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선 제125권 / 묘지(墓誌)
한양부원군 한공 묘지명 병서(漢陽府院君韓公墓誌銘 幷序)
이인복(李仁復)
공의 휘는 종유(宗愈)요, 자는 사고(師古)이며,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나이 15세에 태학에 들어가서 학업을 닦아 우뚝히 자립하여 명망이 있었고, 약관이 못되어 진사시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병과에 급제하였다.
연우(延祐) 초년에, 권지 교감으로부터 예문 춘추관의 검열에 선발 제수되었고, 의릉(毅陵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능호임)을 따라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행궁의 일력(日曆)을 기록하였고, 또 모든 비판문자(批判文字)를 맡아서 썼다.
뒤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행궁에서 일한 공로로 총부 산랑(摠部散郞)에 옮기고, 승봉낭(承奉郞)의 품계에 승진, 6품의 관복을 받았다. 도관 직랑(都官直郞)을 거쳐 사복부정 지제교겸 예문응교 춘추관 편수관에 전직되니, 사람들이 그에게 꼭 맞는 관직이라고 말하였다.
지치(至治)년 무렵에 이르러 불만을 품은 여러 무리들이 충숙왕의 일을 참소 무고하여 왕이 원나라에 불려가 있게 되니, 심왕(瀋王)이 서로 대립하고 사람을 보내와서 말하기를, “내가 이미 왕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니, 나라 사람들이 자못 이에 현혹되었으나 공은 홀로 분연히 일어나 충숙왕을 위하여 일을 바로잡도록 송리(訟理)하려고 하여 드디어 어진 유사(儒士) 16명과 더불어 연서하여 글 수백 자를 써 만들어 가지고 나(이인복)의 할아버지 문열공(文烈公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이 몸소 원나라 서울로 가서 승상에게 바쳤다.
충숙왕이 이 일의 공로를 공에게로 많이 돌려 밀직사 좌부대언에 발탁하였다. 태정(泰定) 말기에, 충숙왕이 권세를 잡은 자의 말에 잘못 빠져 가만히 선위표(禪位表)를 만들어 가지고 공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것을 심왕에게 주고자 한다.” 하고, 빨리 인(印)을 찍으라고 재촉하였다.
공은 그때에 밀직사 지신사로 있으면서, 굳이 간하다가 왕의 명을 얻지 못하고, 물러나와서는 말에서 떨어졌다고 칭탁, 나가지 않고는 우리 문열공과 더불어 이 일을 대신들에게 통고하니, 대신들이 또 여러 왕인(王人)과 꾀하여 집권한 자를 잡아 물리쳐 그 일이 마침내는 시행되지 못하였으나, 역시 이 때문에 관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지순(至順) 원년에 이르러 충혜왕(忠惠王)이 왕위에 오르게 되어, 다시 기용하여 밀직제학을 삼고, 다음해에 정당 문학에 승진시켜 공사(貢士)의 시험을 맡아보게 하였고, 또 다음해에 충숙왕이 다시 임금이 됨으로서 공은 벼슬을 해면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새로 집을 짓고 살았다.
지원(至元) 말년에, 충숙왕이 돌아가니 조적(曹頔)이 난을 꾸몄다. 공이 고향으로부터 돌아와서 우리 문열공을 비롯하여 그 밖의 여러 대신들과 같이 충혜왕을 모셨고, 조적이 패하매 작고한 정승 김륜(金倫)이 공과 같이 조적의 일당을 다스리니, 옥사(獄事)를 이룬 사실이 역(驛)을 통하여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원나라 승상 백안(伯顔)이 살피어 아뢰지 않고, 충혜왕을 불러 원나라 서울로 올리게 하였으므로 공 등은 왕을 따라갔던 것이다.
가서 보니 모두 옥에 계류 당하고 일이 매우 망측하게 되므로 우리 문열공이 글을 원나라 조정에 올려 이를 변명하려 하던 차에 마침 백안이 죽었으므로 일은 무사히 풀리게 되었다. 충혜왕이 복위한 뒤에 그 공훈을 기록하고 첨의평리로 삼았다가 찬성사로 고치고, 추성보절찬화공신(推誠保節贊化功臣)의 호를 내렸다.
지정(至正) 3년 겨울에, 충혜왕이 원나라로 갈 때에 사신이 황제의 명이라 하여 공을 진봉사(進奉使)로 기용하였다. 다음해 정월에 원나라 황제의 조서로 인하여 명릉(明陵 충목왕(忠穆王))을 받들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로 인하여 첨의 좌정승 판군부사사 상호군에 임명되고, 공신칭호를 더하였으며, 얼마 뒤에 한양부원군(漢陽府院君)에 진봉(進奉)되었다. 공이 관직에 있어서는 응교 편수(應敎編修)로부터 여러 번 옮겨 우문(右文)ㆍ예문(藝文) 2관의 대제학,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역임하였고, 품계에 있어서는 승봉랑(承奉郞)으로부터 무려 아홉 번 올라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관직에서 물러 나와 고향으로 돌아간 뒤로는 큰 일이 있지 않으면 혹은 한 해가 다가도 서울에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다. 지금의 국왕(공민왕(恭愍王))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여러 늙은 신하들이 왕에게 촉망하는바 많았고, 공도 역시 그 중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왕이 이로써 공을 볼 때마다 반드시 두터운 예의를 더하였다.
지정 14년 6월 무술일에 병으로 경성 옛 집에서 돌아갔다. 병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그 아들과 사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포의(布衣)로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벼슬이 극품(極品)에 이르렀으니, 비록 중수(中壽)를 얻지 못하고 죽은들 또 무슨 남은 한이 있겠으냐. 내가 3일 뒤에는 마땅히 너희들과 이별할 것이니, 너희들은 기다리고 있으라.” 하더니, 과연 3일 뒤인 그날 돌아갔다.
그의 부음을 들은 자는 원근을 막론하고 서로 조상하여 울며 말하기를, “아, 대신이 돌아가셨구나.” 하고 슬퍼하였고, 왕은 조회를 보지 아니하고, 유사로 하여금 초상을 치르게 하였으며, 시호를 문절(文節)이라고 내렸다. 그 해 8월 임인일에 대덕산(大德山) 선적사(禪寂寺) 남쪽 언덕에 장사하니 나이 68세였다.
증조의 휘는 원서(元諝)이니, 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로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중직 되고, 조부의 휘는 언(彥)인데, 동면도관판관(東面都官判官)으로 동지 밀직사사에 증직되고, 아버지의 휘는 영(英)이니 밀직부사 상호군 치사이며, 어머니 이(李)씨는 함안군대부인(咸安郡大夫人)이다.
공은 보는 것이 보통 사람과 다르고, 얼굴은 괴걸하고 몸이 커서 보기에도 엄연하여 높은 벼슬자리의 그릇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아직 현달하기 전에는 한때의 명사들과 서로 왕래하면서 모여서 술 마시지 아니한 날이 없었고, 취하면 일어나 소매를 늘어뜨리고 춤을 추며 〈양화사(楊花詞)〉를 노래하니 그 노래에 이르기를, “그믐날 같은 맑은 바람을 기다려서 높이 날아 황각(黃閣)에 이르도다.” 하니, 식자들이 모두 특이하게 여겼다.
검열(檢閱)로부터 재상에 이르렀으며, 항상 관리의 전형과 선발을 관장하여 친척과 친구들이 공의 힘에 힘입어 출세한 자가 많았다. 성품이 관후하고 무거워 일을 처리하고 사람을 접할 때는 모두 여유가 있었고, 문장을 함에 있어서도 세속의 속기를 버리려고 힘썼으며, 더욱 시에 힘을 기울였다.
또 담소를 잘하여 술 마시는 자리 같은데 앉으면, 유연히 화기가 흘러서 친애하는 마음이 나게 하였는데, 복재(復齋)는 스스로 지은 별호이다. 처음에 이 문정공(李文定公)이 태학에서 한 번 보고는 드디어 그의 아들 가락군(駕洛君) 휘관(琯)의 딸로 배필을 삼았다.
아들 셋을 낳았으니, 백순(伯淳)ㆍ중명(仲明)ㆍ계상(季祥)이요, 딸은 다섯이라 한다. 장례 때를 당하여 백순 등이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 선공(先公)과 함께 일한 분으로는 오직 이 문열공(李文烈公)이 가장 자세히 알 것인데, 그 손자 인복(仁復)이 일찍이 두 어른을 섬겨서 듣고 본 것이 본래 있는데다가 또 지금 사관(史官)이 되었으니, 이는 능히 우리 선공의 사업을 말하여 무궁히 뒷 세상에 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와서 묘명을 청하였다. 명에 이르기를,
넓고 큰 그릇으로 / 器偉且宏
학문을 넓히고 이름을 이루었으니 / 學博名成
어디에 쓰인들 좋지 않으리 / 何用不臧
세 임금을 내리 섬기매 / 歷事三君
충성을 다하고 근로를 다하니 / 以忠以勤
초선의 관면이 문채 있도다 / 蟬冕有章
복경의 계발을 내몸으로 부터 하여 / 啓慶自躬
시초와 종말이 모두 좋게 하였으니 / 善始令終
오직 그 빛나는 덕이로다 / 維德之光
이 분묘에 돌을 묻고 / 埋石於墳
내 글로 명하니 / 我銘以文
후세인들 어찌 잊으랴 / 來者可忘
<끝>
ⓒ한국고전번역원 | 임창재(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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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漢陽府院君韓公墓誌銘 幷序 - 李仁復
公諱曰宗愈。字曰師古。漢陽人。年十五入大學肄業。卓然自樹立有聲。夫及冠擧進士。擢第丙科。延祐初。由權知校勘。選授藝文春秋館檢閱。從毅陵入朝。錄行宮日曆。且書批判文字。旣還。以勞遷㹅部散郞階承奉郞。賜服六品。歷都官直郞。轉司僕副正知製敎兼藝文應敎春秋館編修官。人以爲稱職。至治中。群不逞誣毅陵以事。徵在京師。瀋王與之相持。使其人來曰。我已得志矣。國人頗惑焉。公獨慨然欲爲毅陵訟理。乃與儒士之賢者十六人。連名爲書。累數百言。我祖文烈公躬至上京。獻之丞相 。毅陵多歸功公。擢爲密直司左副代言。泰定末。毅陵爲用事者所誤。密以禪位表示公。且曰。吾欲以此與瀋王。趣行印。公時爲密直司知申事。固諫不得命。旣退。托以墜馬不起。與我文烈公以告大臣。大臣謀諸王人。執其用事者。斥之。事竟不行。然亦以是失職。至順之元。永陵受命。起爲密直提學。明年加政堂文學典試貢士。又明年毅陵復政。公免歸其鄕。築室以居。至元之季。毅陵薨。曹頔構亂。公至自鄕。與我文烈公及諸大臣。同侍永陵。頔敗。故政丞金公倫與公理其黨。獄成驛聞。丞相伯顔不省顧奏。徵永陵赴都。公等實從行。至則俱繫獄事叵測。我文烈公欲上書以明。會伯顔死得解。永陵旣復位。錄其功命爲僉議評理。改贊成事。賜號推誠保節贊化功臣。至正三年冬。永陵西行。使者稱制。起公爲進奉使。明年正月。有詔。奉明陵歸國。且輔政。由是拜僉議左政丞判軍簿司事上護軍。加功臣號。未幾進封漢陽府院君。公於館職。由應敎編修。累遷爲右文藝文二館大提學監春秋館事。於階。自承奉郞凡九轉至三重大匡。旣罷政。歸卧其鄕。非有事故。或終歲不肯至王京。今國王之未嗣位也 。諸老臣多屬望而公亦與焉。王以是每見。必加優禮。十四年夏六月戊戌。以疾卒于京城舊第。疾革。謂其子若壻曰。吾繇布衣 。荷國重恩。官至極品。縱不得中壽以沒。亦復何恨。吾於後三日。當與若等別。若等其候之。至期果卒。遠近聞訃者。皆相弔以哭曰。於虖。大臣亡矣。王爲之不視朝。俾官理喪。謚曰文節。以其年八月壬寅。葬于大德山禪寂寺之南原。春秋六十又八。曾祖諱元諝。檢校太子詹事贈參知政事。祖諱彦。東面都官判官贈同知密直司事。考諱英。密直副使上護軍致仕。妣李氏。咸安郡大夫人。公瞻視異衆。魁顔偉幹。望之儼然。知其爲公輔器。其未達也。與一時名士相還往。群飮無虛日。醉則起。垂袖爲舞 。歌楊花詞。曰。待如晦淸風。飛敭到黃閣中。識者皆異之。自檢閱至爲宰相。常典銓選。親戚故舊多賴公以達。性寬厚且重。處事接物。皆有餘裕。爲文章務去世俗氣。尤致意於詩。又喜談笑。樽俎間和氣油然可愛而親。復齋。其自號也。初李文定公一見於大學。遂以其子駕洛君諱琯之女配之。生子男三人。曰伯淳。曰仲明。曰季祥。子女五人云云。及葬。伯淳等相與謀曰。吾先公所與共事者。惟文烈李公爲詳。其孫仁復甞事二公。聞見有素。而今爲太史氏。是能道吾先公事業。垂之無窮者也。乃來請銘。銘曰。
器偉且宏。學博名成。何用不臧。歷事三君。以忠以勤。蟬冕有章。啓慶自躬。善始令終。維德之光。埋石於墳。我銘以文。來者可忘。<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