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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초등학교 27회 동기생들
변산반도 내소사(來蘇寺)를 가다.
글 쓴 이 牧 鉦 高 達 五
4월13일, 보슬비가 오락 가락~ 그래도 설레는 맘으로 대문을 나선다. 그간 여러가지 이유로 동기회 모임에 오랫동안 참석치 못하여 송구스런 맘 그지 없으며, 아울러 목적지(변산반도)를 추천한 책임도 있어 간단복 차림으로 서부정류장 근처 “대교주유소”에 도착하니, 벌써 옛 친구들이 많이도 나와 있다.
김상활, 이우태, 김상갑, 이창기, 현평구, 곽정숙, 김봉이, 김곡자, 박명련, 곽순옥, 곽태자, 성계화, 김춘자 등에게 차례 차례 인사를 나누니~ 옛 정이 뭉클하도다! 모두들 건강하고 밝은 모습이다.
잠시후 유가면(瑜伽面)에서 출발한 버스가 도착하여 준비한 음식들을 싣고 차에 오르니, 부산과 마산 방면에서 온 벗들과 또 합류를 해서 꼭 20명이다. 박재도는 온다는 연락이 있었는데 미도착(未到着)이라, 총무(김춘자)가 다시 연락을 하니 이 곳에 왔다가 차를 찾지 못하여 되돌아 갔다고 한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계획보다 10분 늦은 8시50분에 출발하여 ‘김천휴게소’에서 잠시 쉬고는 ‘대전고속버스터미날’을 향하여 신나게 달린다. 황간 부근을 지날 때 서울에선 벌써 도착했다는 연락이 온다.
초등학교를 졸업한지가 어언 50여 년이 지나서~ 각자 삶의 터전이 다르니... 서울, 부산, 대구, 울산, 청주 등 한번 모이기도 쉽지 않슴니다. 11시가 조금 지나서 ‘대전고속버스터미날’에 도착하여 서울 친구들(우중현, 곽종보, 김용도, 김정희, 이팔금, 김옥희, 정매희, 곽점자 등 11명)과 다시 합류를 하니 31명이다. 모두들 얼싸안고 볼을 부비고 난리다!
죽마고우(竹馬故友)는 이래서 좋다는 기라! 언제 만나도 반갑고 서로간에 허물이 없으니... 나이 칠십을 바라보면서도 마음은 동심(童心)이라! 옛 속언(俗言)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드니... 살아서 만나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차내는 시끌벅쩍 웃음꽃이 만발하여 한동안 정신이 없도다! 현 회장님(김광호)의 간단한 인사가 있은 후 차기 회장님(우중현)은 개정됀 “동기회칙”과 “27회동기까페(까페지기)”에 가입을 독려 하느라 장시간 열변을 토한다.
‘여산휴게소’에서 잠시 휴식한 후 얼마를 달려 왔는지... 내소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시계는 거의 13시가 다 되어간다. ‘내소식당’에 ‘산채 비빔밥’을 단체예약 하고는 일주문에 도착하니, “능가산내소사(愣伽山來蘇寺)”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오며, 그 옆으로 “할머니당산나무”는 정월 보름에 제를 모실 때 둘러놓은 굵은 인줄이 감겨져 있어, 입암마을의 전통적인 풍속을 보여 주심니다.
내소사는 인기도 좋아서~ 답방객(答訪客)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봄은 무르익어 만가지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낯선 이방인(異邦人)들에게 미소(微笑)로 반겨 주심니다!
몇 몇 벗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는 향기로운 전나무 숲길을 도란 도란 옛 얘기로 정담을 나누며 걸으니... 천상의 세계가 따로 없슴니다. 쭉 쭉 뻗어 솟아오른 전나무는 하늘높은 줄 모르시고, 사철을 청청(靑靑)하게 여여(如如)하여서~ 인체건강은 물론이요, 내소사의 상징물(象徵物)이로소이다!
초파일이 가까워서 인가? 노변(路邊)에는 울긋 불긋 연등이 꽃밭을 이루고, 숲사이 왼편에는 장방형의 인공 연못을 만들어 물레방아도 돌고 있으며, 또 연밭으로 꾸며 놓아서... 안내문에 “대장금 촬영장소”였다고 한다.
전나무 숲길을 지나 벚꽃나무 숲들이 이어지는데~ 꽃은 거의다 지고 노릿 노릿한 잎들이 싱그럽게 돋아있도다! 그 끝지점에 천왕문이 자리하고, 그 너머로 우뚝하고 장엄하게 아름다운 능가산(가인봉)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천왕문에 들어서니, 사천왕상(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이 8개의 눈을 부릅뜨고 있어 잡귀는 얼씬도 못하겠심더! 선채로 배례(拜禮) 드리고 경내로 들어서니 ‘할아버지당산나무’도 역시 인줄로 감기어져 있으며, 오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많은 상처를 입었도다!
이곳 저곳 경내를 돌아보는데~ 많은 인파들속에 가끔씩 동기들이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인사를 하며 스친다. 대웅전과 석탑을 배경으로 하여 ‘중현이와 광호’에게 간단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는 건성 건성 바쁘게 돌아 봄니다.
법당에 들어 간단한 예(禮)를 드리고 애절한 전설이 깃든 대웅보전의 못다칠한 단청을 살펴보니, 색이 바래져서 쉽게 구분이 가지않는다. 서정주의 “내소사 대웅전 단청”에서, 내소사 대웅보전 단청은 사람의 힘으로도 새의 힘으로도 호랑이의 힘으로도 칠하다 칠하다 아무래도 힘이 모자라 다 못 칠하고 그대로 남겨놓은 것이다.
어느날 해어스럼제 한 나그네가 단청을 맡아 겉을 다 칠하고 보전(寶殿) 안으로 들어 갔는데, 문고리를 닫아 잠그며 “내가 다 칠해 끝내고 나올 때까지는 누구도 절대로 들여다보지 마라”고 당부 하였다.
한데 어느 방정맞은 중 하나가 그만 못 참아 슬그머니 들여다보고 말았다. 새 한 마리가 붓을 물고 제 몸에서 나는 물감을 묻혀 곱게 곱게 단청(丹靑)을 해 가고 있었는데, 인기척에 그만 “아앙!” 소리치며 바닥에 떨어져 사지를 뻗고 늘어지는 걸 보니 그건 커어다란 한 마리 불호랑이었다.
“대호(大虎)스님! 大虎스님! 어서 일어나시겨라우!” 아무리 불러도 영 그만이어서, 할 수 없이 그럼 내생(來生)에나 소생(蘇生)하라고 이 절 이름을 내소사(來蘇寺)라고 했다. 또 다른 얘기는 대웅보전은 조선 인조11년(1633)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며, 당시 청민선사가 절을 중건할 때 도목수는 3년 동안이나 나무를 목침덩이만하게 토막내어 다듬기만 했다고 한다.
장난기가 발동한 사미승은 그中 한 개를 감추자, 나무깎기를 마치고 토막수를 헤아려 본 목수는 자신의 정성이 부족하여 법당짓는 일을 포기하려 했다. 사미승이 감추웠던 나무토막을 내놓았지만 부정탄 재목을 쓸 수 없다 하여 그 토막을 빼놓고 법당을 완성해서 지금도 대웅전 오른쪽 앞 천장만 한 개가 부족하다고 한다.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일이라! 뜰 앞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대웅보전은 정면3칸 측면3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며, 창문살의 아름다움이 참으로 빼어나다. 해바라기문양, 국화문양 등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어 보물 제291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대웅보전의 현판(懸板)은 동국진체(東國眞體)의 대가 원교 이광사(員嶠 李匡師. 1705~1777)의 글씨이며, 고졸(古拙)하고 수기(水氣)가 흐르는 글씨체로 화재예방에도 영험이 있다고 한다.
아울러 변산반도의 능가산(가인봉)은 백두대간의 영취봉 부근에서 서남으로 뻗어나온 호남정맥을 따라 장안산, 팔공산, 진안의 마이산, 주화산을 거쳐 정읍의 내장산, 입암산을 지나 방장산 부근에서 다시 서북으로 미미한 산줄기가 이어져서 배풍산(109m), 옥녀봉, 매봉을 거쳐 이곳 가인봉에 이르고, 다시 그 잔여지맥은 신선봉, 감남산을 지나 봉화봉(174m)에서 서해바다에 그 맥을 떨구고 있으니... 이름하여 변산지맥이라 한다.
연하여 주산은 웅장하고도 아름다우며, 백호(白虎)도 튼실하나 청룡(靑龍)은 더욱 장엄하여 멀리 안산(案山)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도다! 다만 안산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천왕문(天王門) 바깥의 넓고 허(虛)한 공간을 일주문까지 전나무숲과 벚나무를 심어서 비보숲(裨補林)을 조성하였으니... 옛 선인들의 지혜에 감탄을 아니할 수 없슴니다.
더구나 일주문과 천왕문도 약간씩 방향을 틀어 앉혀서 직선상의 공간이 주는 허술함을 최대한 보완(補完) 하였으니... 이하(以下) 덧붙이는 말은 사족(蛇足)이라!
뜰아래 삼층석탑은 천년의 침묵속에 잠들어 있으며, 세련됀 멋은 없으나 오랜세월 풍우(風雨)에 바래져서 역사의 덧게가 차곡 차곡 쌓여 있슴니다. 또 우측 한켠에는 옛 “청림사”에서 옮겨 왔다는 “고려동종(보물 제277호)”이 있다.
안내문에 본래 고려 고종9년(1222)에 청림사 종으로 주조되었으나 청림사가 없어진 후 조선 철종4년(1853)에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하며, 높이 1.3m, 직경67cm의 전형적인 고려 후기종으로서 뛰어난 작품이다.
맨위에 음통과 여의주를 희롱하는 용형상의 종고리가 있고, 그 아래 종신(鐘身)에는 네 개의 유곽(乳廓)과 삼존상이 새겨져 있으며, 당좌(撞座:종을치는 자리)에는 연화문(蓮花紋)이 새겨져 있다.
이 밖에도 전각의 수는 엄청 많아서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봉래루(蓬萊樓), 설선당(說禪堂), 무설당(無說堂), 나한전(羅漢殿), 삼성각(三聖閣), 범종각(梵鐘閣) 등 셀 수 없이 많으며, 연하여 내소사에는 애틋한 전설이 또 있으니...
조선 태종15년(1415) 이씨 부인이 죽은 남편 유근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일자일배(一字一拜:한자쓰고 한번절함)의 정성으로 써서 공양(供養)한 “법화경 절본 사본(보물 제278호)”7권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주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어 볼 수 없으며, 이 법화경(法華經) 사경(寫經)이 끝나자 죽은 남편이 나타나 부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고 하는 얘기가 전해 온다.
오래 오래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한채 설선당을 지나 범종각 옆으로 나려오니, 화두(話頭)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뜰앞에 잣나무)라!”드니... 한 그루의 전나무가 우뚝솟아 홀로 청청(靑靑)합니다.
그 뒤로는 철~철~ 흘러넘치는 감로수(甘露水)가 있어 한바가지 물로 세속의 번뇌(煩惱)를 씻어내니, 몸과 마음이 시원합니다 그려! 천왕문을 벗어나 허허(虛虛)로운 맘으로 걸어 나오니, 태풍 ‘곤파스’에 쓰러진 전나무 두 그루가 있어 대자연(大自然)의 위력을 또 한번 실감합니다.
그 너머로 저만큼 우측 산기슭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부도(浮屠)밭이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수행자(修行者)는 살아서도 엄격하고 절제됀 생활속에서 구도일념(求道一念)으로 정진(精進) 하지만, 열반(涅槃) 후에도 정해진 공간에 오(伍)와 열(列)에 맞게 질서정연 합니다 그려!
울긋 불긋 저 형상이 모두 헛것이라 드니
오고 가는 인생사도 허망 합니다 그려!
살아서는 중생을 제도(濟度) 하시드니
한줌의 재가 되어 석탑으로 보여 주시네!
사랑하는 벗님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아 바지런히 걸어서 내소식당에 도착하니, 모두들 시장끼를 달래시느라 정신이 없으시다. 2열 횡대(橫隊)로 나란히 앉아서 식사하는 모습들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디카에 담슴니다.
점심 후 간단히 총회를 진행하여 신임 회장단 및 임원들을 뽑은 후 다시 격포리 “채석강(彩石江)”으로 달림니다. 구~불~ 구~불~ 해변을 따라 30여 분을 달려서 격포리(格浦里) 해수욕장에 이르니, 어찌나 많은 건물들이 들어 섰는지 변화됀 모습에 깜짝 놀랍니다.
일기예보에 오후 부터는 개인다고 하드니, 날씨도 화창하여 서해바다를 조망(眺望)하기에는 더 없이 좋으며, 해변에는 연인들과 가족들이 많이도 붐비고, 선착장에는 소형 보트가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푸른바다를 시원하게 질주하고 있도다!
점심후라 배도 든든하여 걷는 재미가 쏠~쏠~ 합니다! 모두들 삼삼 오오 손을잡고 채석강의 돌밭을 걸으며 도란 도란 여담(餘談)으로 꽃을 피움니다. 몇 몇 벗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망망대해(茫茫大海)를 바라 보노라니... 억겁(億劫)의 윤회속에 쌓인 퇴적물이 아름다운 ‘채석강’을 만들었도다!
채석강은 변산반도 서쪽끝 격포항과 그 오른쪽 닭이봉 일대 약 1.5km의 층암절벽과 바다를 총칭하는 이름이다. 해안의 절벽은 영겁(永劫)의 세월동안 바닷물의 침식을 받은 수성암층 절벽이 수십만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 하며 곳곳에 해식동굴이 있다.
이곳의 경치가 당나라 이태백이 술에 취해 배타고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채석강”과 비슷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또 이곳은 변산반도의 최서단으로 옛 수운(水運)의 근거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전라우수영 관하의 격포진이 있던 곳으로 전라북도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연하여 채석강(彩石江)이 끝나는 지점으로부터 용두산의 ‘수성당(守城堂:옛 당집)’을 거쳐 ‘대마여우골’로 이어지는 약 2km 가량의 해안선을 “적벽강(赤壁江)”이라 하는데, 이 또한 중국의 적벽강만큼 경치가 좋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전라북도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1시간 여를 거닐며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용도, 우태, 점자, 명련, 광호, 매희, 중현, 계화, 순옥’이 등에게 단체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는 다 둘러보지 못하는 아쉬운 맘으로 발길을 돌림니다.
귀가길에 김제(金堤) “벽골제(碧骨堤:백제때 ‘볏골’을 한자로 옮겨적은 것임)”에 잠시 들리기로 하여 차는 부안으로 신나게 달림니다. 차내는 노래교실로 서서히 흥을 돋우더니... 드디어 오전내 참아왔던 춤판이 벌어짐니다.
40여분을 달려 김제의 넓은 평야에 이르니, 시작과 끝간데를 모르겠도다! 반도가 좁다는 말이 웬말인가? 초등학교 6학년시절에 “수학여행”을 이곳으로 지나간 기억이 어렴풋~이 떠 오름니다.
그때가 10월 초쯤일 것으로 기억되는데... 누렇게 익은 벼들이 끝없이 펼쳐지던 광경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치운다! 시계는 17시 20분을 지나고 있어 기사님과 의논해 보니, 귀가길에 정체가 예상돼서 도저히 ‘벽골제’ 답사가 어렵겠다고 하여, 아쉬운 맘으로 ‘대전고속버스터미날’을 향하여 달림니다.
처음 만날때는 코 흘리게 동안(童顔) 이드니
어느새 백발(白髮)에 잔주름이 늘었구려!
가는 세월을 어느 장사가 있어 막을 것인가
그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아~롱~ 다~ 롱~ 재미나게 살아 왔제~
또 어느 세월에 만날 것인가 기다려지는 구나
단기 4347년(서기 2014년)4월 13일
유가초등학교 ‘27회동기회’에서
변산반도 내소사 및 채석강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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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14년 4월 13일 '유가초등학교 27회 동기회'에서
모처럼 만에 야유회 행사를 가졌슴니다.
전북 변산반도에 "내소사 와 격포리 채석강"을
답사한 후기를 올렸슴니다.
"유가27회 동기회까페"에 올렸던 글을 남산까페에도
올려 봅니다. 님들! 양지하시길 바라오며 내내 건강하소서!
모처럼 벗님들과만나 동심으로 재미나게
하루를 보내셨군요~
내소사 채석강 몆년전에 가족들이랑 변산반도로
한바퀴돌고왔는데 회장님사진으로 다시보니까
감회가 새롭습니다~^^
구슬님이 다녀 가셨군요!
가내는 두루 편안하신지요~~~?
죽마고우들과의 하루가 즐거웠으며,
짧은 만남~ 긴 이별의 시간이 그리움을 더 해 줍니다~
변산반도 내소사 채석강 새만금을 작년 사월에
다녀왔었는데~
이렇게 하나도 놓치지 않은 자세한 설명 읽으면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초등학교 동기생들이랑 좋은시간 즐건추억이
흠뻑 젖어 있는듯 합니다~^^
물빛향님이 다녀 가셨네요!
요 며칠 향님께서 뜸하다 했드니~ 반갑슴니다.
변산반도 주위로는 너무 아름다운 곳이 많아요!
워낙 짧은시간이라 제대로 답사하고 느낄시간이 없었어요!
장문의 글을 감상 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다음주말 예산 '덕숭산'
산행에 꼭 동참해 주셔서 여러가지 좋은 말씀 주시길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