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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의 과정과 4.18 고대 시위
1. 4.19 혁명의 전개
4.19 혁명을 초래하는 직접적인 원인은 3.15 부정선거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계속되는 물가 상승과 민생고, 계속되는 부정부패와 독재정치가
4.19 혁명의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1) 이승만 정권의 장기 집권 야욕
자유당은 친일파들로 구성된 정당이었기에, 이승만 정권은 처음부터 민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에다
전쟁은 사회 불안을 더욱 가속화시켰습니다. 그럼에도 이승만 정권은 장기 집권에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결국 이
같은 행동은 민심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의 2차 연임만을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자유당은 1954년 9월 9일 이기붕외 135명의 서
명으로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제한 철회'를 주요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시켰습니다. 헌법 개정에 필요한 3분의 2에 달하는 136명의 표를 얻지 못하고 135명의 표를 얻어 부결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투표결과 135표를 얻었기때문에 203의 3분의 2는 135.333...으로 자연인을 정수가 아닌 소수점까지 나눌 수 없으므로 개헌안은 가결되었다는 발표를 하였습니다. (사사오입)
이승만의 장기 집권의 야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56년 5.15 정부통령선거에서 장면의 부통령 당선으로 국민들의 야당에 대한 지지를 확인하게 되면서, 장기 집권을 위한 언론 규제와 법적 근거까지 마련하기에 이릅니다. 국가보안법을 개정해서 이승만과 자유당에 반대하는 모든 개인과 단체를 반국가 혐의로 몰아 체포, 구속, 처벌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를 통과하기 위해서 야당 의원을 지하실에 감금하고 30분만에 날치기 통과를 하였습니다. 또한 자신과 맞서게 될 진보당 당수 조봉암을 '적색 간첩의 배후 조종하는 평화통일 방안을 추진하였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걸어서 사형에 처했으며, 야당계 언론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여 몇 차례의 필화사건으로 기자를 구속하고, 야당지의 하나인 <경향신문>을 폐간시켰습니다.
(2) '부정부패' 의 만연
장기집권을 위해서는 각종 정치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부정 부패는 더욱 만연해지게 되었습니다.
각종 원조 물자를 특정 재벌에게 집중적으로 배정해주고 그 대가로 뇌물을 받고, 재벌은 값싼 원조 물자를 민중들에게 팔면서 폭리를 취했으며 , 은행 대출, 세금 징수 과정에서도 자유당 선거 자금을 상납 받아냈습니다.
군사원조 역사 마찬가지로 고위 장교들은 공공연하게 군수 물자를 빼돌리면서 사병의 피복비와 부식비를 떼먹는가 하면, 석유, 자동차, 부속품 등 값나가는 것은 무조건 자신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권력있고 돈 있는 집 자식들은 군대 또한 면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부정부패는 모두 민중의 호주머니를 터는 것이었고, 사회의 기풍을 흐리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3) 미국의 원조 감소로 인한 경기 침체, 민중들의 궁핍한 삶
1945 - 1961년에 걸쳐 31억달러를 미국에서 원조받았습니다. 당장에는 도움받는 듯 하였으나, 1958년을 기점으로 미국의 원조가 줄어들면서 오히려 우리 경제는 한국경제는 대미 의존적 경제, 종속적인 경제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원조는 '무상원조->공공차관->상업차관->직접투자'라는 미국 자본의 논리에 의한 것으로 향후에 이익을 챙겨가는 방법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원조의 감소는 공장의 조업률을 낮추게 했고, 실업자가 넘쳐나게 했습니다. 1958년 초, 실업자는 약 420만 명에 달했고,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도시 빈민은 '보릿고개' , '쌀고개' 라는 단경기를 맞을 때마다 굶주림에 배를 움켜 줘야만 했습니다.
2. 4.19 혁명의 전개과정
(1) 직접적 원인- 3.15 부정선거
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국민들의 야당에 대한 지지를 확인한 자유당은 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처음부터 부정하게 치를 계획을 세웠습니다. 자유당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신병치료를 위해 도미를 하게 된 것을 기회로, 5월 중에 실시해야 할 정부통령선거를 2개월이나 앞당겨 3월 15일에 실시하였습니다.
수술 중 조병옥이 사망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당선이 확실해졌습니다. 하지만 부통령으로 장면의 당선이 확실해지면서, 고령인 이승만의 사망 이후 부통령을 잡지 않으면 권력을 내놓아야 하는 자유당은 부통령으로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부정선거를 치르게 됩니다.
3.15선거는 사상유례 없는 추악하고 불법적인 부정선거로 얼룩졌습니다.
첫째, 세 사람 또는 다섯사람씩 짝지어 기표하고 자유당원에게 검사 받는 3인조, 5인조 공개 투표
둘째, 투표소 주변에 자유당 완장부대를 동원해 민주당 지지자에게 위협을 주는 완장부대 등장
셋째, 있지도 않은 사람을 유권자로 둔갑시켜 자유당에 투표하게 하는 유령유권자 조작
넷째, 총 유권자의 40%에 달하는 자유당 표를 미리 투표함에 넣어두는 4할사전투표
다섯째, 민주당 참관인을 매수하거나 강제로 쫓아내었습니다.
이에 심지어 자유당 표가 총 유권자 수보다 더 많이 나오는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공정 선거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이 날 선거 결과 3월 17일 이승만 88.7%, 이기붕 79% 득표율로 당선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2) 4.19 전개과정
1) 2.28 대구 의거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개최될 민주당 선거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요일 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등교시켜 영화관람, 토끼사냥 등에 동원하자 대구지역 고교생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는 4.19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전국의 여러지역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어 3월 1일 서울, 대전, 수원에서, 8일 대전, 12월 13일 부선 서울에서 계속적인 학생 데모가 일어났습니다. 학생들의 구호도 처음에는 "구속학생 석방하라". "학생을 정치 도구화하지 마라" 등이었으나, 점차 정치적인 구호로 바뀌어 "학생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뭉치자". " 부정선거를 묵인하는 자는 자유로운 조국에서 삶을 포기한 자다"라는 등의 부정선거 규탄의 방향으로 바뀌어갔습니다.
2) 3.15 마산 의거
3월 15일 선거 당일 마산에서 학생시위가 벌였고, 시민들도 선거포기선언을 한 민주당 당사 주변에 모여 "협잡선거 물리치자"고 외치면서 학생들의 대열에 동참하였습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무차별 진압에 나섰고, 경찰의 사격으로 학생들과 시민들이 쓰러졌습니다.
3) 4.11 마산 2차 의거
이 상황에서도 이승만 정권은 무고한 시만, 학생의 죽음을 공산당의 책동으로 무마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오전 11시 20분경 마산 중앙 부두 앞바다에서 눈에서 뒷머리까지 20cm 길이의 미제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체가 해안 낚시꾼에 의해 걸려나왔습니다. 3월 15일 부정선거 항의시위에 참가했던 김주열군이 실종 20여일만에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학생과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으며, 오후 6시 30분경 3만명으로 시위대는 불어났으며 3일간 계속해서 시가행진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진실규명은 외면한 채 무고한 시민들을 연행, 고문하였고, 이에 자유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습니다.
4)4.18 고려대 시위 등 대학가의 항거
서울의 대학생들이 본격적으로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오후 1시경 4000여명의 고려대 학생들은 학교에 집결하여 선언문을 낭독하고 일제히 교문을 나와 국회의사당에 도착해서 구속된 동료 학우들의 석방과 학원 자유를 요구하며, 평화적 시위를 벌였습니다.
평화적 시위였건만, 이승만 정권은 반공청년단이라는 정치 깡패를 동원하여 평화적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는 고려대생을 습격하였고, 학생들의 평화적 시위마저 폭력으로 진앞하는 정권에 대해 민중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5) 4.19 피의 화요일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은 이른 아침부터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국회의사당에 모인 학생 시위대열은 경무대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했습니다. 시민들도 학생들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서울 시내는 온통 민주를 외치는 시위대열로 뒤덮이게 되었습니다. 이미 시위대 숫자는 10만명을 넘어섰습니다.
혁명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자, 자유당 정권은 오후 1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경비 계엄령이 선포하였고, 오후 4시에는 부산.대구.광주 등 4개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였습니다. 오후 5시에는 비상 계엄으로 바뀌면서, 경무대 앞의 발포로 시작된 충돌로 183명의 사망 자와 6,259명의 부상자가 속출하였습니다.
6) 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25일 오후 5시 40분 전국 27개 대학의 교수 300여명은 "4.19에 쓰러져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계엄하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평화적 시위를 감행, 시가를 행진하였습니다. 교수단의 시위는 이제까지의 학생시위에 이은 정부의 마지막 단안을 촉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산과 마산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 노동자, 농민, 구두닦이까지 민주를 향한 외침에 참가하면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염원이 전국에 물결치게 되었습니다.
결국 26일 오전 10시 이대통령은 비로소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 12년의 장기 집권이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부통령 이기붕일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이승만의 하야 후 허정 내각수반이 과도 정부를 이끌었고, 학생들은
파괴된 질서를 회복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리하여 1960년 8월, 의원내각제의 장면 내각이 새롭게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3. 4.19 혁명이 남긴 교훈
(1) 4.19 혁명의 성과
1> 역사는 국민들에 의해 바뀌고, 전진한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였습니다.
4.19 혁명 이후, 우리 사회는 많은 변화를 예감하고 있었으나,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권의 탄생을 이루지 못하고, 박정희의 군사쿠데타가 연이어 벌어지면서 사실은 4.19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사회가 바뀐 것은 없지만, 4.19 혁명은 우리의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성과는 국민들의 힘이 모이면 모든 것을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이고, 역사는 그렇게 모인 국민들의 힘으로 전진해간다는 것을 느끼고 경험했던 것입니다. 아직 민주주의, 평화통일 등 우리사회의 모순들이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혁명에 대한 경험은 매우 중요한 재산이 됩니다. 그리고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몇몇의 영웅의 탄생이 아니라 사회를 바꾸려고 하는 국민들의 단결된 힘이 폭발할 때 실현되는 것이라는 것을 두 눈으로 경험했습니다. 이런 경험은 우리의 현대사를 움직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국민들의 지향과 괴리된 정부는 존재가치가 없음을 증명했고, 또한 그런 정부는 국민들이 심판한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4.19 혁명은 '국가주권이 국민들에게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확인시켜 주는 계기였습니다. 이는 부정과 독재로 유지하는 정부는 언젠가 국민들에게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으며, 국민의 지향과 의사를 따르지 않고, 국민들을 억누르는 정권의 말로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4,19 이후에도 독재정치는 계속되었지만, 4.19 혁명과 같은 계기가 있었기 때문에 7,80년 대의 길고 길었던 암흑의 군사독재시절을 이겨내고 다시 그 시대를 심판할 수 있는 날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3> 통일에 대한 전 국민적 열망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4.19 혁명을 통해 통일논의를 대중적으로 진행시켜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4.19 혁명은 그 배경에서 알수 있듯이, 이승만 정권 아래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빈부격차와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서민들의 생활이 매우 궁핍한 지경에 이르게 되면서 국민들의 분노가 극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3.15 부정선거라는 결정적 계기로 전 국민이 거리로 나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4.19 혁명 과정에서 국민들은 '통일'을 이루는 것이 새 사회를 만들어가는데 중요한 문제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고,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통일운동으로 발전시켜갔습니다. 이렇게 통일운동은 4.19 이후 이승만의 하야 이후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하루 빨리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시대를 맞이하자는 열망을 확인하는 과정이었습니다.
4> 한국학생들의 힘을 확인시켜주었던 4.19 혁명이었습니다.
4.19 혁명의 가장 앞장에 서 있던 사람들은 바로 고등학생, 대학생 들이었습니다. 정의에 민감하고, 불의를 보면 참을 줄 모르는 청년학생들의 기개와 열정이 만방에 과시되었으며, 이를 통해 청년 학생들은 다시 한번 새 사회를 실현하는데 주축이 되는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일제 시대 광주학생운동으로부터 시작된 청년학생들의 투쟁이 4.19 혁명에서 다시 한 번 꽃을 피웠고, 80년대에는 그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다고 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도 청년학생들의 새 사회 실현을 위한 역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2) 4.19 혁명의 한계
4.19 혁명이후 노동조합의 건설과 농민운동이 활발해지고 교원, 교직원들의 권리 찾기 등 우리 국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은 매우 발전했고, 국민들이 단결하면 사회를 바꿔나갈 수 있다는 믿음과 확신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흔히 4.19 혁명은 '미완의 혁명' 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4.19혁명 이후 많은 사회적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지향을 담은 정권을 탄생시키지 못했고, 4.19혁명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로 인해 4.19 혁명 이전보다 더 암흑의 시기로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4.19 혁명에 참여했던 많은 국민들은 분명한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1> 국민의 힘으로 만들어 낸, 국민의 지향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정권이 탄생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4.19 혁명의 가장 큰 한계는 혁명을 지위하고, 혁명의 성공 이후 더욱 발전시켜 정권의 탄생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4.19 혁명을 계기로 해서 지도부의 성격을 지닌 많은 단체들이 생겨났지만 대중들 속에서 지도부의 지위가 부여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단체들이 난립하게 되었고, 이승만 정권이 하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국민들의 정권을 탄생시키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4.19 혁명 다음해에 바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수십년간의 독재정권의 암흑기를 맞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한국정치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CIA 장관으로 재임 중 CIA의 해외 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한국의 5.16 혁명이었다. 만약 미국이 아무 것도 안했더라면 아마도 민중은 공산주의 선전에 말려들어 남북통일을 요구하는 폭도들을 지원했을지도 모른다."
- 5.16 쿠데타 당시 CIA 국장 마렌 덜레스가 영국 BBC 텔레비전 출연(1964.5.3) 에서 한 말
위의 말은 한국정치에 미국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4.19혁명 당시에도 4월 29일 날이 밝자 서울 시민 3만여명은 오전 7시경부터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하며 시위 태세로 들어갔고, 광화문의 1만여 구중은 계엄군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를 누볐습니다. 오전 10시 30분 매카나기 주미대사가 경무대로 들어갔습니다 . 그리고 오래지 않아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발표되었습니다. 오후 1시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였습니다. 이는 이승만 정권은 사실상 미국의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국민들의 분노를 감당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이었음을 암시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정치의 미국의 영향력은 그 이후에도 지속되어 왔고, 국민들의 민주주의의 요구가 높아질 때마다 사람을 바꾸는 식으로 교묘하게 국민들의 분노를 잠재워왔습니다. 미국의 이러한 한국정치에 대한 영향력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올바르게 꽃피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4. 현재적 의의
현재적 의의
한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는 것이고, 국민의 단결된 지향과 힘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독재체제를 붕괴시켰던 가장 큰 힘은 새 사회를 향한 국민들의 지향이었고, 국민들의 단결된 투쟁만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 4.19 혁명의 주된 교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2008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4.19혁명의 정신을 이어받는 데서도 국민들의 힘을 믿고 국민들의 단결된 지향을 실현하는 과정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4.19 혁명을 비롯한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사대주의'는 필연적으로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도 미국의 원조 아래 세워졌고, 그로 인해 많은 정치 , 경제 주권을 미국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미국과 결탁된 많은 정권들의 최후는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나아갈 방향은 우리의 힘을 믿고 우리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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