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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문집보유 제1권 / 비지류(碑誌類)
좌의정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증시(贈諡) 강헌(康憲)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
철성의 이씨는 고려의 대족이다. 휘 진(瑨)이라는 분이 있어 과거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고 덕을 베풀어 후손에게 남겼다. 감찰대부(監察大夫) 휘 존비(尊庇)를 낳으니, 문장으로 이름이 나 현달하였다. 철성군(鐵城君) 휘 우(瑀)를 낳으니, 일을 처리하는 능력으로 인해 회주(淮州), 금주(金州), 전주(全州), 진주(晉州) 등 여러 주의 지방관을 역임하였으며, 이르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어 떠난 뒤에도 백성의 사랑을 받음이 많았다.
문하시중(門下侍中) 휘 암(嵓)을 낳으니, 충정왕(忠定王)을 섬겨 좌정승(左政丞)이 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자신의 뜻을 지켜 사직하였다가 공민왕(恭愍王) 때에 다시 재상이 되었고, 기해년(1359, 공민왕8)에 모적(毛賊)이 서관(西關)을 침범했을 때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승리로 이끈 공로가 있었으니, 장수와 재상의 재주를 겸비하여 공명이 세상을 덮었다.
시작(詩作)은 또한 간고(簡古)하였고, 진서(眞書), 초서(草書), 행서(行書)의 세 가지 서법은 모두 절묘하였으니, 졸하자 시호를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휘 강(崗)을 낳으니, 아버지의 풍도(風度)가 있어 사람들이 모두 공보(公輔)가 될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일찍 죽었다. 벼슬은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신축년(1361, 공민왕 10)에 홍건적의 변란이 일어나자 공민왕이 갑작스럽게 남쪽으로 파천하였는데, 공이 경상도 안렴사가 되어 받들어 맞이하는 위의(威儀)와 호위(護衛)가 매우 성대하고 접대하는 모든 물품이 충분하니, 사람들이 모두 떠들썩하게 칭찬하였다.
왕이 매우 중한 그릇으로 여겼는데, 마침내 졸하자 왕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하늘은 어찌 이리도 빨리 내 산을 빼앗아 가는가?”하였다.
옛날 제도에 추밀(樞密)은 시호가 없었는데, 특별히 시호를 문경(文敬)이라고 하였다. 부인 곽씨(郭氏)는 판개성(判開城) 곽연준(郭延俊)의 딸이다. 홍무(洪武) 무신년(1368) 1월 모 갑자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원(原)이고, 자는 차산(次山)이고, 호는 용헌(容軒)이다. 처음에 공이 태어나 4개월 만에 문경이 졸하니, 곽 부인이 항상 공을 안고 슬피 울며 말하기를, “하늘이 만약 이씨 집안에 복을 준다면 분명 이 아이에게 있을 것이다.”하였다.
공은 어릴 적부터 숙성하여 어른 같았고, 조금 자라자 힘써 공부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의 누이인 권 문충공(權文忠公 권근(權近))의 부인 이씨가 일찍 아버지를 여읜 공을 가련하게 여겨 보살피기를 자기 자식같이 하였고, 문충도 가르치기를 자식같이 하였다.
학문이 날로 성취되어 글을 지으면 작자(作者)의 기운이 있었고, 토론을 할 때면 매번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문충이 놀라 말하기를, “우리 장인어른이 죽지 않았다.”하였다. 공은 나이 15세에 임술년(1382, 우왕8)의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하였다.
을축년(1385, 우왕11)에 포은(圃隱) 정 문충공(鄭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이 주관하는 시석(試席)에서 공이 장원급제하자 포은이 말하기를, “문경의 재주와 덕이 크게 베풀어지지는 못했으나 지금 아이가 이와 같으니 하늘의 보시(報施)는 참으로 징험이 있도다.”하였다.
무진년(1388)에 사복시 승(司僕寺丞)에 제수되고,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공조와 예조의 좌랑, 병조 정랑을 지냈다. 임신년(1392, 태조 1)에 태조가 개국하여 공의 현능함을 큰 그릇으로 여기고 다스리기 힘든 큰 고을을 여러 차례 맡겼다.
세 번 대각(臺閣)에 들어가 지평(持平)이 되고 시사(侍史)가 되고 중승(中丞)이 되었는데, 굳세고 바르게 스스로 지조를 지키니, 대각이 위엄이 있고 당당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양근 군수(楊根郡守)가 되어서는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다. 재차 전교(典校)가 되고, 문한(文翰)을 담당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성대한 명성이 있었다.
공정왕(恭靖王)이 공을 발탁하여 우부승지로 삼았는데, 보고를 자세하고 분명하게 하며 왕명의 출납을 오직 진실하게 하니, 좌부승지로 올렸다. 태종이 즉위하여 공을 그대로 후설(喉舌)에 두고 아끼고 돌아보기를 더욱 독실하게 하였으며, 좌명(佐命)의 공훈으로 논하여 철권(鐵券)을 하사하고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하고 철성군에 봉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경기 관찰사가 되었는데, 사람을 쓰고 버림이 엄격하고 분명하여 횡포하고 교활한 자들이 두려워 몸을 사렸다.
영락(永樂) 계미년(1403, 태종3) 여름에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가 고명(誥命)을 하사하였으므로 경사(京師)로 가서 사은하였다. 겨울에 외직으로 나가 평양 부윤(平壤府尹)이 되었다. 평양부는 예로부터 고을이 크고 일이 많아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어진 곳이다.
공이 편안히 어루만져 적절하게 처리하니, 정사가 매우 잘 다스려졌다. 이때 한창 대동관(大同館)을 수리하고 있었는데, 공이 백성의 소요를 염려하여 속관을 거느리고 직접 재목과 기와를 나르니, 백성이 즐겁게 일에 임하여 빠른 시일에 수리를 완료하였다. 부윤으로서 서북면 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를 겸하였다.
병술년(1406, 태종 6)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제수되고, 중군총제 참지의정부사(中軍摠制參知議政府事)로 옮겼다가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고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옮겼다. 무자년(1408)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고, 계사년(1413)에 동북면 도순문찰리사가 되었다. 을미년(1415)에 추충익대좌명 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의 호로 고쳐 하사받고, 예조 판서로 올랐다가 얼마 안 되어 대사헌으로 옮겼다.
이에 이르러 모두 세 번 헌장(憲長)이 되었는데, 안색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 서서 악을 배척하고 선을 장려하니, 바른말을 하는 데에 헌신(憲臣)의 체모가 있었다. 판한성부사로 바뀌고, 이조와 병조의 판서, 의정부 참찬으로 여러 번 옮겼다가 찬성사(贊成事)로 승진하였다.
무술년(1418, 세종 즉위년)에 세종이 즉위하여 우의정으로 발탁하고, 공신호에 동덕(同德) 2자를 더 하사하였다. 기해년(1419)에 문황제가 고명과 관복을 하사하였으므로 공이 표문(表文)을 받들고 경사로 가서 사은하였다. 공은 자태가 훤칠하여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대단히 눈에 띄었다. 황제가 보고 특출하게 여겨 말하기를, “황염 재상(黃髥宰相)은 후에 꼭 다시 오시오.”하였다.
신축년(1421)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과거 시험을 주관하여 안숭선(安崇善) 등 33인을 뽑았는데, 당시에 인재를 잘 뽑았다는 칭송이 있었다. 을사년(1425)에 선종 장황제(宣宗章皇帝)가 등극하였으므로 경사로 가서 진하(進賀)하였다.
공은 참지정사를 시작으로 묘당(廟堂)에 출입한 세월이 20여 년이고 수상(首相)을 지낸 세월이 9년인데, 정무(政務)를 관대하게 처리하여 바꾸고 확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대체(大體)를 유지하였다. 세종이 뜻을 가다듬어 처음 정치를 할 때를 맞아 마음을 다해 보좌하고 의견을 개진하여 도움이 크고 많았다.
조정이 그 풍모를 사모하여 우러러보았으나 공은 또한 차고 넘치는 것을 경계하여 몇 년 전부터 사직을 청하려고 하였다. 이에 앞서 공을 시기하는 자가 있어 공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잘못을 탄핵하였으나 태종이 친히 죄를 벗겨 주었다. 태종이 훙하자 공을 시기한 자가 전의 감정을 품고서 대각을 부추겨 공을 죽이려고 하였다.
세종은 공이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대신(臺臣)의 청을 어기기가 어려워 여산군(礪山郡)으로 귀양 보내니, 이때가 병오년(1426, 세종 8) 봄이다. 세종이 옛날의 공훈을 생각하여 돌아보고 살펴 주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큰일을 논의할 때마다 반드시 말하기를, “철성이 있었으면 반드시 처리했을 것이다.”하였다.
얼마 안 되어 공을 불러들여 다시 재상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공을 시기하는 자가 다시 저지하였다. 기유년(1429) 여름에 병으로 졸하니, 향년이 62세이다. 세조가 직첩(職牒)과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도로 하사하였다. 공은 도량이 넓고 성품이 충정(忠貞)한 데다 바른 학문으로 보조하였기 때문에 논의에서 발언한 것과 사업에 시행한 것들이 성대하게 볼만하였다.
평소 사람들과 말할 때면 속이고 꾸민 적이 없었으며 또한 모나게 애안(崖岸)을 두어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기지도 않았거니와 큰일에 임하여 결정할 때면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아 마치 산악처럼 우뚝하였다. 인사를 담당했던 10여 년 동안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위주로 선발하고 여탈(與奪)을 사적인 감정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진짜 태평재상(太平宰相)이었다. 애석하다.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 세종의 새롭게 하는 다스림을 도와 이루지 못했으니, 또한 운명이다.
공의 첫 번째 부인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전리사 판서(典理司判書) 허금(許錦)의 딸이다. 1남 2녀를 낳으니, 대(臺)는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이며, 장녀는 주부(主簿) 유방선(柳方善)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부정(副正) 유급(柳汲)에게 시집갔다.
두 번째 부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봉상대부(奉常大夫) 군기 총랑(軍器摠郞) 최정지(崔丁智)의 딸이니, 변한국대부인(弁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6남을 낳으니, 곡(谷)은 대호군(大護軍)이고, 질(垤)은 한성 소윤(漢城少尹)이고, 비(埤)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이고, 장(場)은 상호군(上護軍)이다. 질과 비와 장은 모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당시 사람들의 칭송이 있었다.
증(增)은 행 영산 현감(行靈山縣監)이고, 지(墀)는 행 대호군 겸 승문원참교(行大護軍兼承文院參校)로 정축년(1457, 세조3) 문과에 급제하였다. 4녀를 낳으니, 장녀는 첨지(僉知) 윤삼산(尹三山)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구례 현감(求禮縣監) 이굉식(李宏植)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좌의정 권람(權擥)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 황종형(黃從兄)에게 시집갔다.
대(臺)는 목사(牧使) 권상(權詳)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으니, 월(越)은 첨지이고, 신(晨)은 부정(副正)이고, 의(嶷)는 첨지이고, 경(庚)은 주부이며, 3녀를 낳으니, 장녀는 함양군(咸陽君) 이희(李䛥)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현감 정자숙(鄭自淑)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첨정 이집(李諿)에게 시집갔다.
곡(谷)은 사예(司藝) 이양명(李陽明)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으니, 장녀는 부윤(府尹) 강희안(姜希顔)에게 시집갔는데 자식이 없고, 차녀는 생원 남전(南恮)에게 시집갔다. 질(垤)은 장령 정지당(鄭之唐)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으니, 준(準)은 현감이고, 칙(則)은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인데 임오년(1462)에 급제하였으며, 6녀를 낳으니, 장녀는 현감 조정로(趙廷老)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군수 박후(朴堠)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현감 허형(許蘅)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부사 이시보(李時珤)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지중추원사 김순(金淳)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참봉 경상(慶祥)에게 시집갔다.
비(埤)는 현감 윤환(尹煥)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의(儀)를 낳으니 선략(宣略)이고, 1녀는 생원 정순언(鄭純彦)에게 시집갔으며, 후취로 수의 교위(修義校尉) 오천(吳泉)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으니 위(偉)이고, 2녀를 낳으니 어리다. 장(場)은 군사(郡事) 이규(李糾)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으니 곤(崑)과 헌(巚)이고, 1녀는 남형(南衡)에게 시집갔다.
증(增)은 관찰사 이희(李暿)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으니, 현감 평(泙), 진사 굉(浤), 사(泗), 빈(濱)이며, 2녀를 낳으니, 장녀는 조동호(趙銅虎)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어리다. 지(墀)는 정보(鄭保)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으니, 륙(陸)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인데 갑신년(1464, 세조10)에 장원하였고, 진사 수(陲)와 습(隰)과 맥(陌)이다.
유방선(柳方善)은 2남을 낳으니, 장남은 유윤유(柳允庾)이고, 차남 유윤겸(柳允謙)은 전교시 교리(典校寺校理)이며, 5녀를 낳으니, 장녀는 방준(房峻)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김영견(金永堅)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최영조(崔榮祖)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군수 김원신(金元信)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허식(許植)에게 시집갔다.
유급(柳汲)은 2남을 낳으니, 유종경(柳從京)은 순창 군수(淳昌郡守)이고, 유종화(柳從華)는 종성 부사(鍾城府使)이다. 윤삼산(尹三山)은 6남을 낳으니, 윤오(尹塢)는 상호군(上護軍)이고, 윤당(尹塘)은 보공장군(保功將軍)이고, 윤호(尹壕)는 양주 목사(楊州牧使)이고, 윤해(尹垓)는 현감이고, 윤탄(尹坦)은 상호군이고, 윤파(尹坡)는 직장(直長)이며, 3녀를 낳으니, 장녀는 첨지 박매(朴梅)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서림정(西林正) 이지(李忯)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청원정(靑原正) 이림(李霖)에게 시집갔다.
이굉식(李宏植)은 5남을 낳으니, 현감 이맹희(李孟禧), 어모(禦侮) 이중희(李仲禧), 찰방 이계희(李季禧), 부정(副正) 이영희(李永禧), 이익희(李益禧)이며, 딸은 주부 김예중(金禮重)에게 시집갔다. 권람(權擥)은 2남을 낳으니, 권걸(權傑)은 길창군(吉昌君)이고, 권건(權健)은 진사이며, 7녀를 낳으니, 장녀는 청원군(淸原君) 한세귀(韓世龜)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경력(經歷) 박사화(朴士華)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감찰 신억년(申億年)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주부 김수형(金壽亨)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좌랑(佐郞) 신수근(愼守勤)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참봉 민사건(閔師騫)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신말평(申末平)에게 시집갔다. 황종형(黃從兄)은 3남을 낳으니, 생원 황관(黃瓘), 황찬(黃瓚), 황규(黃珪)이다.
월(越)은 2남을 낳으니, 상호군 적손(嫡孫)과 사손(嗣孫)이다. 신(晨)은 1남을 낳으니, 금(嶔)이다. 의(嶷)는 3남을 낳으니, 필(珌)과 완(琬)과 탁(琢)이다. 경(庚)은 5남을 낳으니, 정(精)과 준(遵)과 질(質)은 모두 생원이고, 박(博)은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고, 규(逵)는 진사이다. 준(準)은 1남을 낳으니, 영(英)이다. 칙(則)은 2남을 낳으니, 졸(拙)과 - 1자 결락 - 이다. 의(儀)는 1남을 낳으니, 풍(豐)이다.
평(泙)은 2남을 낳으니, 효윤(孝胤)과 충윤(忠胤)이다. 륙(陸)은 2남을 낳으니, 이(峓)와 험(嶮)이다. 내외의 증손과 현손이 100여 인이나 된다. 처음 공이 졸하고 3일 뒤에 최 부인 역시 졸하였다. 광주(廣州) 관내 서쪽 율촌(栗村) 이좌감향(离坐坎向)의 언덕에 장례하니, 동역이분(同域異墳)이다.
그 후에 여러 아들들이 서로 이어 타계하여 40여 년이 지나도록 비석을 세우지 못하였는데, 지금 참교공(參校公)이 개연히 비석을 세우고자 하여 나에게 명(銘)을 지으라고 명하니, 나의 외조비(外祖妣) 이씨는 바로 철성부원군의 누이이다. 외람되이 친속의 위치에 있는 만큼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당당한 철성이시여 / 堂堂鐵城
찬란한 공렬이로다 / 有炳勳烈
상부에선 깊고 넓으셨고 / 相府潭潭
인각에선 우뚝 높으셨지 / 麟閣屹屹
오래도록 국정을 총괄하여 / 久宅百揆
그 공로 대정(大政)에 남아 있거니 / 功存納麓
사람에게는 덕망 높은 원로요 / 人有筮龜
나라에선 나라 떠받치는 주춧돌이라 / 國有柱石
조물주는 어찌하여 / 造物者何
인간을 희롱하는가 / 戱劇於人
무슨 운수가 이리 기이하며 / 何數之奇
무슨 형통이 이리 막혔는가 / 何亨之屯
정부의 요직이든 뚝 떨어진 변방이든 / 黃閣朱崖
하찮은 자리든 귀한 자리든 / 蒼蠅白璧
공은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았고 / 公則不嫌
공은 태연자약 처하셨네 / 公處自若
왕께서는 공을 못 잊어 / 王曰念公
공이 조만간 돌아오리라 / 公歸不日
공이 돌아와 복상하리라 하셨으나 / 公歸復相
하늘이 공을 데려감 어찌 이리도 급한가 / 天奪何急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 雖則云然
지니신 덕 길이 보존되어 / 所存者長
산이 숫돌 되고 강이 띠가 되도록 영원하리니 / 山礪河帶
공은 곧 떠나신 것 아니라네 / 公則不亡
옥 같고 난 같은 자손 태어나 / 玉立蘭茁
자손이 창성하다네 / 子孫其昌
광주의 산은 우뚝하고 / 廣陵峩峩
광주의 물은 넘실거리도다 / 廣水沄沄
그곳에 불후의 비석 세우니 / 立石不朽
바로 공의 무덤이로다 / 維公之墳
<끝>
[註解]
[주01] 작자(作者)의 기운 : 작자는 창시(創始)하는 사람으로, 《예기》 〈악기(樂記)〉에 “작자를 성(聖)이라 하고, 술자(述者)를 명(明)이
라 한다.” 하였다.
[주02] 공정왕(恭靖王) : 공정은 조선 2대 왕 정종(定宗)이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이다. 정종은 숙종 때까지 묘호가 없이 시호인 공정으로
호칭되다가 1681년(숙종7)에 이르러서야 묘호를 ‘정종’으로 올렸다. 《宗廟儀軌 卷3 追上尊號》
[주03]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가 고명(誥命)을 하사하였으므로 : 태종 문황제는 명나라 성조(成祖)로 조카인 혜제(惠帝)를 몰아내고
즉위하였다. 혜제는 태조(太祖)의 손자이며 의문태자(懿文太子)의 아들로 의문태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1392년에 황태손(皇太
孫)으로 책봉되고 1398년에 태조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러나 세력이 큰 제왕(諸王)들을 제거하려다가 당시 연왕(燕王)이었던 성조에 의해 축출되고 건문(建文)이라는 연호도 혁제(革
除)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여 혜제로부터 고명을 받았으나 이때에 이르러 그 고명을 반납하고 성조로부터 다시 받은 것이다. 《明史
卷4 恭閔帝本紀》 《太宗實錄 3年 4月》
[주04] 공의 …… 주었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잘못이란 내은달(內隱達)의 딸을 두고 홍여방(洪汝方)과 서로 첩으로 들이려고 다툰 일이다.
이 일이 탄로 나 탄핵을 받았으나 태종이 여러 정황을 살펴 죄를 묻지 않은 일을 말한다. 《太宗實錄 18年 6月 10日》 《世宗實錄 8
年 3月 15日》
[주05] 군기 총랑(軍器摠郞) : 한국문집총간 7집에 수록된 《용헌집(容軒集)》 권4 부록(附錄) 〈신도비명(神道碑銘)〉에는 군부 총랑(軍
簿摠郞)으로 되어 있다. 군부(軍簿)는 군부사(軍簿司)의 약칭으로 조선조의 병조에 해당한다.
[주06] 함양군(咸陽君) 이희(李䛥) :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둘째 아들이다. 《선원강요(璿源綱要)》와 실
록에는 이름이 포(𧦞)로 기록되어 있다.
[주07] 참교공(參校公) : 이원(李原)의 7남으로 후취인 전주 최씨 소생이고, 이름은 지(墀)이다.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를 지냈으므로
참교공이라고 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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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左議政鐵城府院君贈諡康憲李公神道碑銘 幷序
鐵城之李。高麗大族。有諱瑨。登第不仕。種德遺後。生監察大夫諱尊庇。以文名顯隆。生鐵城君諱瑀。以幹能。歷淮,金,全,晉數州。所至多遺愛。生門下侍中諱嵓。事忠定王。爲左政丞。尋奉身乞退。恭愍朝。復相。己亥。毛賊犯西關。爲都元帥。有制勝功。才兼將相。勳名盖世。爲詩亦簡古。眞草行三法。皆妙絶。卒諡曰文貞。生諱崗。有父風。人皆以公輔期之。早歿。官至密直副使。辛丑紅寇之變。恭愍倉卒南巡。公爲慶尙道按廉使。奉迎儀衛甚盛。供頓充斥。人皆嘖嘖稱美。王甚器重。及卒。王歎曰。天何奪我岡之速也。舊制樞密無諡。特諡曰文敬。夫人郭氏。判 開城延俊之女。洪武戊申正月某甲。生公。公諱原。字次山。號容軒。初公生四月。而文敬卒。郭夫人。常抱悲泣曰。天若祚李。其在此孤乎。公在襁褓。嶷然如成人。稍長。力學不倦。公姊權文忠公夫人李氏。憐公早孤。撫如己出。文忠亦敎誨如子。學日就。爲文。有作者氣。每與論議。發越不羣。文忠驚曰。吾舅氏不亡也。公年十五。中壬戌進士科。乙丑。圃隱鄭文忠公主試席。公擢第。圃隱曰。以文敬之才之德。不大厥施。今有兒如此。天之報施。信有徵哉。戊辰。拜司僕寺丞。累轉工禮二曹佐郞。兵曹正郞。壬申。太祖開國。器其賢。歷試繁劇。三入臺。爲持平。爲侍史。爲中丞。剛正自持。臺中凜然。出守楊根郡。有惠 政。再爲典校。任文翰。所至。藉甚有名聲。恭靖王。擢爲右副承旨。敷奏詳明。出納惟允。陞爲左。太宗立。仍置喉舌。眷注益篤。論佐命勳。賜鐵券。拜司憲府大司憲。封鐵城君。出爲京畿觀察使。黜陟嚴明。豪猾畏縮。永樂癸未夏。太宗文皇帝賜誥命。如京謝恩。冬。出尹平壤府。府古稱繁劇難治。公撫綏得宜。政太理。時方繕修大同館。公恐擾民。率僚吏親輸材瓦。民樂趨事。不日告成。明年。以府尹。兼西北面都巡問察理使。丙戌。拜藝文提學。轉中軍捴制參知議政府事。又拜大司憲。遷判漢城府事。戊子。爲慶尙道觀察使。癸巳。爲東北面都巡問察理使。乙未。改賜推忠翊戴佐命功臣之號。進禮曹 判書。尋移大司憲。至是。凡三爲憲長。正色立朝。激濁揚淸。謇諤有憲臣體。改判漢城府事。累轉吏兵二曹判書。議政府參贊。陞贊成事。戊戌。世宗立。擢爲右議政。加賜功臣同德二字。己亥。文皇帝賜誥命冠服。公奉表如京謝恩。公姿相魁偉。巍然萬人中。帝見而奇之曰。黃髥宰相。後須復來。辛丑。陞左議政。主禮圍。取安崇善等三十三人。時稱得士。乙巳。宣宗章皇帝登極。如京進賀。公自參知政事。出入廟堂二十餘年。爲首相九年。政務寬大。不喜更張。持大體。當世宗銳意初政之時。啓沃獻替。裨益弘多。朝庭想望其風裁。公亦盛滿爲戒。欲乞退者有年。先是。有忌公者。搆公暗昧之過。 太宗親雪之。太宗上賓。忌公者挾前憾嗾臺。欲抵公死。世宗知公無他。重違臺臣之請。謫礪山郡。是丙午春也。世宗念舊勳。眷顧不衰。每論議大事。必曰。鐵城在。必處之矣。未幾。欲召還復相。忌公者又沮之。己酉夏。以病卒。享年六十二。世祖還賜職牒功臣錄券。公氣宇寬洪。性稟忠貞。輔以學問之正。故其發於議論。措諸事業者。蔚乎可觀。平生與人言。未嘗矯飾。又不崖岸自異。及其臨決大事。確然不動。屹如山岳。掌銓注十餘年。選賢與能。予奪不以私。故人無怨言。眞太平宰相也。惜乎。一遭顚躓。不能贊成世宗維新之治。亦天也。公先娶陽川許氏典理判書錦之女。生一男二女。臺。 中樞院副使。女長適主簿柳方善。次適副正柳汲。後娶全州崔氏。奉常大夫軍器捴郞丁智之女。封弁韓國大夫人。生六男。曰谷。大護軍。曰垤。漢城少尹。曰埤。同知中樞院事。曰塲。上護軍。垤,埤,塲。皆中武科。有時譽。曰增。行靈山縣監。曰墀。行大護軍兼承文院參校。中丁丑文科。生四女。長適僉知尹三山。次適求禮縣監李宏植。次適左議政權擥。次適繕工副正黃從兄。臺娶牧使權詳之女。生四男。曰越。僉知。曰晨。副正。曰嶷。僉知。曰庚。主簿。生三女。長適咸陽君䛥。次適縣監鄭自淑。次適僉正李諿。谷娶司藝李陽明之女。生二女。長適府尹姜希顏。無嗣。次適生員南恮。垤娶掌令鄭之唐之女。生二男。 曰準。縣監。曰則。議政府舍人。壬午。及第。生六女。長適縣監趙廷老。次適郡守朴堠。次適縣監許蘅。次適府使李時珤。次適知中樞院事金淳。次適參奉慶祥。埤娶縣監尹煥之女。生一男儀。宣略。一女適生員鄭純彥。後娶修義校尉吳泉之女。生一男。曰偉。生二女。幼。塲娶郡事李糾之女。生二男。曰崑。曰巚。一女適南衡。增娶觀察使李暿之女。生四男。曰泙。縣監。曰浤。進士。曰泗。曰濱。生二女。長適趙銅虎。次幼。墀娶鄭保之女。生四男。曰陸。掌隷院判決事。甲申壯元。曰陲。進士。曰隰。曰陌。柳方善生二男。長曰允庾。次曰允謙。典校校理。生五女。長適房峻。次適金永堅。次適崔榮祖。次適郡守金元信。次適許 植。柳汲生二男。曰從京。淳昌郡守。曰從華。鍾城府使。尹三山生六男。曰塢。上護軍。曰塘。保功將軍。曰壕。楊州牧使。曰垓。縣監。曰坦。上護軍。曰坡。直長。生三女。長適僉知朴梅。次適西林正怟。次適靑原正霖。李宏植生五男。曰孟禧。縣監。曰仲禧。禦侮。曰季禧。察訪。曰永禧。副正。曰益禧。女適主簿金禮重。權擥生二男。曰傑。吉昌君。曰健。進士。生七女。長適淸原君韓世龜。次適經歷朴士華。次適監察申億年。次適主簿金壽亨。次適佐郞愼守勤。次適參奉閔師騫。次適申末平。黃從兄生三男。曰瓘。生員。曰瓚。曰珪。越生二男。曰嫡孫。上護軍。曰嗣孫。晨生一男。曰嶔。嶷生三男。曰珌。曰琬。曰琢。庚生五男。曰精。曰 遵。曰質。皆生員。曰博。藝文檢閱。曰逵。進士。準生一男。曰英。則生二男。曰拙。曰▣。儀生一男。曰豐。泙生二男。曰孝胤。曰忠胤。陸生二男。曰峓。曰嶮。內外曾玄孫。百有餘人。初公卒後三日。崔夫人亦卒。窆廣州治之西栗村离坐坎向之原。同域異墳。厥後諸孤相繼淪逝。餘四十年。碑尙未立。今參校公。慨然欲竪。命居正銘之。居正外祖妣李氏。卽鐵城之姊。忝在戚屬。義不敢辭。謹銘。銘曰。
堂堂鐵城。有炳勳烈。相府潭潭。麟閣屹屹。久宅百揆。功存納麓。人有筮龜。國有柱石。造物者何戱劇於人。何數之奇。
何亨之屯。黃閣朱崖。蒼蠅白璧。公則不嫌。公處自若。王曰念公。公歸不日。公歸復相。 天奪何急。雖則云然。所存者長。
山礪河帶。公則不亡。玉立蘭茁。子孫其昌。廣陵峩峩。廣水沄沄。立石不朽。維公之墳。<끝>
容軒先生文集卷之四 / 附錄
四佳文集補遺一 / 碑誌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