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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忠臣)
권탁(權卓) - 자(字)는 사원(思遠)이고 안동인(安東人)이며 예천군(醴泉君) 권계용(權季容)의 후손(後孫)이다. 선조(宣祖) 임역(壬役)에 순절(殉節)하였다. 증직(贈職)으로 판결사(判決事)이고 현충사(顯忠祠)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옆에는 어서각(御書閣)이 있다.
주(註) 255. 임역(壬役) : 임진년(壬辰年)의 싸움이란 뜻. 임진왜란(壬辰倭亂).
주(註) 256. 판결사(判決事) : 조선조(朝鮮朝) 장례원(掌禮院)의 으뜸 벼슬로 정삼품(正三品).
송빈(宋賓) - 자(字)는 사신(士信)이고 청주인(淸州人)이며 대사성(大司成) 송승은(宋承殷)의 후손(後孫)이다. 강(强)하고 굳세었으며 대절(大節)을 지니고 있었다. 임란(壬亂) 때 창의(倡義)하여 순절(殉節)하였으며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후(後)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고 표충사(表忠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주(註) 257. 대절(大節) : 대의(大義)를 위(爲)하여 목숨을 바쳐 지키는 절개(節介).
주(註) 258. 창의(倡義) : 국난(國難)을 당(當)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킴.
이대형(李大亨) - 자(字)는 태래(泰來)이고 호(號)는 관천(觀川)이며 증직편(贈職篇)에 있는 이경유(李景裕)의 아들이다. 임역(壬役)에 분성진(盆城鎭)에서 순절(殉節)하였으며 판결사(判決事)에 증직(贈職)되고 표충사(表忠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순조조(純祖朝)에 정랑(正郞) 건우(虔愚) 이치(李致)에게 명(命)하여 표충사(表忠祠)에서 제사(祭祀)를 지내게 하였다.
김득기(金得器) - 자(字)는 구오(具五)이고 절의편(節義篇)에 있는 김거익(金居翼)의 후손(後孫)이다. 친제(親癠)에 단지(斷指)의 효도(孝道)를 하였고 임역(壬役)에 출발(出發)할 때 옷 한 벌과 머리 한 줌을 아들 김간(金侃)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어머니와 같이 합장(合葬)하여라.”라고 하였다. 송빈(宋賓) 이대형(李大亨)과 함께 육력(戮力)하여 함께 싸웠으나 힘이 다하여 순절(殉節)하였다.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고 송담사(松潭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주(註) 259. 친제(親癠) : 부모(父母)의 병환(病患).
주(註) 260. 육력(戮力) : 힘을 합(合)함.
류식(柳湜) - 자(字)는 낙서(樂棲)이고 호(號)는 낙오(樂吾)이며 명환편(名宦篇)에 있는 류용(柳墉)의 손자(孫子)이다. 효도(孝道)와 우애(友愛)가 있었고 지조(志操)와 절개(節介)를 지녔으며 임진년(壬辰年)에 창의(倡義)하여 성(城)을 지키다가 적(敵)이 우물길을 끊어버리자 객사(客舍) 계단(階段) 아래로 나아가 땅을 파 샘을 얻었다. 성(城)이 함락(陷落)되기에 이르러 순절(殉節)하였다.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되고 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사충단(四忠壇)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영(李伶) - 자(字)는 여윤(汝允)이고 호(號)는 충순당(忠順堂)이며 성산인(星山人)이고 정무공(靖武公) 이호성(李好誠)의 후손(後孫)이다. 임진년(壬辰年)에 백의(白衣)로 창의(倡義)하여 본읍(本邑)으로 나아가 동문(東門)에서 진(陣)을 지키다가 성(城)이 함락(陷落)되기에 이르러 피 묻은 저고리를 아들에게 주고 돌아가서 장사(葬事) 지내라고 하고는 힘껏 싸우다가 순절(殉節)하였다.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贈職)되고 복호(復戶)되었으며 세덕사(世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주(註) 261. 복호(復戶) : 조선조(朝鮮朝)에 충신(忠臣)과 효자(孝子)에게 조세(租稅)와 부역(賦役)을 면(免)하여 주던 일.
안민(安慜) - 자(字)는 사심(士心)이고 호(號)는 모헌(茅軒)이며 순흥인(順興人)이고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후손(後孫)이다. 관직(官職)이 감찰(監察)에 이르렀으며 임진년(壬辰年)에 순절(殉節)하였다. 김해(金海)의 입석강(立石江)의 가에 묘갈(墓碣)이 있고 함안(咸安) 두릉사(杜陵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진인(李振仁) - 자(字)는 의보(義甫)이고 무과편(武科篇)에 있는 이만지(李萬枝)의 아들이다. 임란(壬亂)에 순절(殉節)하여 사절(死節)한 곳에 정문(旌門)을 세우라고 명(命)하였으며 삼강록(三綱錄)에 기재(記載)되어 있다.
성정국(成定國) - 자(字)는 중임(重任)이고 창녕인(昌寧人)이며 정절공(貞節公) 성사제(成思齊)의 후손(後孫)이다. 임진년(壬辰年)에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창녕(昌寧)으로 들어가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같이 고생(苦生)하다가 순절(殉節)하였다. 동고록(同苦錄)에 기재(記載)되어 있다.
강보손(姜甫遜) - 진주인(晉州人)이며 정유년(丁酉年)에 집안 아이들을 이끌고 적(敵)에 항거(抗拒)하다가 형세(形勢)가 어려워지자 갓끈으로 목을 매어 순절(殉節)하였다. 이로 인(因)하여 그 산(山)의 이름을 관항산(冠項山)이라고 하게 되었다.
주(註) 262. 정유년(丁酉年) :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있었던 1597년(年)을 말함.
윤붕(尹鵬) - 주부(主簿)이며 임진년(壬辰年)의 전투(戰鬪)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주(註) 263. 주부(主簿) : 조선조(朝鮮朝) 문관(文官)의 종육품(從六品) 벼슬
강수란(姜秀蘭) - 강보손(姜甫遜)의 증손(曾孫)이며 병자년(丙子年)에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였다가 호(胡)에게 잡혀서 항거(抗拒)하다가 절사(節死)하였다.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절의(節義)
김거익(金居翼) - 호(號)는 퇴암(退庵)이고 의성인(義城人)이다. 의성군(義城君) 김용비(金龍庇)의 현손(玄孫)이며 좌사윤(左司尹) 김태권(金台權)의 아들이다. 고려조(高麗朝)에서 관직(官職)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으며 조선(朝鮮) 태조(太祖)와 구계(舊契)가 있어 혁명(革命)에 이르러 우의정(右議政)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망복지의(罔僕之義)를 지켜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 학고(鶴皐) 김복한(金福漢)이 지은 신도비(神道碑)의 비명(碑銘)에 청풍준절용동백세(淸風峻節聳動百世)라고 하였다.
주(註) 264. 좌사윤(左司尹) : 고려조(高麗朝) 공양왕(恭讓王) 때 좌첨사(左詹事)를 고친 이름.
주(註) 265. 정당문학(政堂文學) : 고려조(高麗朝) 문종(文宗) 때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의 종이품(從二品) 벼슬이었다가 충렬왕(忠烈王) 원년(元年) 1275년(年)에 참문학사(參文學士)로 개칭(改稱)하였으며 조선조(朝鮮朝) 초기(初期)에는 문하부(門下府)의 관직(官職)으로 존속(存續)시켰고 태종(太宗) 원년(元年) 1401년(年)에 문하부(門下府)를 의정부(議政府)로 바꿀 때 의정부문학(議政府文學)이라고 함.
주(註) 266. 구계(舊契) : 오랜 인연(因緣).
주(註) 267. 신도비(神道碑) : 종이품(從二品) 이상(以上)인 벼슬아치 무덤 근처(近處)의 큰길가에 세우는 비석(碑石).
주(註) 268. 용동(聳動) : 놀랍고 두려워 몸을 흔들며 움직임.
김계금(金係錦) - 단종조(端宗朝)에 의(義)를 지키고 미양원(薇陽院)에서 스스로 정향(靖享)하였다. 일찍이 영월(寧越)을 왕래(往來)하며 지은 갱가(賡歌) 자규사(子規詞)에서 말하기를 자규(子規)야! 자규(子規)야! 어찌 괴롭게 울기만 하고 쉴 줄을 모르느냐? 세상(世上) 사람들은 네 울음소리들의 괴로움을 풀어주지 못하고 네 봄 울음소리에 야유(冶遊)를 다툰다고 하네. 자규(子規)야! 괴롭게 울지를 말아라. 다만 서로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듣고 홀로 누(樓)에 기대어 잠 못 이룰까 두렵구나.라고 하였다.
주(註) 269. 정향(靖享) : 고요함을 누림. 조용히 살아감.
주(註) 270. 갱가(賡歌) : 남의 노래를 받아서 부르는 노래.
주(註) 271. 야유(冶遊) : 주색(酒色)에 빠져 방탕(放蕩)하게 논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놀이를 말함.
김만백(金萬伯) - 호(號)는 송오(松塢)이고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김석(金碩)의 손자(孫子)이다. 관직(官職)이 천안(天安)과 함창(咸昌)의 교도(敎導)에 이르렀고 임란(壬亂)에 북(北)으로 향(向)하여 통곡(痛哭)하고는 의사(義士)들을 모집(募集)하고 노복(奴僕)들을 거느리고 창의(倡義)하여 군공(軍功)이 있다.
허빈(許瀕) - 자(字)는 정보(靜甫)이고 호(號)는 자수재(自修齋)이며 학행편(學行篇)에 있는 허경윤(許景胤)의 아들이고 문장(文章)과 학행(學行)이 있었다. 인조(仁祖) 병자년(丙子年)에 친명(親命)으로 창의(倡義)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갔으며 남성일기(南城日記)와 유고(遺稿)가 있다.
노한석(盧漢錫) - 자(字)는 광숙(光叔)이고 호(號)는 해은(海隱)이며 광주인(光州人)이다. 병자년(丙子年)의 척화신(斥和臣) 국담(菊潭) 이준(李埈)의 아들이다. 일찍이 부친(父親)의 뜻을 이어받아 창녕(昌寧)에서 김해(金海)로 우거(寓居)하여 그 동(洞)을 이름하여 모정리(慕禎里)라고 하였으며 스스로 편안(便安)히 하여 벽(壁)위에 대명(大明)이라고 크게 두 글자를 써 놓고 조석(朝夕)으로 쳐다보며 절하고 여러 번(番) 관직(官職)을 제수(除授)하여도 다 받지 아니하였다. 매양(每樣)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일을 말하고는 문득 눈물을 흘렸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갈(碣)을 지었다.
동한필(董漢弼) - 자(字)는 득량(得良)이고 호(號)는 두옹(斗翁)이며 광주인(廣州人)이다. 원종훈편(原從勳篇)에 있는 동대순(董大順)의 아들이다. 인조조(仁祖朝)에 관직(官職)이 감역(監役)이었는데 병자년(丙子年)에 화친(和親)이 성립(成立)되자 벼슬을 내놓고 지리산(智異山)으로 들어가 배두정(拜斗亭)을 짓고 여러 번(番) 불렀음에도 일어나지 아니하고 성리학(性理學)에 몰두(沒頭)하였으며 열전(列傳)에 스스로 서문(序文)을 썼다. 유집(遺集)이 있다.
주(註) 272. 감역(監役) : 조선조(朝鮮朝) 선공감(繕工監)에 딸려 토목(土木)이나 건축공사(建築工事)를 감독(監督)한 종구품(從九品) 벼슬. 감역관(監役官)
효행(孝行)
반석철(潘碩徹) - 기성인(岐城人)이고 만호(萬戶) 반형(潘衡)의 아들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至極)한 효도(孝道)를 하였으며 친병(親病)이 있자 얼음 속의 잉어(鯉魚)가 뛰어 나오고 겨울에 대추(大棗)가 결실(結實)하였고 또 큰 가뭄을 당(當)하여 농사(農事)짓는 다섯 두락(斗落)이 말라서 죽었는데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고 우니 홀연(忽然)히 소나기가 내리고 맑은 샘물이 솟아 나왔으니 인(因)하여 효자천(孝子泉)이라고 이름하였다. 부친(父親)이 돌아가자 여묘(廬墓)에 예(禮)를 다하였다. 세조조(世祖朝)에 명(命)으로 정문(旌門)을 세웠다.
주(註) 273. 여묘(廬墓) : 상제(喪制)가 무덤 근처(近處)에 여막(廬幕)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
권형(權衡) - 관직(官職)이 좌랑(佐郞)이고 헌납(獻納)으로 초계군수(草溪郡守)에 이르렀으나 사직(辭職)하고 어버이를 봉양(奉養)하였다. 상(喪)에 이르자 애훼(哀毁)하여 병(病)이 되었고 종신(終身)토록 벼슬하지 아니하였다. 명(命)으로 정문(旌門)을 세웠다.
주(註) 274. 좌랑(佐郞) : 고려조(高麗朝)의 육부(六部)와 조선조(朝鮮朝)의 육조(六曹)에 있었던 정오품(正五品) 벼슬.
배덕민(裵德民) - 임진년(壬辰年)에 적(敵)이 그 아버지를 죽이려 하자 몸으로 익폐(翼蔽)하여 부자(父子)가 목숨을 같이 하였다.
주(註) 275. 익폐(翼蔽) : 날개로 품듯이 감쌈.
안신갑(安信甲) - 자(字)는 의용(義勇)이고 호(號)는 두암(斗庵)이며 충신편(忠臣篇)에 있는 안민(安愍)의 아들이고 무관(武官)으로 초계군수(草溪郡守)가 되었다. 선조조(宣祖朝)에 효도(孝道)로써 정문(旌門)이 있는데 어제(御題)에 말하기를 “흰 칼날로 아버지 원수(怨讐)를 갚았으니 뜨거운 정성(精誠)이 나라의 치욕(恥辱)을 씻었네.”라고 하였다.
주(註) 276. 어제(御題) : 원래(元來)는 임금이 친(親)히 보이는 과거(科擧)의 글제를 말하나 여기서는 임금의 글이라는 의미(意味)임.
이우두(李友杜) - 충신편(忠臣篇)에 있는 이대형(李大亨)의 아들이다. 임진년(壬辰年)에 성(城)이 함락(陷落)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아버지의 시체(屍體)를 찾으려고 들어갔다가 적(敵)에게 해(害)를 당(當)하여 진중(陣中)에서 순효(殉孝)하였다. 부자(父子)를 함께 초혼장(招魂葬)으로 하였다.
주(註) 277. 순효(殉孝) : 효도(孝道)하다가 죽음을 당(當)함.
주(註) 278. 초혼장(招魂葬) : 시신(屍身)이 없을 때 혼(魂)을 불러 장사(葬事) 지내는 일.
김간(金侃) - 자(字)는 직부(直夫)이고 호(號)는 운암(雲庵)이며 충신(忠臣) 김득기(金得器)의 아들이고 승사랑(承仕郞)이다. 임란(壬亂) 때 아버지가 난(難)이 있는 곳에 가서 순절(殉節)하자 성중(城中)에 잠입(潛入)하여 아버자의 시체(屍體)를 찾았으나 능(能)히 하지 못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자 아버지의 유명(遺命)을 따라 부(府)의 북(北) 불산(佛山)에 의복(衣服)과 모발(毛髮)을 합장(合葬)하였다.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이 삼충실기(三忠實記)에 서문(序文)을 써서 말하기를 “참판(參判) 김공(金公)의 아들 간(侃)이 아버지를 알았으나 언덕에서 떨어짐을 면(免)하지 못하여 기미(幾微)가 다르니 오히려 성중(城中)에 잠입(潛入)하여 아버지 시체(屍體)를 찾으려고 그치지 아니하기를 몇 번(番)이나 했던고! 아! 사람이 누가 임금이 없겠는가! 사람이 누가 아버지가 없겠는가! 신하(臣下)가 되고 자식(子息)이 되는 것이니 능(能)히 소득(所得)으로써 부담(負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상(天常)이 있는 자가 지금(至今)에서 옛날까지 몇 사람인가!”라고 하였다.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이 갈(碣)을 지었다.
주(註) 279. 승사랑(承仕郞) : 조선조(朝鮮朝) 종팔품(從八品)의 문관(文官) 품계(品階)
주(註) 280. 기미(幾微) : 낌새. 기미(機微)와 같음.
주(註) 281. 천상(天常) : 하늘이 정(定)한 상도(常道)로 군신(君臣), 상하(上下), 존비(尊卑) 등(等)의 질서(秩序)를 말한다.
배명윤(裵命胤) - 자(字)는 덕승(德承)이고 호(號)는 삼외당(三畏堂)이며 분성인(盆城人)이고 좌찬성(左贊成) 배영(裵渶)의 증손(曾孫)이다. 정우(丁憂)에 여묘(廬墓)를 육재(六載) 동안 하였고 효행(孝行)으로써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증직(贈職)되었다.
장시행(張是行) - 어머니 빈소(殯所)가 실화(失火)되자 화염(火炎)을 무릅쓰고 온전히 얻었으나 두루 몸은 그을리고 데었다. 정문(旌門)이 있다.
장익정(張翼楨) - 장시행(張是行)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병환(病患)에 단지(斷指)하였고 거우(居憂)에 애훼(哀毁)가 예(禮)를 넘었다. 정문(旌門)이 있다.
주(註) 282. 거우(居憂) : 상중(喪中)에 있음.
송제현(宋齊賢) - 자(字)는 군현(君顯)이고 사마편(司馬篇)에 있는 송정백(宋廷伯)의 아들이다. 천성(天性)이 효도(孝道)와 우애(友愛)를 지녔고 친제(親癠)에 삼삭(三朔) 동안 눈 한 번(番) 깜박이지 아니하고 분(糞)을 맛보아 그 차도(差度)와 심(甚)함을 시험(試驗)하였다. 상(喪)에 이르러 애훼(哀毁)하고 여막(廬幕)에 있었다.
이진황(李震凰) - 호(號)는 삼우(三友)이고 충신(忠臣) 이대형(李大亨)의 현손(玄孫)이다. 형(兄)인 이진호(李震虎) 이진룡(李震龍)과 함께 효도(孝道)와 우애(友愛)가 독실(篤實)하였으며 여러 번(番) 향시(鄕試)에 급제(及第)하였고 세마(洗馬)에 그쳤다.
신몽삼(辛夢參)의 시(詩)에 말하기를
盆城十里東 분성(盆城) 십리(十里) 동(東)쪽에
孝友三學士 효도(孝道)와 우애(友愛)있는 삼학사(三學士)라네.
虎衛朔望路 호랑이가 삭망(朔望)길을 지켜 주었고
鴈飛去來趾 기러기가 오가는 걸음 따라 날아다니네.
라고 하였다.
주(註) 283. 세마(洗馬) : 고려조(高麗朝) 동궁(東宮)의 종오품(從五品), 춘방원(春坊院)의 정칠품(正七品),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정구품(正九品) 벼슬.
주(註) 284. 삭망(朔望) : 초하루와 보름인데 상중(喪中)에 있는 집에서는 이 날에 제사(祭祀)를 지냈다. 삭망전(朔望奠).
조전(曺恮) - 자(字)는 자신(子愼)이고 호(號)는 청계(淸溪)이며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조덕여(曺德輿)의 아들이다. 천성(天性)이 지극(至極)히 효성(孝誠)스러웠고 어버이를 봉양(奉養)함에 몸과 마음으로 정성(精誠)을 다하였으며 도(道)의 경지(境地)에 올라 천거(薦擧)되었다.
김처정(金處精) - 자(字)는 자순(子純)이고 호(號)는 순재(純齋)이며 중부사정(中部司正) 김경손(金敬孫)의 후손(後孫)이다. 바른 행실(行實)이 일찍이 저명(著名)하였으며 여러 번(番) 천거(薦擧)에 들었고 아버지의 병환(病患)에 시탕(侍湯)하면서 사람의 젖을 얻어 사용(使用)하여 큰 효과(效果)를 보았다. 의복(衣服)을 원근(遠近)의 유녀(乳女)에게 나누어주고 30년(年)을 시용(試用)하였다. 또 날아가는 꿩과 내려앉는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사람이 노루를 지고 와서 주는 감응(感應)이 있었으며 증직(贈職)으로 빙고별검(氷庫別檢)이 되었고 정문(旌門)이 있다.
주(註) 285. 시탕(侍湯) : 어버이의 병환(病患)에 약(藥) 시중하는 일.
주(註) 286. 시용(試用) : 시험적(試驗的)으로 사용(使用)함.
송상현(宋商炫) - 자(字)는 헌징(獻徵)이고 문행편(文行篇)에 있는 송채(宋采)의 아들이다. 증자(曾子)의 경계(警戒)로 뜻을 길러 어긋남이 없었으며 사람들이 다 그 효도(孝道)를 일컬었다.
허각(許珏) - 자(字)는 광옥(光玉)이고 호(號)는 수우재(守愚齋)이며 김해인(金海人)이고 가락군(駕洛君) 허염(許琰))의 후손(後孫)이다. 정우(丁雨)의 어려운 일에 여묘(廬墓)를 육재(六載) 동안 하였는데 호랑이 두 마리가 와서 지켜 주었다.
본쉬(本倅)가 고기를 주어서 제사(祭祀)를 도왔다. 늘그막에 임천(林泉)에 복거(卜居)하여 마음을 기울여 성리학(性理學)을 연구(硏究)하였다. 효자(孝子)라는 소문(所聞)을 본쉬(本倅)가 들었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증직(贈職)되었다.
주(註) 287. 정우(丁雨) : 정우(丁憂)의 잘못.
주(註) 288. 본쉬(本倅) : 본군(本郡)의 군수(郡守).
주(註) 289. 복거(卜居) : 살 곳을 가려서 정(定)함.
홍우직(洪禹稷) - 자(字)는 이익(而益)이고 호(號)는 송은(松隱)이며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홍창(洪昌)의 아들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至極)히 효도(孝道)하였고 생사(生死)에 근심함이 없었다.
김덕창(金德昌) - 자(字)는 군화(君和)이고 호(號)는 예재(禮齋)이며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김건(金鍵)의 아들이다. 효행(孝行)이 독실(篤實)하다고 세상(世上)에 널리 알려졌다.
송예증(宋禮增) - 자(字)는 군겸(君兼)이고 사마편(司馬篇)에 있는 송정백(宋廷伯)의 후손(後孫)이다. 천성(天性)이 지극(至極)히 효성(孝誠)스러웠으며 모친(母親)의 병환(病患)에 꿩이 나타나는 감응(感應)이 있었고 부친(父親)의 병환(病患)에도 또한 노루가 나타나는 감응(感應)이 있었다. 정우(丁憂)에 성묘(省墓)를 하니 호랑이가 나타나는 감응(感應)이 있어 동물(動物)의 감화(感化)로 그 효(孝)를 증험(證驗)하였다. 포장(褒狀)이 있다.
허동엄(許東曮) - 자(字)는 경빈(敬賓)이고 호(號)는 구봉(龜峯)이며 학행편(學行篇)에 있는 허경윤(許景胤)의 후손(後孫)이다. 모친(母親)이 여질(癘疾)로 돌아가자 산막(山幕)에서 초종(初終)을 지내는데 호랑이가 와서 지켰고 반구(返柩)할 때에는 동구(洞口)까지 따라 나왔다. 여묘(廬墓) 3년(年)에 눈과 비를 피(避)하지 아니하였다. 효자(孝子)로 천거(薦擧)되어 증직(贈職)으로 동교(童敎)가 되었다.
주(註) 290. 여질(癘疾) : 창질(瘡疾)과 같으며 종기(腫氣)임. 염병(染病)을 가리키기도 함.
주(註) 291. 초종(初終) : 초종장사(初終葬事). 초상(初喪)에서 졸곡(卒哭)까지를 말함.
주(註) 292. 반구(返柩) : 시신(屍身)을 고향(故鄕)이나 집으로 운반(運搬)하는 일.
송효증(宋孝增) - 자(字)는 사행(士行)이고 문행편(文行篇)에 있는 송채(宋采)의 손자(孫子)이다. 성품(性品)이 지극(至極)히 효성(孝誠)스러웠고 마음과 몸을 수양(修養)하는 데 밝았으며 친제(親癠)에 북두성(北斗星)에 빌어 효험(效驗)을 얻었다. 실기(實記)가 있다.
김덕제(金德濟) - 자(字)는 군화(君和)이고 충신편(忠臣篇)에 있는 김득기(金得器)의 현손(玄孫)이다. 성효(誠孝)로 어버이를 섬겼으며 검소(儉素)와 절약(節約)으로 몸가짐을 하였다.
주(註) 293. 성효(誠孝) : 효성(孝誠)과 같음.
김치묵(金致黙) - 호(號)는 성재(誠齋)이고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김종집(金宗潗)의 아들이다. 친제(親癠)에 아우 김치백(金致伯)과 함께 분(糞)을 맛보고 단지(斷指)하였으며 상(喪)에 이르러 여묘(廬墓)를 3년(年)하였는데 십리(十里) 산(山)길이 저절로 탄로(坦路)가 되었다. 삼성재(三省齋)를 짓고 두 아우와 함께 일석(日夕)에 강학(講學)하며 담락(湛樂)하였다.
주(註) 294. 탄로(坦路) : 평탄(平坦)한 길. 탄도(坦道).
주(註) 295. 일석(日夕) : 저녁
김창택(金昌宅) - 자(字)는 성여(聖汝)이고 호(號)는 모헌(慕軒)이며 증직편(贈職篇)에 있는 김현정(金顯鼎)의 증손(曾孫)이다. 친병(親病)에 단지(斷指)하여 회소(回甦)시켰으며 정우(丁憂)에 형제(兄弟)가 여묘(廬墓)를 하였다. 그 집의 편액(扁額)에 식호(式好)라고 하였고
시(詩)가 있으니
十載經營一草堂 십년(十年)을 경영(經營)하여 초당(草堂) 하나 지으니
弟兄談笑喜同床 형제(兄弟)가 한 자리에서 담소(談笑)하며 즐거워하네.
扁名式好君知否 편액(扁額) 이름 식호(式好)를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皓首無猶示久長 흰 머리가 지금(至今)도 또한 없으니 오래 살게 보이겠구나.
라고 하였다.
주(註) 296. 회소(回甦) : 소생(蘇生).
김창우(金昌羽) - 자(字)는 중여(重汝)이고 호(號)는 겸재(謙齋)이며 김창택(金昌宅)의 아우이다. 효도(孝道)와 우애(友愛)를 독실(篤實)하게 행(行)하였으며 형(兄)을 섬겨 새벽과 저녁에는 반드시 문안(問安)하였고 노년(老年)에 이르러서도 쇠약(衰弱)해지지 아니하였으며 차식호당시(次式好堂詩)가 있다. 형제(兄弟)가 서로 의지(依支)하여 집 하나를 지어 잘 때에 같이 덮고 먹을 때도 같은 상(床)에서 먹으니 봄바람이 뜰에 가득한 나무에 불어 앵두나무 두 그루가 우거지고 해 그림자가 길었다고 한다.
노진성(盧振聲) - 자(字)는 여원(汝遠)이고 절의편(節義篇)에 있는 노한석(盧漢錫)의 손자(孫子)이다. 모친(母親)의 병환(病患)에 단지(斷指)하여 피를 넣어 이틀 동안 회소(回甦)시켰고 정우(丁憂)에 이르러 예제(禮制)를 극진(極盡)하게 하였다.
주(註) 297. 예제(禮制) : 상례(喪禮)의 범절(凡節).
류방식(柳邦植) - 자(字)는 성건(聖建)이고 호(號)는 아인(啞人)이며 문행편(文行篇)에 있는 류적(柳績)의 아들이다. 부친(父親)이 고을의 일로 멀리 북변(北邊)에 유배(流配)되었을 때 나이 열여섯에 부친(父親)을 모시고 고향(故鄕)으로 돌아왔다. 효도(孝道)로 신설(伸雪)하였으며 묵암(黙庵) 허(강?)(許亻岡))과 도와(陶窩) 최남복(崔南復)을 좇아 노닐었고 예총질의(禮摠質疑) 가례초(家禮抄) 석북기(釋北記)를 지었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주(註) 298. 신설(伸雪) : 원통(寃痛)함을 풀고 부끄러움을 씻음. 신원설치(伸寃雪恥)
안기남(安基南) - 자(字)는 문옥(文玉)이고 호(號)는 율은(栗隱)이며 수직편(壽職篇)에 있는 안기철(安基喆)의 아우이다. 천성(天性)이 지극(至極)히 효성(孝誠)스럽고 거우(居憂)에 축일(逐日)하여 성묘(省墓)를 하였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爲)하여 길을 닦아주고 안효자(安孝子)의 길이라고 불렀다.
주(註) 299. 축일(逐日) : 하루도 거르지 않음.
박시형(朴時馨)
박만형(朴晩馨) - 이상(以上)의 두 사람은 형제(兄弟)로 같이 효행(孝行)을 하여 정문(旌門)이 있다.
박남규(朴南奎) - 박시형(朴時馨)의 조카인데 또한 효도(孝道)로 정문(旌門)이 있다.
이시회(李時檜) - 자(字)는 문찬(文讚)이고 경주인(慶州人)이며 표암(瓢岩) ( ? )의 후손(後孫)이다. 약관(弱冠)에 죄(罪)가 아니면서도 유설(縲絏)되어 아홉 삭(朔)이나 집과 떨어져 있었다. 집 하나 떨어진 것이 고개 하나 나루 하나였는데 저녁에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오며 정성(定省)하기를 평상시(平常時)와 같이 하였다. 부친(父親)의 눈이 어두워지자 매일(每日) 식사(食事)에 밥, 국, 고기, 나물을 차렸으며 출입(出入)에는 일일이 고(告)하고 부지(扶持)하기를 십년(十年)을 한결같이 하였다. 모친(母親)의 병환(病患)에 약(藥)을 물어 밤에 돌아오는데 호랑이가 앞에서 인도(引導)하였고 부친상(父親喪)에 여묘(廬墓)할 때 본쉬(本倅)가 포촉(脯燭)을 보내 주었다.
주(註) 300. 약관(弱冠) : 갓을 쓸 수 있는 가장 어린 나이라는 뜻으로 스물을 말함.
주(註) 301. 유설(縲絏) : 포승(捕繩)줄에 묶임.
주(註) 302. 정성(定省) : 저녁에 부모(父母)의 침소(寢所)를 갖춰 드리고 새벽에 살펴 봄. 혼정신성(昏定晨省).
주(註) 303. 부지(扶持) : 고생(苦生)이나 어려움을 견딤.
주(註) 304. 포촉(脯燭) : 포육(脯肉)과 양초(洋燭)
송은좌(宋殷佐) - 자(字)는 혁윤(赫尹)이고 호(號)는 율리(栗里)이며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송재규(宋在奎)의 아들이다. 일생(一生)을 마음으로 힘쓰기는 양친(兩親)을 기쁘게 함에 있었는데 명도(命途)가 불행(不幸)하여 시하(侍下)에 기절(氣絶)한 중(中) 부친(父親)이 부름에 응(應)하여 말하기를 병(病)이 나은 사람은 다시 3년(年)까지 이른다.라고 하였다. 공중(空中)으로부터 슬프게 응(應)하여 하는 말이인명(人命)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데 아버님이 그것을 잊었구나.라고 하였다. 고향(故鄕) 사람들이 전송(傳誦)하였다.
주(註) 305. 명도(命途) : 운명(運命)과 운수(運數). 명수(命數).
주(註) 306. 시하(侍下) : 부모(父母)나 조부모(祖父母)가 살아 있는 처지(處地). 또는 그러한 사람.
주(註) 307. 전송(傳誦) : 여러 사람이 입으로 전(傳)하여 가면서 외움.
김장한(金章漢) - 자(字)는 여헌(汝憲)이고 김해인(金海人)이며 좌윤(左尹) 김국담(金菊潭)의 후손(後孫)이다. 모친(母親)이 노망(老妄)으로 동이에 있는 간장을 남초(南草)에 부어 싹마다 다 말라서 죽고 동이는 비어 있었다. 모친(母親)이 상심(傷心)할까 두려워하여 마음을 한결같이 하고 입에 올리지 아니하였다. 아이를 보라고 맡겨놓고 아내와 함께 밭을 매고 저녁에 돌아오니 모친(母親)은 나가서 돌아오지 아니하고 아이는 집에서 키우는 개에게 물려서 두 손가락이 씹혀 없어졌고 거의 죽게 되었는데 그 아내에게 잠계(潛戒)하여 모친(母親)이 알고 상회(傷懷)하지 못하게 하였다. 모친(母親)의 병(病)에 단지(斷指)하였고 상(喪)에 이르러 여묘(廬墓)하였다.
주(註) 308. 남초(南草) : 담배
주(註) 309. 잠계(潛戒) : 조용히 경계(警戒)함.
주(註) 310. 상회(傷懷) : 상심(傷心)
김재수(金在受) - 자(字)는 장보(章甫)이고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김세원(金世元)의 증손(曾孫)이다. 천성(天性)이 지극(至極)히 효성(孝誠)스러웠으며 친제(親癠)에 단지(斷指)하였고 조간(遭艱)에 여묘(廬墓)하였다.
주(註) 311. 조간(遭艱) : 부모(父母)의 상(喪)을 당함. 당고(當故)
노명세(盧命世) - 자(字)는 치지(致智)이고 호(號)는 매은(梅隱)이며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노심연(盧心淵)의 아들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精誠)을 다하였고 어부(漁父)가 감동(感動)하여 생선(生鮮)을 주었다. 정우(丁憂)에 애훼(哀毁)하고 묘(墓)에 곡(哭)을 하였다. 묘(墓)가 십리(十里)를 떨어지고 고개 하나가 있었는데 바람과 눈을 피하지 아니하고 축일(逐日)하여 찾아 곡(哭)을 하고 눈물을 흘려 풀이 말랐다. 천거(薦擧)하였다.
강영준(姜榮駿) - 자(字)는 문오(文五)이고 호(號)는 송호(松湖)이며 수직편(壽職篇)에 있는 강수석(姜壽碩)의 아들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至極)히 효도(孝道)하여 6년(年)을 여묘(廬墓)하였고 피눈물로 종제(終制)하였다. 고향(故鄕) 사람들이 포창(襃彰)하였다.
주(註) 312. 종제(終制) : 탈상(脫喪)
주(註) 313. 포창(襃彰) : 찬양(讚揚)하여 내세움.
김태현(金泰鉉) - 자(字)는 구서(九瑞)이고 호(號)는 우곡(寓谷)이며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김응석(金應碩)의 손자(孫子)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처음부터 끝까지 모나지 아니하였고 게으름이 없었다.
조순승(調舜承) - 자(字)는 훈경(勳卿)이고 호(號)는 활한(活漢)이며 행의편(行誼篇)에 있는 조석규(曺碩奎)의 아들이다. 갑자기 친제(親癠)를 당(當)하자 손가락을 베어서 피를 넣어 즉시(卽時) 회소(回甦)하게 하였다. 의(義)로운 처사(處事)를 하여 고을 사람들과 선비와 벗들이 추앙(推仰)하고 존중(尊重)하였다.
조석희(曺錫禧) - 자(字)는 덕수(德壽)이고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조형(曺炯)의 아들이다. 천성(天性)이 지극(至極)히 효성(孝誠)스러웠으며 친병(親病)이 위태(危殆)롭고 깊어지자 북두성(北斗星)에 기도(祈禱)하여 대신(代身)하기를 원(願)하였더니 즉시(卽時) 회소(回甦)하게 되었다. 맏형(兄)과 둘째형(兄)과 함께 세 사람이 우애(友愛)가 매우 돈독(敦篤)하여 잘 때는 같은 이불을 덮고 먹을 때는 같은 상(床)에서 했으며 노년(老年)에 이르러 담흡(湛翕)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칭송(稱頌)하고 천거(薦擧)하였다.
주(註) 314. 담흡(湛翕) : 즐겁고 화합(和合)하다.
김환수(金煥洙) - 호(號)는 계남(溪南)이고 행의편(行誼篇)에 있는 김호규(金鎬奎)의 아들이다. 천성(天性)이 지극(至極)히 효성(孝誠)스럽고 뜻을 기르는 데 어긋남이 없었다. 부친(父親)이 경심정(敬心亭)에 살 때 날마다 세 번(番)씩 살펴서 문후(問候)를 하였고 척망대(陟望臺)를 짓고 올라서 부친(父親)을 바라보았으며 친병(親病)으로 가래가 막히자 빨아서 나오게 하였고 분(糞)을 맛보고 단지(斷指)하여 연명(延命)하게 하였다. 상(喪)에 이르러 축일(逐日)하여 성묘(省墓)하니 면인(面人)들이 묘(墓)로 가는 길을 닦아주었다. 집안에는 침구(寢具)와 등촉(燈燭)을 한결같이 부친(父親)이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포상(褒賞)이 있다.
이수학(李壽學) - 수직편(壽職篇)에 있는 이윤상(李潤祥)의 아들이다. 천성(天性)이 지극(至極)히 효성(孝誠)스럽고 뜻을 기르는 데 어긋남이 없었으며 노년(老年)에 이르러 불해(不懈)하였다. 사람들이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을 칭송(稱頌)하였다. 자(資)가 통정대부(通政大夫)였다.
주(註) 315. 불해(不懈) : 게으르지 않음.
주(註) 316. 자(資) : 관등(官等)의 위계(位階).
김종락(金鍾洛) - 자(字)는 대일(大一)이고 태원인(太原人)이다. 한림(翰林) 김평(金坪)의 후손(後孫)이다. 천성(天性)이 지극(至極)히 효성(孝誠)스럽고 증자(曾子)로 뜻을 기르는 경계(警戒)로 삼아 평생(平生)을 어기지 아니하였다. 승순(承順)하여 봉양(奉養)하였고 효성(孝誠)이 고을 사람들에 저명(著名)하였다.
주(註) 317. 승순(承順) : 웃어른의 명령(命令)을 따름. 승안순지(承安順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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