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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신자가 사역하는 교회 정신
박영철교수
모든 제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제사장, 복음 사역자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 나라의 요원들(agents)이다.
그리스도인의 근본 신분--복음의 일군, 복음의 사역자.
복음은 제사장 신분을 믿고 사명으로 받아들인 자들에 의해 힘있게 전파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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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3대교리:
이신득의(以信得義, salvation by faith) 교리
오직 성경
전신자 제사장직(全信者祭司長職, every believer's priesthood)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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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자 제사장직 교리의 실현은 세계 복음화의 지름길
초대교회 시대 복음 전파 위력--모든 신자들이 제사장직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사역자로 헌신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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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자 제사장직 교리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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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리대한 오해: 구원론적 입장에서 강조, 사역적 측면이나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책임이라는 점에서 이해되거나 강조되어 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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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리는 모든 신자가 사역하는 교회를 위한 핵심적, 신학적 근거.
베드로전서 2장 9절--“왕 같은 제사장”(royal priest)임을 선언. (벧전 2:2) 영적인 아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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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자 제사장직 교리의 오해와 곡해--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장. 그것보다 더 강한 의미가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의무라는 측면에 드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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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된 구약의 제사장 제도--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사건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감당할 사역을 알려주시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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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제사장들의 주된 임무는? 제사 드리는 일. 누구를 위한 제사였는가? 백성들을 위한 제사, 백성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한 제사. 불신자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복음의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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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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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심은 단순히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목적을 넘어서서 하나님 나라 사람들로서,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로 부르시고 마치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를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군으로 일생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러한 사실을 베드로를 통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움 덕을 선전하게 하려하심이라"(벧전 2:9)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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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경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네 가지 신분을 언급하고 있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리고 "그의 소유된 백성"이 그것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분상의 변화에 관한 표현들을 음미할 때 이들 모두는 단순한 특권과 축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과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로의 부르심을 의미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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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하신 족속이라는 표현 속에는 하나님의 선택의 행위가 전제되고 있는데 선택이란 목적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택하신 족속으로서의 하나님의 기대와 하나님의 의도성을 엿볼 수 있다. 무엇이든 누구든 선택할 때는 선택 후의 어떤 것을 염두에 두고있다는 점에서 책임이 전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 요원으로서의 사역하는 삶에로의 택하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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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신분은 왕족의 대열에 서있는, 왕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책임을 맡은 자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러한 신분상의 표현을 대할 때 대단한 프라이드를 느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와 동시에 막중한 책임과 의무감도 동시에 느껴야 마땅한 표현이다. 왕족의 대열에 선 자로서의 왕 같은 제사장이란 자신의 신분이 얼마나 축복되며 특별한 존재인가에 관한 자긍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지만 그 이전에, 또는 그와 동시에 실로 막중한 책임과 의무를 지니는 사역자로서의 신분의식이 온전히 자리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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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나라"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영적, 도덕적 상태와 삶의 질이 어떠해야 함을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악과 죄로 만연된 이 세상에서 따로 불려냄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것을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를 부르심은 거룩함에로의 부르심이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사명에로의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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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근본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유된 존재로서 우리의 존재가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나라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움을 받는 사람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며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삶의 수준이 어떠해야함을 암시하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백성을 향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본문의 하반 절은 앞의 네 가지 변화된 신분이 의미하는 바를 못박아준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이토록 엄청나게 변화된 신분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명백하게 밝혀준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하심이라." 앞에서 언급하고있는 네 가지 놀랍고도 복된 신분상의 변화가 단순히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과 변화를 즐거워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운 은혜와 덕을 선전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초대교회 시대와 초기 기독교시대에 있어서(오순절 성령감림 사건으로부터 콘스탄틴 황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자가 복음을 위한 제사장으로서의 직분 수행을 당연히 여겼으며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본연의 임무로 여기고 또 그러한 인식 하에 복음의 제사장으로서 살아간 수 많은 증거들을 본다.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받는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 핍박으로 인하여 각 곳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복음의 말씀을 두루 전파한 사건이나(행 8:1-4), 복음 전하는 일이 사도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디모데, 디도, 스데반, 빌립,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등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방인에게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사실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뒷받침한다고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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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사건으로부터 불과 270여 년 밖에 안 되는 짧은 시기에, 그것도 연속되는 10명의 황제들이(교회 역사가들은 이들을 일컬어 10대 박해자라고 부른다) 로마의 방대한 조직력을 동원하여 기독교에 혹심한 박해를 가한 시기에 로마 전역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었음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리스도께 대한 초대교인들의 사랑과 헌신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수준이었음과 동시에 교회 속에서의 그리스도인들간의 강한 사랑의 응집력, 그리고 자신의 근본 신분이 하나님의 사역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신분에 걸맞는 사역을 감당한 결과였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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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 하나님의 교회와 복음을 위해 신선한 개혁 또는 영적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 동료들의 동기를 살펴볼 때 우리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는 동기와 교회로 하여금 교회답게 만들려는 동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기들은 결국 본질상 같은 것으로서 여기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역자라는 성서의 기본 원리가 함께 역사하고 있음을 본다. 종교개혁의 기수인 루터의 경우 이신득의(以信得義) 교리를 발견한 뒤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만신자 제사장직 교리를 주장하며 이 교리의 실현을 위한 한 방편으로 의무교육제도를 주창하게 되었음을 본다. 루터는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이 단순하고 명백한 교리를 통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환상을 보는 가운데 이러한 복음을 알려주는 성경이 누구에게나 읽혀져야 함을 주목하고 라틴어나 히브리어 및 헬라어로 된 성경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자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하여 출판하는 자신의 종교개혁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믿고 그 일에 전력투구했다. 동시에 그는 모든 백성들이 초등교육을 의무적으로 받음으로 누구나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힘썼다. 그리고 그로부터 260여 년이 지난 1780년, 영국의 글로체스터(Glocester)에서 로버트 레이크스(Robert Raikes) 주도한 현대주일학교 운동이 단순히 문맹퇴치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을 때 의무교육제도를 사상 처음으로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국가적 차원에서 의무교육제도를 정착시킨 사람은 미국의 메사츄세츠(Massachusettes) 주의 교육부 장관이었던 호레이스 만(Horace Mann)이었다. 현대 주일학교가 순수한 신앙교육기관으로 자리잡게 될 수 있었던 것이 호레이스 만의 이와 같은 노력의 결과였다. 호레이스 만으로 하여금 이러한 일을 하게 만든 성서적인 원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역자”(Every Christian is a minister)라는 자신의 확신을 실현하려는 동기로 그러한 일을 행해낼 수 있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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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교인이 사역자라는 개념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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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교인이 사역자"라는 말과 혼용 또는 병용되는 것이 "평신도 사역자" 또는 "평신도가 사역하는 교회," "평신도 운동," "전신자 사역"등과 같은 용어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들이 사용될 때 그 의미를 살펴보면 약간씩 다르거나 그 근본 전제를 달리하는 것들을 보게된다. 우선적으로 구분해야 할 개념은 평신도 운동 또는 평신도 사역이다. 평신도 운동에 관한 관심이 한국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말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시기로부터 불러일으켜진 평신도 개념과 평신도 운동의 방향은 성직자들(목회자들)과의 대립 관계 속에서 설정됨으로써 적지 않은 부정적 성향을 띠기도 했다. 비록 이러한 성향이 오늘까지 확산되거나 지속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이러한 개념이 잔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 듯 싶다. 모든 교인이 사역자라는 말의 의미는 어떤 점에서도 목회자와 평신도의 대립구도(이 경우 교회 속에서의 주도권 다툼과 같은 차원에서의 대립) 속에서 이해되어서는 아니 되며 오히려 사역의 책임과 의무라는 면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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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관련된 개념으로는 "평신도가 사역하는 교회"를 들 수 있다. 1979-80년에 걸쳐 7,000명의 교회를 운영하며 유지하는데 필요로 하는 평신도 사역자가 몇 명인지를 과학적으로 연구 조사한 미국의 헐리우드(Hollywood) 제일장로교회의 헐버슨(Hulverson)박사는 그 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평신도 사역자가 370명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이 연구결과를 받아들일 경우 전체 교인들 중 불과 1/20이라는 작은 숫자만이 일해도 7,000명 교회는 정상적으로 운영된다는 말이다. 이 경우 대부분의 교인은 구경꾼 또는 방관자로 남아 있어도 좋다는 공식적 허락과 사역 면제를 선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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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모든 교인이 사역자"이며 "모든 교인이 사역하는 교회"란 문자 그대로 교인의 숫자가 얼마이든 한 사람도 사역으로부터 면제해주거나 제외시키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데 전신자(모든 신자)가 사역하는 교회란 이러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의 영적 성장 정도가 어떠하든지 그 수준에 적합한 복음을 위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그 어느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고 모든 교인이 사역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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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명령과 전교인 사역자 실현, 그리고 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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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세대의 교회들을 향한 주님의 진군 명령과 같은 마태복음 28장 18-20절의 지상명령에 순종하여 교회는 지난 2000년 동안 계속 사역해 오고 있다. 2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이 최대의 명령을 수행해 온 교회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가설적으로 교회가 이 일을 위한 수많은 경험을 해 온 결과 다양한 노하우를 축적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지금쯤이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은 어느 정도 완성되었어야 마땅할 충분한 시간이 지나갔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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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은 물론이고 그를 주님의 충성스러운 제자로 양육하여 주님의 복음을 위한 또 다른 사역자가 되게 하는 일에 필요한 다양한 기술과 경험의 집적(集積)은 오늘날에 이르러는 하나님의 교회로 하여금 세계 복음화의 완성 단계나 마무리 단계에서 그 감격스런 결과를 누릴 수 있게 해야 마땅할 것인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한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왜, 무엇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였는가? 한 때는 전 세계를 통치하던 로마제국이나 기독교화 되었다는 서구 유럽이 온 세계에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세계 인구의 2/3 이상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음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순종하고 있다고 말하는 지상명령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심각히 재고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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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모든 사역은 결과적으로 교회가 그리스도께로부터 부여받은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지극히 당연하고도 명백한 관심사요 고민 거리는 여하히 자신들이 속한 교회를 통하여 모든 족속을 제자로 만들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 그 말씀대로 살도록 도울 것인가에 있다.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우리의 모든 역량을 결집시켜 수행해야 할 지상명령의 내용을 상기시켜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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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명령이 제시하는 목표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성취키 위한 전략으로는 “가는 일”(going)과 침례를 “주는 일”(baptizing)과 “가르치는 일”(teaching)과 그리고 “지키게 하는 일”(observing)이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전략들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시행되고 있는가에 관한 반성을 토대로 새로운 도전이 시도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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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일”이 있어서 교회는 어떻게 행하고 있는가? 랄프 네이버 2세(Ralph Neighbour, Jr.)는 이 점에 있어서 오늘날의 교회 구조 자체가 "오라는 구조"(come structure)이지 “가는 구조”(go structure)가 아님을 지적한 바 있다. 즉 교회가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준비해 놓고 사람들을 교회로 오도록 요청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을 뿐 잃어버려진 영혼들을 찾아가는 구조가 아님을 지적한 것이다. 실질적으로 오늘날의 사회와 사람들의 의식구조와 생활 패턴은 더 이상 교회로 오라는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한 초청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교회가 이러한 복음전도 대상자들을 향한 접촉에 있어서 시대착오적인 타성을 버리고 지상명령의 전략에로 환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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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으로서의 “침례를 주는 일”(baptizing)은 어떠한가? 침례가 가지는 의미가 자아 중심의 죄악 된 삶에 대하여는 완전히 죽은 자로서 그러한 자신의 과거를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하고 이제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침례 의식이 한낱 의식으로 전락하는 것은 철저히 막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다는 말이 단순히 죄 용서받고 구원 얻었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자신의 삶의 목적과 동기와 이유가 더 이상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바뀌어졌음을 의미하는 엄숙한 신앙고백 행위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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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teaching) 지키게 하는 일(observing)은 어떠한가? “가르치는 일”은 그런대로 수행한다 할지라도 배운 내용대로 살아가도록 돕는 일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로 비중을 싣고 행하고 있는가? 신앙과 생활의 괴리 현상이 한국 기독교인들의 중대한 병폐임을 지적 받아 온지 오래이건만 그러한 문제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자신들이 배운 바를 그대로 지킬 수 있도록 교회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를 반문해 본다면 그러한 문제가 상존 하는 것이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을 듯 싶다. 지상명령이 수행되는 일은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지연되거나 비효율적이어서는 아니 된다. 모든 족속, 곧 어떠한 사람이든지 예외 없이 충성스러운 제자로 성장하여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돌봄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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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한 바와 같이 지상명령은 교회를 행한 주님의 진군 명령과 같은 것이다. 혹자는 이 명령을 기독교 사역의 대장정(Magna Carta)이라고도 표현한다.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사역의 근본이요, 과정이요, 그리고 목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교회의 모든 사역과 활동들은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이 명령을 수행하는 결과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전신자 제사장직 교리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전략이 곧 지상명령의 수행이라는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모든 교인들을 충성스러운 제자로 성장토록 훈련시키고 개발시키는 일의 결국은 그들로 하여금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는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제자훈련의 바탕에 근거하여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주님의 복음 사역자의 심정과 태도와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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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지상명령 수행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새로운 각성과 시도는 지난 반 세기 동안 각 곳에서 시도되어 왔다. 특히 1930년대에 태동하여 1950년대에 이르러 세계 각처에서 진행된 현대제자훈련운동, 전신자 제사장직 교리의 재발견으로 인한 평신도 각성 운동, 복음의 새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담을 것을 주장하는 새 가죽부대 운동(New Wineskin Movement), 그리고 지역 교회라는 영적 생활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은 셀 교회라는 모델을 낳고 그러한 교회들이 지난 20여 년간 전세계 각처에서 성장해 오고 있는 추세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교인을 복음의 사역자로 개발시키는 전략으로서 셀 그룹 교회의 성서적, 신학적 배경과 실제적인 면들을 보다 면밀하게 검토하는 일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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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우선 전신자 제사장직 교리를 검토함으로써 전신자 사역자화라는 목회의 목표에 관한 신학적, 교리적 바탕을 확고히 한 뒤 셀 그룹 교회의 실질적인 면들을 개념, 구조, 기능 등을 중심으로 검토한다. 그 다음 셀 그룹 교회로의 전환을 위한 전략들을 고찰하며 마지막으로 전신자 사역 개발 목회를 위한 선결 조건 등을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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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론에 비추어 본 전신자 제사장직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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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자 제사장직 교리는 교회의 본질, 교회의 사명과 사역 등에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교회의 본질 그 자체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로서 그러한 불리움은 사명에의 불리움이며 사역에로의 불리움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전신자 제사장직 교리가 사역자로서의 개인을 강조한다면 집단으로서의 교회는 그 개인의 사역을 개발시키는 핵심적인 모체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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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세상의 어떠한 조직이나 기관 및 기구들과도 독특하게 구분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 사실상 이와 같은 교회는 그리스도와의 결합이 전제가 된다. 왜냐하면 이 결합만이 그리스도인간의 영적 교제를 가능케 만들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그 지체들간의 영적 교제를 통하여 그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현현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인들간의 영적 교제의 수준과 질은 단순한 교제의 차원을 넘어 가족으로서의 형제애를 전제로 한다. 마치 가족간의 혈연관계가 지니는 사랑의 교제가 곧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인들간의 교제의 질과 수준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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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교회의 사명과 책임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역시 전신자 제사장직 교리는 교회의 존재이유와 목적을 확인해 준다. 미국 서남침례신학대학원(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교회교육행정학 교수를 역임한 티드웰(Charles A. Tidwell)박사는 교회의 사명을 “하나님의 다중적 지혜(manifold wisdom)를 알게 하는 것”(엡 3:10)으로 요약하면서 이러한 사명을 수행키 위한 교회의 기능으로서 예배, 선포와 증거, 양육과 교육, 그리고 봉사 등을 제시한다. 이러한 교회의 기능은 결국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다중적 지혜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뿐 아니라 하늘의 영들에게도 전파하는 목적을 실현키 위한 것으로서 이러한 사명은 단순히 집단으로서의 교회 뿐 아니라 그 교회의 구성원인 개개 교인을 통해 성취되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모든 교인을 사역자로 개발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전신자 제사장직 교리와 직결됨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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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침례신학대학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교수였던 힌슨(Hinson) 박사는 “교회의 사역은 전체 교인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티드웰 교수도 “제자도에로의 부르심은 그 부르심의 의도대로 살아갈 때 교회의 본질을 이룬다“ 고 말함으로써 개개 교인이 결정적인 교회의 구성원이요 사명 감당자임을 강력히 암시해준다. 화이트(W. R. White)는 침례교회 특징 중 하나를 개인의 지고성(至高性; The primacy of the individual)으로 보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함에 따르는 사명과 책임도 개인이며 개인이 회개하고, 개인이 믿으며, 개인이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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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자 제사장직 교리의 역사적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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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초대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제사장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한 일은 단순히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적어도 4세기 초,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는 계속되었다. 신약성서의 수많은 언급들은 물론이고 주후 302년에 이르기까지의 270여 년 동안 계속된 기독교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말살되기보다는 오히려 지중해 일대를 복음화 했다는 사실은 이 기간동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사역자로서의 삶을 철저히 살았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기도 벅차고 어려운 가운데서 오히려 복음의 사역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신앙에 대한 이해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 됨은 복음 사역자 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말은 곧 복음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혹독한 핍박도 그들의 본연의 신분의식에 기초한 사명에로의 불꽃을 꺼뜨릴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에 흘러감에 따라, 특히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복음의 사역은 “성직자”들의 전유물화 했으며 “평신도”들은 복음 사역으로부터 배제되어갔으며 이러한 상황에 익숙해진 “평신도”들은 오히려 복음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 자신들로부터 “성직자”들에게로 전가된 것을 다행히 여기는 경향으로 굳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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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이 이루어진 주후 302년이 악의 세력에 대한 기독교 승리의 원년이었다고 말하지만 필자는 주후 302년이야말로 기독교가 악의 세력에 패배한 패배의 원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적어도 그 전까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며 사역하는 자로서의 삶을 산 중거들을 명백히 가지고 있지만 그때로부터 시작된 교회와 세상 정권과의 이상야릇한 결탁은 기독교의 생명력을 송두리채 빼앗아 가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복음의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은 오로지 성직자들의 전유물로 만듦으로써 세계를 복음화하고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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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던(Shurden)은 기독교가 1세기 이후 16세기경에 이르기까지 크게 세 가지 비극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제사장직의 성직자화, 은혜의 성례전화, 그리고 교회의 제도화이다. 제사장직의 성직자화라는 말은 일부 신자의 제사장직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에 계층주의를 형성하여 직업적인 성직자 계층이 평신도(비성직자) 계층을 지배하게 된 결과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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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성례전화란 특정 계층에 의한 집례가 은혜와 구원을 가져다주는 주된 통로로 인식된 것으로서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찢어졌던 휘장을 다시 꿰매는 일과 같은 잘못이다. 그리고 교회의 제도화란 교회가 단순히 교인들이 출석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평신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세상 속에서 살아 역사하는 몸이라기보다는 성직자들이 관리하는 건물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하고 사역을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 구경꾼들로 전락한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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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비극적 경험은 특히 4세기초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과 함께 시작되어 로마 카톨릭의 중세 천년 동안 그 뿌리를 깊숙이 내렸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재침례교도들, 그리고 침례교도들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문제의 교정은 부단히 시도되었고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약간의 시정을 이룰 수 있었으나 특히 전신자 제사장직 교리의 경우는 다른 어떤 왜곡보다도 교정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 할 수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1962년부터 1965년 기간동안 제2차 바티칸 종교회의를 가진 바 있다. 이 회의에서 로마 카톨릭은 가히 혁명적인 신학적, 교리적 변화를 시도했는데 그것은 평신도들에게 사역을 허락하는 획기적 조치로서 “평신도의 사도직 교령”을 채택하는 일로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곧 평신도의 성례전 집행, 이를테면 세례 의식과 성만찬, 그리고 미사 집전 등과 같은 과거에 성직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것들을 과감하게 평신도에게도 그러한 사역을 허락함으로써 전신자 제사장직 교리의 실현에로의 거대한 변화의 몸짓을 시작했다. 이러한 로마 카톨릭의 변화를 개신교의 실제적인 목회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오히려 개신교가 전신자 제사장직 교리의 실현에 미온적이거나 그러한 실현에의 의지가 부족한 것처럼 보이기조차 한다. 전신자 제사장직 교리의 역사적이 거대한 왜곡의 장본인은 그러한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과감한 조치를 취하는 반면 개신교는 그 왜곡의 한복판에서 머뭇거리고 있다는 사실은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금세기 중반 이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온 평신도 신학에의 새로운 각성, 현대제자훈련운동, 그리고 그러한 운동의 개 교회 접목 노력 등은 오늘 우리에게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역자이며 교회는 개개 교인을 복음을 위한 사역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개발시키고 또 그러한 사역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의 실현을 촉구해 왔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의 결과, 전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同時多發的)으로 전개되어 오고 있는 셀 교회라는 새로운 형태의 교회 구조에로의 대전환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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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자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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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복음을 위한 사역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삶의 목적이 이 사명과 직결될 수 밖에 없으며 이에 따라 라이프스타일이 변할 수 밖에 없다. 복음 전파를 지상명령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모든 삶을 그 사명완수에 연결시켜 새로운 삶에 대한 해석과 재조정을 시도한다. 만일 이러한 삶에 대한 재조정이 결여된다면 그 사람의 헌신이 아무리 엄청난 말로 표현된다 할지라도 그 헌신의 진실성은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 적어도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지상명령으로 생각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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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의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던 목포의 한 자매는 자신이 복음의 제사장이라는 말을 듣고 난 뒤 제사장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수 있기를 진지하게 기도했다. 그녀는 가게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느꼈기에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의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그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 가지 지혜를 주셨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즉각 행동에 옮겼다. 그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가게를 이용하는 고객들을 대상으로 고객관리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카드들을 한 장씩 들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켜주셔서 복음을 들을 마음의 준비를 시켜주실 것을 기도했다. 고객들이 가게를 들를 때마다 자신의 간증을 들려주는 등 복음을 제시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펼쳐갔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사람들의 변화 또는 준비되는 상태별로 200여장의 카드를 A급, B급, C급 등 세 부류로 분류했다. A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 복음을 전해도 무리 없이, 또는 거부감 없이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B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점차 복음에 관심을 가지는 마음이 엿보이기 시작하는 사람들이었고, C굽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아직 복음에 관하여는 전혀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C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B급으로 변화되도록 기도했으며, B급에 있는 사람들이 A급으로 변화되도록 기도했다. 그녀는 고객관리카드를 만들기 시작한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200여장의 카드를 가지고 매일 기도할 수 있었으며 20여명의 결신자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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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한 대학 교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학 교수로 삼아주신 이유를 대학생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감당하도록 하시기 위해서라고 믿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캠퍼스에서 성경공부반을 조직하고 학생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과 함께 복음 전하는 일을 꾸준히 수행하고 있다. 그는 대덕 연구단지에 자신의 집을 지을 때 지하실은 캠퍼스에서 함께 성경을 공부하며 복음을 전하는 학생들이 언제든지 자유롭게 찾아와 기도하며 교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그리고 1층은 거실과 식당을 분리시키지 않고 넓게 트인 공간으로 만들어 교인들이나 학생들이 자신의 집을 방문하여 함께 식사하며 교제할 수 있도록 했으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 언제든지 유할 수 있는 게스트 룸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이 사용하는 전용 공간은 2층으로 제한한 집을 건축한 것이다. 복음의 제사장임을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은 이와 같이 집을 지어도 복음을 위해 소용될 수 있도록 설계하여 집을 짓는 간증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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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이나 거주지 역시 제사장직분을 수행하는 일을 염두에 두고 결정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주의 오클랜드에 있는 한인 중심으로 구성된 한 침례교회가 보스톤에 지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온 교회가 개척을 위해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을 때 지교회로 개척 나가게 될 담임목사 부부가 그 동안 자신들이 양육하고 훈련시킨 20여명의 교인들에게 함께 보스톤으로 개척하러 갈 것을 권고했다. 미국 서부해안으로부터 정반대인 동부해안 도시인 보스톤으로 이사를 가서 함께 교회를 개척하자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미국 대륙을 건너가자는 제안이었다. 그들은 진지하게 그 제안을 놓고 기도했으며 결국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닌, 교회를 개척하여 복음을 전하려는 목적을 위해 수천 마일에 해당하는 이사 길에 나섰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기 위해 준비하던 형제 부부도 있었는데 그들은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께서 자신들을 교회개척을 위해 부르시는 것을 믿고 변호사 사무실을 포기한 채 미국의 동부로 이사하는 결단을 내린 형제도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교회개척은 신학교를 졸업한 전도사나, 특별히 개척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잘 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제사장이라면 교회를 개척하는 일 역시 목사나 선교사들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이 분명하다. 자신의 직업이나 거주지조차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 조정하는 것이 마땅한 그리스도인의 라프스타일(lifestyle)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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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미국 유학 시절에 한 달간 유대인 회당을 견학한 적이 있었다. 한 달간 유대인 회당에 다니면서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활동을 참관하여 보고서를 제출하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유대인 회당에서의 한 달간의 경험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곳을 방문한 첫날 회당에서 랍비로부터 그 회당에 관한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나서 질문 시간이 주어졌을 때 필자는 약간은 엉성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지금부터 한 달간 이 유대인 회당에 출입하게 되면 유대인들의 눈에는 필자가 명백한 이방인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에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얕보거나 우월 감정을 가지고 대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랍비, 당신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와 같은 질문을 받은 랍비는 한참동안 필자를 쳐다보더니 유감스러운 마음을 가득 담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과 같이 답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우리 유대인을 너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요. 우리 유대인들은 제사장 나라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당신 같은 이방인이 자신의 발로 우리 유대인 회당에 들어온 것을 우리 유대인 모두는 당신을 환영하는 자세를 가지고 대할 것입니다.” 이러한 답을 들었을 때 필자는 매우 놀랐으며 한편으로는 무언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구약과 신약성서시대의 유대인들이 잘 못된 선민우월사상(選民優越思想)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기신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저버렸었으나 지난 2천년을 나라 없이 방랑하던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본연의 신분인 제사장 나라의 위치를 다시 찾았다는 사실을 들을 때 오히려 오늘날 참 이스라엘이며 영적 이스라엘로 자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2천년전의 유대인들과 흡사한 모습을 보는 아픔을 느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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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랍비는 오늘날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요원(agent of Kingdom of God)들로서의 신분의식에 투철할 뿐 아니라 전세계에 흩어져있는 유대인들은 모두가 메시아 왕국 건설요원으로서의 사명감으로 강력한 동지애로 똘똘 뭉쳐있다고 확신 있게 덧붙였다. 그는 계속해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이 감기에 걸리면 택사스(필자가 유학하면서 한 달간 다녀본 회당이 택사스에 있었다)에 있는 유대인들이 재치기를 할 정도라고 말했다. 그들은 이와 같이 자신이 메시아 왕국 건설 요원이라는 신분의식에 충일한 상태로 전세계적으로 흩어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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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반드시 영적 이스라엘로서 하나님 나라의 요원이라는 본연의 신분의식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우신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인류구속계획을 완성시키기 원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독특하게 구분되는 구분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화목을 이루게 하는 거룩한 사명이야말로 하나님 백성을 하나님 백성 되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이러한 신분의식과 사명의식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스타일을 독특하게 만들며 세상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삶의 과정을 드러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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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이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이다. 그들은 마땅히 교회공동체 안에서 힘을 얻고, 그 속에서 다른 요원들의 삶을 통하여 도전을 받으며, 나아가 그러한 삶을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주신 이유와 목적이기도 하다.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로지 복음의 제사장으로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게 위해 헌신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살아있는 간증은 그 공동체 속에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도 소중한 모델이 되며 격려가 된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 속에서 이러한 간증을 얼마나 실질적으로, 그리고 신선하게 보고 듣는 기회가 있는가? 교회가 공동체로서 그 구성원 상호간의 유기적 관계를 경험할 수 있을 때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존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의 교회는 무언가를 크게 결여하고 있다고 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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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 교회가 지향하는 바는 바로 이러한 공동체로서의 유기적 관계인 교회 본질을 회복하고 실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사람이 공동체의 유기적 관계를 경험할 수 있으려면 구성원 상호간에 관계를 경험할 수 있을 만큼 그 숫자가 적어야 한다. 수 백, 수 천명의 사람들이 서로간에 실질적이고도 구체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 구성원들이 보다 적은 숫자로 구성된 소그룹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직면하게된다. 이것은 단순한 추론에 의해 주장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직접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제자들의 숫자를 열 두 명으로 제한시키셨다. 그런가 하면 초대교회들은 모두가 가정에서 모였으며 그러한 소그룹을 통하여 복음을 강력히 전파하는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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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제사장이며 사역자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셀 그룹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도전이 되며 모델이 되어 서로를 부추켜 세우는 일이 가능하다. 인격적인 신자들간의 관계성이야말로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중요한 영적인 장소이다. 이러한 면에서 셀 교회는 모든 구성원들로 하여금 제사장직을 감당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방법이며 대안인 것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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