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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 터...
사직단 터에 다달아 보니 서울과 광주 에서 볼 수 있었던 제단은 보이지가 않는다. 오래된 누각이 한채 서 있는 것이 모두 였다. 알림판을 보니 사직단이 있었던 곳은 틀림이 없는데.... 차에서 내려 철대문 쪽으로 가 보니 잠겨있다. 아마도 개인이 종교적인 용도로 사용한 건물인듯 싶다. 아쉽지만 주변을 돌아보니 누각 오른쪽에는 성당이 있고, 왼쪽에는 경로당이 있었다. 서울과 광주의 규모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이 일대가 모두 사직단 터였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남아있는 형태로만 봐도 그동안의 겪었을 법한 수많은 수난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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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벽
아쉬움을 달래고 주변을 돌아보니 경로당 양쪽 옆으로 펼쳐져 있는 높디 높은 벽이 둘러쌓여, 답답한 마음을 가중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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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판에 따르면...
사직단(社稷壇) 터
이곳은 조선시대 사직단이 있었던 곳이다. 사직단은 약 3천여년전 중국에서 천자(天子)와 제후(諸侯)가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사(社:토지신)와 직(稷: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만든 제단에서 유래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농신(農神)에게 제사지내는 풍습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고, 사직단은 783년 (신라 선덕왕 4년)에 처음으로 세워진 후, 1395년 (조선 태조 4년)에 이르면 전국주요 지역에 사직단을 세우고 중앙의 종묘 (宗廟)와 함께 중요시하였다. 동래 사직단은 정당(正堂) 1칸, 재실(齎室) 5칸으로 1640년 동래부사 정호서(丁好恕)가 처음 세웠다. 1672년 동래부사 이하(李夏)가 중창하고, 1709년 동래부사 권이진 (權以鎭)이 동래부의 서쪽 5리에 옮겼다. 바로 1709년에 옮긴 사직단이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이 사직단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우리민족말살정책으로 원형이 파괴되고, 사직단 터만 남아 있다가 1950년대 중반 도시화 과정에서 그 흔적마저 없어졌다.
내용 중에 왜곡되어 흘러와 박혀버린 내용이 보인다. 앞부분에 "사직단은 약 3천여년전 중국에서 천자(天子)와 제후(諸侯)가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라는 귀절이다. 저기에서 약 3천여년전이라면 단군시대를 일컬음인데 단군께서 중국의 천자와 제후였다는 말인가? 그도 그럴것이 단군시대의 강역이 지금의 중국땅 대부분이었으니 어찌 중국이 이러한 부분을 가만 놔두었겠는가? 중국의 역사왜곡은 어디가 끝이 될런지... 저런 내용을 그냥 저렇게 표기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 역시 웃습기 그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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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일본과 인접한 도시라 왜란의 피해가 컷다. 사직단 역시 그 피해 대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직단을 보고 세삼 느낀다. 지키는 못한 것과 관심이 없는 것은 다르다. 물론 한동안은 전쟁으로 인해 먹고 사는 일이 우선이었겠지만, 지금이라도 지키지 못한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 생각한다.
부탁입니다. 관계자님! 바르게 고쳐 주세요. 올해는 개천5903년이고, 단기4339년입니다. 마니산 참성단과 같은 귀한 유적입니다. 사직단은 터만 남겨놓고 사라졌지만 표기라도 바르게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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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사직동 사직단(社稷壇) 가는길
부산광역시 동래구 사직동 --> 사직3동 대로변(지하철 사직역 인근)사직우체국 골목 --> 언덕을 올라가서 우측 --> 사직3동 대건성당 바로위 경로당과 붙어있음.
※ 편의상 차량으로 이동하시는 것을 기준으로 가는 길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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