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서울 등축제가 청계천에서 15일의 전시를 마치고
지난 17일 막을 내렸습니다
평일날 가서 여유있게 사진을 찍었으나 편집이 늦어
지금 올립니다
페이지 용량 관계로 사진과 동영상을 3회에 걸쳐서 올리려고 합니다.
(1.한성백제 500년,,2 웅진백제,사비백제3. 화합의 백제정신)
우선 이번 전시회의 큰 테마는 "한성백제 천년의 꿈"이었고
세부 테마는 한성(서울)백제 500년, 웅진(공주)백제시대,사비(부여)백제시대,
화합의 백제정신 이렇게 네가지로 분류되어
청계광장에서 수표교사이를 3만여개의 등으로 장식하여
백제 700년의 역사와 문화를 아름다운 빛으로 잘 표현들을
하여 주었답니다
[1]테마1:한성백제 500년(B.C 18년~AD 475년)
한성(서울)백제 500년은 청계광장에서부터
광교까지 총 444M 에 이르는 청계천을 따라서 전시되었는데요
기원전 18년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를 떠나 새나라의 건국을 꿈꾸며 지금의 서울지역인
한성에 터전을 잡으며 이룩한 백제의 농경문화,뛰어난 조선술,
높은 문화수준,일본과의 활발한 교류를 총해 만든
아스카 문화 중의 백제 700년 역사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493년을 차지하는 한성 백제의 찬란한 최고 전성기를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1)백제(百濟)를 상징하는 매의 용맹함
17대 아신왕을 비롯하여 왕가에서도 매사냥을 즐겼던 백제는
매의 날쌔고 힘찬 매의 모습과 닮은 백제장군들의 기상을
3M대형등의 매와 함께 입구에 전시를 하였네요
(2) 한성(漢城) 백제(百濟)의 시작
기원전 18년 고구려를 떠나온 소서노(고구려 주몽왕의 둘째부인),비류, 온조는
부아악(북한산)에 올라 새로운 제국의 중심지를 정하였는데
형인 비류는 소금이 많이 나는 미추홀( 인천)을 도읍으로 정하고
동생인 온조는 쌀이 많이 나오는 위례성(서울) 을
도읍으로 정하여 각각 백제의 초기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3)백제의 시조 온조대왕
동생인 온조는 위례성(하북 위례성:오늘날의 종로구 일대)을 근거지로
"십제"라는 국호로 나라를 세우고 후에 형인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와 백성들까지 통합하여 영역이 넓어지고
나라가 발전하게 되자 그에 걸맞게 나라이름도
십제에서 백제로 바꾸었다고 하는데요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은 아버지 고주몽을 닮아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였고
지략을 겸비하여 수차례의 위협과 전쟁을 이기고
백제를 강건히 세워내었다고 합니다
말이 상하로 움직이는 등을 만들었네요 ㅎㅎ
등불이 점등하기전의 사진이라서 등불축제(등축제)
사진 기분이 안나서 나올 때에 다시 찍었답니다
(4) 백제의 관제(官製)와 복색(服色)
백제는 복색(服色)구분을 통해 정치 체계를 마련하고 왕권 강화를
이룩 하였습니다.삼국사기에 따르면 8대 고이왕 때 16 직제및
이에 따른 복장제(服裝製)를 마련하여 6품(品)이상은 자색(紫色,자주색),
11품(品)이상은 비색(緋色,붉은색),16품 이상은 청색(靑色)관복(官服)을
착용하였습니다
(5)칠지도와 일본에 전해지는 칠지도(七支刀)
(ㄱ)칠지도(七支刀)
몸체에 여섯가지가 붙어있는 독특한 모양의 칼로
현재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고 있습니다.
몸체에는 "백제의 왕세자가 일본에 칼을 전달하니 후세까지 전하라"라는 글이
한자로 새겨져 있는
당시에 뛰어난 백제의 제철기술을 자랑하는 문화중의
일부로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칠지도 가 백제왕에게 내려준 사실을
명문의 글자가 몇자 보이지 않고 지워져 있다고해서
(* 이것도 일본측이 의도적으로 훼손했다는 의혹이 짙음)
(전쟁기념관에 전시중인 칠지도 모사품은
길이가 74.9cm에 칼날부분이 65cm이고 나머지는 칼자루이며
칼 좌우로 3개씩 가지가 뻗어 있으며
주 몸통과 더불어 7개의 가지로 보고 칠지도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실제 전투용이 아닌 의식용으로 보고있음)
일본측의 학자들은 이를 거꾸로 이용하여
칠지도의 제작 년도가 AD369년으로
일본측의 역사책인 일본서기(日本書紀)신공기52년
칠지도 헌상(獻上)의 기사와 억지로 맞추어 보려는 이론을 만들어
백제와의 정치적인 연결고리를 끊을 목적으로
칠지도 명문의 "태(泰) X"를 중국황제의 연호로 끌어들인 후
"일본서기 신공왕후기"와 연결하여 신공왕후가 포상8국의
난을 일으켜 한반도 남부를 쳐서 장악하니 백제왕이 칠지도를
여왕에게 헌상(獻上)하였다로 해석하여
칠지도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증거로 거꾸로 주장하고 있지만
이때에는 백제의 국력이 가장 강력했던 근초고왕시대의 시기여서
우리로서는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역사 왜곡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
(임나일본부설:일본 야먀토 정권이 4세기후반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 가야에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고 지배했다는 주장으로,일본의 한국사 왜곡사례
중의 하나로, 2010년 3월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사실이 아니며
용어자체를 폐기하기로 합의하였다고 함)
(ㄴ)일본에 전해진 칠지도:
백제는 활발한 해상교류를 통해 우수한 문물과 기술을
일본에 전달함으로써 일본 문화의 기틀마련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칠지도가 일본으로 전달된 역사적 사실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백제의 국제적 지위와
문화적 선진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네요
칼의 길이가 74.9cm라서 그런지
전해지는 장면에서 칼이 저의 캠코더에는 잘 잡히지가 않았네요
(6)백제사신선 (百濟使臣船)
백제의 활발한 해상교류는 우수한 조선술(造船術)을 바탕으로
하엿습니다 "백제 조선공이 만든 크고 튼튼한 배를 특별히 "백제 배"라고
불었다는 기록이 일본 문헌에 남아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
또한 일본의 광명왕후가 견당대사(見唐大使)에게 하사한 어제가(御製歌)가 후세에
전해 오는데 가사는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큰 배에 노가 있고
,너를 당나라 땅에 보낼 것이다.해상에서 신의 많은 보호가 있기를 축원한다"
이것은 일본이 3세기부터 신라와 백제의 조선기술을 활용한 것을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네요
(7) 백제문양(百濟紋樣)과 수막새
수막새는 처마끝에 부착하는 기와의 한 종류입니다
가장 보편적인 백제 수막새의 문양은 연꽃모양으로 백제인들의
불교관념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문자무늬,민무늬등 다양한 문양들에서 소박하면서도
섬세한 백제 문화를 엿볼 수 있다고 합니다
등불에 비친 등으로 보니까 넘 아름답고 신비한 무늬이길래
넋을 잃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8)백제의 제철 제련기술
백제의 제철기술은 철광석으로 부터 철을 추출하여 무기나
농경가구를 만드는데 이용되었습니다
큰 화로안에 철광석과 목탄을 넣은 후 대형 송풍관을 통해
바람을 불어넣는 방식으로 제조되었으며 그 형태가 일본의
고대(古代)제철로와 유사하여 초기 백제의 제철기술이 일본에 까지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9)왕인(王仁) 박사
397년에 일본의 오진 (應神)천황의 초청으로 "천자문"과 "논어"
10권을 가지고 기술자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 한학을 알리는 한편
태자의 사부가 었으며 학문과 도덕,
유교사상을 전파하고 기술공예를 전수하여 아스카 문화를 비롯한
일본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백제의 학자입니다
일본에서는 "왕인 박사비"를 세워 그의 위업을 기리고 있다고 합니다
(10)개로왕과 도림스님
백제의 21대 개로왕은 바둑을 좋아했습니다.
고구려 왕의 명으로 백제에 잠입한 승려 도림은
내기 바둑으로 개로왕의 한심을 사는데 성공하자,
호화로운 성을 짓도록 현혹하여 백제를 곤궁에
빠뜨립니다 .결국 475년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한성을 빼앗기고 한성백제 시대를 마감하게 됩니다
(동영상)2013 서울 등축제(1):한성 백제의 꿈
이글은 스크랩하지 않고 옮겨 온 것은 text를 편집하기 위해서입니다.
원본의 주소는
http://cafe.daum.net/DAESA8/ASzM/2092
<원본에 남긴 글>
첫댓글 청계천 등불축제를 보고 싶었는데 이 곳서 보게 되어 기쁩니다.
늘 채워주시는 바람새지기님께 감사를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