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선생님과 나
― 한 시대를 추억함
프롤로그
갓난아이 주먹만 한 눈송이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월출산자락으로 난 옛 국도를 따라 불티재를 넘었다. 광주 일곡에서 해남 땅끝까지 걷는 중이었다. 하치마을을 지나 월남리 못미처 국도변에 제법 큰 휴게소가 보였다. 피곤하기도 하고 너무 추워 따뜻한 차로 몸을 녹이고 싶었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실내가 어두웠다. 60이 될까 말까 한 아주머니 한 분이 나를 맞이했다. 폭설로 정전되어 어둡다고 미안스러워했다. 말하는 품위나 자태가 기품 있었다. 탁자에는 길게 화선지가 펴있고 옆에는 큰 붓에 먹과 벼루가 놓여있었다. 촛불 아래로 “소년이노학난성 일촌광음(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까지 쓰다만 예사롭지 않은 전서체가 보였다.
내가 감탄하는 얼굴로 서예가시냐고 묻자 그냥 취미로 배우고 있다고 답했다. 읍에 있는 서예원에서 배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원장님이 최준기 선생님 아니냐고 물었다. 짐작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이름이 퍼뜩 떠올랐을 뿐이다. 그녀는 나에게 읍에 사느냐고 되물었다. 내가 아니라고 하자, 원장은 아니어도 그분에게서 배우기도 한다면서 어떻게 선생님 함자를 아느냐고 다시 물었다. 나는 어떤 분에게서 그분의 이름을 들을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골똘한 얼굴을 하더니 “혹시 리영희 선생님에게서요?” 나는 놀라서 “어떻게 그분을 아십니까?” 하니 몇 차례 최 선생님과 함께 선생님을 모시고 차를 마신 적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갑자기 친해져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주머니가 들었던 리영희 선생님 강의 이야기도 들었다. 월출산 골짜기에서 나누는 리영희 선생님 이야기는 특별했다. 문을 열고 나와 휴게소를 돌아보니 눈에 덮인 지붕이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눈길을 걸었다. “광장의 촛불만 세상을 이끌어가는 횃불은 아닙니다. 고전을 밝히는 촛불 하나도 세상의 빛이 됩니다.” 어디선가 선생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다음 해 리영희 선생님의 부음을 들었다. 이제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도 벌써 14년이 지났다. 14년 전 장지가 광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불가피한 서울 출장으로 장례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회한으로 남아있다. 늦었지만 기억으로만 있는 선생님과의 인연을 기록으로 남겨 영전에 바치려 한다. 리영희 선생님과 맺은 인연은 선생님과 나의 사상 편력에서 변곡점을 이룰 때마다였으니, 이 글은 어쩌면 선생님과 나의 사상적 여정의 기록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