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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의심에 관한 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의심은 마귀로부터 오는 것임으로 버려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세뇌 받아왔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믿음 없는 자로 정죄 받거나, 심한 경우 마귀의 앞잡이로 몰리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좀처럼 의심에 대한 고백을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처를 드러내지 않고는 결코 치료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심의 문제를 숨기고 있으면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의심을 예찬하거나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의심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또 의심의 문제를 정말 해결하려면, 그것을 노출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말인 것입니다.
의심은 반드시 불신자들의 전유물만은 아닙니다. 때때로 성도인 우리들 속에도 의심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에게도 의심이 생겼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베드로도 의심을 숨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베드로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의심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실패의 정황을 통해서 그 의심을 노출시키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믿음으로 파도 위를 걸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확실한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어려워지자 의심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는 의심과 함께 물 속으로 침몰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의 경우와 동일한 유형의 의심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식 밑바탕에 깔려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의심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어려움을 예상하지 못했고, 그것에 대비하지 못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의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세 가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해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순종은 성도들의 당연한 의무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물질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라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사든, 입을 것을 사든,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난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전도하시는 분들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고 전합니다. 이 메시지 자체는 절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말은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오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으면 그날부터 모든 어려움이 다 물러간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메시지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신앙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이런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믿음의 사람이다. 따라서 내게는 역경도 재앙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거짓된 전제요 거짓된 가정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쫓는 사람들의 변화는 약속하셨지만,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절대적 변화를 약속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믿음과 기도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심각하게 오염되었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주님은 이 세상이 아직도 이 세상 신의 지배 아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갑작스럽게 닥칠 재앙이나 불행이나 실패에 대비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세상은 끊임없는 악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속 도전해 올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만이 알고 있는 어떤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악과 싸우도록 하셨습니다. 요16:33을 보십시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환난을 당할 것이지만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도 암에 걸릴 수 있고, 사업에 실패할 수 있고, 인간 관계의 위기를 경험할 수 있으며, 예측할 수 없는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당황하고 두려워하며 무력해질 수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은 마치 갈릴리 바다와 같습니다. 베드로도 갈릴리 바다에서 고난을 당했던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평소에는 너무도 잔잔하고 평화스러워 보이다가, 갑자기 큰 파도와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는 무서운 바다로 변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성지순례를 하는 사람들은 이 갈릴리 바다에서 곤욕을 치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세상은, 다음 순간에 어떤 위기와 재앙이 밀어닥칠지 예측할 수 없는 변화 무쌍한 바다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약1:2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
원문에 보면, 여러 가지 색상의 시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형형 색색의 시험들을 겪게 됩니다. 만약 이 시험에 대비하지 않고 있다가 그런 경우를 당하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 왜 나에게 이 고난과 이 어려움을 주십니까? 하나님, 당신은 정말 살아 계십니까? 이렇게 하여 신앙의 본질에 대한 회의와 의심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 자신의 잘못과 상관없이 고난이 왔을 때 의심할 수 있습니다. 태초 이래로 인류를 지배해 온 가장 강력한 삶의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인과론입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철학입니다. 역경은 죄 때문에 왔을 것이다. 우리는 역경을 만나게 되면 본능적으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른들의 말을 빌리자면 전생에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역경이 찾아온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대한 신앙적인 대답이 없다면,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하나님, 어찌하여 나에게 이 역경을 주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 세상은 인과론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잘못과 상관없는 역경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경우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역경이 오지만, 어떤 경우는 우리의 잘못과 전혀 상관 없이도 역경이 찾아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욥의 경우가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 주지 않습니까? 욥의 고난은 그의 실수나 허물과 상관없이 주어진 시련이었습니다. 요 9장에는 날 때부터 소경 된 자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때 인과론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제자들의 질문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요9:2)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을 들으신 주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그도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죄가 더 많아서 날 때부터 소경 된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인과론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삶의 본질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주님이 제자들을 재촉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24절입니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數里)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지금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는 중인데 파도를 만났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을 당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기 우리가 끊임없이 주님 앞에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의 명령을 따라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애쓰는데 왜 내 사업은 여전히 엉망인가요? 내 자녀들은 왜 계속 나에게 어려움을 안겨 주나요? 또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바다를 건너는 도중에 폭풍을 만난 제자들의 경우처럼, 어떤 잘못이 없더라도 역경은 올 수가 있습니다. 저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일 수가 있습니다.
저도 주님 앞에 쏟아 놓고 싶은 수없이 많은 질문이 있습니다. 제가 납득할 수 없는 수많은 고난, 문제, 부조리 등에 대한 질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 앞에 우리가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궁극적인 유익을 위하여, 우리의 삶의 훈련을 위하여, 아니면 주님만이 알고 계신 어떤 목적을 위하여, 때로 우리의 잘못과 전혀 상관없는 고난을 허용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되어 있을 때,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폭풍 앞에서 하나님께 하나님, 저의 약함을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이 폭풍과 환난과 파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을 신뢰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를 건지소서라고 고백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만이 아시는 이유로 인해서, 우리에게 고통과 역경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의심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자신 만만한 사람들에게도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아예 처음부터 겸손히 주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자신감에 차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신앙에 대해 회의하기가 더 쉽습니다. 베드로의 문제는, 그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너무 자신 만만하게 굴었다는 점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이 다혈질의 사나이 베드로를 추적해 보십시오. 그는 얼마나 자신 만만해 합니까? 재미있는 것은, 이 고난과 역경을 당하면서도 베드로는 여전히 자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主)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이것은 주님을 향한 일종의 시험입니다. 주님이 정말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만물을 주장하실 수 있는 주님이라면,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여기에서 강조된 단어도 나라는 단어입니다. 왜 하필 자기입니까? 야고보는 걸어가면 안 되나요? 요한은 걸어가면 안 되나요? 주께서 나를 명하사. 이 고난과 환난 속에서 아직도 끈끈하게 자기에게 매달리고 있는 이 철저한 자존심의 사나이를 보십시오.
29절입니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다 위로 발을 내딛고 걸어가는 순간, 얼마나 신기했을까요? 드디어 스타가 되는 순간입니다. 물위를 걷는 놀라운 순간입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현실을 의식하기 시작합니다. 바람과 파도를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빠집니다. 자신 만만하던 사람이 사정없이 무너져 내릴 때, 그가 느끼는 충격이 어떠할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이것이 베드로의 충격입니다. 자신 만만하게 인생을 살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자기 자신이 철저하게 꺾여 버림을 느끼게될 때의 충격!
베드로의 경우, 처음부터 주님이 오라고 했습니까? 물론 나중에 주님이 오라고 말씀하셨지만, 물위를 걷게 해 달라는 것은 베드로의 제안이었습니다. 자기가 제안하고, 자기가 가다가, 자기가 실패하고 나서는 나중에 주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업을 벌이다가 자기가 잘못하고서 주님, 왜 나에게 이 고난을 주십니까?라고 말합니다. 어디에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닙니까? 자신 만만한 사람이 자신의 무능으로 실패했을 때,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주님에게로 그 원인을 돌리려 하는 심리, 그 유혹 때문에 그들은 부르짖습니다. 주여, 당신이 정말 주님입니까? 이 회의를 보십시오. 자신 만만한 사람일수록 더 쉽게 신앙에 대한 회의와 의심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의심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 그러면 이러한 의심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나 보통 믿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주께서 이 순간 베드로를 향해서 믿음이 없는 자여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믿음이 적은 자여라고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어느 날 우리에게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안에 믿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믿음이 작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믿음이 적은 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우리의 삶에 다가오는 어려움과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이성과 지혜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이게 큰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큰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큰 믿음이란 지속적인 믿음입니다. 오래 전에 저와 함께 신앙 생활하던 한 자매가 있습니다. 그 자매는 특별히 뛰어나지 않습니다. 화려하지 않아서 남의 눈에 띠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인정할 수 있는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꾸준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한결같다는 것입니다.
물위로 자기의 발을 내딛는 순간,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약간의 믿음이 작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아-이런 일도 하게 하시는 주님, 당신을 제가 믿습니다라고 속으로 말하면서 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을 의식하고 파도를 의식하고 빠져 들어가는 그 순간, 베드로는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란 계속 믿는 것을 말합니다. 롬1:17에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믿음은 우리가 구원받을 때, 즉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할 때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위해서 오늘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흔들리고 있는 내 사업을 위하여, 깨어진 인간 관계의 회복을 위하여, 그것들을 이길 수 있는 오늘의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제의 믿음으로 오늘을 버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순간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순간 순간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어제 나를 구원했던 그 동일한 믿음을, 지금 이 순간 다시 한번 구하면서, 고난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큰 믿음이란 궁극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궁극적인 믿음이란 어떤 경우에도 주님은 결코 나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시련을 당할 수 있지만, 그래서 좌절하고 쓰러질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주님은 당신과 나를 영원히 버리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27절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제자들이 두려움에 빠지는 그 순간, 주께서는 즉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행동을 시작하십니다. 30-31을 보십시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주님은 베드로를 포기할 수가 없으십니다. 자신의 제자이고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지혜로 자기들의 삶이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부모의 보호가 없이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고난과 역경 속에서 버틸 수 있는 것은, 흔들리고 있는 나에게 즉시로 그 손을 뻗으시고, 내게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으시며, 주님을 바라보고 다시 걷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영광을 위하여, 이름을 위하여 마침내 우리를 승리자로 이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궁극적인 신뢰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오늘 우리가 당하고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파도와 고난에도 불구하고 벌떡 일어나서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주님을 신뢰하면서 오늘의 삶을 걸어갈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의 승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우리가 당하고 있는 문제도, 결국은 신뢰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중국과 북한 땅에 복음의 불씨를 심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큰 믿음입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계속해서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 끝 날까지 지키실 것이며, 결국은 승리를 주실 것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심지어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불평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여전히 우리를 지키시고 승리를 주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렇게 하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