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공보
* 발행일 / 20020202
* 글쓴이 / 이상훈
아름다운세상/ 故 이상양전도사
한편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고층빌딩이 올라가고 왕복 12차선의 시원스런 도로가 뚫리던 70년대의 서울, 또 다른 쪽에는 매일 매일 서울시 곳곳에서 몰려오는 분뇨차 3백여 대가 하늘도 땅도 온통 썩혀버리는 시커먼 인분을 쏟아내던 뚝방마을이 있었다. 그렇게 냄새나고 어두운 곳에 마치 향나무처럼 자신의 몸을 불태움으로써 세상을 밝히고 아름다운 향기를 뿜어내다 쓰러져간 사람이 있었다. 故 이상양전도사.
잇따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조차 없는 부가 만들어지던 시절이었지만 발전의 혜택은 일부 경제인들과 정치인들에게만 국한되고, 경제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쫓기듯 떠밀려 도시의 변두리 '뚝방마을' 판자촌에서 하루하루 죽지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그는 정녕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이었다.
이 전도사가 자신의 생명을 바친 뚝방마을을 알게 된 것은 그가 장신대 기독교교육과에 편입생으로 입학했던 1972년 6월의 어느 날, 주선애 교수를 통해서였다. 남루한 옷차림을 한 어린이들이 어디론가 가는 모습을 보고 따라나선 주 교수가 3백대의 분뇨차가 쏟아내는 인분에 하늘도 땅도 썩어버릴 것 같은 악취 구덩이 속에서 1만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바글대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왜 보여주셨냐"는 한마디 절규같은 기도를 드린 후, 이 사실을 수업시간을 통해 학생들에게 전했다.
주 교수로부터 뚝방마을의 현실을 접한 이 전도사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며칠 후 동료들과 함께 주 교수를 따라나선 이 전도사는 그 길로 뚝방마을에 거처를 정하고 그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들이 먹는 음식을 먹고 그들과 함께 자고 그들이 맡는 냄새를 함께 맡고 살면서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하나씩 둘씩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해 여름 고애신, 기현두, 정태일 등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봉사회를 조직, 공동화장실 건설 사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했다.
1만여 명의 주민들이 가마니로 대충 가린 두세 칸의 화장실을 이용하고 있어 공동화장실의 건립은 가장 시급한 일 중의 하나였다. 신학생 봉사대와 마을 사람들의 힘을 합쳐 4동 14칸의 공동화장실를 지은 일은 뚝방마을 사역의 첫번째 성과였다.
그 일을 계기로 마을사람들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길러준 그는 72년부터 세상을 떠나던 77년까지 6년 동안 다리 건설, 내집갖기 운동전개, 보육기관 건립, 야학(성경구락부), 무료진료, 망원제일교회 개척 등 보통 사람이 하나 하기도 힘든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정열적으로 임했던 일은 주택건설 사업과 교육사업.
사실 주택건설 사업은 가장 불가능해 보이는 일 중의 하나였다. 서울시에서 갑작스럽게 판자촌을 철거하면서 갈 데 없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앉는 일이 벌어지자 이 전도사는 주택건설만이 대안이라 믿고 뭉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마을사람들에게 불어 넣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뚝방마을 사람들이었지만 1백원, 2백원 푼돈을 모아 5천6백만원이라는 거금을 모았고 이를 토대로 땅을 사고 그 땅에 주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5백60여 세대의 주택을 건축한 것. 갑작스런 판자촌 철거에서 비롯된 주택건축은 74년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으며 이같은 이 전도사의 사역은 본보 지면을 통해 수차례에 걸쳐 자세히 보도되기도 했다.(1973년 5월 26, 11월 17일자, 74년 3월 16일자)
유아들을 위한 보육사업과 청소년들을 위한 야학 사업 역시 이 전도사가 많은 애정을 쏟았던 일이었다. 부모가 일을 나가면 쓰레기 더미에서 온갖 오물을 장남감 삼아 노는 아이들을 불러모아 가르치고 밥을 먹여 보살피는 보육사업은 이 전도사에게 가장 보람있던 일 중의 하나. 74년 당시 1백20명의 어린이들이 이 전도사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또한 가정형편상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지 못하고 생존경쟁의 현장으로 내몰리는 청소년들을 위해 개설한 야학은 뚝방마을 청소년들에게는 말 그대로 희망의 빛, 진리의 빛을 던져주는 소중한 등대가 되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을 이 전도사 홀로 담당하지 않았다. 그의 곁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주선애 교수와 마애린 선교사 그리고 그와 함께 한 수많은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뚝방마을 주민들을 위해 헌신한 이 전도사는 폐결핵을 앓고 있던 환자였다. 병으로 인해 오랫동안 요양을 하기도 했던 그는 몸을 돌보지 않은 봉사와 헌신으로 말미암아 끝내는 병이 악화되어 수술을 받게 되고 수술 후 완치되지 않아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된다. 77년 3월 23일의 일이었다. 생후 2개월된 아기와 부인 그리고 뚝방마을 사람들을 남겨둔 채로…
이 전도사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26년.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3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그가 생명을 바쳤던 뚝방마을은 이제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지만 그의 향기로웠던 삶은 여전히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짙은 추억의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이상훈 shlee@kidokongbo.com
◈ 26년 동안 고인 遺業 이어온 부인 박영혜권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습니다."
26년 전 사랑하는 남편 이상양전도사를 떠나 보내고 아들 선배군과 살아온 박영혜권사(도림어린이집 원장)는 남편을 떠나보내던 날 하용조목사가 전한 설교 말씀 중에서 그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면서 "하나님이 이 전도사를 그곳으로 보낸 것도 옳은 일이고, 그만큼 했을 때 데려가신 것도 모두 옳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며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 때 전도사님을 데려가신 것을 감사한다"고 고백했다.
이 전도사를 만나기 전 영등포 산업선교회 신용협동조합 간사로 4년간 재직하며 도시산업선교의 현장을 경험했던 박 권사는 76년 영등포 산선의 인명진 목사의 소개로 이 전도사를 만나 결혼했다. 당시 29살의 노처녀라 결혼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뚝방마을 사람들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는 모습에 반해 결혼하게 됐다"는 박 권사는 "가슴을 완전히 가르는 엄청난 수술 후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을 정도로 밝고 환한 사람"으로 이 전도사를 추억한다.
사별 이후 뚝방마을의 어린이집을 섬기며 이 전도사가 가장 사랑했던 아이들을 돌봤던 박 권사는 "주 교수의 도움으로 그동안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지금은 도림어린이집에서 17년째 사역하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또한 사별 당시 2개월이었던 아들 선배군은 장성한 청년이 되어 대학(한국외국어대 불어과) 졸업을 앞두고 있다.
자신이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도림어린이집에 맡겨지는 아이들 대부분이 맞벌이 부부의 아이라는 박 권사는 "이곳 도림동에 처음 왔을 당시만 해도 뚝방마을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며 "그들을 섬긴다는 마음으로 해온 일이 지금에 이르게 됐다"고 말한다.
이어 박 권사는 "지금은 이상양전도사가 사람들에게 잊혀져가는 사람이지만 그가 남긴 정신은 이어졌으면 좋겠다"며 "사람들이 이상양전도사를 추억하며 어둡고 소외된 현장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일하는 주님의 일꾼들을 한 번이라도 돌아봤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전했다.
◈ 故 이상양전도사를 추모하는 사람들
뚝방마을 전도자 이상양전도사가 세상을 떠난지 26년이 흐른 지금도 그를 추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뚝방마을을 이 전도사에게 소개한 장신대 주선애 명예교수와 그와 함께 뚝방마을 사역을 펼쳤던 동료 학생들은 여전히 그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故 이상양전도사를 기억하는 동료와 선후배들은 지난달 21일 장로회신학대학교 동문회(회장:류영모)에서 만나 그의 사역을 기리며 제1회 광나루동문상을 그의 유족에게 수여했다.
이날 동문회 모임에서 주선애권사(장신대 명예교수)는 "자기 이름에서 받침자만 빼면 '이사야'가 된다고 우스개소리로 자기 소개를 했던 이 전도사는 정말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하며 뚝방마을 주민을 위해 온전히 헌신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회고하며 "한 때는 그에게 뚝방마을을 알려준 것을 후회하기고 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사실 주 명예교수는 이 전도사에게 뚝방마을을 알려준 일 외에도 이 전도사의 하는 모든 일에 든든한 지원자가 돼주었다. 학교에서 교계에서 재원과 인력이 필요할 때마다 주 명예교수는 최선을 다해 그를 도와주어 이 전도사는 사역에 전력을 다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전도사에게는 아무리 어렵고 궂은 일이라도 함께 해주는 든든한 동료들이 있었다. 당시 함께 뚝방마을을 섬겼던 이들 중에는 지금은 목회자가 된 정태일목사, 기현두목사, 김기복목사, 임재환목사 등이 있으며 광주 동광원에서 사역하고 있는 고애신 전도사도 초창기부터 함께 사역했던 동료였다. 또한 당시 동료 중에서 임정자 전도사는 지금도 망원제일교회에서 전도사로 봉사하고 있다.
그와 함께 오랫동안 일했던 기현두목사(새온교회 시무)는 "하나님께서 뚝방마을이라는 삶의 현장을 보여주셨던 것"이라며 "삶의 현장에서 철저히 헌신한 이 전도사는 그후 목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전한다. 상계동에서 목회하고 있는 기 목사 역시 도시서민들의 삶터인 반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서 목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영향을 끼치기도 했던 이 전도사의 삶은 지난 82년 '뚝방마을'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두란노에서 출간되기도 했다. 이 전도사의 동료였던 김기복목사가 지은 이 책은 현재는 절판상태라 도서관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