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판사가 소설을 썼다. 소설은 추리 소설 같기도 하고 자기 고백 같기도 하다. 정재민의 『보헤미안 랩소디』가 그 것이다. 작자는 후기에서 자기 어머니의 일기를 토대로 소설을 썼다고 실토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면 자전적이다.
그러나 여기에 나름의 장치를 덧붙임으로써 ‘자전적’이라는 틀을 벗어나고자 했다. 그 장치가 바로 정신분석이다. 정신분석 과정을 통해 소년시절이 다시 가지런히 자리매김하고 엄마의 집요함도 순화과정을 거쳐 호흡을 가지런히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다보니 처음 친구의 죽음으로 떠올랐던 온갖 생각들은 결국 지환의 망상 같은 것으로 치환되어 버리는 것 같아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정신분석을 통해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발상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얻은 결과는 그리 흡족하지 못하다.
정의감에 불타는 지환의 온갖 노력은 동혁의 죽음으로 무엇을 밝혀낸다든가 비리 의사의 고발을 통해 그 뒤에 감추어진 어떤 진실을 파헤치는 것도 아니다. 경찰, 의사, 검사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판사인 지환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매듭지어지고 말았다.
소설의 시작은 이렇다. 고향 신해에서 황동혁이라는 친구가 죽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아직은 모른다. 현장 검증 때 전축에서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보헤미안 랩소디였다. 그의 휴대폰은 어제 밤까지 판사와 연락을 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누가 봐도 추리소설이다.
거기에 지환의 엄마의 죽음이 얹어진다. 엄마는 그 동안 류마티스로 고생하다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지환의 후배인 효린은 우연히 엄마의 사진에서 손가락을 보고 류마티스가 이닌 것 같다고 했다. 그녀는 의사였다.
이때부터 지환은 엄마의 류마티스를 치료했던 신해병원의 우동규 과장을 찾아가 진실 규명을 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금방 끝날 것 같던 진실 규명 작업은 이내 엄청난 벽에 부딪치고 만다. 그러한 일은 우리 사회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가진 자의 횡포 같은 것이다.
소설은 이곳부터 끝까지 우동규와에 대한 응징의 과정을 담고 있는데 그런 과정은 엉뚱하게도 정신분석이라는 용어를 차용해서 오히려 지환의 마음을 치유하여 엉뚱한 곳으로 돌리는 과정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다. 후에 드러났지만 우동규는 효린의 형부였다. 병주고 약준 격이다.
좋게 보면 ‘정신분석은 하나의 장치를 넘어 트릭으로 작용’하고 있다할 것이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그보다는 오히려 소설의 본질을 흐리는 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트릭이라고 하기는 그 내용이 지루할 만큼 적나라하다.
그러다보니 저자가 자신의 정신분석학적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일부러 그러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꿈’에서 그런 점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필요할 때 깨소금처럼 맛깔스럽게 소품이 활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소품이 무대를 장악하고 있어 전체적인 이야기를 흐리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지환이 처음 사건을 접하고 정의감에 불타하며 투쟁을 시작했을 때의 결기는 정신분석학의 영향 때문인지 슬그머니 거두어진 느낌이다.
더구나 동혁의 시체 부검 결과도 허망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황동혁의 아버지는 류마티스 환자가 맞다는 것이다. 결국 별 일도 아닌 것을 지환이 혼자 자기 생각 속에 빠져 사건을 멋대로 재단한 것에 불과한 셈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독자들을 혼란에 가두고 싶었는지 동혁이 우동규를 죽인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그러다보니 마지막에 슬그머니 올려놓은 보헤미안 랩소디의 노래 가사는 마치 살인을 방조하는 듯한 불량스러운 노래처럼 들릴 지경이다.
엄마는 살아생전에 늘 입버릇처럼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판검사가 되어 애미의 한을 플어 달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하는 말인지 정말 무엇인가 한이 서려있었는지는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엄마의 신파극 같은 읊조림은 단순히 독자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쓸모없는 장치 같은 것이 되었다. 그것은 엄마의 일기장 또한 마찬가지다. 일기장은 보통의 경우 매우 유력한 증거일 것이다. 물론 이 소설도 그렇게 시작했다.
그러나 동기의 순수함과 사건을 대하는 지환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동규와의 법정 다툼에서 완패를 당했다. 그 동안 엄마가 쓴 편지는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강한 동기였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우동규의 편법 진로 피해자들의 제보도 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저자는 소설은 문제제기를 하기는 했지만 해결할 능력은 없어 보였다. 자칫 하다가는 뻔한 사법 정의니 사회 정의니 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기울어질 수 있음을 우려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탈출구고 정신분석을 차용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다보니 정신분석은 소품 본연의 역할을 벗어나 마치 세상을 지배하는 정복자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을 것이다. 양념이 과하면 요리는 그 본래의 맛을 상실하는 법이다. 결국 지환은 친구의 죽음이 아무 것도 아님을 확인하는 것이 소설의 전부 같은 느낌이다.
어떻든 판사가 소설을 썼다는 점에서 일단은 흥미로웠다. 내가 책을 펼쳐든 것도 그 때문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다보니 은근히 그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기도 한다. 문장은 간결했으며, 그 문장에 품격이 더해지는 것은 작품이 거듭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