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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숙마포촌사(夜宿麻浦村舍)
夜宿麻浦村舍 移得龍湖興 茅齋到已昏 蘿陰冥石逕
江色澹柴門 人語喧歸船 燈光漏遠村 夜深更淸絶 峰月暗生痕 .
『용산에서 놀다 마포까지 내려오니 어느덧 황혼이 뉘엿뉘엿 하다. 임시 숙소로 삼은 초가집에서 묵으면서 바라 본 마포의 저녁 풍광은 자못 태평스럽다. 뒷동산의 돌길은 넝쿨로 뒤덮여 먼저 어둑어둑 해졌고, 사립문 너머로 보이는 한강 물빛은 해맑기만 하다. 어디선가 포구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는 두런두런 뱃사람들 소리가 들려온다. 주어진 현실에 열심히 살아가는 뱃사람들의 시끄러운 그 소리마저 정답게 들려오는 저녁 무렵이다. 밤을 준비하는 등불이 먼 마을에서 하나 둘 새어나오기 시작하는 한가로운 어촌의 풍경으로, 마포는 밤을 맞이한다. 한밤중 더 없이 맑고 고요해진 강물 위에 산봉우리 뒤켠으로 떠오른 달이 비추인다. 잔잔한 수면의 흔들림에 달님의 밝은 그림자는 얼굴에 상처를 낸다.』 마포의 해거름 경치가 수채화로 그려진 듯 조선시대의 문인 송규징(宋奎徵)의 아름다운 시이다.
마포동은 이곳에 마포나루가 있으므로 해서 유래되었다. 지금의 마포대교가 놓여있는 곳이 예전의 마포나루터이다. 마포나루는 주로 여의도를 건널 때 이용하던 나루로, 여의도 백사장으로 건너 영등포를 거쳐 시흥쪽으로 가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했던 나루이다. 마포는 지리적 조건상 수상교통의 요충지로서 포구문화가 일찍부터 번성하였으며, 강변풍광이 아름다워 전국의 시인묵객이 즐겨 찾는 정감 넘치는 고장이었다. 그러나 1982년에 시작된 한강개발사업으로 강변의 호안이 정비되어 자연스러운 멋이 없어진데다가 이미 1966년 마포강변을 따라 강변제1로가 건설되었다. 여기에 1925년의 을축년 홍수 이후 한강제방의 재정비로 옛날의 운치있는 강변의 모습을 그려보기는 어렵지만 아직 포구로 남아있을 때의 마포강변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서 표현한 마포8경(麻浦八景)은 마포지역의 풍치가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인데 곧,
용호제월(龍虎霽月) ⇒ 용산강에 비 개인 날 저녁에 뜬달 광경
마포귀범(麻浦歸帆) ⇒ 삼개나루로 돌아오는 수많은 돛단배의 경치
방학어화(放鶴漁火) ⇒ 방학교 부근의 샛강에서 밤낚시 하는 등불 원경
율도명사(栗島明沙) ⇒ 밤섬 주변에 쌓인 깨끗한 백사장의 원경
농암모연(籠岩暮煙) ⇒ 농바위 부근 많은 인가에서 저녁 짓는 연기오르는 경관
우산목적(牛山牧笛) ⇒ 와우산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목동들의 피리소리
양진낙조(楊津落照) ⇒ 양화진 강 하늘에 붉게 물든 낙조와 노을의 장엄한 경치
관악청람(冠岳晴嵐) ⇒ 관악산에 맑게 개인 날 어른거리며 오르는 아지랑이의 신비로운 원경이다.
그러나 오늘날 마포8경 대부분의 절경들은 사라지거나 그 명맥만 이어오고 있다. 산자수명(山紫水明)했던 밤섬은 여의도 윤중제 공사 석재 제공으로 바위산은 모두 없어지고 평평한 땅으로 되어 철새의 도래지가 된지 오래이며, 농바위도 서강대교 건설 때 유실되었다. 또한 마포8경 주변의 마을도 현대화의 물결로 크게 변화되어 그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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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밤섬
당시 마포8경의 절묘한 풍광을 조망할 수 있던 지점은 지금의 상수동 사무소 북쪽 고지대였으며 일대에는 예전부터 시문을 읊던 30여 개의 많은 정자와 별장이 세워져 있었다. 이중 영복정(榮福亭)은 서강 북쪽 언덕에 세워져 있던 양녕대군 별장이었으며, 강변도로 진입로 부근에 있었던 평초정(坪楚亭)은 구한말 을사오적(乙巳五賊) 중의 한사람인 외무대신 박제순(朴齊純)의 아흔아홉칸짜리 저택이었다. 또한 상수동 326-26에 위치한 강변에는 고종 때 유명했던 내시 나익진(羅翼鎭)이 세웠다는 내시별장 영은정(永恩亭)이 최근까지 현존했으나 1971년 강변도로 건설로 대부분 철거됐다. 이외에도 마포8경과 함께 유명했던 풍벽정, 호인정, 연정, 소파정, 팔관정, 창랑정 등 여러 정자가 즐비했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신윤복(뱃놀이)
마포연표
551년 신라 진흥왕이 한강 중상류지역에 10군을 설치함
757년 신라 경덕왕 때 서울지방은 별도로 한양군으로 개칭되었는데
마포지역도 이때부터 나루터로 기능이 시작됨
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 군 복속과 함께 궁예의 지배지로 됨
1424년 세종 6년에 세종의 형 효령대군이 별장을 지음
1484년 성종 15년에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정자를 크게 짓고 망원정이라 고쳐지음
1888년 마포∼인천간 13t급 기선 취항. 증기선 삼호호(三湖號)와 16t급 용산호(龍山號) 운항함으로 마포 일대 매우 번성
1892년 마포나루에 경사국(警査局)설치로 청·일 양국의 세력 교전장으로 변함
기록에 의하면 1751년에 만든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한성부 서부
용산방 성외 마포계가 처음 나타난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의 변화가 있을 때는 한성부 서서 용산방 성외 마포계와 옹리, 상계,
중계, 하계로 바뀌었다. 이것이 지금 마포동의 모태가 됐다.
흔히 마포동을 이룬 중심마을을 동막(東幕 : 독막)이라 불렀는데 옹리
상계·중계·하계로 각각 동막, 동막 가운데 마을, 동막 아랫마을로
도화제2동쪽에 있는 것이 동막하리, 그 가운데가 동막중리이며 동막상리는 강변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막리는 옹기를 제조하던 곳이 많았기 때문에 옹리라 하던 것을 동이를 만드는 곳이라는 뜻의 동막(東幕)으로 바뀌었다. 이곳이 동이를 제조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조선초기의 문인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 나온다. 용재총화에는 "사람이 사용하는 동이는 질그릇을 말하는데 도성에서 소요되는
항아리 종류인 와기는 노량 마포 등지에서 나오며 이곳 사람들은 이
일로 인해 생업이 유지된다"고 적혀있다. 옹기그릇은 젓갈종류나 김장을 하기 위한 그릇뿐만 아니라 술을 빚어놓는 그릇으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이곳의 새우젓은 한때 도성의 상업경기를 좌우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래서 '마포'하면 으레 '새우젓'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마포 새우젓장수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에 따르면 목덜미가 까맣게 탄 사람을 왕십리 미나리장수라 하였고, 얼굴이 까맣게 탄 사람은 마포 새우젓장수라고 했다. 그 이유는 동쪽의 왕십리에서 도성 안으로 미나리를 팔러 오려면 아침 햇빛을 등에 지고 오므로 목덜미에 빛을 받아 새까맣게 탔기 때문이고, 반면 서쪽에 위치한 마포에서 도성 안으로 새우젓을 팔러오려면 아침햇빛을 앞으로 안고 오기 때문에 얼굴이 햇빛에 까맣게 탄다는 것이다.
효종 연간에는 마포나루에 강원 등지로부터 땔나무와 숯 등을 실은 배들이 많이 모여 싸전 소금전과 함께 신전(薪廛:땔나무와 숯장)까지 형성됐으며, 이처럼 농수산물의 집산지였던 마포항으로 오가는 인천 강화의 배가 무려 1천여척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마포나루에 조선초기에는 도승(渡丞)을 두었으며, 효종때에는 어영청에서 임명한 별장을 두어 격을 높이기도 했다. 또한 궁중에서 필요한 미곡·자리·종이 등을 관리하던 풍저창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곳 풍저창의 기능은 세곡을 저장하던 곳이다.
※ 도승(渡丞) : 서울로 드나드는 사람들 가운데 수상한 자를 적발하고 강물의 수위를 측정하는 한편, 나룻배의 운항을 감독했다. 사공들이 정원과 짐을 초과한다든가 많은 뱃삯을 요구하는 비리를 적발, 곤장을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도승들은 뱃사공들과 짜고 웃돈을 받는 일이 다반사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 풍저창(豊儲倉) : 고려 때에 궁중에서 사용하던 미곡을 맡아 보던 관청을 조선왕조에서도 계승하여 태조초에 풍저창을 설치하였다. 본고(本庫)가 설치됐던 곳은 북부 의통방(義通坊, 오늘날의 효자동)이었으며 궁중의 쌀(米), 콩(豆), 자리(草芚), 종이 등의 물품을 맡아보았다. 후에 장흥고(長興庫)에 폐합되고 나서는 내시(內侍)의 요록(料祿), 노인들의 세찬(歲饌), 사신(使臣)들의 사미(賜米)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 이렇듯 풍저창(후에 장흥고)에서 출납하던 일의 중요성에 비추어 경비를 엄중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미곡을 출납할 때에는 포도청에서 부장(部將)을 파견하여 경비케 하고 공물(貢物)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부신(符信)을 발행하여 무단출입을 못하도록 제한을 하였다.
삼개포구(마포나루)
삼개포구는 현재의 마포에 대한 옛 이름이다. '삼개'라고 하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서울의 중서부 한강연안에 위치한 마포지역이 안산(鞍山)에서 갈라진 와우산 구릉과 노고산 구릉, 용산 구릉이 한강으로 뻗어 세 개의 산맥연안에 호수처럼 발달한 서호(西湖: 서강), 마호(麻湖:마포강), 용호(龍湖: 용산강)가 있었는데, 위의 3호를 삼개[三浦: 3개의포구]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포라는 지명은 삼[마(麻)] 개[포(浦)]로 의역된 것으로 원래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삼개포구는 서울의 노량, 용산, 양화진과 북한강의 가평, 청평, 춘천 및 남한강의 여주, 목계, 충주까지 배의 왕래가 매우 빈번하여 중부지방 수운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세곡은 조운에 의하여 운반하였는데 삼남지방의 세곡은 남해나 황해를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마포, 서강, 용산 등에 산재한 창고에 보관하였다.
1903년의 마포나루
1925년의 마포나루
조화현 [ 마포나루 /a Ferry of Ma-Po 47*69 cm 2000 ]
나루터에 얽힌 이야기 중 하나.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던 1902년의 일이다. 내탕금에 굶주리던 황실에서는 한강을 건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룻배삯 말고도 도진세(渡津稅)라는 미명의 도강료를 얹어 받았던 일이 있다. 구한말 팔도 물산이 모이는 마포나루 주변은 온갖 주먹들이 모여 갈취와 폭력을 일삼는 난장판이었다. 이들은 황실로부터 도진회사를 허가받아 강을 건너는 사람에게 ‘도강세’라는 세금을 받았다. 당시 발행된 황성신문을 보면 무뢰배들의 폭력을 견디다 못한 뱃사공과 인근 주민들이 합세하여 도진회사를 때려 부셨다는 기록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주먹들의 주활동무대는 도시, 그 중에서도 상업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혹자는 "주먹의 역사란 상업의 역사"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19세기 중엽 서울 진입을 기다리는 팔도 물산의 물류기지인 마포나루 주변은 온갖 종류의 주먹들이 득실거리던 각다귀판이었다. 배를 건너는 상인들은 도강세란 세금 아닌 세금을 무뢰배들에게 뜯겨야 했고, 여리꾼이나 기생오라비(기둥서방)의 농간에 물건을 날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1910년에는 일본 상인 우에다(上田)가 마포나루에서 여의도까지 배다리(舟橋)를 놓고 마포쪽에서는 우에다 자신이 여의도쪽에서는 우에다 부인이 거적을 깔고 앉아 도강료를 받았다. 다분히 일본 상인적 발상이었다. 한번 건너는데 현금일 경우 8전, 현물일 경우 쌀 반되값이었다 하니 착취에 가까운 도강료였다. 결국은 배다리로 생업을 잃은 마포나루 배꾼과 섭수꾼, 거기에다가 민원까지 얽혀 폭등으로 번지고 말았으니, 삼개나루는 이 나루를 건너는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 섭수꾼 : 조선조 '명종실록(明宗實錄)' 11월 4일 기록을 보면,… “한강 잉화도(仍火島: 여의도), 남녀가 서로 안거나 등에 업고 강을 건너는 품이 야하기 그지없다.” 날이 가물어 물길이 얕아지면 사람을 업어 도강시키는 이른바 직업적인 섭수꾼이 있었다. 물을 건너준다는 뜻의 섭수(涉水)에서 비롯된 말이다.
삼개포구는 새우젓항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서해안에서 잡은 새우젓을 비롯한 어물이 마포나루로 운반되어 이곳을 통해 팔려나갔기 때문이다. 지금의 용강시장 뒤쪽이 1960년대초까지 새우젓 배가 만선기를 펄럭이며 출입하던 포구였다. 전국 농수산물의 집산지였던 삼개포구는 금세기 초만 해도 오가는 배가 1,000여 척에 이르렀다.
1946년의 마포 새우젓 나루터
옛날 새우젓장터로 유명한 마포나루에는 돼지우리가 없었다고 한다.
흔한 음식찌꺼기였던 새우젓을 먹고 돼지의 장기가 녹아서 살아남은
돼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조금 과장되긴 했지만, 새우젓과 돼지가 서로 생존하는 데는 상극이라는 사실을 설명해주는 좋은 예가 된다.
전국 농수산 물화의 집산지로서 수로교통의 실질적인 중심지의 역할을 담당했던 삼개포구는 그후 서울과 인천간에 철도가 부설(1890. 9)되면서 물화집산의 포구로서의 기능이 점차 줄어들었고, 6·25동란 이후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되는 지점에 휴전선이 설치되고, 행주대교, 서강대교, 마포대교가 세워지면서 큰배들이 출입할 수 없게되자 마포의 포구문화는 사라지게 되었다. 단지 '삼개포구'라는 표석이 토정동 용강아파트 앞에 서 있을 뿐이다.
김홍도(나룻배)
황포돛배
한국의 돛배는 대부분 황포돛배라는 명칭으로 많이 남아 있다. 황포라는 명칭은 돛의 색깔이 누렇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강원도와 충청남북도, 멀리는 경상도 지역에서 나온 산물들이 황포돛배에 실려 마포항에 드나들었는데 황포돛배는 물화집산을 전적으로 하던 객주(경강상인)소유와 선상에서 가족과 생활을 같이 하며 강을 따라 움직이는 개인돛배 및 나라의 세공(稅貢)을 운반하는 관영돛배가 있었다.
조선시대 말에서 일제 초까지만 해도 마포나루를 드나드는 황포돛배는 100∼200척이었고 이들 배를 운항하는 사공들로 인해 유흥경기도 대단하였다. 그런데 황포돛배가 가장 두려워했던 세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망원역풍이다. 넓은 망원동 앞강에 이르면 역풍이 일어 황포를 재빨리 내리지 않으면 배가 돌거나 심하면 뒤집히거나 했다. 둘째는 노량 배다리다. 임금이 사냥을 가거나 성묘를 갈 때면 놓는 배다리 때문에 보름 전부터 한강의 돛배를 징발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배는 모두 800척이나 되기 때문에 황포돛배 사공들은 전후 한달동안 생업을 잃어야 했다. 셋째 두려움은 행주에 숨어사는 도적떼로 행주수적(幸州水賊)이었다. 뻘밭 갈대속에 도적떼가 숨어 있다가 황포돛배가 다가오면 낚싯배를 몰고가서 노략질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한강 뱃노래에 이 황포돛배의 애환을 읊은 대목이 나온다. 「뚝섬나루에 내리자니 환금객주 콧대가 무섭고/ 노량나루에 내리자니 배다리 첩지가 무섭고/ 마포나루에 내리자니 분대주모 실웃음이 무섭고/ 서강나루에 내리자니 수어청 융선이 무섭다.」
뚝섬나루에는 세도가들의 돈을 맡아 돈을 늘려주는 객주들이 집결해 있었으며 그 세도를 믿고 횡포가 심했기에 콧대가 높고, 노량나루에는 임금행차의 배다리(주교)를 놓는다는 핑계로 배를 빼앗기에 무섭다. 마포나루에는 진하게 화장한 주모들이 집결해 있어 유혹이 두려우며, 서강나루에는 외적을 막는 병선이 집결돼 있어 과잉단속을 하니 무섭다는 것이다.
황포돛배의 본체는 소나무나 전나무, 낙엽송이라야 하고 부속으로는 참나무나 참죽 등을 가려쓴다. 황포돛배를 제작함에 있어서 한강 상류지방과 하류지방은 밑바닥 구조가 다르다. 한강 상류지방은 밑바닥이 평평하고 넓어 수심이 얕은 곳을 무난히 헤쳐나갈 수 있도록 했으며, 한강 하류지방은 수심이 깊어 멀리 항해할 수 있는 배를 만들었는데 바닥이 V자형으로 되어 있어 물의 저항을 덜 받게 되어있다. 황포돛대와 마상이배는 한강 상류의 전통적인 배이다. 일반적인 황포돛배는 크기 19.91m, 폭 2.88m, 높이 0.96m, 돛대 높이 11.5m이며 보통 쌀 40섬을 싣는다.
황포는 거친 광목을 바느질로 연결하여 높이 16m, 가로 4m정도로 연결한다. 이렇게 연결된 광목은 황토물을 들이는데 황토물은 색깔이 누렇고 입자가 가는 진흙황토를 파다가 물에 풀어 모래나 거친 흙을 가려내고 위에 뜬 흙물을 따로 넓은 그릇에다 따라두면 가는 입자의 황토색이 우러난다. 그 물에다 광목을 넣고 삶아서 염색을 하면 누렇게 변하는데 광목에 황토물을 들이면 좀을 방지하고, 질기며, 비바람을 맞아도 변하거나 썩지 않는 이점이 있다. 이렇게 누런물이 들기 때문에 황포돛대라고 한다. 마상이배는 돛이 없고 서너명 정도 탈 수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마상선이라는 기록이 있다.
한국 재래식 배의 특징은 강배 만드는데 잘 나타나 있는데, 강배 제조기술의 핵심은 배 밑바닥에 있다. 배바닥에 활처럼 생긴 곱창쇠를 12개 정도 가로지른다. 곱창쇠는 참나무 각목이나 팔뚝크기의 곧은 참나무를 원료로 하는데 활처럼 약간 굽게 하여 붙이면, 배 밑바닥이 땅이나 돌에 부딪혀도 바닥송판이 움푹 들어갔다가 다시 펴지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고무처럼 유동적이어서 수심이 얕고 자갈이 많은 곳에서도 활동할 수 있다. 배 제작시 가장 중요한 공법중에 하나가 배의 몸체를 제작할 때 쓰는 아엽파기인데 양옆에 홈을 파 나무와 나무를 붙이는 방법이다. 아엽파기는 판자와 판자 넓이를 붙이는 넓배기와 판자의 끝을 붙이는 동배기가 있다. 동배기는 흔히 있는 이음새 붙이기이지만, 넓배기는 배제작시에만 사용되는 공법이다. 아엽을 파서 붙인 다음 특수제작한 쇠못으로 몸체를 고정하고 나무틈새를 대나무밥으로 메운다. 대나무밥으로 메움으로써 물이 들어가는 것도 막아주고 공간이 있음으로 해서 쿠션역할도 해주기 때문이다. 뱃머리도 아주 중요하다. 배 앞부분이 수그러들면 물로 파고 들어가고, 앞이 너무 하늘로 치솟아 있으면 바람을 차고 나가는 대신 바람에 채여 배가 돌아 버리기 때문이다. 황포돛배는 마포 인근 밤섬과 하남시 배알미동 등 한강유역에서 주로 만들었는데 큰 것은 무려 1,300석(1,000가마)의 쌀을 싣는 거대한 것도 건조하였다고 한다.
배목수 함갑수의 황포돛배
동막저수지
동막에는 저수지가 있었는데 지금의 마포유수지이다. 지금은 유수지를 복개해서 주차공원으로 만들어 이용하고 있으나 1960년 중반 때까지는 이곳 저수지에서는 맑은 물이 가두어져 있어 한 두 시간 낚시를 드리우면 바케츠 하나 가득 붕어를 낚아 올릴 수 있었고, 겨울에 얼음이 얼면 아이들의 썰매장소로 이용되기도 했었다.
마포나루굿
옛날 마포는 전국적인 물화집산(物貨集散)의 포구로서 농산물을 비롯한 어염상선으로 붐벼 포구문화가 번성하였으며, 성 밖 농촌취락으로 발전하였는가 하면, 강변 풍광이 아름다워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는 정감 넘치는 고장이었다. 이러한 문화적 환경 속에서 마포인들은 매년 5월 단오 무렵에 '마포나루굿'을 하며 지역의 화합과 발전을 염원하고 마포항을 드나드는 선박들의 무사항해를 기원했다.
마포나루터에서의 굿
마포종점
은방울자매(1967년) |
(마포종점)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
하나둘씩 불을 끄고 깊어 가는 마포종점
여의도 비행장에 불빛만 쓸쓸한데
궂은비 내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 박춘석 작곡/정두수 작사, 은방울 자매 노래 -
지금의 마포 지하철역부근은 옛날(1950년대 초)에는 마포 전차종점이
있던 곳이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라고는 지금의 제1한강교밖에
없었으니, 마포에서 영등포나 부천, 인천을 가려는 사람은 마포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다. 김장철이면 마포나루에는 인천에서 온 새우젓 배가 몰려들었고, 마포 전차종점에는 전차가 길쭉한 새우젓 독을 싣고 가기도 했다. 당시 전차는 승객칸과 화물 전용칸이 별도로 있었다. 마포동 140-1번지에는 불교방송국이 있으며, 그
주변에는 독립운동기념비와 함께 쌈지공원이 있는데, 그 안에 마포종점 노래비도 있다.
마포종점 노래비
마포불당
마포동 337번지에는 지금도 마포불당이 있다. 이곳은 1985년경부터 주민들이 신령그림을 모셔놓고 매년 음력 5월20일 12시에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곳이다. 당초에는 불이 자주 발생해 불당을 지었다고 하는데, 안에는 성황당도 모셔져 있으며 매년 당제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