 있었다. 여기에서 사도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부족과 필요를 지적했는데, 그것은 생명이 자라 성숙하는 것, 곧 충분히 변화하여 성장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이 서신(고린도전서)의 목표는 혼에 속하고 육체적이며 육체에 속한 고린도의 믿는 이들을 격려함으로써, 그들이 생명의 성장을 갈망하여 영적인 사람들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영적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당신이 영 안에 살면 살수록 당신은 더욱더 모든 사정을, 심지어 하나님의 사정까지도 지혜롭게 분별하게 된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