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 진사 권공 행장(進士權公行狀)
공은 휘가 극중(克中)이고 자가 정지(正之)이고 호가 청하(靑霞)이니 안동(安東) 사람이다. 고려(高麗) 때의 이름난 재상 한공(漢功)의 후손으로 고조부 관(寬)은 의금부 경력을 지냈고, 증조부 사형(士衡)과 조부 만영(萬英)은 모두 사마를 지냈으며, 부친은 준(俊)이고, 외조부 함열(咸悅) 남궁희(南宮憘)는 사섬시 정을 지냈다.
공은 만력(萬曆) 을유년(乙酉年, 1585, 선조 18)에 고부(古阜)의 송산(松山)에서 태어났다. 집안사람의 꿈에 구슬을 엮어 장식한 옷을 입고 있는 어린아이 꿈을 꾸었는데 그 구슬 장식이 모두 문자를 이루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여 말을 배우자마자 곧 글을 읽었으며 장난을 즐기지 않았다.
6, 7세 때 말을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하여 신동(神童)이라 불렸다. 임진왜란 때 피난 가는 도중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공이 당시 어린 나이임에도 전쟁 통이라고 해서 예법을 잃지 않았다. 떠돌다가 관동(關東)에 우거하였는데《초사(楚辭)》한 책을 지니고 다니면서 밤낮으로 송독하였으니, 공의 시격(詩格)은 여기에 근원한 것이다.
난리가 끝나자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와 석계(石溪) 최명룡(崔命龍) 공에게 수학하여 성리(性理)와 관련된 여러 서적들을 모두 읽었다. 석계가 말하기를,
“문장도 몰라서는 안 된다.”
하고, 또 장성(長城)에 가서 현주(玄洲) 조찬한(趙纘韓)에게 수학하도록 하니 현주가 훌륭한 글솜씨라고 칭찬하였다.
석주(石洲) 권필(權韠) 공이 공의〈장홍(長虹)〉시(詩)를 읽었는데, “어떻게 하면 용천(龍泉)의 긴 보검으로 바꾸어, 결의를 다지고 천지의 간웅을 주벌할 수 있겠는가.〔安得化作龍泉一長劒, 唾手天地誅奸雄.〕”라는 구절에 대해 무릎을 치고 찬탄하였다.
16세에 석계를 통하여 사계(沙溪) 선생에게 인사를 드렸는데, 공이 견식이 명석하여 속학(俗學)의 부류가 아니라고 석계가 말하여 선생이 그대로 수 개월 머물도록 하였는데, 공이 변석하고 질정한 것이 많았다.
《중용장구》의 계신공구(戒愼恐懼)에 대해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을 겸한 것으로 간주하고, 하늘이 명한 성(性)은 생명이 있는 것은 똑같이 가지고 있으니 맹자(孟子)가 개와 소의 성(性)을 설명한 것은 다만 기질(氣質)의 관점에서 말한 것일 뿐이라고 논한 데 이르러서는, 선생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내가 평생 깨달은 것은 이 말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임자년(壬子年, 1612, 광해군 4)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별시 전시(別試殿試)에 응시하러 가는 길에 석계에게 들렀는데 석계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계 선생이 조문을 왔다가 상례(喪禮)를 공에 맡기자 공이 정성과 의식을 모두 극진히 행하고 그대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며, 3년 동안 남의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중간에 성균관에서 유학하였는데 시세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옷을 떨치고 돌아왔다.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서궁(西宮)에 유폐된 변고를 듣고서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이때부터 출사할 생각을 접은 채 문을 닫고 독서하였다. 시사를 언급할 때면 그때마다 강개한 마음이 일어 눈물을 흘렸다.
평소 몸가짐이 단정하고 엄숙하였는데 좌우에 도서를 두고 고명하게 사색하며 종일토록 묵묵히 앉아있으니, 남들이 그 끝을 헤아릴 수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배우는 자는 밤에 암송하는 공부 과정을 두어야 크게 진보할 수 있다.”
하였다.
생각이 나면 그때마다 빨리 기록하였는데 늙어서도 깨알 같은 글씨를 쓸 수 있었다. 항상 제생들과 더불어 음양(陰陽)과 성정(性情)의 덕과 고금에 인물의 출처와 득실에 대해 강론하였는데 명백하고 통쾌하여 듣는 이들이 흔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또 간간이 마음이 통하는 이와 만나면 산수를 담론하고 문장을 평론하기도 하였으며, 술이 조금 오르면 호탕하게 노래하며 훌훌 속세를 벗어나려는 심사가 있었으니, 당시에 호중(湖中)의 고매한 선비를 말할 때면 반드시 공을 으뜸으로 꼽았다. 공에게 배운 선비들 중에 권면하여 성취시킨 이들이 또한 많았다고 한다.
공은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 백석(白石) 유집(柳楫)과 도의(道義)로 사귀었으며, 중년에는 순창(淳昌)의 오산촌(鰲山村)에 우거하여 제호(霽湖) 양경우(梁慶遇)와 함께 시와 술을 즐기며 종유하였다. 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 공이 김제 군수(金堤郡守)가 되었는데, 공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남쪽으로 내려와 군수가 되어 다행인 점은 그대의 거처가 가까운 것이네.”
하였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공이 공에게 부친 시에,
호남의 권극중에게 한마디 말 부치노니 / 寄語湖南權克中
하늘로 치솟는 그 의기 본디 호걸이었네 / 凌雲意氣本豪雄
하였다.
공이 사우(士友)에게 존중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공은 두 형을 잘 섬겼는데 밤마다 침상을 맞대고 화락하게 지냈으며 형이 잠들지 않으면 감히 물러나지 않았다. 큰형이 성미가 엄하고 급하여 때때로 심하게 화를 내었는데 공은 반드시 관을 벗고 문밖에 서 있다가 화가 풀리면 비로소 물러났다.
한번은 민가에 묵었는데 주인의 어린 딸이 밤을 틈타 와서는 말하기를,
“계모가 나쁜 사람이라 어르신을 따라갔으면 합니다.”
하니, 공이 엄하게 나무라며 회초리를 쳤다.
마침 그 집에 도둑이 들어 솥을 훔치고 있었는데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에 그것을 두고 떠났다가 길가에서 공에게 절하고 죄를 청하였다. 품행이 집안에서 닦여지고 남들에게 믿음을 받음이 또한 이와 같았다. 공은 75세의 나이에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앞두고 슬퍼하는 마음이 없이 손발을 씻고 의관을 정제하고 새 대자리에 누워서 세상을 떠났다. 염습(斂襲)과 장례(葬禮)를 검소하게 치르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난리 중에 모친을 제대로 장사 지내지 못하여 죽을 때까지 한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공의 부인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한량(漢良)의 딸이다. 외아들 상신(相信)을 두었고, 상신의 아들은 덕수(德壽)이고 딸은 김익명(金益明)에게 시집갔다. 익(榏), 환(桓), 숙(橚), 욱(㮋)은 덕수의 아들이다. 김익명의 아들은 상도(尙道)이고, 박치원(朴致元)과 김수현(金壽顯)은 사위이다.
공은 일찍이 송(宋)나라, 명(明)나라, 우리나라 유현(儒賢)의 문집 가운데 요체가 되는 말을 모았으며, 또 《독서록(讀書錄)》 한 책, 〈중흥십조(中興十條)〉,〈만세사업설(萬世事業說)〉,〈경연의대팔조(經筵擬對八條)〉,《역대사요(歷代史要)》,《참동계주해(參同契註解)》등의 여러 책을 저술하였으니 집에 보관되어 있다. 정승 민진원(閔鎭遠)이 호남 관찰사를 지낼 적에 공의 문집을 가져다 세상에 간행하였다.
공은 천성이 청명하고 재능이 남달랐다. 문사(文辭)에 있어선 배우지 않고도 솜씨가 뛰어났는데 다만 본 바가 컸기 때문에 여기에 힘쓰지 않았다. 만년에는 내면을 채우고 기르는 데 방도가 있었으며 화순하고 온후하여 기상이 매우 좋았다.
견식이 넓고 실천이 독실했던 것은 남들이 미치지 못할 바인데 공을 아는 세상 사람들은 문장지사(文章之士)라고만 말하니 아, 참으로 말엽적인 것이다. 그러나 공이 평생 저술한 것 또한 불후하게 전해지기 충분하니 후세의 양자운(揚子雲)이 없으리라 걱정하지 않는다. 살아서 부귀했으나 죽어서 이름이 민멸되어 일컬어지지 않는 자에 비하면 어떠하겠는가.
나의 조부 의정 부군 형제가 소싯적에 공의 조카 진사 상훈(相勛)에게 시를 배웠으니, 이 때문에 공의 덕과 행실을 매우 자세히 들었다. 지금 공의 족손 추(樞)의 부탁으로 위와 같이 대략 서술하여 세상의 입언군자(立言君子)를 기다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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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진사 권공 행장 :
저자가 권극중(權克中, 1585~1659)을 위해 쓴 행장이다.
[주02] 맹자(孟子)가‥‥것 :
《맹자》〈고자상(告子上)〉에 나오는 내용이다. 고자(告子)가 “생(生)이 곧 성(性)이다.”라고 하여 생의 본능과 인간의 본성을 동
일시하는 주장을 펼치자, 맹자(孟子)가 반박하기 위해 “백우(白羽)의 백색이 백설(白雪)의 백색과 같으며, 백설(白雪)의 백색이 백
옥(白玉)의 백색과 같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차례로 던진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해 고자가 “그렇다.”라고 대답하자, 맹자는 “그렇다면 개의 성(性)이 소의 성(性)과 같으며, 소의 성(性)이 사람
의 성(性)과 같단 말인가?”라고 반문하면서, 고자의 주장이 틀렸음을 최종적으로 확인한다.
[주03] 후세의 양자운(揚子雲) :
그 저술에 대해 올바르게 평가해 줄 안목을 갖춘 후세 사람을 뜻한다. 자운(子雲)은 한(漢)나라 때의 양웅(揚雄)을 가리키는데, 그가
《태현경(太玄經)》을 지었을 때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비웃자 이르기를, “세상이 나를 믿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후세에 다시 양
자운이 있다면 반드시 이 책을 좋아할 것이다.” 하였다.《御定唐宋文醇 卷3 昌黎韓愈文4 與馮宿論文書》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