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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파워 포워드 한 명을 찾습니다!
글: Doctor J
어떻습니까? 이런 선수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 어느 누구라도 탐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선수가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지금부터 소개할 '80년대 최고의 파워 포워드'로 불리우는 벅 윌리암스(Buck Williams)가 바로 그런 선수였습니다.
벅 윌리암스의 본명은 'Charles Lynwood Williams'입니다. 1960년, 자동차 수리공의 아들로 태어난 윌리암스는 어릴 때부터 골격과 체력이 또래 아이들에 비해 남달랐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시절엔 육상, 미식축구, 농구를 겸했고, 이 세 종목 모두에서 출중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매릴랜드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윌리암스는 미식축구와 농구를 병행했고, 취미삼아서 뛰곤 했던 육상 중장거리 달리기 부문에선 대학 최고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던 준족이자 왕체력의 천부적인 운동선수였습니다. 워낙 잘 뛰어다녀서 붙은 숫사슴이란 뜻의 별명 'Buck'가 아예 이름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우상이었던 커림 압둘자바를 좇아 그는 농구선수의 길을 택합니다.
신장이 6-8, 203cm에 체중도 100kg이 채 되질 못 했지만, 대학 3년 내내 그 터프하다는 ACC 지구에서 주전 센터를 보며 랄프 샘슨과 같은 큰 선수들을 상대했고, 이들과의 대결에서 조금도 밀린 적이 없었던 터프가이입니다. 매 시즌 ACC 지구의 리바운드 1위를 차지하기도 했고요.
그의 타고난 보드 장악력과 탄력, 터프함, 그리고 성실성이 눈에 띄어, 그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대표팀에 뽑히게 됩니다. 아이재야 토마스와 함께 대표팀의 공동주장을 맡았던 그는 NBA 팀들이나 구소련, 동구권 팀들과의 친선경기에서 주전 센터로서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며 많은 프로 스카우터들의 눈길을 끌 수 있었습니다.
매릴랜드 대학 3학년을 마치고 NBA 드래프트에 뛰어든 그는 전체 지명 3번으로 뉴저지 넷츠에 입단을 했고, 자신의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포워드 포지션을 맡게 됩니다. 워낙에 자기보다 키 크고 덩치좋은 센터들과만 대결해 온 그로선 프로 적응이 상당히 쉬웠습니다. 이젠 자신과 비슷한 체격의 선수들만 상대하면 됐으니까요.
프로 첫 시즌부터 마치 몇 년 뛰어온 베테랑같은 원숙한 모습을 보이며 윌리암스는 페인트존을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게임당 12.3개의 리바운드, 평균 15.5점에 야투율까지 58.2%를 기록하며 아이재야 토마스를 밀어내고 '올해의 신인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죠.
데뷔하자마자 어린 나이에 소속팀의 리더가 된 그는 동부 올스타에도 선정됩니다.
사실, 당시 모든 구단의 감독, GM들이 군침을 흘리던 선수였어요. 맨 위에 묘사해 놓은 것처럼, 이런 선수는, 농구 밖에 모르며 혼을 불태우는 선수들이 많았던 옛날에도 찾기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터프한 농구를 하는데도 부상이 없고 체력도 남아 도는 선수, 골밑에서 상대팀 센터와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다가도 속공 찬스만 나면 번개처럼 달려나가 호쾌한 덩크로 속공 피니쉬를 해주는 빅맨, 라커룸의 리더이자 연습시간이나 오프시즌에도 타선수에게 본이 되는 자세만 보여주던 롤 모델, 이런 선수를 어떻게 탐내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윌리암스에겐 그 흔한 '서포모어 징크스'도 없었습니다. 루키 시즌에 이미 모리스 루카스와 함께 리그 최고의 파워 포워드 반열에 오른 그였지만, 프로 2년차엔 모든 부문에서 더 향상된 모습(17.0점, 12.5리바운드, 1.3블락샷, 58.8% 야투율)을 보이며 All-NBA 세컨드 팀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이게 특기할 만한 사항인데... 80년대 초반엔 정말로 훌륭한 포워드들이 많았어서 All-NBA 팀에 선정되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다는 점이지요. 퍼스트 팀 포워드는 항상 래리 버드와 줄리어스 어빙의 차지였기 때문에 어느 포워드라도 All-NBA 세컨드 팀에 뽑힌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영광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자리에 프로 2년차의 블루칼라워커 리바운더가 들어간 겁니다. 그러니 그의 2년 연속 올스타 선정도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죠.
윌리암스가 이끈 뉴저지 넷츠는 84년에 디펜딩 챔피언인 필라델피아 식서스를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업셋시키는 이변을 연출합니다. 윌리암스는 이 시리즈에서 식서스의 센터, 모제스 말론과 매치업이 되기도 했지만, 시리즈 평균 18.6점, 15.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 승리의 1등 공신이 되지요.
85년에도, 86년에도, 87년에도, 88년에도, 그의 스탯에는 도무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때 그의 별명이 영국 런던의 명물 대형 시계탑 '빅 벤'인 적도 있습니다. 평균스탯이 별 오차가 없이 항상 한결같다는 뜻이었습니다. 부상으로 결장하는 법이 없이 매경기 38~40분을 뛰어주며, 야투율은 55~59% 사이, 득점은 16~18점, 리바운드는 첫 7시즌동안 게임당 12개 (4개 이상의 오펜스 리바운드 포함)는 꼭 잡아주던 선수였으니까요.
점프력은 37인치(93센치)에 불과했지만, 호쾌한 덩크를 아주 자주 터뜨려 줬습니다. 코트에서 그가 뛰어다니던 모습을 보면 한 마리의 야수와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별명이 "Wild Cat"이었죠.
파워 포워드란 포지션이 골밑에서 센터를 도우며 몸싸움만 해주는 단순한 역할만을 부여받던 시절, 온갖 궂은 일은 물론, 팀의 득점까지 담당하며 코트 전역에 걸쳐 다이내믹한 플레이를 펼쳐보이던 그의 등장은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1989년에 칼 말론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벅 윌리암스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파워 포워드이며, 동시에 코트에선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선수다. 그가 다른 컨퍼런스에 있어서 다행이다."
벅 윌리암스는 수비력도 훌륭했습니다. 커리어에 걸쳐 올디펜시브 퍼스트팀에 두 번, 세컨드팀에 두 번, 도합 네 번 밖엔 뽑히지 못 했지만, 간발의 차로 세컨드팀을 놓친 게 또 네 번이나 됩니다. 항상 팀을 먼저 생각했고, 라커룸의 리더였으며, 코트 위의 온갖 궂은 일은 도맡아 하는 살림꾼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무슨 마가 끼었는지 그의 팀, 뉴저지 넷츠는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정말로 재능이 넘쳐났던 올스타 장신 포인트 가드, 마이클 레이 리차드슨이 1986년 시즌 중에 약물복용 문제로 리그에서 쫓겨난 후부터 3시즌 내리 드래프트하는 선수마다 실패였고, 트레이드해오는 선수마다 부상으로 앓아 누웠습니다. 오로지 한 선수, 벅 윌리암스만이 자신의 역할을 소처럼 묵묵히 해주고 있을 때였습니다.
성실하고 조용한 수퍼스타, 벅 윌리암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팀의 감독이자 GM, 윌리스 리드(전 뉴욕 닉스의 스타 센터 출신입니다)가 오.로.지. 윌리암스를 제대로 된 팀에서 뛰어보게 해주려고 트레이드를 감행합니다. 팀은 어차피 3시즌 내내 플레이오프에도 못 오르는 팀으로 추락해버린 상태였고, 윌리암스도 나이가 30세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윌리암스를 항상 존경하고 좋아해왔던 포틀랜드의 클라이드 드렉슬러가 팀 프런트를 향해, 벅 윌리암스만 영입해주면 팀을 파이널에 올려놓을 자신이 있다며 강력하게 트레이드를 제안했습니다. 결국, 윌리스 리드와 드렉슬러의 도움(?)으로, 벅 윌리암스는 1989년에 '부상병동' 샘 보위와 트레이드가 되며 젊은 포틀랜드 팀으로 이적을 하게 됩니다.
당시에 이 조용한 트레이드를 눈여겨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벅 윌리암스가 입단하면서 포틀랜드의 농구가 갑자기 강력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워낙에 젊고 운동능력이 뛰어난 선수들만 우글대던 팀이라 벅 윌리암스처럼 경험이 많은 터프가이가 골밑을 완전히 책임져 주자 그 시너지 효과가 엄청나게 불어났던 것입니다. 릭 애들먼 감독이 윌리암스를 '본드'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다 따로따로 놀던 블레이저스의 어린 선수들을 하나로 묶어준 접착제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죠. 드렉슬러는 윌리암스를 '슈가'라고 불렀습니다. 아이스 커피를 마실 때에 마지막에 넣는 액체설탕처럼 팀 전체에 녹아들어 팀의 경기력 전체를 살려주는 선수란 뜻이었습니다.
포틀랜드에 영입이 되자마자 벅 윌리암스는 세 시즌 연속으로 All-NBA Defensive 팀에 선정이 됩니다. 칼 말론, 숀 캠프, 탐 체임버스, 로이 타플리, 오티스 소프, 데이빗 로빈슨, 하킴 올라주원과 같은 득점력 좋은 서부의 올스타 빅맨들을 상대로 그는 맹활약을 합니다. 그리고 2년 연속으로 야투 성공률 1위의 자리에도 오르게 되지요.
팀의 성적도 그에 비례했습니다. 1990년에 59승의 성적으로 파이널 진출, 1991년엔 리그 최고의 승률인 63승과 함께 서부 결승 진출, 92년에도 파이널 진출... 비록 팀을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 했지만, 그가 합류하기 전까진 네 시즌 연속으로 1라운드에서 탈락하던 팀이 포틀랜드였음을 감안해 보면 그의 팀 합류가 가져온 위력이 얼마나 컸는 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되지요.
대신, 포틀랜드에 합류하면서 벅 윌리암스는 스스로 롤플레이어가 됐습니다. 팀에 뛰어난 득점원이 많았고, 모두들 열심히 해보자는 의지 또한 강했기 때문에 윌리암스는 철저히 자신을 죽이며 골밑 수비와 리바운드에만 신경을 씁니다. 그래서 90년대의 그가 별다른 재능이 없이 골밑에서 몸싸움만 해대는 '노가다' 선수의 이미지로 굳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89년과 90년에 나온 대부분의 권위있는 농구잡지들 - 이를테면 Basketball Digest, ESPN Pro Basketball, Street & Smith's Pro Basketball, The Sporting News 등등 - 에선 80년대 최고의 파워 포워드로 윌리암스를 선정하는 데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80년대는 찰스 바클리, 칼 말론, 케빈 맥헤일이란 역대급 파워 포워드들 3인이 쏟아져 나온 시기이기도 했으나 (물론, 윌리암스도 동포지션 역대 10위 안에 드는 선수입니다만) 이들의 전성기의 시작은 80년대 중반이나 후반이었죠. 윌리암스의 경우는 81년 데뷔시즌을 시작으로 10년 이상 꾸준히 그 전성기 기량이 유지된 케이스이기 때문에 80년대만 놓고 봤을 때는 윌리암스가 최고였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어느 특정한 시기를 떠나 윌리암스의 플레이 스타일이란 것이 어느 팀에 가든 완전히 녹아들 수 있었고, 이 선수의 내구성이나 이타적인 자세, 성실함, 운동능력 등이 많은 선수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자산이었음을 볼 때, 이러한 부분들만 놓고 봐도 참으로 '완소'의 대표적인 선수가 아니었겠나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윌리암스는 커리어 통산 오펜스 리바운드가 4,526개로 모제스 말론과 로버트 패리쉬 다음인 역대 3위에 랭크되어 있습니다. 4위가 데니스 로드맨이고 5위가 찰스 바클리입니다. 그의 진정한 선수로서의 가치는, 수비 시엔 상대팀 빅맨들에게 절대로 자리를 내주지 않는 포기할 줄 모르는 박스아웃 근성, 그리고 공격 시엔 끊임없이 도전하는 공격 리바운드에 대한 불굴의 투지에 있었습니다. 정신력, 체력, 내구력, 이 세 가지가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면서 그를 위대한 블루칼라워커형 파워 포워드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17년 동안 1,300 여 게임에 출전한 벅 윌리암스는 13점, 10리바운드, 그리고 55%의 야투율을 커리어 평균으로 기록했습니다.
90년대 초반, 원조 드림팀이 결성됐을 때, 그 팀의 사령관이었던 척 데일리 감독이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비록 이 드림팀에 뽑히지는 못 했지만, 이 팀에 어울리고, 또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들어오는 것이 그야말로 마땅한 선수를 하나만 더 뽑으라면, 저는 주저없이 벅 윌리암스를 뽑겠습니다." 자신의 선수인 아이재야 토마스가 팀에 선정되지 못 했는데도, 척 데일리 감독은 이러한 말을 남겼습니다. 벅 윌리암스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타선수들 사이에서도 덕망이 높았던 윌리암스는 90년대 현역시절에 NBA 선수협회 노조위원장으로서 활약하며 선수들과 협회 사이에 생겨날 수 있는 갈등을 최소화시키는 역할도 참 잘 해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990년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피닉스 선즈와의 6차전 원정경기에서 마지막 결정적인 스틸과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팀을 파이널에 올린 그가 공을 체육관 천정을 향해 높이 던져 올리는 순간, 모든 블레이저스 선수들이 그를 코트 바닥 위에 눕히고 덮치며 기뻐하던 모습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파이널 진출이 확정되고, 라커룸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며 자축하는 블레이저스 선수들에게로 중계 캐스터가 인터뷰를 위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드렉슬러에게 질문했습니다.
캐스터: "현재 기분이 어떠십니까?" 드렉슬러: "벅 윌리암스!" 캐스터: "예. 올 시즌, 벅 윌리암스 선수의 활약이 정말 컸습니다. 그렇죠?" 드렉슬러: "벅 윌리암스!" 캐스터: "파이널 전망을 어떻게 보시는 지...?" 드렉슬러: "벅 윌리암스! 포틀랜드, 예에 ~ !!!"
벅 윌리암스의 수상경력
요즘은 왜 이런 '쾌남' 파워포워드가 나오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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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벅윌리암스가 이런 선수였군요.. 많이 배웁니다. 그리고 닥터제이님의 내공에 경의를 표합니다... 님 덕분에 너무나 많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좋은글 정성이 깃든 글 잘읽었습니다. 닥터J님 글 읽다보면 벅 윌리암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신 것 같습니다. 덕분에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도 알게되고 감사드려요 ^^ 우승반지만 있었어도 평가가 더 올라갔을텐데 말이죠. 몸싸움 대단하네요. 저도 저런 블루워커들 참 좋아합니다.
항상 느끼지만 아는게 너무 많으신 거 같습니다. j님은 ㅎ
별 말씀을... 짬밥만 조금 더 많을 뿐입니다.^^;
정말 좋은글...너무나 감사합니다.^^
마지막 드렉슬러의 말이 찡하네요. ㄷㄷ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읽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안타깝네요 드렉슬러와 벅 윌리엄스의 조합이 우승까지는 못이어졌다는게...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이런선수군요.
90년의 블레이저스가 정말 강했었는데, 디펜딩 챔피언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풍부한 플레이오프 경험과 노련하고도 터프한 수비의 벽 앞에 무너졌고, 91년엔 리그 최다승수를 올렸으면서도 컨파에서 매직 존슨의 리더쉽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92년엔 막강한 디펜딩 챔피언 시카고 불스와 맞닥뜨려 졌고요. 만약, 91년에 불스와 블레이저스가 파이널에서 만났다면 블레이저스가 아주 좋은 모습을 보여줬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우승도 가능했을 것으로 보거든요. 그리고, 사보니스가 3~4년만 일찍 NBA에 왔었더라면 하는 생각도 떠나질 않네요. 뭐, 다 지난 일이지요.
감사합니다 또하나의 레전드를 배웠네요 , 정말 요즘은 이런 선수가 없는거같아요, 그나마 가넷이 보스턴가면서 이런모습 보이는거같기도하고요
전 커리어에 걸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선수를 찾기가 힘이 듭니다.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보스턴의 가넷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최근 들어 안토니오 맥다이스도 이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좋은 글이네요.
문제?를 보고 덩컨...? 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빗나갔네요 ㅎㅎ;;;
우와! 벅 윌리엄스가 이런 굉장한 선수였군요! 저는 포틀랜드 시절 고글을 쓰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때만 봐서, 호레이스 그랜트와 비슷한 유형의 수비타입의 블루워커인줄로만 알았는데...80년대 전성기때의 모습은 충격적입니다! 정말 본받을만한 모범이 되는 멋진 선수네요!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
중3때인 92~93시즌부터 nba를 제대로 보기 시작했는데 솔직히 벅윌리엄스를 눈여겨 본것은 포틀에서 닉스로 넘어올때부터 였죠~그때는 전형적인 블루워커였고, 득점보다는 수비와 굳은일을 하는 식스맨으로 많이 나왔었는데 그립네요^^
윌리암스가 닉스에 갔을 때는 이미 38세였습니다. 벤치에서 나와 유잉과 오클리를 백업하는 역할만 했었죠. 유잉과 모닝이 모두 결장했던 98년 마이애미와의 5차전에 센터로 선발출장해서 12점, 14리바운드로 맹활약하며 닉스를 2라운드로 진출시키던 모습이 떠오르는군요.
위에 공지한 글을 보니 가넷이 딱 떠올랐는데 히힛 모르던 진주같은 선수를 알게되었네요.
이런 카페가 있어서 잘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선수도 소개할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이런선수였군요 좋은 정보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