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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生入死,
출생입사
인간의 生과死를 出과 入으로 표현했다.
어떤 門을 기준으로 나가면 生이요 들어 오면 死라 했으니
道를 기반으로 한 노자의 생사관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生之徒十有三, 死之徒十有三,
생지도십유삼, 사지도십유삼
제명대로 사는이가 열에 셋이고
요절하는 이가 열에 셋이라.
人之生, 動之死地, 亦十有三,
인지생, 동지사지, 역십유삼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죽음의 길로 접어드는 이 또한 열에 셋이라.
夫何故, 以其生生之厚,
부하고, 이기생생지
왜 이런고 하면
그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한 까닭이다.
蓋聞善攝生者, 陸行不遇兕虎, (덮을개,어찌합, 다스릴섭 잡을섭 ,외뿔소시)
합문선섭생자, 육행불우시호
- 攝生 : 몸은 늘 수고롭게 하고, 마음은 항상 편안하게 한다.
음식은 늘 간소하게 하고, 잠은 항상 편안하게 한다.
섭생의 요체는 이것을 벗어남이 없다.
열심히 일을 하니 배가 고파서 소박한 밥상도 입에 달다.
내가 노력해서 결과를 거두니 마음에 잡스런 생각이 없고,
헛된 욕망이 깃들지 않는다.
쓸데없는 생각이 마음에 없게 되자
잠자리가 편안하여 꿈꾸지 않고 잠을 잔다.
건강을 지키는 비결은 이것 뿐이다.
사람들은 거꾸로 한다.
몸은 편안하려고만 들고,
마음은 많은 궁리로 늘 수고롭다.
욕심 사납게 먹어치우고, 꿈자리는 항상 뒤숭숭하다.
속담에
삶을 잘지켜 길러나간자는 길을 다니더라도
외뿔소와 호랑이를 만나는 불운에 직면하지 않는다.
入軍不被甲兵, 兕無所投其角, (이불피)
입군불피갑병,시무소투기각
군대에 들어가도 갑옷과 칼을 찰 일이 없고
외뿔소의 뿔에 받힐 일이 없다.
虎無所措其爪, 兵無所容其刃, (둘조,손톱조 칼날인 )
호무소조기조, 병무소용기인
호랑이 발톱에 글킬일이 없고
비록 군에 몸담는다 해도 칼에 베일 일이 없다.
夫何故, 以其無死地
부하고, 이기무사지
어찌된 연유인고하니
그 사람은 죽을 자리에서 비켜있기 때문이다.
섭생을 잘하면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불의의 사고를 막을 수 있으며
설사 죽을 자리에 처하더라도 살아 나올수 있음이다.
노자에게 있어서 섭생이란 무었인가?
목숨이란 내것이 아니라 내게 맏겨진 것이라 알고
이를 잘 지켜나가는것.
내 목숨은 내것이므로 내 마음대로 한다든지,
제 목숨만 소중히 하고 남의 목숨을 모른척 하는 것은
다 열에 셋 죽음으로 가는 무리라 했다.
한갓 미물이나 식물의 생령까지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
이를 두고 섭생을 잘 하는 자라 했다.
(해석1)
삶에서 나와 죽음으로 들어간다.
삶의 무리가 열에 셋이 있고 죽음의 무리가 열에 셋이 있으며
사람이 사는 데 움직여 죽음의 땅으로 가는 것이 또한 열에 셋이 있다.
대저 무슨 까닭인가 그 삶을 삶으로 하는 것이 두터움(집착함)으로써다.
대개 듣건대 삶을 잘 기른 사람은 뭍으로 가도 외뿔소와 범을 만나지 않고
군에 들어가도 갑옷과 칼을 입지 않는다.
외뿔소도 그 뿔을 던질 곳이 없고 범도 그 발톱을 둘 곳이 없으며
칼도 그 날을 넣을 곳이 없다고 한다.
대저 무슨 까닭인가 그 죽을 땅이 없음으로써다.
(해석2)
살려고 나오는데 결국 죽음으로 들어간다.(출생입사:出生入死)
이는 생명에 대한 애착이 심하기 때문이다.(이기생생지후:以其生生之厚)
인생은 역설이다. 얻고자 하는 자는 잃고
잃고자 하는 자는 얻는다.
이기고자 하는 자는 지고 지고자 하는 자는 이긴다.
자기를 버리면 하늘을 얻고,
자기를 지키고 살리자 하면 자기도 잃고 생명도 잃는다.
애착이야말로 인간의 근원적 본능이다.
그러나 본능대로만 살면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인다.
다행히도 인간에게는 본능뿐만 아니라 하늘이 준 본성이 있다.
본능이 본성의 조절을 받게 될 때 조화와 평화와 상생의 길이 열린다.
"살려고 나오는데 결국 죽음으로 들어간다." 실로 놀랍고 무서운 말씀이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마태복음 16장 25절)
- 홍성환의 신앙과 사상
(해석3)
사람들은 삶에서 나와 죽음으로 들어간다.
오래 사는 사람이 열 명중에 세 명쯤 있고,
일찍 죽는 사람도 열 명중에 세 명쯤 있다.
또한, 오래 살 수 있는데도 공연히 움직여 죽음으로 가는 사람도 열 명중에 세 명쯤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너무 삶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삶을 잘 지켜 길러나가는 자는 육지를 여행해도 외뿔소나 호랑이를 만나지 않고
군대에 들어가도 갑옷을 입지 않는다.
외뿔소도 그 뿔을 들이밀 틈이 없고,
호랑이도 발톱을 들이댈 틈이 없으며.
병사도 칼날을 쓸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에게는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해석4)
나오는 것이 삶이고 들어가는 것이 죽음이다.
삶의 도를 제대로 지키는 사람은 열 명에 세 명 정도이고,
죽음의 도를 제대로 지키는 사람도 열 명에 세 명 정도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스스로 움직여
사지(死地)로 가게 되는 사람도 열 명에 세 명 정도 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의 삶을 너무 잘 살아 가려 들기 때문이다.
듣건대 삶을 잘 유지하는 사람은
육지를 여행해도 외뿔소나 호랑이를 만나지 않고,
군대에 들어가서도 무기의 피해를 입지 않는다 하였다.
외뿔소도 그의 뿔로 들이받을 여지가 없고,
호랑이도 그의 발톱으로 할퀼 여지가 없으며,
무기도 그 날을 들이밀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그에게는 사지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해석5)
사람들은 삶에서 나와 죽음으로 들어간다.
오래 사는 사람이 열 명중에 세 명쯤 있고,
일찍 죽는 사람도 열 명중에 세 명쯤 있다.
또한, 오래 살 수 있는데도 공연히 움직여
죽음으로 가는 사람도 열 명중에 세 명쯤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너무 삶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삶을 잘 지켜 길러나가는 자는
육지를 여행해도 외뿔소나 호랑이를 만나지 않고
군대에 들어가도 갑옷을 입지 않는다.
외뿔소도 그 뿔을 들이밀 틈이 없고,
호랑이도 발톱을 들이댈 틈이 없으며.
병사도 칼날을 쓸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에게는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해석6)
세상에는 오래 살 수 있는 곳에서 나가 사지(死地)로 뛰어드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 중에는 오래 살 수 있는 사람이 열에 세 명쯤 있고,
일찍 죽는 사람도 열에 세 명쯤 있으며,
살려고 몸부림 치다가 오히려 사지로 가는 사람도 열 사람 중 세명은 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너무 삶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속담에 섭생을 잘하는 사람은 육지를 여행하여도 사나운 짐승을 만나지 않고
싸움 터에 나가도 상처를 입지 않고, 들소가 뿔로 받을 틈이 없고,
범에게 발톱으로 할퀼 곳이 없고 무기가 파고들 틈이 없으니,
그것은 그에게는 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해석7)
도가에서는 생사에 집착함이 없이 자유스러운 참삶(etemal life)을 주된 가르침으로 삼는다.
우리가 삶과 죽음에 구애받지 않고 초연한 태도를 취하게 될 때
진정으로 자유스런 참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노자나 장자에게 죽음이란 근본적으로 삶과 다를 것이 없다.
장자는 죽음이란 한 가지 존재 양식에서 다른 존재 양식으로 옮겨감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사람의 모양으로 태어난 것이 즐거운 일이지만
세상에는 이와 못지않게 다른 수많은 존재 양식이 있을 터인데,
이런 수많은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도 기쁜 일이 아니겠느냐”는 식의 말을 했다.
그는 자기 부인이 죽었을 때 장단에 맞춰 춤을 추었다고 한다.
조문차 찾아온 친구가 “자네는 부인 죽은 것이 그렇게도 기쁜가?” 하면서 놀라워하자
장자는 물론 자기도 처음에는 슬펐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기 부인도 대우주의 생성 변화의 흐름에 따라 세상에 태어났다가
이제 ‘큰집’에서 쉬게 되었는데, 이를 슬퍼하는 것은
계절의 바뀜을 가지고 슬퍼하는 것처럼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차라리 춤을 춘다고 했다.
삶과 죽음은 모두 ‘하나’에서 만나는 것으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한가지 사물의 양면 정도에 불과하다.
즉 우리의 작은 자아, 작은 목숨에서 해방될 때 큰 자아, 큰 목숨과 하나가 되고
이렇게 하나된 상태에서는 해받을 곳이 없다.
이런 상태에서는 ‘죽음의 자리’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간을 소비하면서 죽어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연습도 중요하지만 죽어가는 연습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 하다.
주어진 삶을 성실하고 아름답게 살지만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의연함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잠언 14:21)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잠언 14:29-32)
-독재정권에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던 김대중의 잠언집中-
해방 후 지금까지 독재적 군사통치가 판을 칠때
많은 사람들이 비판을 외면했다.
'나는 야당도 아니고, 여당도 아니다.
나는 정치와 관계없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을 봐왔다.
그러면서 그것이 중립적이고 공정한 태도인 양 점잔을 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惡을 惡이라고 비판하지 않고,
善을 善이라고 격려하지 않겠다는 자들이다.
스스로는 황희 정승의 처세훈을 실천하고 있다고
자기합리화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얼핏보면 공평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공평한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비판을 함으로써 입게 될 손실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다.
이것이 결국 惡을 조장하고 지금껏 善을 좌절 시켜왔다.
지금까지 군사독재 체제 하에서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이렇듯 비판을 회피하는 기회주의적인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좌절감을 느껴왔는지 모른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惡한 자들을
가장 크게 도와준 사람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惡의 편이란 말이 바로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남을 헐뜯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바로잡으라.
남에 대한 비난은 언제나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난,
또는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마하트마 간디
▒ 100세를 사는 사람들 ▒ 왕성한 두뇌활동
100세를 산 노인들 중엔 치매의 덫에 들지 않고 정신 능력(지능·의지· 기억)을 유지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박상철(朴相哲·53) 서울대 의대 교수의 체력과학노화연구소와 조선일보 취재팀이 100세 이상 노인 120명을 대상으로 신체·인지 기능과 일상생활 관리능력을 평가한 결과, 66.6%가 의학적으로 평가할 때 치매에 걸리지 않은 것으로 분석됐고, 33.3%가 치매를 의심케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 7.4%는 시력·청력·인지 기능 등 모든 분야가 젊은 사람들과 같은 정상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력·청력·말하기 능력이 떨어져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점을 감안하면, 치매 노인의 비율은 그보다도 적을 것으로 분석됐다. 치매는 30대에서도 나타나는 노인성 질환이고, 85세 이상 노인의 약 40%가 치매에 걸린 것으로 추정되는 것(대한신경정신의학회 조사)으로 미루어 보면 100세 노인들의 인지 능력은 대단한 것으로 평가된다.
◆ 끊임 없는 두뇌·신체 활동
전남 보성군 벌교읍의 이성수(100)할아버지는 지금도 안경없이 책을 읽는다. 이 할아버지는 “매일 책을 읽는 게 치매예방에 도움이 된 것 같다 ”고 말했다.
치매 없는 장수 노인들은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이고 두뇌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었다.
경기 양평군 양평읍 이휘진(106) 할아버지는 책 읽는 게 취미다. 관절염·고혈압으로 몇 년 전부터 거동이 불편하지만 질문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또렷하게 대답했다. 이 할아버지는 지금도 성경을 읽고 신문·잡지도 꼼꼼이 읽는 편이었고, 수십 년 전 일도 정확히 기억했다. 치매에 걸리지 않은 이유에 대해선 “하느님을 생각하고 열심히 믿은 덕분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전남 순창군 팔덕면 김반월(92) 할머니는 문맹이라 신문·책을 보지 않고, TV도 무슨 내용인지 몰라 거의 안 본다고 했다. 하지만 3남 2녀를 둔 김 할머니는 큰 아들 제삿날, 네 자녀의 생일은 정확하게 기억한다. 김 할머니는 “매월 달력을 넘길 때마다 조상 기일과 가족 생일부터 챙긴다”고 말했다.
“게으름 병에는 약도 없어. 나는 평생 가만히 있지 않았어.” 전남 곡성군 오곡면 오양례(94) 할머니는 아침 6시면 가족 중 가장 먼저 일어나 요강 닦고 세수 하고 방을 치우면서 며느리 밥상을 기다린다. 밭에 나가 손수 심은 작물을 돌보다 심심하면 노인정에 나가 할머니들과 끊임없이 담소를 나눈다. 외출이 힘든 겨울철엔 화투를 치면서 시간을 보낸다. “저녁 되면 TV를 봐. TV 없이 어찌 사나 몰라.” 오 할머니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이야기를 많이 해서 정신이 멀쩡한가봐”라고 했다.
강원도 화천군 A(96) 할아버지는 지금도 자식과 별도로 재산을 관리한다. 1주일에 한번 면사무소를 찾아가 자신의 땅이 온전히 있는지 확인한다고 한다.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추영엽(97) 할아버지는 성격이 엄청나게 급해 가만히 있질 못하고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현재도 농사일과 소 관리는 몸소 하고 있다. 추 할아버지는 최근 대통령 선거에 관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당당히 밝힐 만큼 사회문제에 관심도 많았다.
◆ 적극적인 대인 관계
경북 예천군 용궁면 권명완(101) 할머니는 정신이 또렷하고 시력·청력이 양호해 대화를 하는 데 불편이 없었고, 취재팀이 방문한 날에도 아랫동네 사는 딸(79)과 이웃 사람이 놀러 와 있었다. 권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75)는 “성격이 좋고 말씀을 잘하셔서 이웃들이 자주 찾아온다”면서 “틈만 나면 금강경·법화경을 읽고, 불경 구절을 좔좔 외고, 방석에 수를 놓을 만큼 시력이 좋다”고 했다.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나영화(98) 할머니는 귀가 안 좋지만 아직도 달변이다. “지금도 친구가 45명은 돼. 사람 만나는 걸 워낙 좋아하거든.” 막내 며느리(51)는 “시어머니가 남의 일에 참견을 잘하시고 과거 회상에 젖는 것을 좋아하시고, 절기·친척에 대한 기억이 확실하세요. 항상 손에 무언가 들고 외우시고 기억하시려고 노력하지”라고 말했다.
경기도에 사는 B(105) 할아버지는 교회에서 꾸준히 전도 일을 하고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관절염으로 다리가 불편해 주로 편지를 써서 사회 활동을 하고 있다. 14년 전 사별한 할머니 사진을 집에 걸어 놓고 서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과학교실 김지혜 교수는 “우수한 정신 기능을 유지하는 데는 유전적 요인이 상당 부분 작용하지만, 능동적 생활 태도와 적극적인 대인 관계는 스스로 노력해 얻을 수 있고 자신의 노년을 책임지기 위해 그래야 한다”며 “대인 관계를 더 넓히는 것은 불가능해도 현재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국 미시간대·덴버대 연구진도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얘기를 할 때면 기억력·정보처리력·언어능력뿐 아니라 시각·청각·촉각·후각까지 동원된다”면서 “인지력이 높을수록 사교성도 높을 가능성이 크지만, 일상적인 대인 관계가 의도적인 지적 훈련 못지않게 인지력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를 최근 내놓았다.
전문가 진단
운동 규칙적으로 하면 ‘혈관성 치매’예방
무병장수(無病長壽)는 누구나 희구하는 목표다.
의학적 상식대로라면 백세인들은 하나같이 치매에 걸려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백세인들에게는 그들만의 장수비결이 있었고, 상대적으로 치매에 걸린 확률이 낮았다.
치매는 노년기의 가장 두려운 질환 중 하나이자, 주요 사망 원인이다. 그 빈도는 65세 이후에 5~10% 정도이고 연령이 5세 증가함에 따라 2배씩 유병률이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증가 추세라면 100세 이상까지 사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이 치매에 걸릴 것이라고 학자들은 예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조사에서 40%는 인지기능이 정상이거나 거의 정상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의 연구 보고에서도 백세인의 3분의 1 정도는 정상적인 정신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는 백세까지 장수하는 사람은 신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상당수에서 정신 건강도 잘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100세 노인에서 생각보다 치매가 적은 이유는 치매에 걸린 사람은 100세가 되기 전 대부분 사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00세까지 장수한 사람은 노화의 속도가 느리고, 치매를 비롯한 치명적인 노인 질환에 걸리지 않는 유전적 특성을 타고 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 조사에서 백세인들은 대개 건강한 생활 습관과 규칙적인 운동을 했다. 이는 혈관성 치매의 예방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특히 고혈압·당뇨병·고지혈증 등과 같은 생활습관병은 이런 건강한 삶과 사고를 통해 방지된다. 또한 끊임없이 움직이고 사람을 만나 대화하고 놀이를 하면서 치매를 멀어지게 하는 타고난 재주를 보인 셈이다.
인지기능과 고등 정신기능이 감퇴하는 질환인 치매는 건강장수에 큰 걸림돌이다. 가정이나 사회에도 장기간 많은 부담을 준다. 노인에게 치매가 생기면 가정과 사회에서 고립되며 신체 활동이 저하되고 영양섭취가 불충분해진다. 이는 근골격계와 생리기능의 저하로 이어지고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로 건강을 악화시킨다.
프랑스에서 건강을 잘 유지하고 있는 100세 노인들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들은 성격이 차분하고 개방적이며 쾌활하고 낙천적이고 참을성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좋은 성격과 마음가짐이 젊음을 유지하고 건강하게 장수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인 치매의 반 정도는 정확한 원인을 모르는 알츠하이머형 치매이고, 10~20%는 뇌졸중 후에 생기는 혈관성 치매이다. 알츠하이머형 치매는 학력이 높은 사람에게는 비교적 덜 생긴다고 알려져 있다. 20대 초반의 언어능력이 80대에 발병하는 치매나 인지능력 저하와 관계가 있다는 보고도 있다. 현재의 한국 중장년층도 어려서부터 지적능력 개발에 힘써야 하며, 항상 생각을 게을리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외국어나 컴퓨터를 배우는 등 지속적으로 머리를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崔倫浩·(성균관대 의대 교수)
발췌 : 조선일보 ▒▒ 원본보기 ▒▒ 2002/11/14
잊지 못할 일본인 '가끼루마 스님'의 은덕
<삼중 스님 대증언>이총-북관대첩비 한국이전 도운 '가끼루마'
김성애 논설위원
2009년 11월, 일본인 가끼루마 스님이 부인 도시마에게 유언을 남겼다. “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가진 게 없이 떠나는 이 사실을 후회하지 않는다. 당신은 남은 인생을 착한 일 많이 하다가 오너라. 미안하다. 남겨주어야 할 물질에 집착하지 못했다. 그러나 후회 없이 깨끗이 살다 간다.”
가끼루마 스님은 말기 암으로 병원에서 퇴원조치를 내렸다. 집에서 세상을 떠날 때는 편안히 웃으면서 빈손으로 떠났다. 삼중 스님은 가끼루마 스님이 곧 세상을 떠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난해 봄에 그의 얼굴을 보니 시간적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일본은 세계 최장수 국가인데 건강했던 그가 왜 이리 빨리 갔느냐? 그는 건강하나만 믿고 몸으로 부딪치면서 열정을 쏟았다. 불같은 불심 하나로 뭉친 그는 흔히 말하는 일본의 양심이었다. 그에게는 절, 집, 사무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가끼루마 스님이 죽고 나니 더 존경스러워졌다. 한국을 위한 그의 마지막 열정으로 북관대첩비를 북한으로 넘기고 떠났다.
북관대첩비 함경도 길주로
국교관계가 없는 북한당국이 북관대첩비의 귀향을 일본정부에게 강력하게 요청했다.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일에 가끼루마 스님은 자진해서 나섰다. 남한, 북한, 일본 3개국이 관련된 사안이었다. 그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손 “이구 전하”가 한국으로 귀향하는데 거리로 나서서 모금운동을 펼쳤다. 그런 조그마한 계기가 연이어지면서 이구 전하는 한국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구 전하는 일본 천왕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리면서 한 가지 부탁을 드렸다.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선물로 받고 싶은 게 있다. 한반도 남북한의 평화를 위해서 북관대첩비를 함경도 길주로 보내고 싶다.” 이런 사연으로 북관대첩비는 한국을 거쳐서 북한으로 인도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함경도 길주에서 북관대첩비를 약탈하여 야스쿠니신사 내에 세워두었다. 2005년 10월, 꼭 100년 만에 한국에 되돌아 왔다. 2006년 3월 1일 김대중 대통령 정권하에서 이루어진 남북한 평화물결로 북한 함경도 길주로 되돌아갔다.
▲ 가끼루마 스님. ©브레이크뉴스
▲ 일본에 있던이총, 비총, 울산동백, 북관대첩비를 한국으로 이전 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가끼루마 스님의 영정 앞에선 삼중 스님
북관대첩비의 인도가 결정되는 마지막 시기에 그는 암 진단을 선고받았다. 수술을 하자는 의사의 권유를 뿌리쳤다. “난 지금 이 중요한 시간에 수술대에 눕지 않겠다. 북관대첩비를 마무리 짓고 싶다.”는 그의 결심을 어느 누구도 꺾지 못했다. 그는 삼중 스님과 더불어 한국을 위한 남다른 인간애로 일생을 불태웠다.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때 충의공 정문부(鄭文孚1565~1624 해주인) 선생을 대장으로 한 함경도 의병들이 왜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1708년 숙종 때, 백성들이 함경도 길주에 세운 전승기념비이다. 임진왜란 때 우리의 뼈아픈 치욕을 일본인 손으로 사과하려는 마음에서 그는 자신의 암수술을 거부했다. 임진왜란 당시 치욕인 이총, 비총, 울산동백, 북관대첩비까지 가끼루마 스님의 열정에서 성공적인 귀향을 일궜다.
가끼루마는 울산동백도
이총과 비총을 시작으로 울산 동백을 한국에 건네 준 일등 공신은 바로 가끼루마 스님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리는 지장원 사찰의 현판에는 울산동백의 뿌리를 밝히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울산성을 공격한 가등청천 외장이 아침햇살에 피는 아름다운 꽃, 오색팔중 동백꽃을 발견했다. 아름다운 꽃나무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여 본국에 가져갔다. 그래서 지장원 사찰에서 자라는 아름다운 동백을 보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차를 즐겼다고 한다. 그 뒤 울산에서는 동백나무가 서서히 멸종되어 갔다. 몇 년 전에 한 한국인이 교토를 관광하다가 사찰의 현판에 적힌 신기한 나무를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 울산에 있었던 동백나무는 이 사찰에는 자라고 있고, 왜 울산에는 없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고향인 울산에는 동백나무가 멸종되었지만, 일본의 한 사찰에서는 아름드리 자라고 있었다.
이 기막힌 소식에 울산시는 거국적으로 정부 당국을 통하여 일본에게 울산동백의 분양을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지장원의 주지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면서 한마디로 묵살을 했다고 한다. 일본 스님들의 권위는 우리나라 스님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대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KBS 울산지국장은 삼중 스님을 찾았다. “스님! 거대한 이총도 옮기셨는데 울산동백 나무 한 뿌리만이라도 해결해 주시죠!” 삼중 스님의 저력을 믿었다. 삼중 스님도 이런 뜻을 바로 가끼루마 스님에게 전달했다.
가끼루마 스님은 삼중 스님의 부탁에 곧장 지장원을 찾아갔다. 지장원 주지를 진심으로 설득했다. “임진왜란 때 약탈해 온 동백이지 않느냐? 그 가지 하나 받아가겠다는 데 무엇이 그리 문제가 되겠느냐? 뿌리 하나만이라도 돌려주자.” 그의 설득에 주지는 응했다. 주지의 승낙이 떨어진 날, 삼중 스님은 일본으로 날아갔다. 가끼루마 스님이 동참한 가운데 울산동백 몇 뿌리를 지장원 주지에게서 받아왔다. 울산시청에 심었던 그 동백나무는 지금도 잘 자라고 있다. 또한 울산시 광장에서도 잘 자라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겨우 뿌리 몇 개만을 분양받았는데 지장원의 울산동백 나무는 그 날부터 시들시들해졌다고 한다. 동백나무도 고향에 돌아오니 자신의 자리에서 아주 잘 자랐다. 삼중 스님은 며칠 전 울산 시청 앞에서 아름다운 동백나무를 보면서 가끼루마 스님을 위해 기도를 했다. “고마운 분! 하늘나라에서 복을 받으시길!”이라고.
사천에 이총의 안장식
▲ 가끼루마 스님의 부인인 도시마 여사를 만나고 있는 삼중 스님. ©브레이크뉴스
가끼루마 스님은 자신의 최대 업적 “이총”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일본인들은 육체보다도 영혼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북관대첩비가 마무리된 시점에서 암수술을 결정했으나 이미 늦었다. 수술을 포기했다. 그 후 그는 경북 사천에 힘겨운 걸음을 했다. 일생을 담은 “이총”의 안장식에 참석했다. 호흡이 어려워 조그만 걸어도 힘겨워했다. 그는 삼중 스님에게 진심어린 고마움을 표했다. “이총의 안장식까지 마무리 지어주어서 고맙다.” 그의 자서전 출판기념일 2008년 1월, 삼중 스님은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죽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자신 인생의 자랑거리인 이총, 비총, 울산동백, 북관대첩비 등 많은 업적들에는 한국에 대한 사랑이 넘쳐났다.
삼중 스님은 그 뒤 그를 만나기 위해 일본에 갔다. 그는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부인이 대신해서 나왔다. 암수술을 뒤늦게 해봤으나 수술경과는 그리 좋지 않다고 했다. 부인은 6개월 이상 견디지 못한다는 의사의 소견서를 보여주었다. 삼중 스님은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한국인 한 사형수가 만들어서 선물해 준 염주를 머리에 대고 누워있었다. 삼중 스님이 방안에 들어서니 일어났다. 예의가 깍듯한 그는 겨우 일어나서 삼중 스님을 반가워했다. 부인의 애절한 눈빛에서는 도움을 바라는 마음이 읽혔다. 사람이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인 듯 했다. 그리 쓰러지니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었을 것이다.
삼중 스님은 돈을 몇 푼이라도 도와드리고 싶었다. 약간의 돈은 준비했으나 너무 중태인 병환에 액수가 너무나 빈약했다. 삼중 스님이 준비해서 가져갔던 돈의 10배는 더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 때만은 꼭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들의 눈은 간절했다. 특히 도시마 부인의 눈빛에서는 절절했다. 누워서 허덕이는 그와 도시마, 두 노인네의 모습은 너무 초라했다. 삼중 스님은 그때만큼 돈이 절실한 적이 없었다. 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돈의 위력을 절감했다. 삼중 스님은 가끼루마 스님과의 많은 만남에서 한 번도 돈을 드린 적이 없었다.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는 마지막 돈으로 도와드리고 싶었다.
암수술로 죽어가던 그에게
“스님! 안중근 의사 친필이 정심사에 3점이 있지 않습니까? 사진까지 합하면 70여점이나 되지 않나요. 정심사 조카 주지가 얼마 전에 죽었다고 하더군요.”
삼중 스님은 뼈만 앙상한 그에게 엉뚱한 말을 건넸다. 측은한 마음에서 일부러 강한 어투로 그의 정신에 승부를 걸었다. 안중근 의사의 친필 반환운동에 그는 몇 년 전부터 매달리고 있었다.
“...... 아~ 내가 다 알고 있습니다.”
“스님이 마지막 일을 하기 위해서 일어서십시오. 그 친필이 반환만 된다면 내가 스님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정부도 도와줄 것이오! 한국에서는 내가 스님을 위한 모금운동을 하겠소!”
삼중 스님은 그 당시의 자신의 심정을 토해냈다. “야~ 이놈아~ 너 참! 야비한 인간이로구나.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무슨 일을 거들면 도와주겠다는 말이 나오느냐! 한국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던졌던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더냐. 그 일을 도와주지 않으면 도와줄 수 없다는 말을 어찌 할 수 있느냐.”
“삼중 스님! 내가 해 내겠습니다. 난 자신 있습니다. 조금 나아지면 곧장 정심사 주지를 찾아가겠습니다.”
가끼루마 스님의 눈망울은 다시 초롱초롱 빛났다. 죽어가던 눈매에서 다시 자신의 열정에 빛이 발했다. 삼중 스님은 그에게 고단한 숙제를 남기고 싶었다. 죽어가는 생명의 불꽃을 연장시키고자 했다. 일본인으로 한국을 위한 그의 내면을 파악하는 사람은 오직 삼중 스님뿐이었다. 현실은 그를 차갑게 냉대했다. 일본에서는 가끼루마 스님을 자국의 이익을 배반하는 이방인으로 치부했다. 역사적으로 귀한 도움을 받은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은 가끼루마 스님을 지나가는 이방인인양 지나쳤다. 삼중 스님은 준비해 간 돈을 건네주지 못한 채 한국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별의별 생각을 펼쳤다가 다시 접었다. “이 시기가 가끼루마 스님을 도와줄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 것이다. 가끼루마 스님의 미담을 기사화해서 모금운동을 전개해 볼까? 그래서 그에게 한국인의 따뜻한 마음을 전달하고 싶다. 그러나 막막하다. 신문사를 겨냥한 미담 기사에서 과연 모금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가끼루마스님의 훈장?
금년 4월, 삼중 스님은 문화관광부 직원과 동행하여 일본을 방문했다. 그 시기에 가끼루마 스님을 다시 만났다. 며칠 후 다시 병원에 들어간다는 그의 눈망울은 아직까지 살아 빛났다.
“스님! 제가 일본 형무소에 가서 교화 강연을 하러 갑니다. 스님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삼중 스님은 그에게 생명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무엇인가를 던지고 싶었다.
“물론입니다. 삼중 스님! 제 인생에서 형무소 교화를 한 번이라도 하는 것이 소망이었습니다. 꼭 참석하고 싶습니다.”
그는 자신의 각오를 다짐했다. 그런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힘은 점점 빠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안타까운 모습에 삼중 스님은 문화관광부 직원에게 말을 건넸다.
“저 사람 한국정부에서 훈장이라도 하나 주어야 합니다. 저리 아픈 몸으로 뭔가 한국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문화관광부 직원도 감격했다. 자신이 듣고 본 상황들에 대한 보고서를 잘 작성해서, 가끼루마 스님에게 훈장이라도 주는 가교역할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비쳤다.
“저런 스님에게 한국정부는 어떤 대접을 해 주었나요? 내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세상을 떠나기 전에 꼭 훈장 하나만이라도 저 분께 고마움을 전달해 드리고 싶습니다.”
가끼루마 스님은 이 말 한마디에 감격해서 울먹였다. 자신을 그토록 인정해주는 삼중 스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욕심 없이 잘 살아 왔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하는 시간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삼중 스님이 부족한 저에게 칭찬의 말씀을 들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훈장”을 받는 것처럼 한없이 기쁩니다.”
그는 삼중 스님과 함께 했던 지난날들이 스쳐지나가듯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제가 좀 더 두 분을 모셔야 되는데 이만 들어가야겠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다음 번에 꼭 제가 두 분께 저녁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더 이상 무너지는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가끼루마 스님, 제가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겠습니다. 몸 건강히 잘 지내십시오.”
문화관광부 직원은 정중히 가끼루마 스님을 문밖까지 배웅했다. 그 노인네의 비틀거리는 모습이 그의 삶에서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었다. 사실 삼중 스님은 가끼루마 스님의 마음을 이해했다. 정말로 죽기 전에 한국정부에서 수여하는 훈장을 노인네에게 안기고 싶었다. 며칠 후 그가 병원에 재입원 했는가를 묻지도 못했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그에게 돈 몇 푼이라도 전해 주어야 하는 현실에서 삼중 스님은 그대로 일본을 떠났다.
가끼루마는 먼 여행 떠났다.
▲ 가끼루마 스님의 추도식에 참석토록 배려했던 장경도 사장(오른쪽)과 삼중스님. ©브레이크뉴스
최근 삼중 스님은 “용산의 구세주”로 통하는 장경도 사장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장 사장의 부인은 와세다 대학을 나온 인재라 삼중 스님의 통역자로 자진해서 도왔다. 몇 차례 가끼루마 스님과의 만남에서도 부인 강현숙은 통역을 했다. 가끼루마 스님의 부인 도시마는 강 여사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가끼루마는 먼 여행을 떠났습니다”라는 말에서 강 여사는 일본의 문화를 쉽게 이해하는지라 금세 알아들었다고 한다. “장례식을 제대로 치루지 못했다. 11월 17일 날 돌아가셨다.” 뒤 늦은 연락에는 숨은 사연들이 그득했다.
“누구한테 연락할 형편이 아니었다. 가끼루마의 자식들은 ”아무도 오지마라. 우리 아버지는 한국을 위해서 일생을 바쳤다. 우리 가족의 희생을 생각하면 울분이 터진다. 한일관계자들은 오지마라.”는 자식들의 항변에도 일리가 있었다. 도시마 부인은 “이제는 추모회를 드리고 싶다. 힘이 든다. 여러 가지로 어렵다. 그러나 꼭 추모회 모임은 하고 싶다. 삼중 스님은 꼭 모시고 싶다.”는 간절한 부탁을 전달했다고 한다. 갑작스런 부음 소식에 삼중 스님은 준비가 만만치 않았다. 일본에 가려면 넉넉한 준비를 필요로 했다. 시간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여러 모로 신경이 쓰였다. 먼저 계산이 앞섰다.
삼중 스님은 장 사장의 전화에 선뜻 일본에 간다는 승낙을 하지 않았다. “스님 가셔야죠”라는 당연한 어투에 “조금 있다가 연락하겠다”면서 일단 전화를 끊었다. 장 사장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삼중 스님은 자신을 탓했다. “참 나쁜 놈이다. 가끼루마 스님과 너와는 어떤 관계더냐? 이총을 생각해 봐라. 모든 일들을 전폐하고라도 네가 죽지 않는 한 가야하지 않겠느냐? 가자!”는 결정을 몇 분 내로 내렸다. 한국에 있던 일정을 다 취소했다. 돈 문제는 비상금이라 털어서라도 일단 쓰자는 심사였다. 돈은 이럴 때 써야 한다는 결정은 손쉬웠다. 이런 결정으로 마음이 후련해졌다. 통역자 없이 일본에는 가지 못한지라 장 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장 사장도 일정을 조정하여 함께 추도식에 가자는데 뜻을 모았다.
추모사 호령 “가끼루마 가이죠!”
추도식의 통보를 3일 전에 받아서 모든 일들이 뒤섞여졌다. 삼중 스님을 보좌하기 위해 장 사장과 부인도 일본으로 함께 떠났다. 장 사장이 고맙게도 모든 경비를 떠맡아 주었다. 일본에 가서 보니 “정말로 참 잘 왔다!”는 표현이 맞았다. 추도식에는 수백 명의 일본인들이 모였다. 삼중 스님이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인은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을 뻔 했을 것이다. 추도식장에 내려가면서 삼중 스님의 머릿속에 스치는 뭔가가 있었다. “내가 추도식장에서 망신당하는 게 아니냐? 누군가가 한국을 위해서 그리 일했는데 병원 한 번 오지 않느냐는 봉변(?)은 있을 수도 있다. 그럼 조용히 당해야지!”
추도식에는 일본 대승정, 여승, 민단 대표자 등 추도사는 계속해서 연이어졌다. 삼중 스님을 호명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삼중 스님은 또 한 번 생각이 스쳤다. “그래! 유족들의 아픔은 클 것이다. 세상에 그리 한국을 위해 일한 사람에게 병문안 한 번도 가지 않은 땡중을 누가 호명해 줄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다니. 내가 여기서 추모사 하겠다고? 안되지! 참회사를 해야지! 입하나 방긋하지 말고 조용히 앉아있다 떠나자!” 그 때 한 일본스님이 삼중 스님을 향해서 “저기 한국에서 오신 스님이 한 말씀해야 하지 않느냐?”면서 추모사에 동참시켰다.
추모사로 연단에 자리한 삼중 스님은 가끼루마 스님의 영정을 바라보면서 섰다. 추도식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은 어딘지 냉랭했다. 서자마자 곧바로 고함을 질렀다. “가끼루마 가이죠(회장). 가끼루마 가이죠!, 가끼루마 가이죠!,” 영정을 향해 3번의 고함을 쳤다. 가끼루마 스님은 일한불교협회 회장으로, 삼중 스님은 한일불교협회 회장으로 만났다. 그러니 스님과의 호칭은 자연스레 가이죠(회장)로 호칭했다. 통역이 진행되기 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일본인들은 추도사를 영정을 등진 채 서서는 조그마한 소리로 흐느끼면서 가만가만히 진행했다. 그런데 삼중 스님은 영정을 바라보면서 고함부터 질렀다. “저게 미쳤나? 아니 웬 고함을 저리 질러?”하는 눈초리들은 삼중 스님의 등판에 꽂혔다.
“가끼루마 가이죠는 왜 한 장의 사진으로 탁자 위에 점잖게 앉아 있습니까? 빨리 내려오시오. 한국에서 삼중이라는 땡중이 왔는데 이게 뭐요! 빨리 내려와서 손을 잡고 끌어안아 줘야 되지 않소! 당신은 항상 그리해 주지 않았소! 행동하는 일본의 표상, 육신은 갔지만 모든 한국인의 가슴엔 새길 것이오. 당신은 잘 들으시오! 일본이 저지른 역사의 만행에 대해서 한국인에게 생명을 바쳐서 뜨겁게 참회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일본의 인구가 1억 2천인데 왜? 당신과 같은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습니까? 당신이야 말로 참된 인격자였소! 돌이켜 봅시다. 일천 사오백년 전, 한국은 일본에게 불교를 전해 주었습니다. 불교 뿐 아니라 한문, 천문, 지리, 미술, 공예, 건축, 음악, 심지어는 점복술까지 당신 일본인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사실상 일본의 뿌리는 한국문화가 모국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은혜를 갚았습니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수많은 한국인들의 귀, 코를 끊어서 전시기념비인 이총을 세우지를 않나, 당신들은 은혜를 짐승처럼 대했잖소! 당신이 한일 3대 아픔을 푼 장본인이라서 더욱 알지 않소! 이총, 비총, 울산동백, 북관대첩비 당신 손에서 한국인들에게 되돌려 주었지 않았소! 그런 인생 마감에 당신과 동참을 하게 되어서 그 동안 참으로 행복했소! 금강경에 인생은 한마당의 꿈이라고 했소! 도깨비장난같이 인생은 풀잎의 이슬 같은 것이지 않소!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편안히 쉬십시오.”
통쾌한 추모사에 대승정 인사
▲ 가끼루마 ©브레이크뉴스
삼중 스님의 추도사는 한국과 그의 아픔을 대변하듯 우렁찼다. 동반자로 가끼루마 스님의 은덕을 높이 존경했다. 통역으로 이런 의미를 잘 전달했는지 전달하지 못했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자리에 돌아오니 주일공사는 삼중 스님에게 다가와서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그 전에는 서로 다른 곳에 자리를 잡은지라 아는 체를 하지 않았었다. 무섭게 일본인들을 질타하는 모습이 좋았다는 주변의 평에 덩달아 주일공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장 사장은 아주 통쾌한 추도사에 일본까지 온 보람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추도식의 좌중은 삼중 스님의 목소리에 압도당했다. 일본 대승정(90세가 넘은 큰스님)은 연세로 보나, 위상으로 보나 삼중 스님이 대승정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 한다. 그 순간을 놓쳤다. 대승정은 삼중 스님의 좌석에 일부러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고맙다. 일본인이 죽었는데 먼 한국에서 와서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대승정에 이어 추도식에 모인 대부분 많은 스님들이 삼중 스님의 곁으로 와서 인사를 했다. 삼중 스님은 부인 도시마에게 약속을 했다.
“가끼루마 스님의 훈장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힘닿는 대로 한국정부에 노력해 보겠다. 훈장의 추서를 건의해 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가끼루마 스님을 위한 추모비를 경주의 내 사찰에 만들고 싶다. 사찰이 완성되면(지금 건설 중이라서 전제를 분명히 밝혔다.) 가끼루마 스님의 추모비를 꼭 세우겠다. 일본인의 추모비를 한국사찰에 세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 것이다. 한국인도 가끼루마 스님을 추모해야 한다. 꼭 약속 지켜질지는 내 건강이 문제이지만 건강도 잘 챙겨서 스님의 넋을 추모하고 싶다.”
부인 도시마는 삼중 스님에게 가끼루마 스님의 머리카락이 담겨진 함을 전달했다. 삼중 스님은 부산 자비사에 함을 모셔놓고 사찰이 완공되면 그의 추모비에 세울 결심을 다졌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 짓고 돌아오니 아주 기뻤다. 마지막이 참 좋았다. 마무리를 잘했다. 일본에 가지 않았더라면 어떠했을까? 평생 후회했을 것이다. 그때 갔을 것. 사람 도리를 했다. 형편껏 보탬이 되도록 노력했다. 나로선 일본에 가서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가끼루마 스님이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를 저 세상에서 들어도 부끄럽지 않는 마음이다!”
전과18범…하룻밤 자고나면 사라지는 죄의식
<박삼중 스님 대증언> 평생 범행으로 산 소매치기 이야기
김성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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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산다. 자신 있게 살고자 자신을 내비치며 사는 방법은 다양하다. 당당하게 사는 길목에서 죄의식에 대한 경계선도 천차만별이다. 결벽증이 강한 사람이 갖는 죄의식의 경계선은 강철처럼 탄탄할 듯싶다. 그런데 도둑근성이 숨어있는 사람이 갖는 죄의식의 경계선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는 연필선일 듯싶다.
죄의식의 중량을 견디는 강철선과 연필선에는 각기 다른 삶을 표현한다. 말 그대로 강철선은 깐깐한 인상에 잘 구부러지지 않는 소신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반면에 연필선은 하루 밤 자고나면 모든 일을 잊어버리는 옷도 걸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옷이야 얼마 비싸지도 않으니 그냥 옆 사람의 옷을 몸에 끼우면 된다. 따라서 연필선으로 그어진 죄의식은 남의 물건을 같이 쓴다는 이해할 수 없는 지우개를 달고 있다.
소매치기 경력이 출중한 사람이 감옥소에서 출소하여 죄의식의 무게에 대한 진가를 보여준 실화가 있다. 12살부터 시작된 소매치기는 그를 18범으로 낙인을 찍게 했다. 삼중 스님의 금강경 강연을 교도소에서 듣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자신도 스님이 되고자 한문(漢文)을 열심히 공부했다. 감옥살이에서 나온 그의 나이 26살에 삼중스님을 찾아 왔다. 자신이 스님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을 말했다. 삼중 스님은 그를 받아들였다.
중이 소매치기보다 못하다
▲ 삼중 스님 ©브레이크뉴스
“감옥소에서 한문을 배우는 정성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길로 인도하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18범으로 낙인이 찍힌 인생이라도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머리를 삭발하고 승복은 입은 그는 스님의 행색으로는 하나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원도 산골짜기에 있는 보현사의 주지에게 부탁드렸습니다. 그 절에서 스님으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몇 주일 후, 다시 찾아와서는 불쑥 한다는 말이 걸작이었습니다. ‘스님, 중이 우리 소매치기보다 못하더군요!’”
삼중스님은 깜짝 놀라 영문을 물었다. 아주 떳떳하게 스님들의 해괴망측한 행태를 고발하는 그의 모습에서 삼중스님도 인정하는 면이 있었다. 사실 소수의 스님들이 저지르는 행동들에는 안타까운 광경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강원도 보현사 주지에게는 그는 간다온다 말없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대뜸 ‘그 절 스님들은 할머니 손에서 건네받은 돈으로 밤새 술을 퍼마시고, 염소까지 잡아먹습니다. 그리 난장판이지 않는 좋은 절로 보내주십시오.’ 사실 스님으로 사는 소수의 사람들은 승복만을 입은 사람들이 사는 세계입니다. 그러니 여러 형태의 빛깔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활을 하는 스님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나도 스님인지라 스님 편을 거들었습니다. ‘너희들 소매치기들은 할머니의 돈을 훔치지 않느냐? 아들 결혼시킬 때 쓰려는 소판 돈을 소매치기하니 결국에는 할머니의 목숨까지 끊게 하는 경우를 내가 본 적이 있다. 어째 소매치기하고 중하고 비교를 하느냐? 스님들이 혼자서 살려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래서 더러 그리하는 스님들이 있을 수 있다.’며 해명 아닌 변명을 했습니다.”
도벽에 스님들 방문 잠금
그는 말도 잘했다. 넙죽 넙죽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승복을 매만지면서 다른 절로 자신을 보내달라는 부탁을 능청스럽게 했다. ‘이번에는 좋은 절로 보내주시면 제가 잘 지내보겠습니다.’는 말을 믿기로 했다. 그래서 삼중스님은 그에게 잘 어울릴 절을 물색했다.
“선배 도인으로 아주 순박한 스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선배 도인은 저를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선배 도인에게 간단하게 그의 상황을 꺼내놓으면서 부탁을 드렸습니다. 저를 좋아하다보니 제가 보낸 사람을 철석같이 믿었을 게 눈에 보입니다. 그가 절에 나타난 이래로 없어지는 물건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님들은 방문을 잠그고 다닐 정도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주지스님이 그의 비행을 선배 도인에게 이르게 되었답니다. 처음에야 선배 도인은 호되게 주지를 훈계했다고 합니다. ‘삼중스님은 저 젊은이를 사람 좀 만들어 보겠다면서 우리 절로 보냈다. 도와주어야 할 니들이 왜 비난을 하느냐?’”
삼중스님은 선배 도인에게 볼 면목이 없었다. 선배 도인이 감싸주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승복을 입은 채 절에 있는 물건들은 다 자기 것인 양 들고 나왔다. 수도하는 절에서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점을 틈타 그의 도벽은 날개를 달았다.
“그의 도벽은 점점 더 나를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그가 절에서 쫓겨나올 시기에 5.18 광주 항쟁이 터졌습니다. 그는 그 시절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만들어진 삼청교육대에 끌려 갔습니다. 일 년쯤 지난 후, 나를 다시 찾아 왔더군요. 자신의 지난 날 저지른 잘못을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나를 모시고 잘 지내겠다는 약조를 거듭했습니다. 지옥 같은 삼청교육대에서 나온 그의 모습은 너무 처참했습니다. 그런 모습에 기회를 다시 한 번 주었습니다. ‘그래 나랑 같이 살자. 자네와 같은 처치의 사람들도 의리는 있는지 내 물건에는 손을 대지 않더라.’ 하는 농담을 주고받았습니다.”
금고안의 돈과 녹음기
삼중스님은 그 시절 큰 사찰의 주지로 있었던 시절이었다. 삼청교육대에 끌러 가 지옥 같은 생활을 했던 그는 눈빛은 간청을 했다. 젊은 시절을 감옥소에서 거의 다 탕진해 버린 그의 모습은 용서를 빌고 있었다.
“잘못을 빌고 있는 그의 등판은 너무 말라서 척추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습니다. 그래서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서 한 식구처럼 지내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만큼은 그도 사람다운 생활을 맞보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터진 겁니다. 한 이틀 뒤 쯤 사찰의 총무가 제게 뛰어 올라와서 보고를 했습니다. ‘스님, 금고 문을 열고 현금 몇 백만 원과 녹음기를 그 소매치기가 가지고 튀었습니다.’는 말에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자신을 믿고 한솥밥을 먹이고자 받아 준 그가 금고를 털고 사라진 것입니다.”
세상에는 하루 밤을 자고 일어나면 자신의 약조를 잊어버리는 부류도 있다. 그 시절 돈 몇 백만 원은 굉장히 큰돈이었다. 또 녹음기도 귀한 물건이라 금고 안에 두었던 것이다. 세상이 자신을 믿은 사람들을 배신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말도 넙죽넙죽 잘도 붙인다.
“돈도 참 큰돈이었죠. 사찰에서 쓸 공사대금을 지불한 돈이었으니 실망이 이루 말할 수 없더군요. 또 다른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교도소를 제 집처럼 들락거리는 사람이니 얼마 되지 않아 또 교도소에 들어갈 겁니다. 그 때 자신의 훈장거리에 내 이야기를 끼어 놓을 생각을 하면 허망하기 그지없더군요. ‘내가 그 삼중 땡중 물건을 낚았다.’는 그 부류들끼리의 속어를 쓰는 잡음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심지어 그가 어떠한 상황까지 시나리오를 쓰려는지 걱정이 앞섰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다른 출소자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입니다. 나처럼 많은 재소자와 사형수를 만난 사람들도 ‘역시’하는 소리가 나오는데, 일반인들은 출소자들은 어떤 눈으로 보겠습니까?”
두 팔로 스님을 꽉 껴 앉다
그가 금고를 털어서 사라진 지 3년 쯤 지난 무렵이다. 삼중스님은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려고 터미널에서 있었다. 그런데 스님을 등 뒤에서 꽉 끌어안는 웬 젊은이가 있었다. 이런 반가운 행동은 처음 있는 일인지라, 스님은 등 뒤에 있는 얼굴을 웃으면서 뒤돌아보았다.
“아니 글쎄! 그 소매치기이었습니다. 워낙 곱상하게 생긴 얼굴이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전기에 감전된 듯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나 뜻밖이라 눈이 저절로 크게 떠지더군요. 가만히 보니 그 소매치기 옆에 여자가 있었습니다. 잠깐 스치는 그 몇 초 사이. 당황한 마음은 무수한 생각을 들게 하더군요. ‘아니! 그럼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인가! 금고를 턴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나? 괜한 사람을 도둑으로 몰았나?’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내 스스로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습니다. 반갑다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더군요.”
그가 하는 말과 행동으로 봐서는 괜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러니 덥지도 않은 봄철 날씨에 이마의 땀이 송골송골 올라왔다. 그런데 뒤이어진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제는 미안한 감정까지 들게 했다. 그는 자신의 옆에 있는 여자를 스님에게 소개했다.
“참 난감했습니다. 그가 소개하는 여자는 참해 보였습니다. 내가 주지로 있는 절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례를 부탁하려고 했답니다. 그래서 나를 만나기 위해서 절로 내려가려는 참에, 운이 좋게도 나를 만났다면서 아주 좋아했습니다. 아니 이런 말까지 하는 그의 모습은 천진난만 했습니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땡 중인 나를 자랑하면서 아주 신나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나도 조금 여유가 생기자, ‘그럼 내가 정말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도 한 번 슬쩍 찔러나 보자.’는 마음이 일어나더군요.”
금고 턴 사람은 다른?
고속버스 터미널, 많은 사람들의 마음처럼 그와 삼중스님은 서로의 마음을 읽지를 못했다. 스님은 고민을 하면서 자신의 의혹을 벗어내려 했다. 좋아하는 여자와 함께 있는 그의 모습에서는 과거의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스쳐가는 흔적으로나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표정을 잠깐이라도 스칠 것이다. 삼중스님은 조심스럽게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하여 말을 꺼냈다.
“아주 조심스러웠습니다. ‘나는 자네의 결혼식을 절에서 올리면서 내가 주례를 서는 것은 어렵지 않네. 그러나 내가 주지로 있는 절이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네. 상좌스님과 다른 스님들에게도 물어봐야 한다네. 그 중에 몇몇 스님들이 축복해주지 않으면 낭패이네. 자네의 결혼식을 올릴 수 없지 않는가?’며 다른 스님들에게 바통을 넘겨서 슬쩍 떠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야 냄새를 피웠습니다. 쌍이 노래지면서 한다는 소리가 더 기막히더군요.”
참 사람의 마음은 알다가도 찾을 길 없다. 죄지은 사람의 마음은 언제 들통이 나는 것일까? 연필로 그어진 죄의식은 하루 밤에 지나고 나서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도대체 죄의식이라는 무게를 전혀 느끼지 않고 사는 삶의 형태는 어떨까? 눈앞에서 팔랑거리는 깃털처럼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면서 사는 것일까?
갯벌구멍의 ‘방게’같은 삶
“지금에서야 기억난 듯이 아주 조그마한 소리로 말했어요. ‘아 참! 녹음기 한 대 사갈려고 했는데, 그럼 못가겠네!’ 하는 말에 ‘옳지! 네가 맞구나!’로 맞장구 쳤습니다. 그의 입에서 튕겨 나오는 말에는 죄의식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냥 잊고 있는 상황을 어렴프시 떠올리는 듯 했습니다. 내가 그를 떠보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런 말을 듣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도 나를 비롯하여 절에 있는 스님들은 괜한 사람을 잡았다는 생각에 미안해했을 겁니다. 자신이 스스로 이런 중대한 발언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죠.”
죄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알아도 모른 척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피해를 당하여 죽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삶을 포기할 정도까지 자신을 탓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 밤 지나고 나면 썰물 때처럼 갯벌구멍을 들락거리는 ‘방게’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남들이 당하는 피해나 배신감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리하지 못합니다. 전혀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이 헛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죠. 타성이 되어 버린 자신들의 습성은 도덕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당했다면 그 피해를 잊어버리겠습니까? 아닙니다. 절대 잊지 않고 자신의 피해를 당했다는 것을 광고하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부부 공양주의 사기
전문사기꾼 부부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혀를 차게 한다. 삼중스님이 관광지 큰 사찰의 주지로 있었던 시절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부부인지 아니면 남녀인지 함께 절에 찾아왔다. 부부의 행색으로 보아 갈 곳이 없어 보였다. 자신들이 사찰에서 공양주로 좀 지내기를 바란다는 말에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고 허락했다.
“벌써 20년 쯤 된 이야기라 그 시절에는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믿고 주민등록증을 보자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서로 믿으면서 지냈던 시절이었습니다. 한 달 뒤 쯤 남편에게 공금을 내라고 은행에 보냈습니다. 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그의 아내도 사라졌습니다. 공금으로 몇 백만 원을 굉장히 큰 금액이었습니다.”
연고는 물론 인적사항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불쑥 며칠 전에 남자에게 걸려온 전화가 생각났다. 전화 내용에서 ‘장모가 백병원에 입원하고 있다.’는 말을 기억을 해냈다. 그의 행방을 추적하고자 백병원으로 달려갔다.
“백병원 그의 장모 병실에 다른 스님 두 명과 들어서는데 그제야 남자가 들어왔습니다. 깜짝 놀라는 그를 보자마자 공금을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 상당한 금액을 쓸 시간은 분명히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미 다 써버렸다는 대답으로 돈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 내 옆에 있는 전과가 있는 스님은 펄떡 뛰었습니다. 경찰에 신고해서 옷을 뒤져보면 반듯이 돈이 나올 거라면서 난리를 피었습니다.”
삼중스님은 교도소에서 많은 재소자들을 보았다. 자신의 손으로 형무소에 보내서 재소자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경찰을 부르지 말라고 제지했다. 이런 삼중스님에게 남자는 고마워하면서 자진해서 ‘차용증서’를 써주었다.
“차용증서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마음이 중요하니 돈을 꼭 벌어서 갚아달라는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20년쯤 지난 후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자신이 ‘이 아무개’라는 이름을 여러 번 소개를 해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끝내 기억을 못하자 자신이 만난 시절에 대한 사찰의 이름과 공양주로 지냈던 이야기를 듣고서야, 겨우 그 남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너무 오래되어서 그의 이름조차 잊어버렸습니다.”
20년이 지난 후, 남자의 전화에 삼중스님은 속으로 무척 기뻐했다. ‘그래도 자신의 양심을 믿어 준 게 고마워서 전화를 했으니, 그럼 혹시 돈이라도 돌려주려고 하는가?’는 생각에 반갑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런데 지 버릇 개 못준다는 옛 속담이 적중했다.
“그가 내뱉는 말은 도저히 제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도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스님, 제가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서 감옥소에 갈 형편입니다. 스님, 돈을 빌려주십시오.’하는 소리에 기대했던 마음에 먹칠을 했습니다. 거액의 공금을 훔쳐 달아났던 사람이 오히려 자신이 선행을 베푼 사람처럼 당당했습니다. 돈을 빌려달라는 전화를 하다니 보통 사람들이라면 절대 못하는 행동을 했습니다. 죄의식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이런 사기꾼들입니다. 꾼의 체질로 변한 그들의 삶은 입만 열면 더욱 인정스럽게 다가옵니다. 입에 혀처럼 살뜰히 칭찬하다가 돈을 빼앗고 마음에 아픔까지 주고 떠납니다. 꾼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sungae.kim@hanmail.net
금강경 제3분 대승정종분
2009.11.27 20:15
덕산이(allfioryou)
대승정종분이란 대승의 바른 종지란 뜻으로 대승보살의 나아갈길을 말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의 종류인, 이른바 알에서 태어나는 것, 모태에서 태어나는 것, 습기에서 태어나는 것, 화현하여 태어나는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여열반의 세계로 인도하여 완전한 멸도에 들게 하리라.'
그러나 이와같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중생들을 완전히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실은 한 중생도 열반에 들은 자는 없다. 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생각이 있다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보살이 일체 모든 중생들을 다 무여열반의 세계로 인도하겠다는 대 서원의 발심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것이다. 모름지기 대승보살의 몫은 하화중생의 마음을 내는 것이란 뜻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생의 종류는 아홉가지로 구류중생이다. 우리는 보통 중생이라 하면 인간들만 그러하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경에서 나오듯 이렇게 아홉가지로 나누어진다.
보통 구류중생 중 처음 네가지는 태란습화 사생으로 분류한다. 난생은 알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조류등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알에서 태어나는 일체 모든것들을 말한다. 태생은 모태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온갖 짐승이나 사람또한 이곳에 속한다. 습생은 습기에 의해 태어나는 것으로 모기, 지렁이, 온갖 벌래들이 이곳에 속하며, 화생은 모태나 알등에 태어나는 원인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업력에 의해 화현하여 태어나는 것으로 천상의 신들이나 지옥의 중생들이 이곳에 속한다.
그리고 다음의 두가지 종류인 유색, 무색의 뷴류는 형상의 유무에 따른 분류로써 유색은 모양과 빛깔을 가진 중생으로 욕계와 색계에 사는 이들을 말하며, 무색은 모양과 색깔이 없는 신들로써 무색계에 있는 이들을 말한다.
그리고 나머지 세가지 종류인 유상, 무상, 비유상비무상의 분류는 인식의 유무에 따른 분류로써 유상은 인식작용이 있는 중생으로 무상천과 비상비비상천을 제외한 나머지에 사는 중생을 말한다. 무상은 인식작용이 없는 중생으로 색계의 세 번째 하늘인 무상천에 사는 중생들이며, 비유상비무상은 인식작용이 있는것도 없는것도 아닌 중생으로 비상비비상천에 속한 신들을 말한다.
보살이란 이렇듯 우리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부터 신들까지 모두 무여열반에 들게 하겠다는 서원이 있어야 한다. 무여열반이란 일체 모든 고통과 번뇌의 불길이 다 끊어저 마지막 육신까지도 소멸하여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궁극의 경지로써 완전한 열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유여열반이란 일체의 번뇌를 끊어 없앴지만 아직 육신을 남겨둔 열반을 말하는 것으로,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남음이 없이 그 육신마져 없어졌을 때를 무여열반이라 한다.
보살의 공통된 서원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다. 허나 수보리는 어떠한가. 이미 아라한과를 증득한 이로써 상구보리를 원만하게 성취하고 계신분이다. 다만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열반의 저 언덕으로 가기를 잠시 미루고 이 언덕에서 하화중생의 발원을 성취하기 위해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따로이 상구보리,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어떻게 수행해야하고,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하는지를 설법할 필요가 없으셨던 것이다. 다만 부처님께서는 수보리를 비롯하여 보리심을 발해 보살의 길로들어선 선남자 선여인들이 보살의 길을 온전하게 걷기 위해서는 하화중생의 발심이 보살에게 있어서는 생명과도 중요한것임을 당부하고 계시다.
다시 말해,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이야말로 보살을 보살일 수 있게 해주는 보살의 요건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대기설법이라하여 설법을 듣는 상대의 근기에 맞게 그 내면의 깊은 뜻을 온전히 헤아려 그핵심을 바로집어 주는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완전이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실은 한 중생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다."
이 대목이 제3분의 핵심이면서 또한 금강경의 핵심이고, 나아가 모든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앞에 모든 보살의 길에 들어선 이들에게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일체 모든중생을 다 제도해야 한다고 발원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 발원이 방편법을 말씀하신 것이라면 이 부분은 근본법을 말씀하고 계시다.
다 제도해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어느 한 중생도 제도되지 않았음을 깊이 통찰하여 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말은 수없이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수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함축하여 전달하고 있다. 이 말 속에서
무분별, 무아, 연기, 공, 중도의 이치가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중생들은 열반에 들지 못하고 수없이 많은 번뇌와 괴로움, 불행 속에서 헤메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환상이며 거짓이고, 신기루 이고 꿈이니 이 세상 어느것도 본질적으로 괴로운것은 없다. 다만 꿈속에서, 환상속에서 헤메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다만 이것이 환상이고 꿈임을 그저 알기만 하더라도 더이상 얽매이지 않는다. 일체 모든존재는 이미 제도되어있고, 열반의 언덕에 이미 도달해 있다. 다만 환상과 같은 탐진치 삼독에 빠져 괴로워 하고 있을 뿐이며 환상과 같은 깨달음과 열반을 찾아 헤메고 있을뿐이다. 중생들의 괴로움이 환상임은, 보살들의 구제역시 환상임을 망각해선 안된다.
모든중생은 이미 구제되어 있다. 새삼스럽게 또다시 분별을 일으켜 누가 누굴 제도하고, 깨닫게 할것도 없다.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고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우리는 그곳에 도달해 있는것이다. 다만 모를뿐.. 무명, 즉 어리섞음으로 인해 이것이 모두 환상임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하화중생의 발원을 가져야 하지만 '행함이 없이 해야한다' 라고 말씀하고 계신것이다. 일체 모든 중생을 저 피안의 세계로 인도해야 하지만 사실 그들은 중생이 아니며, 이미 인도되어 있다는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착각에 빠져있어서도 안되고, 거기에 집착해서도 안된다. 걸림없이, 집착없이 발원을 성취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며, 발원의 성취라는 것 또한, 성취가 아님을 말씀하고 계신것이다.
중생들이 느끼고 있는 불행과 괴로움이란 것도 환상이지만, 더 나아가 제도되어야 할 중생또한 환상이며, 제도해야할 보살또한 환상일 뿐이다. 다시말해, "일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고정된 자아가 아니다."
제도해야할 중생도 없고, 제도해야할 나 또한 모두 공하고 무아인 것이다. 제도하고 제도받는 주체가 모두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공할진데 공한 가운데 일어난 괴로움과 불행이 어디 있겠는가..
나와 남을 분별할것 없고, 중생과 부처를, 생사와 열반을, 행복과 불행을, 제도받는 이와 제도 하는이를 분별할 것도 없이 이세상은 본래부터 공하고 무분별이며 무아인것이다. 그 어떤 한쪽에도 치우치면 안된다. 극단이 어디있는가. 이러하기에 중도의 실천만이 무분별과 공, 무아를 체득할 수 있게 해준다. 다만 이렇게 세상이 만들어지고 온갖 경계가 나타난것은 다만 공한 가운데 꿈처럼 인과 연이 서로 화합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는것이다. 이렇게 무아, 공, 인과라는것은 모두 연기의 다른말이다. 연기법이 부처님 가르침의 전부라는 표현도 맞을것이다.
"왜그런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모두 무아라는 진리를 가리고 있는 것들이다. 즉, 이 사상을 멸하면 무아법을 바로 볼 수 있다.
아상. 나라는 생각. 내것이다. 내가 한다라는 생각들. 이 아상으로 인해서 모든 분별이 시작된다.
나라는것이 있음으로 너가 존재하며 중생이 존재하고 부처가 존재한다. 제도받을 내가 존재하며 제도해줄 보살이 존재한다.
나다 라는 생각은 몸뚱이와 마음과 생각이 나라고 착각하는 분별이다. 지수화풍이 화합하여 인연따라 잠시 만들어진 것일뿐 100년도 채 못되어 사라질 이 몸이 어찌 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내 생각또한 오랜 경험에 의해 습이쌓여 그것이 떠오르니 인식작용이 없다면 어찌 생각이 일어날 것이며 그것이 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백년도 채 못되 사라질 이 몸이 무엇을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그 무엇인들 영원한것이 있겠는가. 열심히 돈을 벌어도 가져갈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업에따라 또다시 태어나 새로 돈을 벌참이 아니라면 윤회를 벗어나는 길을 한번 생각해봄이 어떠한가.
이름도 태어나 누군가 지어주어 그리 불리우니 이름이 나라할수 없으며 나를 증명하기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노력하며 발버둥친다. 나를 무엇이 증명하는가. 엄마와 아빠가 나를 증명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엄마와 아빠와 상대성으로 내가 존재함이니 엄마와 아빠가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엄마가 있는나. 아빠가 있는나. 어디 학교에 입학한나. 어디에 취직한나. 돈을 얼마만큼 버는나. 어느집에 사는나. 어느 주민번호를 갖고 있는나. 어떤차를 모는 나. 도데체 나는 어디있는가. 그것들이 모두 없어지면 나를 무엇으로 중명한단 말인가..결국 죽음에 이르러 끝내 나를 증명하지 못한채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아니니 그동안 나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해오며 쌓아진 업으로 또 다시 태어나 새로 시작해야 하니 모든것이 반복되며 동시적이다.
어쩌란 말인가..
금강경에선 이 어쩌란 말인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최소한 새로 태어나려는 일념과 업을 없애는 길을 알고있다. 그것이 바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중생상은 무엇인가.
중생이란 깨달음을 얻지 못한 모든 이들을 의미하는 말로, 깨달은 이와 깨닫지 못한이의 분별을 만들어 내며 동시에 살아있는 존재와 죽어있는 존재를 분별하는 착각을 만들어낸다. 나는 깨닫지 못하였으나 더욱 밑으로 타락할 지언정 그래도 중생일 것이라는 착각또한 만들어낸다. 이 중생상은 아상이 타파되면 자연스럽게 없어질 수 밖에 없다.
다음 수자상으로 목숨과 생명에 집착하여 생사를 초월하는 그 어떤 영혼이 있다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생사를 초월하고자 하고 목숨과 생명이 끊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또한 나 라는것이 있다는 착각, 즉 아상에서 시작되는것에 불과하다. 나 가 있으니 좀더 오래살고 싶고, 생사를 뛰어넘고 싶고, 그 어떤 불생불멸의 초월적인 존재를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없는 무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고 죽음도 있을 수 없고, 목숨의 길고 짧음 또한 환상이며 꿈에 불과하다.
다음 인상이라는 생각. 이것은 윤회의 주체로서의 그 어떤 실체, 내가 몇번이고 나고 죽더라도 이 실체는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사람이라는 생각이 있기에 뱀을 보고 놀라 소리치며 벌래를 하찮은 존재로 여긴다. 분별심이다. 나는 언제나 인간이었고 앞으로도 인간일것이니 뱀과 벌래따윈 나와 하등 상관없는 존재라는 착각과 분별심을 일으킨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이 인상이 있으면 보살의 입장에서 스스로가 중생보다 우월한 존재라 생각하여 제도하니 그것은 제도가 아니며 제도받을 중생이 없다면 제도할 보살이 어찌 존재하겠는가.
이렇듯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머무르면 곧 보살이 아니라는 말씀은 무아의 진리를 말한다. 분별심으로 인한 제도는 제도가 아니며 중생과 분별되어 존재하는 보살은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 라는 상을 타파한다는 것은 곧 나 아닌 모든것에 대한 분별심을 타파한다는 것이다.
이후 금강경의 모든 내용은 이 제3분을 설명하기위한 방편의 내용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