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잠잔다"
"잠꾸러기~"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세수한다"
"멋쟁이"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밥먹는다"
"무슨 반찬~"
"개구리 반찬"
"살았니? 죽었니?"
"살았다!"
이때 뒤돌아 앉아있던 술래가 아이들을 향해 쫓아가고
나머지는 모두 우르르 도망을 간다.
어린시절 동네에서 아이들과 해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놀았던 우리의 전래놀이다.
우리나라에는 여우고개라고 불리는 고개가 많다.
이런 지역은 대부분 인적이 드물고 산세가 험한 곳으로
예로부터 여우의 출몰이 잦았던 곳이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여우고개는 관악산 자락의 남태령(南泰嶺)이다.
지금의 남태령은 경기도 과천과 서울을 잇는 큰 길이다.
옛날에는 한두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길이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이 골짜기에 천년 묵은 여우가 살았다고 한다.
사람으로 변신한 여우가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해쳤다고 해서
여우골로 불렸다고 한다.
'과천부터 긴다.’
삼남대로의 마지막 길목인 과천에 도달한 촌뜨기들이
한양의 위세에 눌려 지레 기어서 생겼다는 속담이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큰 벼슬을 하던 안락공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과천에서 살게 되었다.
안락공은 많은 길손 중에서도 과거를 보러 가거나
벼슬을 얻을까 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사람이
인사를 하지 않으면 못 지나가게 하였다.
“나를 도대체 어떻게 보는 거야,
무례한 놈이라고 왕에게 보고하고 말겠다.”
이렇게 말하는 안락공에게 길손들은 인사를 하였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서울에 가려는 사람들에게 과천을 지날 때
안락공에게 인사를 하지 않으면 혼이 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길손들이 인사를 하려고 지체하니
자연 과천에서 머물러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다 보니 여관 겸 밥집인 술막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대수롭지 않은 벼슬로 아니꼽게 권세를 부리면
‘과천 현감이라도 되나?’라는 빈정거림이 최근까지도 있었다.
이들 전해오는 이야기를 보면 길손에 대한 과천에서의 횡포는 대단했던 듯하다.
남태령 옛길은 한양에서 삼남(충청·전라·경상도)으로 통하는 유일한 도보길이었다.
이곳을 지나 수원·안성을 거쳐 남쪽으로 갔으며,
반대로 과천에서 이 고개를 넘어
사당동·동작동·흑석동을 거쳐 노들나루(노량진)에서 한강을 건너 한양에 이르렀다.
남태령 옛길은 삼남(충청, 전라, 경상)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으로서
과거 보러 한양가는 길 역할을 한 곳이다.
서울로 가는 고갯길, 남태령을 향하여 완만하게 오른다.
자동차 달리는 신작로가 생기면서 남태령 옛길은 사라졌다.
서울쪽은 완전히 없어졌다.
과천쪽에 짧은 거리나마 옛길이 남았다.
오른쪽 2차선 도로가 바로 그 길이다.
물론 옛날엔 길도 이보다 좁고 흙길이었을 것이다.
그 흔적따라 걸어올라간다.
조선시대를 되짚어 생각한다.
과천에서 이 고개를 넘어 사당 동작 흑석동을 거쳐
노량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남태령은 지방의 물산이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고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길이기도 했다.
포장도로가 끝나고 좁은 오솔길이 나타난다.
이 숲길이 진짜 옛길이다.
남태령 옛길에 위치한 과천루에 서면 좌우로
청계산과 관악산이 감싸고 있는 과천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과천 팔경중 제5경 남령망루(南嶺望累)는
‘남태령 망루에서 바라보는 과천’을 말한다.
조선 후기의 학자 신경준은 “길에는 주인이 없다.
그 위를 가는 사람이 주인일 뿐이다” 라고 하였다.
이 고개의 본디 이름은 여우가 많이 출몰한다 하여 '여우고개'라 했다.
정조임금이 수원에 모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원을 참배하러 갈 때
이 고개에서 쉬면서 이름을 물었다.
이때 과천현의 이방 변씨가 임금께 속된 이름을 아뢸 수 없어
임기응변으로 '남태령(南泰嶺)'이라 하였다.
'남쪽으로 가면서 처음 맞는 큰 고개'라 뜻이었다.
이때부터 고개이름이 남태령이 됐다는 일화가 전한다.
또 다른 이름으론 '쉬네미 고개'라고도 했다고 한다.
고개에 출몰하는 산적들로부터 강탈을 당하지 않으려면
쉰 명이 모여서 관군의 호위를 받아 넘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관군들이 그냥 호위해 주는 게 아니라
보호명목으로 과다한 뇌물을 챙겨
이래저래 민간인들은 씁쓸한 수탈을 당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