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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헨리(O. Henry)
본명은 William Sydney Porter.
보통 사람들, 특히 뉴욕 시민들의 생활을 낭만적으로 묘사했다. 그의 단편 소설들은 우연의 일치가 작중인물에 미치는 영향을 우울하고 냉소적인 유머를 통해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갑작스런 결말로 인해 극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그의 등록상표가 되다시피했으나 그런 수법의 유행이 한물가자 평론가들은 바로 그런 수법 때문에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숙모가 교사로 있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졸업 후에는 숙부의 잡화상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1882년 텍사스로 가서 농장, 국유지 관리국을 거쳐 오스틴에 있는 제1국립은행의 은행원으로 일했다. 1887년 애설 에스티스와 결혼했으며, 이무렵부터 습작(習作)을 시작했다. 1894년 주간지 〈롤링 스톤 The Rolling Stone〉지를 창간했으나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휴스턴 포스트 Houston Post〉에 기자이며 칼럼니스트로 활동했고 가끔 만화도 기고했다.
생애와 활동
오 헨리는 필명이다. 알려진 바로는 1886년부터 이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그는 '건방진 헨리'라는 별명의 고양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 고양이는 그냥 '헨리'라고 부르면 아는 척도 하지 않았으나
'O. 헨리'라고 부르면 금방 달려와 몸을 비벼댔다.(고양이가 간사한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여기서 'O. 헨리'라는 필명을 착안했고 실제로 자기 문장에 이 필명으로 사인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무렵 친하게 지냈던 롤리 케이브가 남긴 1886년 사인북에도 'O. 헨리'의 이름이 적혀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이 필명이 생긴 것은 1886년경이라는 추측은 거의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한편, 그 필명이 그가 복역한 교도소의 간수장 Orrin Henry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주장도 있다.
왜냐하면, 그가 똑똑히 'O. Henry'라는 필명을 쓰면서 편집자들에게 자기의 정체를 숨겨 달라고 부탁했던 것은 1901년 오하이오 교도소에 들어간 뒤부터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주로 '시드니 포터', '올리버 헨리', 'S.H 피터즈' 등의 필명을 사용했다.
유년기~청년기
그는 1862년 9월 11일,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즈버러에서 포터부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알제논 시드니 포터는 그곳의 내과 의사로 작은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다.
그는 사교성이 있고, 환자에게도 매우 친절했으나, 기계 발명하는 일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마침내 미치광이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어머니 메리 제인 버지니아 스웨임은 불어와 회화를 공부해 문장과 그림에 뛰어난 부인이었다.
그러나 메리는 헨리가 세 살 때 폐병으로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사후,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지 않아 집안형편이 극도로 나빠지자 온 가족이 숙모, 숙부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헨리는 숙모 에바 라이너가 자신의 집에 차린 사숙에서 전형적인 초등교육을 받고, 숙부 클라크가 경영하는 약국에서 일하면서 전기나 소설, 수필 등을 탐독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 훗일 작가로서 대성할 투시력과 추리력을 키워 나갔다.
헨리의 생애는 여러 가지로 순탄치 못했다.
일찍부터 자립의 길을 걷게 되어 1882년 텍사스주로 가서, 카우보이가 되기도 하고, 점원, 기계견습공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닥치는 대로 일했다.
1887년 25세에 17세의 소녀 에이솔 에스티즈 로치와 결혼했다,
에이솔은 <크리스마스 선물>에 나오는 델러같은 여성으로(청순가련의 전형..) 헨리는 그녀를 몹시 사랑한 것으로 보인다.
1891년 오스틴 은행에 근무하는 한편, 디트로이트의 <프리 프레스>지로부터 원고의뢰를 받아 유머러스한 일화를 기고하는 등 문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가 발행한 신문 <롤링 스톤>은 은행을 그만두면서까지 열성으로 매달렸으나 적자만 내다가 1895년에 폐간되었다.
범죄와 복역
그의 범죄 사실은 오늘날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 당시의 은행경리는 매우 엉성했는데 감사 때 장부의 숫자가 맞아떨어지지 않자 출납계원이었던 헨리에게 덮어 씌웠다는 설도 있고, 은행 돈을 신문 발행의 적자를 메우는 데 썼다는 설도 있다.
O. 헨리의 가장 믿을 만한 전기로 여겨지는
그 근거의 하나로써 랭퍼드는 이 사건에 대해 헨리가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분명히 그는 일생 동안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기를 극도로 싫어했고 또 열심히 숨겼던 것 같다.
어쨌든 재판소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아 헨리는 그 곳으로 갈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어찌 된 일인지 뉴 올리언스의 온두라스로 도망하고 말았다.
그는 그곳에 살면서 아내에게 몰래 편지를 보냈는데 아내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귀국했다.
그러나 아내는 그가 돌아온지 얼마 안 되어 29의 나이로 사망했다.
교도소 생활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비참했던 것 같다.
그는 교도소 생활을 이렇게 표현했다.
"인간의 생명이 여기에서처럼 값싸게 여겨질 줄이야 상상도 못해본 일이다. 여기에서는 인간이란 영혼도 감정도 없는 동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 비참한 교도소 생활을 체험하지 않았던들 과연 미국 문학사에 남는 단편작가 O. 헨리가 태어났을지 의문이다.
다행히 약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도움이 되어 교도소 내 다소 자유로운 약제계로 보내져 밤 늦게까지 단편 창작에 몰두 할 수 있었다.
본격 창작 활동
모범수로 석방된 뒤, 3년간 감옥생활을 하는 사이에 얻은 풍부한 체험을 소재로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작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에인즈리> 지 편집자의 권유로 뉴욕으로 나와 본격적인 작가생활에 들어갔다.
1904년에 첫 단편집 <양배추와 임금님>이 나왔다.
이어 1906년에 제 2단편집 <4백만>이 나옴으로써 그의 작가적 지위는 확고해졌다.
<4백만>은 당시의 뉴욕 인구를 나타내는 숫자이며 뉴욕을 묘사한 작품이었다.
<선물>을 위시하여 <정신없는 브로커의 사랑> 등, 그의 대표적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들이 이 속에 들어있다.
<4백만>은 또 O. 헨리의 단편의 특장인 '결말의 의외성'을 매우 뚜렷하게 보여준 단편집이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진행해 가다가 마지막에가서 뜻밖의 결말을 지어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그 '전환' 수법은 <4백만> 이후 그의 상표처럼 쓰였다.
"나는 이야기의 결말을 생각하지 않고 쓰기 시작하는 일도 흔하고 마지막까지 줄거리를 다 세워 놓고 쓰기 시작하기도 하며 또 때로는 미리 정해든 결말에 맞추어 이야기를 지어 나가는 수도 있다."고 그는 말했다.
1907년, 뉴욕의 생활에서 취재한 또 하나의 단편집 <손질 잘 된 램프>가 나오고 , 같은 해에 텍사스에서의 체험을 기초로 한 단편집 <서부의 마음>이 나왔다.
이어 1908년에는 <도시의 소리>와 <점잖은 사기꾼>이, 그리고 이듬해인 1910년에는 <순 장삿속으로>가 출판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생존 중에 나온 단편집이다.
1909년에는 극작에도 손을 댔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오직 하나, 1909년에 폴 암스트롱이 그의 단편 <되살아난 개심>을 <통칭 지미 발렌타인>으로 각색하여 상연하여 히트한 바있다.
죽음과 평가
헨리의 재혼 상대는 소년시절의 첫사랑 샐리 린제이 콜만이었으나 별로 성공적인 결혼 생활은 못 되었다.
재혼 후, 헨리는 슬럼프에 빠져 좀처럼 글을 써내지 못하고 술만 마셨으며 아내와 곧잘 싸웠다.
결국 극도로 건강이 나빠져 1910년 6월 5일, 뉴욕 종합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병명은 간경화증(+과로+당뇨+과음)이었다.
사후에 단편집 <회전목마>, <엉망진창>, <구르는 돌>, <잡동사니> 등이 출판되었다.
1918년에는 뉴욕의 예술과학 협회에서 <오 헨리 기념 문학상>
그가 소설가로서 황동한 것은 겨우 10년정도였으나 그 동안 300여 편을 발표했다.
이것을 날짜로 풀면 평균 10일에 단편 하나씩을 쓴 셈이 된다.
그는 전형적인 단편작가로서 단편소설밖에 쓰지 않았으며, 그가 끝내 경제적인 윤택을 얻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당시 원고료는 장수당 얼마하는 식으로 매겼음)
유머와 위트, 페이소스는 누구나가 지적하는 헨리의 독특한 맛인데, 더욱 경탄할 것은 그 착상의 기발과 구성의 묘미이다.
풍부한 상상력과 확고한 구상력을 가진 작가가 아니고선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재주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에는 그의 장기인 '결말의 의외성'이 있고 작품마다 거의 예외없이 마음 밑바닥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따뜻한 웃음과 절로 콧등이 시큰해지는 감동이 있다.
그것은 이 작가가 인간의 심리와 인정의 미묘한 움직임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따뜻하고 정다운 마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모파상이나 체호프에도 비교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헨리의 전기를 쓴 로버트 데이비드는 "나는 우울할 때 O. 헨리를 읽는다."고 말했다.
또한 알폰소 스미드는 미국 문학사를 장식한 뛰어난 단편작가 어빙, 포, 하트 등과 비교하여 "O. 헨리는 미국의 단편소설을 휴머나이즈(humunize)했다."고 말했다.
이 말은 헨리 문학의 본질을 찌른 적절한 평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작품은 남부 뉴 올리언스와 서부 텍사스, 중미를 무대로 한 것도 많지만 주로 뉴욕을 배경으로 했으며,
미국 남부나 뉴욕 뒷골목에 사는 가난한 서민과 빈민들의 애환을 다채로운 표현과 교묘한 화술로 그려 놓았다.
그 무렵 뉴욕은 근대 자본주의 초기의 모습으로 특히 '샐러리맨'이라고 불리는 소시민의 생활이 점차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장소였다.
그는 뉴욕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맨해튼 섬의 계관 산문 작가'로 일컬어지기까지 했다.
<백과사전>
마지막 잎새 / 오. 헨리
워싱턴 스퀘어의 서쪽에 있는 조그만 구역에 가면 길이 이리 저리 마구 얽혀서 <플레이스>라고 부르는 길쭉한 조각으로 나눠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플레이스>들은 기묘한 각과 곡선을 이루고 있는데 하나의 길이 한두 번은 제자신과 교차한다. 일찍이 한 화가가 이 거리에서 재미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감과 종이와 캔버스의 계산서를 든 수금원이 이 거리에 들어와서 외상 한 푼 받지 못하고 어느 새 온길로 되돌아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이 색다르고 옛스러운 그리니치 빌리지에 곧 화가들이 몰려들어 북향의 창문과 18세기 풍의 박공과 네덜란드 풍의 다락방과 싸두려 방세를 찾아서 돌아다녔다. 이윽고 그들이 6번가에서 백랍 컵과 탁상용 풍로를 하나 둘 들고 들어와서 여기에 <예술인의 마을>이 하나 생긴 것이다.
수우와 존지는 나지막한 3층 벽돌 집 꼭대기에 화실을 갖고 있었다. <존지>는 조안너의 애칭이다. 수우는 메인 주가 고향이고 존지는 캘리포니아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8번가에 있는 <델모니코>식당에서 정식을 먹다가 만나, 예술에 있어서나 치커리 샐러드나 예복 소매의 취향에 있어서나 취미가 일치한다는 것을 알고 공동으로 화실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5월의 일이었다. 11월이 되자 의사들이 폐렴이라고 부르는 차갑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손님이 이 마을을 쏘다니면서 그 얼음 같은 손가락으로 여기저기서 사람들을 만지고 다녔다. 이스트사이드에서는 이 파괴자가 대담하게 으스대고 다니면서 수십 명의 희생자를 냈지만, 이 좁고 이끼낀 <플레이스>의 미로에서는 그 걸음걸이도 느려졌다.
폐렴씨는 기사도적인 노신사라고 부를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캘리포니아의 부드러운 바람으로 가냘퍼진 조그만 어런 처녀는, 도저히 피묻은 주먹에 숨결이 거친 이 늙은 협잡꾼의 정당한 사냥감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존지를 덮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페인트칠을 한 철제 침대에 누운 채 거의 꼼짝 못하고, 조그만 네덜란드풍의 창너머로 옆에 있는 벽돌집의 텅 빈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바쁜 의사가 털이 숭숭한 반백의 눈썹을 움직여서 수우를 복도로 불러냈다.
"저 처녀가 살아날 가망은 ... 글쎄, 열에 하나야."하고 그는 체온계를 흔들어 내리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 가능성도 그 처녀가 살고 싶어하지 않으면 소용없단 말씀이야. 지금처럼 사람이 장의사한테 달려갈 기분으로 있어서야 처방이고 뭐고 다 바보 같은 짓이 되고 말지. 저 처녀는 이제 낫지 않는다고 아예 마음먹고 있거든. 무언가 깊이 생각하고 있는 일이라도 있나?"
"쟤는... 언젠가 나폴리 만을 그려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림을 그려? 바보같긴! 무언가 골똘이 생각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은 없을까? 이를테면 남자친구 같은 거."
"남자요?"하고 수우는 터무늬없는 소리라는 투로 말했다. "그럴 만한 남자가... 하지만 아니에요, 선생님. 그런 일은 없어요."
"음, 그렇다면 좋지 않은 걸. 나는 내 힘이 미치는 한, 의술의 힘을 다해 보지. 하지만, 환자가 자기 장례식 행렬의 자동차 수를 세기 시작하게 된다면 내 약의 효과도 5할은 감해지지. 아가씨가 잘 구슬려서 겨울 외투 소매의 새 유행이라도 물어보도록 만든다면 가능성이 열에 하나가 아니라 다섯에 하나라고 약속하지."
의사가 돌아간 뒤 수우는 작업실로 가서 종이냅킨이 곤죽이 될 때까지 울었다. 그러고는 화판을 들고 휘파람으로 재즈를 불면서 힘차게 존지의 방으로 들어갔다.
존지는 이불 밑에 잔잔한 파도 하나 일으키지 않고, 얼굴을 창문으로 돌린 채 누워있었다. 수우는 그녀가 잠들어 있는 줄 알고 휘파람을 그쳤다. 수우는 화판을 세워 어떤 잡지 소설의 삽화로 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젊은 화가는 젊은 작가가 문학에의 길을 개척해 나가기 위해서 쓰는 잡지 소설의 삽화를 그림으로써 미술에 대한 길을 개척해 나가야만 한다.
수우가 소설의 주인공인 아이다호 카우보이의 모습에다 말 품평회에 입고 나갈 멋있는 승마바지와 외알박이 안경을 그리고 있는데 나지막한 소리가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들려왔다. 그녀는 얼른 침대 곁으로 갔다.
존지의 눈은 커다랗게 떠져 있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세고 있었다ㅡ수를 거꾸로 세고 있었다. 그녀는 "열둘."하고 세고는 조금 있다가 "열 하나.", 이어 "열.", "아홉.", 그러다가 거의 동시에 "여덟.", "일곱."하고 셌다.
수우는 궁금해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뭐가 있어서 세는 거지?' 그저 살풍경하고 쓸쓸한 안마당과 20피트 저편에 벽돌집의 텅빈 벽면이 보일 뿐이었다. 뿌리가 울퉁불퉁하게 옹이져서 썩은 한 그루의 해묵은 담쟁이덩굴이 벽돌담 중간쯤까지 뻗어울라가 있었다. 차가운 가을 바람이 덩굴에서 잎사귀를 쳐서 떨어뜨리고, 앙상한 발가송이 가지가 허물어져 가는 벽돌담에 매달려 있었다.
"뭐니?" 수우가 물었다.
"여섯." 존지는 거의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제 차츰 빨리 떨어지기 시작했어. 사흘 전에는 거의 백 장쯤 있었는데. 세고 있으면 머리가 다 아팠지만 이젠 쉬워. 아, 또하나 떨어지네. 이제 남은 것은 다섯 잎뿐이야."
"뭐가 다섯 잎이지? 얘기해 보렴."
"잎사귀야. 담쟁이덩굴 잎. 마지막 한 잎이 떨어질 때는 나도 가는 거야. 나는 사흘 전부터 알고 있었어.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지 않던?"
"그런 바보 같은 소린 들은 적이 없어."하고 수우는 몹시 경멸하는 듯이 투덜거렸다. "마른 담쟁이 잎사귀와 네가 낫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러니? 그리고 넌 저 덩굴을 아주 좋아했잖아. 이 말괄량이야, 바보 같은 소리 작작해라. 선생님은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곧 완쾌할 가망성은 ...저어, 선생님 말씀 그대로 말한다면..하나에 열이라고 그러셨어! 그건 뉴욕 시내에서 전차를 타고 가거나 신축 빌딩 밑을 지나갈 때의 위험률과 같은 거야. 자, 이제 국을 좀 마셔봐. 그리고 수디는 다시 그림을 그리게 해줘. 그러면 그걸 잡지사 편집자에게 팔아서 앓아 누운 우리 아기에겐 포도주를 사오고 먹성 좋은 나를 위해서 돼지고기를 사올 수가 있잖아?"
"포도주는 이제 살 필요 없어." 존지는 계속 창밖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또 한 잎 떨어지네! 아니, 국물도 먹고 싶지 않아. 이제 넉 장뿐이야. 어둡기 전에 마지막 한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 그러면 나도 가는 거야."
"존지." 수우는 그녀 위에 몸을 굽히고 말했다. "내가 그림을 다 그릴 때 까지 눈을 감고 창밖을 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지 않겠니? 난 이 그림을 내일까지 넘겨줘야 한단 말이야. 광선이 필요해서 그래. 그렇지 않으면 커튼을 내리고 싶다만."
"다른 방에서 그릴 수 없어?"하고 존지는 차갑게 물었다.
"난 네 옆에 있고 싶어서 그래. 게다가 네가 줄곧 저 쓸데없는 담쟁이 잎사귀를 쳐다보고 있는게 싫어서 그런다."
"다 그리면 금방 알려줘야 해." 존지는 눈을 감고 쓰러진 조각처럼 창백하게 조용히 누워서 말했다. "마지막 한 잎이 떨어지는 걸 보고 싶으니까. 난 이제 기다리기 지쳤어. 생각하는 것도 지쳤고. 모든 것에 대한 집착에서 떠나, 꼭 저 불쌍하고 고달픈 나뭇잎처럼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싶어."
"좀 자도록 해 봐. 난 베어먼 할아버지를 불러다가 은둔한 늙은 광부의 모델이 되어 달라구 부탁해야겠어. 곧 돌아올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움직이지 마."
베어먼 노인은 이 집 1층에 살고 있는 화가였다. 나이는 60이 넘었고, 미켈란젤로가 그린 모세의 수염 같은 구레나룻이 사티로스같은 얼굴에서 도깨비 같은 몸으로 곱슬곱슬하게 처져있었다. 베어먼은 예술의 낙오자였다. 40년 동안 화필을 쥐어왔지만 예술의 여신 치마자락을 잡을 만큼도 가까이 가보지 못했다. 언제나 걸작을 그린다고 하면서도 아직 시작해 본 적이 없다. 지난 몇 해 동안 이따금 상업용이나 광고용의 서투른 그림을 그린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그리지 못했다. 그는 전문적인 모델을 채용할 힘이 없는 이 마을 젊은 화가들의 모델이 되어 주고 조금씩 돈을 얻어 쓰고 있었다. 과하게 진을 마시면서도 여전히 멀지 않아 걸작을 그린다는 말만 했다. 그 밖의 점에서는 몸집은 작지만 성격이 꼿꼿한 늙은이였으며, 누구나 유약한 것을 보면 사정없이 비웃고, 특히 위층 화실에 있는 두 젊은 예술가를 지키는 감시견을 자청하고 있었다.
수우가 가 보니 베어먼은 아래층의 어두침침한 골방에서 노간주나무 열매의 냄새를 물씬 풍기며 앉아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걸작의 첫 획을 25년이나 기다려온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캔버스가 이젤에 얹혀 있었다.
수우는 노인에게 존지의 망상을 이야기하며 존지는 정말 나뭇잎처럼 가볍고 연약해서, 이 세상에 대한 가냘픈 집착이 더 약해지면 둥둥 떠서 날아가 버리지 않을는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베어먼 노인은 핏발이 선 눈에 눈물을 글썽그리면서 그 어이없는 망상에 큰 소리로 모멸과 조소를 퍼부었다.
"뭐라구!" 그는 소리쳤다. "아니 그래, 다 썩은 덩굴에서 잎이 떨어진다고 저도 죽는다는 그런 얼빠진 소릴 하는 놈이 이 세상에 어딨어? 나는 그런 말 들어본 적도 없다. 싫어, 나는 아가씨의 그 쓸데없는 은둔자의 숙맥같은 모델이 되기는 싫다구. 어째서 너는 존지가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하게 내 버려두느냔 말씀이야. 아아, 가엾은 존지 아가씨야."
"그 애는 몹시 앓아서 쇠약해졌어요. 그리고 열 때문에 마음까지 병에 걸려서, 별의별 이상한 망상으로 가득 찬 걸요. 좋아요, 베어먼 할아버지. 제 모델이 되기 싫으시다면 필요 없어요. 하지만 전 할아버질 정말로 너무나 변덕스런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여자란 금방 저래서 탈이야! 누가 모델이 안돼준다고 그랬나? 가라구, 나도 따라갈테니까. 반 시간 전부터 나는 언제라도 모델이 되어 주겠다고 말하려 했었지. 허, 참! 여긴 존지 같은 착한 처녀가 병들어 누워있을 곳이 못 돼. 멀지 않아 나는 걸작을 그릴게야. 그러면 우리 모두 다른 데로 옮기자고. 정말이야, 그렇게 하자구."
두 사람이 위층에 올라가 보니 존지는 잠들어 있었다. 수우는 커튼을 창턱까지 끌어내리고, 베어먼에게 옆방으로 가자고 몸짓했다. 방에 들어간 두 사람은 겁먹은 듯이 창문으로 담쟁이 덩굴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서로 말없이 쳐다보았다. 차가운 진눈깨비가 쉴새없이 내리고 있었다. 베어먼은 낡은 푸른 옷을 입고는 바위대신 냄비를 엎어놓고 앉아 은둔한 광부의 자세가 되었다.
이튿날 아침 수우가 한 시간쯤 자고 눈을 떠 보니 존지는 흐릿한 눈을 크게 뜨고 내려진 녹색 커튼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어줘, 보고 싶으니까."하고 그녀는 속삭이는 소리로 명령했다. 수우는 마지못해 하라는 데로 했다. 그런데 보라! 기나긴 밤새 비가 후려치고 바람이 휘몰아쳤는데도 벽에는 아직도 한 장의 담쟁이 잎이 또렷이 남아 있지 않은가! 그것은 담쟁이의 마지막 잎새였다. 그 잎자루 가까이는 아직도 진한 초록빛이었지만, 톱니모양의 가장자리에는 노란 소멸과 조락의 빛을 띠고 대견스럽게도 땅 위에서 20피트쯤 되는 가지에 매달려있었다.
"저게 마지막 잎새야. 밤중에 틀림없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바람소리를 들었거든. 오늘은 떨어질 거야. 그러면 나도 동시에 떨어지는 거야."
"얘, 얘!" 수우는 지친 얼굴을 베개에 얹으면서 말했다. "네 자신을 생각하고 싶지 않거든 내 생각이나 좀 해다오. 난 어떻하면 좋아?"
그러나 존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것은 신비롭고 먼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영혼이다. 그녀는 우정 및 이 땅과 연결하고 있는 기반이 하나하나 풀어짐에 따라, 그 망상이 점점 더 억세게 그녀를 휘어잡는 것 같았다.
그날도 다 지나가고 해거름이 되어도 그 외로운 담쟁이 잎이 벽에 그냥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가 밤이 되니 북풍이 다시 사납게 휘몰아치기 시작하고 한편 비는 여전히 창문을 두들겨 나직한 네덜란드풍 처마에서 후둑후둑 흘러 떨어졌다. 이윽고 날이 새자, 존지는 사정없이 커튼을 올리라고 명령했다. 담쟁이 잎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존지는 드러누워서 오랫동안 그것을 바라 보았다. 그러더니 가스 스토브 위에서 닭수프을 휘젓고 있는 수우에게 말을 건냈다.
"난 나쁜 계집애였다, 수디." 내가 얼마나 나쁜 계집애였는가 알려주려고 저 마지막 잎새를 저 자리에 남겨둔거야. 죽고 싶어하다니 벌받을 일이지. 자, 그 국물 좀 갖다 줘. 우유에 포도주를 탄 것도 좀 주고. 그리고 아니, 손거울부터 먼저 갖다 줄래? 그리고 내 등에다 베개 몇 개 받쳐 줘. 일어나 앉아서 네가 요리 하는 걸 보고 싶어."
한 시간 뒤 그녀는 말했다. "수디, 난 언젠가 나폴리 만을 그려 보고 싶어."
오후에 의사가 왔다. 의사가 돌아갈 때 수우는 살그머니 뒤따라 나왔다.
"희망은 반반이야."하고 의사는 수우의 떨고 있는 여윈 손을 잡고 말했다. "간호만 잘 해주면 당신이 이겨. 그럼 이제 아래층에 있는 환자를 보러 가야지. 베어먼인가 하는 사람인데 화가 같더군. 역시 폐렴이야. 나이가 많고 몸도 약한 사람인데 갑자기 당했어. 나을 희망은 없지만 오늘 입원하면 좀 편해 지겠지."
이튿날 의사는 수우에게 말했다. "이제 위험은 벗어났어. 당신이 승리야. 앞으로는 영양과 뒷바라지, 이것뿐이야."
그리고 그날 오후, 수우가 침대로 다가가보니, 존지는 누운 채 무척 파란 빛깔의 도무지 쓸데없어 보이는 숄을 만족스러운 듯이 짜고 있었다. 수우는 한쪽 팔로 베개와 함께 존지를 껴안았다.
"너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 귀여운 아가씨. 베어먼 할아버지가 오늘 병원에서 돌아가셨단다. 겨우 이틀을 앓으셨을 뿐이야. 첫날 아침, 관리인이 아래층에 있는 그분 방에 가봤더니 할아버지가 몹시 괴로워하고 계시더래. 신발과 옷은 흠뻑 젖어서 얼음처럼 차갑고. 날씨가 그렇게 험한 날 대체 어디를 갔다오셨는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어. 그러다가 아직도 불이 켜져있는 각등과 언제나 놓여있는 자리에서 꺼내온 사다리와 흩어진 화필과 초록과 노랑물감을 푼 팔레트를 발견한 거야. 그리고 얘, 창밖으로 저 벽에 있는 마지막 담쟁이 잎 좀 쳐다봐. 바람이 부는데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게 이상하지 않니? 아아, 존지, 저건 베어먼 할아버지의 걸작이란다.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진 날 밤, 그분이 저 자리에 그려 놓으신거야."
크리스마스 선물 / 오. 헨리
일 달러 팔 십 칠 센트―이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 중 육십 센트는 잔돈이었다. 이 잔돈은 물건값을 악착같이 깎아 깍쟁이라는 핀잔을 받고 얼굴이 빨개지면서까지 식료품상이라든가 채소 장수라든가 푸줏간 사람들과 시비를 해서 그 때마다 한 푼 두 푼씩 모은 것이었다. 델라는 이 돈을 세 차례나 세어 보았다. 역시 일 달러 팔십 칠 센트였다. 그런데 내일은 크리스마스가 아닌가.
별수없이 허술한 조그만 침대에 뛰어들어가 넋두리라도 하는 길밖에 없었다. 델라는 침대로 뛰어들어 넋두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고 나면 인생이란 눈물과 콧노래와 웃음으로 빚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 중에서도 인생은 콧노래가 제일이란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집의 여주인은 푸념이 콧노래로 점점 변해 가는 동안 방 안을 훑어 보았다. 가구가 딸려 있는 아파트는 집세가 한 주일에 팔 달러였다. 이 집은 지나치게 형편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칫 잘못하면 거지 떼들이 몰려들기 딱 알맞은 그런 방이었다.
아래 현관에는 늘 비어 있는 우편함이 하나 있고 어떤 사람의 손가락이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는 초인종 단추가 있었다. 그밖에 거기에는 '제임스 딜링햄영'이라고 쓴 명함이 붙어 있었다.
'딜링햄'이라는 이름은 일찍이 살림이 풍족하던 시절, 산들바람에 반짝반짝 빛나던 것으로, 그 당시 이 방 주인의 수입은 주급(週給) 삼십 달러였다. 그렇던 수입이 이십 달러로 줄어든 지금 '딜링햄'이라는 이름은 희미해져서 마치 글자 자체가 겸손하여 눈에 띄지 않는 D자 하나로 축소되어 버리려고 숙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제임스 영 씨는 집에 돌아와 이층으로 올라오면 늘 그를 '짐'이라고 부르는 부인의 뜨거운 포옹을 받았다. 이 부인의 이름은 '델라'라고 독자들에게 이미 소개를 했다. 어쨌든 이건 퍽 좋은 현상임에 틀림없었다.
델라는 울음을 그치고 분첩으로 뺨을 두드렸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뒤뜰의 잿빛 담 위를 걸어가는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이 크리스마스인데, 짐의 선물을 살 수 있는 돈이라곤 일 달러 팔십칠 센트가 전부였다. 몇 달을 두고 한 푼 두 푼 모아 온 것이다. 주급 이십 달러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지출은 그녀가 생각한 범위를 늘 넘어섰다. 짐의 선물을 살 돈이 불과 일 달러 팔십칠 센트밖에 없다니. 그녀가 사랑하는 짐이 아닌가.
그녀는 남편을 위해 무엇을 선물하면 좋을까 궁리를 하면서 행복감에 잠겨 긴 시간을 보냈다. 무엇인가 좋고 진기하고 진짜―짐이 가지고 있으면 영광스러울 만한 그런 가치 있는 것을 그녀는 사고 싶었다.
방 안의 창문과 창문 사이에는 거울이 있었다. 여러분은 집세 팔 달러의 아파트에 걸려 있는 거울을 본 일이 있을지 모른다. 무척 야위고 민첩한 사람이라면 얼핏 세로로 가느다랗게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자기의 외관을 꽤 정확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델라는 야윈 편이기 때문에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창문에서 물러선 그녀는 이십 분 동안 점차 굳어졌다. 이윽고 그녀는 머리채를 풀어 한껏 길게 어깨 위에 드리웠다.
그런데 제임스 딜링햄 부부에게는 대단한 자랑거리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짐이 할아버지 대(代)에서부터 물려받아 온 금시계였다. 다른 하나는 델라의 머리채였다. 솔로몬 왕의 왕비인 시바가 만일 바람벽을 사이에 둔 옆집에 살고 있다면, 델라는 늘 창문 밖으로 머리채를 늘어뜨리고 그 왕비의 보석과 타고난 미모를 송두리째 무색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지하실에 보물을 산더미처럼 가지고 있는 솔로몬 왕이 이 집의 관리인이었다면, 짐은 그가 지나갈 때마다 자기의 시계를 꺼내어 왕으로 하여금 탐이 나게 해서, 자꾸 수염을 쓰다듬는 걸 보게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그처럼 아름다운 델라의 머리채는 지금 그녀의 둘레에 멋지게 늘어져, 마치 황금의 폭포가 물결치듯이 빛나고 있었다. 머리채는 무릎 아래까지 가 닿아 그녀의 옷이라도 될 성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하고 재빠르게 다시 머리채를 손질해 올렸다. 그녀는 잠시 비틀거리다가, 낡아 빠진 붉은 융단 위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한동안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는 낡은 밤색 자켓을 걸치고, 낡은 밤색 모자를 썼다. 그리고는 스커트에 바람을 일으키고 눈을 빛내며, 그녀는 총총히 방을 나와서 층계를 내려가 거리로 나섰다.
그녀가 발을 멈춘 상점에는 이런 간판이 적혀 있었다.
'마담 소프로니 상점. 각종 미용, 머리 용품상'
단숨에 상점으로 뛰어올라간 델라는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소프로니라는 이름과는 달리, 당당한 체구에 지나치게 살갗이 희며 쌀쌀하게 생긴 마담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델라는 입을 열었다.
"제 머리칼을 사지 않으시겠어요?"
"사지요."
하고, 마담이 말했다.
"모자를 벗고, 어디 한번 보여 줘요."
황금의 폭포가 스스로 흘러내렸다.
"이십 달러."
하고, 마담은 익숙한 솜씨로 머리채를 잡아 올리면서 말했다.
"빨리 계산해 주세요."
델라가 말했다. 아아, 델라에게 그 후 두 시간은 행복의 날개를 타고 흘러갔다. 그러나 이런 부질없는 비유는 잊어버리자. 그녀는 짐의 선물을 사러 여러 상점을 쏘다녔다.
그녀는 마침내 그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정말 짐을 위해 맞추어 놓은 것 같았다. 다른 상점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녀는 상점이란 상점의 안팎을 샅샅이 뒤졌던 것이다. 그것은 백금으로 된 시곗줄로, 단순하고 말쑥한 장식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실질적이고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남편의 시계에 꼭 어울리는 좋은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이것을 얼핏 보다 곧 짐에게 맞으리라는 걸 알았다. 짐다운 물건이었다. 무게 있고 값지고―이것은 사람과 물건에도 들어맞는 말이다. 대금으로 이십일 달러를 치르고 난 그녀는 팔십칠 센트를 가지고 집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이 시곗줄을 시계에 채우면 짐은 어느 친구 앞에서도 시간을 보면서 창피해하지 않을 것이다. 훌륭한 시계였으나 그는 낡은 가죽줄을 시곗줄로 쓰고 있기 때문에 가끔 몰래 꺼내 보곤 했다.
집에 돌아오자, 델라의 황홀했던 기분은 일단 어느 정도의 분별과 이성을 되찾았다. 그녀는 머리를 지지는 아이론을 꺼내어, 크나큰 사랑에서 비롯된 황폐한 머리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언제나 귀찮기 짝이 없는 거창한 일이었다.
사십 분이 못 가서 그녀의 머리는 짤막하게 웨이브진 머리털로 뒤덮여, 마치 장난꾸러기 초등 학교 학생처럼 보였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오랫동안 자세히 살펴보았다.
"짐이 나를 못살게 굴지만 않는다면."
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나를 보자마자 그이는 내가 코니 아일랜드 합창단의 소녀 같다고 할 거야. 하지만 난들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아아! 일 달러 팔십칠 센트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는걸."
그녀는 일곱 시에 커피를 끓이고, 난롯불에다 프라이팬을 달구어 폭챱을 만들 준비를 했다.
짐은 귀가 시간이 늦는 일이 없었다. 델라는 시곗줄을 두 줄로 손에 집어 들고 짐이 늘 들어오는 문 가까이의 테이블 한 구석에 앉았다. 그러자 아래층의 층계를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극히 사소한 일에도 날마다 속으로 기도를 드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지금도 기도를 중얼거렸다.
"하느님, 부디 저이가 아직도 절 예쁘게 여기도록 해 주십시오."
문이 열리고 짐이 들어섰다. 이미 문이 닫혔다. 그는 창백하고 몹시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불과 스물두 살로 가장 노릇이 힘에 겨웠다. 그는 새 외투가 필요했고, 장갑도 없었다.
문 안에 들어선 짐은 마치 메추리 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우뚝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델라에게 가 멎었다. 그 시선 속에서 그녀가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한 무엇이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소스라치게 했다. 그것은 노여움이나 놀라움이나 불만이나 공포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짐작하고 있던 어떤 감정도 아니었다. 그는 표현하기 어려운 독특한 표정으로 잠자코 그녀를 쏘아볼 뿐이었다.
델라는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켜 그에게로 다가갔다.
"여보!"
하고, 그녀는 소리쳤다.
"그런 눈으로 절 보지 마세요. 저는 다만 당신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드리고 싶었어요. 머리칼은 곧 다시 자라날 테니까 괜찮아요, 그렇지요? 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제 머리칼은 아주 빨리 자라는걸요. 여보, 어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해.'라고 말씀하세요. 그리고 유쾌한 기분을 가져요. 당신은 생각도 못할 멋진―정말이지 예쁘고 근사한 선물을 마련했어요."
"당신 머리칼을 잘랐다구?"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는 이 명확한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괴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머리를 잘라서 팔았어요."
델라는 말했다.
"그렇지만 저를 좋아하는 당신의 마음은 전과 다름이 없겠지요? 머리칼이 없어도 저는 그대로예요. 그렇지 않아요?"
짐은 뭔가를 더 알아 내려는 듯한 눈초리로 방을 둘러보았다.
"당신 머리칼이 없어졌단 말이지?"
"찾아볼 필요도 없어요."
델라는 말했다.
"팔았다고 했잖아요.―팔았다구요. 오늘은 크리스마스예요.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머리칼은 당신을 위해서 팔았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머리칼은 하나하나 셀 수 있을는지 몰라도 당신에 대한 제 애정은 누구도 셀 수 없을 거예요."
하고, 그녀는 갑자기 정성어린 애정을 보이며 말했다.
"짐. 폭챱을 만들까요?"
짐은 문득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그는 델라를 껴안았다. 이제 십 초 동안 우리는 다른 방향에서 이것과는 관계가 없는 어떤 문제를 신중히 조사해 보기로 하자. 한 주일에 팔 달러와 일 년에 백만 달러―여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어떤 수학자나 현인이라도 여기에 대해서는 오류를 범할지도 모른다. 동방 박사는 많은 값진 선물을 가지고 왔지만, 그 선물 가운데도 그런 해답은 없었다. 이 암흑에 싸인 얘기는 앞으로 해명되리라고 본다.
짐은 외투 주머니에서 물건 꾸러미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던졌다.
"델라, 나를 오해하지는 말아 줘."
그는 말했다.
"머리칼을 잘라 버렸건, 면도를 했건, 머리를 감았건, 그런 것이 당신을 향한 내 애정을 어떻게 할 수는 없어. 하지만 저 묶음을 펼쳐 보면 내가 왜 멍청해 있었는지 알 거야."
희고 재빠른 손가락이 끈과 포장지를 풀었다. 그러자 기뻐 어쩔 줄 모르는 환성이 터져 나왔다. 뒤미처, 가엾게도 갑자기 여성의 발작적인 울음이 터져 방안은 눈물 바다로 변했다. 그래서 이 방의 주인은 있는 힘을 다해서 아내를 위로하여야 했다.
눈앞에는 머리빗이 놓여 있었다. ―델라가 오래 전부터 브로드웨이의 진열장에 놓여 있는 걸 갖고 싶어하던, 좌우에 이가 달린 비녀 한 틀이었다. 예쁜 진짜 대모갑으로 되어 있고 가장자리에 보석이 박힌, 지금은 사라져 버린 그 아름다운 머리채에 꽂으면 꼭 어울릴 빛깔이었다.
비싼 머리빗인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가져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속으로 안타깝게 바라보곤 했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 자기의 소유가 되자, 이번에는 그 기다리던 장식품에 빛을 주어야 할 머리칼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빗을 가슴에 품었다. 마침내 그녀는 고개를 들고 꿈에 잠긴 듯한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짐, 제 머리칼은 무척 빨리 자라요."
그리고 나서 델라는 털을 태운 조그만 고양이처럼 벌떡 일어나,
"아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짐은 아직 자기의 근사한 선물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반듯이 편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열심히 그에게 내보였다. 그 희끄무레한 귀금속은 그녀의 맑고 열렬한 영혼의 반사를 받아 더욱 빛나는 것 같았다.
"어때요, 근사하죠? 이걸 구하느라고 온통 거리를 쏘다녔어요. 이제 이걸 구하려면 시간이 백 배는 걸려야 할 거예요. 당신 시계, 이리 주세요. 시곗줄에 채운 모양을 보고 싶어요."
짐은 시계를 꺼내는 대신, 긴 의자에 양팔을 베개삼아 드러누워 빙긋 웃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서로 잠시 보류하기로 하지. 선물로 쓰기에는 지나치게 좋은 걸. 나는 당신 머리빗을 사는데 돈이 필요해서 시계를 팔아 버렸어. 자, 그러면 폭챱이나 만들어요."
이십 년 후 / 오. 헨리
1. 20년 전의 약속
순찰 경관이 의젓한 걸음걸이로 큰길을 가고 있었다. 좀 거드름을 피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습관일 뿐이었다. 사실 거드름을 피운다 해도 누가 봐 줄 사람도 없었다. 이제 겨우 밤 10시가 될까말까한 시간이었지만 눅눅한 바람이 사납게 불고 있어서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지미는 정말 고지식할 정도로 정직한 사람이었어요. 약속을 잊을 리가 없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친구를 만나려고 천 마일이나 멀리 여행을 했어요. 하지만 옛날 그 다정했던 친구가 나타나기만 하면 천 마일을 달려온 값어치는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2. 친구의 편지
옛친구를 기다리는 사나이는 고급스러운 시계를 꺼냈다. 시계 뚜껑에도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열 시 삼 분 전이군요."
사나이가 말했다.
"열 시 정각이었지요. 우리가 이 음식점 문 앞에서 작별을 한 게 말이에요..."
"그래, 서부에 가서 재미는 좋았어요? 한 밑천 잡았겠지요?"
경관이 물었다.
"물론이지요. 지미도 아마 나의 절반쯤은 성공을 했겠지요. 하지만 그 친구는 어느 쪽인가 하면 좀 느린 편이었습니다. 성품이 너무 착한 거예요. 서부에서는 남의 돈을 빼앗으려고 덤비는 약삭빠른 놈들과 싸워야 합니다. 뉴욕에서야 사람들이 판에 박힌 것처럼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하곤 하지만... 서부에서 살아남으려면 잠시도 맘을 놓아서는 안되는 거죠..."
경관은 경찰봉을 빙빙 돌리면서 두세 걸음 걸어갔다.
"나는 이제 가보겠소. 당신 친구가 약속대로 오면 좋겠군요. 그런데 약속 시간에서 일 분도 더 기다리지는 않을 생각입니까?"
"물론 약속보다 더 기다려야죠!"
사나이는 말하였다.
"글쎄, 한 삼십 분 정도는 더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만 있다면 지미는 반드시 그때까지는 올 테니까요. 안녕히 가십시오, 경관나리."
"그럼..."
경관은 그의 순찰 구역을 살펴보면서 걸어갔다.
이제 차가운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간간이 불던 바람도 이제는 계속해서 불어왔다.
길거리에 극히 드물게 지나 다니는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옷깃을 여미고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주 오래 전, 젊은 시절 친구하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천 마일을 달려온 사나이는 철물점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 20분쯤 지났을까, 기다란 외투를 입고 귀밑까지 외투 깃을 세운 키가 큰 사나이가 길 저쪽에서 나타났다. 그 사나이는 길을 급히 건너오더니 곧장 기다리고 있는 사나이에게 다가갔다.
"보브 맞어?"
새로 나타난 사나이가 어딘지 불분명한 말투로 물었다.
"지미 웰즈야?"
철물점 앞에서 기다리던 사나이가 큰소리로 말했다.
"야, 이거 참!"
새로 온 사나이가 상대의 두 팔을 붙잡았다.
"틀림없이 보브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살아있는 한 반드시 여기서 다시 만날 줄 알았지. 어쨌든 이십 년이야! 정말 긴 세월이 흐른 것 아냐? 옛날 식당은 없어졌어, 보브. 그래도 있었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여기서 우리 또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래 서부는 좀 지내기가 어떻든가?"
"서부야 정말 대단하지. 내가 바라는 건 뭐든지 다 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너도 꽤 변했구나 지미.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키가 몇 인치 더 큰 것 같구먼."
"스무 살이 넘어서 키가 더 자랐어."
"그래, 뉴욕에서는 어떻게 지내고 있었어, 지미?"
"그럭저럭 잘 지냈지. 지금은 시청에서 일하고 있다네. 자 가자구, 보브. 내가 잘 아는 집이 있거든. 거기 가서 우리 천천히 옛날 얘기나 하자구."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길을 걸어갔다. 서부에서 온 사나이는 자기가 성공하고 출세한 얘기를 자랑스럽게 길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상대는 외투 깃에 얼굴을 가린 채 흥미로운 표정으로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길모퉁이 약국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 밝은 등불 밑에 이르자 두 사람은 서로 동시에 얼굴을 돌려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서부에서 온 사나이는 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팔짱을 풀었다.
"넌 지미 웰즈가 아냐."
그는 물어뜯을 것처럼 외쳤다.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아무리 길다지만, 그렇다고 매부리코가 이렇게 납작하게 주저앉을 리는 없지."
"하지만 그 이십 년 동안에 착한 사람이 악당이 되는 일은 있을 수 있겠지."
키 큰 사나이가 말했다.
"넌 지금 나에게 끌려가고 있는 거야, 보브. 실은 네가 이쪽으로 올 것 같다고 시카고에서 전보가 왔었지. 순순히 따라오는 게 좋지 않을까? 그게 훨씬 좋을 거야. 실은 자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 받은 편지가 하나 있어. 경찰서에 가기 전에 여기 이 창 밑에서 읽어 보게나. 오늘 외근중인 웰즈 경찰관이 쓴 편지라네."
서부에서 온 사나이는 조그만 쪽지를 받아 손으로 펼쳤다. 처음 읽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편지를 다 읽기 전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편지는 비교적 짧았다.
'보브. 나는 약속한 시간에 그 장소에 갔었네. 자네가 성냥을 켜서 담배에 불을 붙일 때 나는 자네가 시카고에서 지명수배가 된 사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 하지만 아무래도 내 손으로 자네를 체포할 수는 없더군. 그래서 한바퀴 순찰을 돌고 와서 다른 형사에게 내 대신 부탁을 한 것이라네. 지미로부터'
셋방 / 오. 헨리
뉴욕 웨스트 사이드에서도 남족에 위치한 아파트 지대에는 사람들이 들고 남이 잦은 곳이다. 마치 철새처럼 가구가 딸린 방으로 여기에서 저기로 곧잘 옮겨 다니는 것이다. 그들은 세간을 옮길 때 상자에 넣어서 옮긴다. 이 동네에는 몇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야깃거리도 많다. 하지만 대개는 슬프거나 따분하다.
어느 날 저녁, 한 젊은 청년이 무너져 내릴 듯한 빨간 벽돌집 사이를 헤매고 다녔다. 청년은 어느 집에 이르러 얼마 안되는 짐을 층계위에 내려놓더니 모자와 이마의 먼지를 떨어냈다. 청년은 그 낡아 빠진 집의 벨을 눌렀다. 벨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울렸다. 이것으로 열두 번째 집이었다.
잠시 후 주인이 나타났다. 탐욕스런 인상을 풍기는 여자였다.
"방 있습니까?" 청년이 물었다. "예, 들어와요."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일주일 전부터 비어 있는 방이 3층 구석에 있지요. 좀 보시겠어요?"
청년은 주인의 뒤를 따라 층계를 올랐다. 어디선가 새어 들어온 희미한 빛으로 복도에 깔린 융단이 희끗희끗 보였다. 마치 이끼 같았다. 밝으면 끈적거릴 것처럼.
층계참의 선반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옛날에는 꽃병에 꽃도 꽂아놓고 어느 성자의 상도 세워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꽃은 탁하고 불결한 공기로 시들어 버렸을 것이고, 성상은 악마가 어두운 지하실로 끌고 가 버렸을 것이다.
"이 방입니다." 주인이 말했다.
"아주 좋은 방이지요. 이 방은 비는 일이 좀처럼 없어요. 작년 여름에는 무척 고상한 사람들이 있었답니다. 두말 않고 그 자리에서 선금을 지불해 주더군요. 스프롤즈와 무니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군요. 희극 배우들이죠. 석 달 동안 여기에 살았었지요. 미스 블레터 스프롤즈는 예명이에요. 아, 저기 옷장 위에 결혼 증명서가 있네요. 엑자에 걸려있잖아요. 수도는 복도 끝에 있어요."
"연극 배우들이 주로 방을 빌리러 옵니까?" 청년이 물었다.
"들어왔다 나갔다 해요. 손님 중의 대부분이 연극과 관계가 있지요. 이 곳은 극장 지대니까요. 배우들은 어디서든 오래 머물지 않잖아요.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죠."
청년은 그 방에 세들기로 하고 일주일치 방세를 지불했다. 너무 피곤해서 그저 침대에 드러눕고 싶었던 것이다. 방에는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수건과 물이 준비되어 있다고 주인이 알려주었다.
주인이 막 나가려 할 때 젊은이는 지금까지 몇백 번이나 물어 왔던 질문을 했다.
"저어, 젊은 아가씨에요. 미스 바슈나, 미스 엘로이즈바슈나라고 합니다만...... 댁의 방에 세든 사람 중에 혹시 그런 사람이 없었나요? 아마 극장에서 노래를 불렀을 겁니다. 피부가 희고 키는 중간 정도로 밝은 금발에 왼쪽 눈썹 언저리에 점이 있는 아가씬데요."
"글쎄요, 그런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데요. 연극과 관계된 사람들은 방을 바꾸듯이 이름도 잘 바꾸거든요. 으흠....., 그런 이름은 모르겠군요."
모른다. 모른다. 언제나 모른다.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건만, 5개월 동안 언제나 변함없이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낮에는 극장의 지배인이나 배우의 매니저, 배우 양성소와 합창단을 찾아다녔다. 또 밤에는 일류 배우들이 나오는 화려한 무대에서부터 저속한 뮤직 홀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집을 나가 행방을 알 수 없는 바슈나. 청년은 엘로이즈 바슈나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뉴욕 어딘가에 있겠지.'하고 청년은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뉴욕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흐르는 물 속의 모래처럼 항상 움직이며 돌아다니고 있다. 오늘 위로 떠오른 모래가 내일이면 물 속 깊숙이 파묻혀 버리듯이.
청년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의자에 몸을 던졌다. 몹시 피곤했고 지쳐 있었다. 가구가 딸린 이 방은 겉보기로 봐서는 지내기에 괜찮을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듯한 낡은 가구들, 낡은 소파, 의자, 융단, 그리고 창문 사이에 있는 30센티미터 복의 싸구려 벽거울, 그림 몇장. 하지만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그런데 방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청년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았다. 난로 앞 벽에는 화사한 융단을 쳐 놓았다. 애써 뭔가 꾸며 보려는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화려한 벽지를 바른 벽에는 그림이 몇장 걸려 있었는데, 청년이 그 동안 다른 방에서도 흔히 보아 오던 것들이었다. 화로 선반에는 이 방을 거쳐 간 사람들이 두고 간 물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볼품없는 화병, 여배우 사진들, 약병, 몇 장의 트럼프 등.
이런 것들을 유심히 관찰하다보니 이 방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조금씩 알아 듣게 되었다. 화장대 앞의 융단이 닳아 떨어져 있었다. 이 방에 살았던 여성들이 그 자리에 섰거나 혹은 앉아서 화장을 했다는 걸 말해 준다. 또 벽에는 작은 손가락 자국이 나 있었다. 아마 햇빛이 비치는 쪽을 따라 꼬마들이 아장아장 걸어간 것이리라.
방 안 곳곳에는 크고 작은 얼룩들이 있었다. 눈에 띄게 커다란 자국은 누군가가 겁이나 항아리를 던져 참았던 화를 터뜨렸던 것 같았다. 벽거울에는 꾸불꾸불한 글씨로 '메어리'라고 씌여 있었다.
이 방에 살았던 사람들은 세상살이의 괴로움을 털어놓는답시고 가구에다 화풀이를 했던 모양이다. 가구는 이지러지고 깨지는 등 성한 구석이 하나 없었다. 소파는 용수철이 튀어 나와 있었고, 대리석 난로 선반은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 있었다. 마루청에서는 알아듣지도 못할 독특한 말과 비명이 들려왔다.
이 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 방을 '우리집'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흠집을 낸 것이다.
어쩌면 '우리집'이라고 부르는 이 집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고 화가나서 마구 망가뜨렸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쓰러져 가는 집이라도 일단 자기 집이라고 하면 소중하게 가꾸고 꾸밀텐데 말이다.
청년은 의자에 파묻혀 이것저것 생각했다. 그때 어딘가에서 이상한 소리와 냄새가 방 안에 펴져 왔다. 유쾌하지 않은 웃음소리였다. 혼자 고함지르는 소리와 주사위 흔드는 소리, 자장가 소리, 기분 나쁜 울음소리 등이 들려왔다. 또 머리 위에서는 밴조를 힘차게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덜컹거리는 소리, 고가 철도를 달리는 열차 소리, 그리고 서글픈 듯한 고양이의 울음소리.
마치 방이 살아서 숨쉬는 것 같았다.
방이 토해내는 숨을 청년은 들이마셨다. 아주 고약했다. 차고 탁하고 축축하며 죽어가는 냄새. 낡은 리놀륨이라든가 썩어가는 목재와 섬뜩한 곰팡이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런게 갑자기 어디선가 강한 물푸레나무 향기가 방 안 가득히 퍼졌다. 향기가 어찌나 강한 지 마치 누군가 들어온 듯 했다.
"뭐라구?" 청년은 소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마치 누군가가 자기를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그 강한 향기는 청년에게 착 다라붙어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청년은 손을 뻗어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냄새가 사람을 부른단 말인가? 틀림없이 그것은 소리였다. 하지만 어떻게 목소리가 손을 뻗어 그를 안을 수 있을까?
"바슈나가 이 방에 묵었던 거야!" 청년은 소리쳤다. 방 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바슈나가 가지고 있던 것이나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물건이라면, 설사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청년은 구별할 수 있었다. 주위에 가득한 물푸레나무 향기, 이 냄새는 분명 바수나의 것이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냄새였던 것이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 향기가 나는 것일까?
방은 적당히 정리되어 있었다. 옷장 위에는 반 묶음 정도의 머리핀이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건 단서가 되지 못했다. 서랍을 뒤져보았다. 오래 써서 낡은 손수건이 나왔다. 그것을 얼굴에 대어 보았다. 지독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청년은 손 수건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또 다른 서랍에서는 깨진 단추와 연극 프로그램, 전당표와 시든 연분홍 접시꽃 두 송이 그리고 해몽에 관한 책 등이 나왔다. 나머지 서랍을 열자 검은 색 비단 리본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바슈나의 것이 아니었다. 바슈나의 것이라면 적어도 이렇게 흔한 것은 아닐 테니까.
청년은 마치 사냥개처럼 방 안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벽을 만져 보기도 하고 넓죽 엎드려 바닥과 침대 구석구석을 살펴보기도 했다. 벽난로와 테이블, 커튼과 덮개, 방 안을 마구 휘저으며 찾아보았지만 이렇다 할 것은 없었다.
그때 다시 청년은 누군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다시 한번 소리내어, "그래, 나 여기 있어!"라고 대답하며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오, 하나님! 이 냄새는 어디세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어떻게 향기가 사람을 부를 수 있을까요?'
청년은 참을성 있게 계속 손을 더듬어 찾아 나갔다. 하지만 코르크 마개와 담배들만 손에 잡힐 뿐이었다. 매트 사이에서 피우다 만 담배가 발견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청년은 마구 욕을 퍼부으며 발뒤꿈치로 담배 꽁초를 밟아 뭉개 버렸다. 청년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층분하고 있었다.
순간 그는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가더니 주인 여자를 불러 냈다. 청년은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말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아주머니. 제가 오기 전에 누가 저 방에 살았었지요?"
"아, 네. 다시한번 가르쳐 드리지요.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스프롤즈와 무늬라는 사람이지요. 둘은 부부입니다. 브레터 스프롤즈는 예명이지요. 벽에 결혼 증명서가 걸려 있지요?"
"그럼 미스 스프롤즈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러니까 그녀의 생김새가 말입니다."
"글쎄요. 말하자면 머리는 검고 뚱뚱했어요. 얼굴이 재미있게 생겼다고 할까요? 그 사람들은 지난 주 화요일에 나갔답니다."
"그럼 그 사람들 전에는요?"
"짐마차 운송업에 관계하는 독신 남자였지요. 일 주일 있다가 곧 나가 버렸어요. 그 전에는 클라우더 부인과 아이 둘이 있었는데, 한 넉달 쯤 있었지요, 아마? 그 전에는 나이 많은 도일 씨가 있었는데 방세는 그 아들이 대신 내주었답니다. 도일 씨는 반년 있었어요. 그게 일 년 전이야기니까, 그 이전은 생각이 잘 나지 않는군요."
청년은 실망하여 무겁게 걸음을 옮겨 방으로 돌아왔다. 그 새 방은 죽어 있었다. 물푸레나무 향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 아파트에서 나는 독특하고 역겨운 냄새만 진동했다.
청년은 멍청하게 가스등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침대 시트를 갈기갈기 찢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작은 칼날로 시트 조각들을 창과 문틈에 잔뜩 밀어 넣었다. 바깥에서 공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는 가스의 마개를 비틀어 풀어 놓고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 날 밤은 매클 부인이 찬 음료를 대접할 차례였다. 그래서 부인은 이 부근 하숙집 주인들이 모이는 장소로 먹을 것을 가지고 가서 파디 부인과 마주앉았다. 두 사람 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늘 저녁에 3층 구석방을 젊은 청년에게 세주었답니다." 맥주거품 너머로 파디 부인이 말했다. "두 시간쯤 전에 자러 갔어요."
"어머나, 방을 빌려 주었다구요, 파디 부인?" 신통하다는 듯이 매클 부인이 말했다. "그런 방을 어떻게...... 당신은 정말 재주도 많군요. 그래 청년한텐 그 말씀을 하셨나요?"
그러자 파디 부인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방에는요, 세를 주기 위해서 가구를 들여 놓았어요. 그런 이야기는 뭣하러 합니까?"
"하긴 그래요. 우리는 방을 빌려주는 일로 생활을 꾸려 가고 있으니까요. 정말 잘 하셨어요, 부인. 만일 그 방 침대에서 누가 자살했다는 소리를 사람들이 듣는다면 아마 그 방을 빌리려 하지 않을 거예요."
"맞아요. 부인 말씀대로 우리는 살아가야 하잖아요." 파디 부인이 말했다.
"정말 그렇구말구요. 그러고 보니 오늘로 꼭 일주일째로군요. 가스를 켜 놓고 자살을 하다니, 정말 귀여운 아가씨였는데..... 정말 예뻤어요."
"네, 참 예쁜 아가씨였지요." 하지만 파디 부인은 무언가 트집을 잡으려는 듯 말했다.
"다만 왼쪽 눈썹 옆에 있는 검정 사마귀만 없었다면 말이죠. 우리 한 잔 더 할까요, 매클 부인?"
마녀의 빵 / 오. 헨리
길모퉁이에서 조그마한 빵집을 운영하는 미스 마더. 올해로 마흔인 그녀는 2천달라의 예금 잔고가 있고 의치 두개를 끼워 넣었으며 무엇보다 인정이 많다 그런 그녀의 마음속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바로 일주일전애 두 세 번 빵집에 들러 언제나 딱딱한 식빵만을 사 가는 중년의 남자
그는 언제 봐도 말쑥하고 예의바른 모습이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빛은 얼마나 다정한지... 언젠가 손가락 사이에 묻은 얼룩을 보고 미스 마더는 그가 가난한 화가일 거라고 짐작했다 두툼한 고기와 달콤한 잼이 들어간 빵과 함께 차를마실 때면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다락방에서 딱딱한 빵을 먹을 그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가끔 그가 사가는 빵에 맛있는 걸 끼워주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예술가는 자존심이 세다는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스 마더는 늘입던 갈색 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하늘하늘한 물방울무늬 실크 블라우스를 입었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 때처럼 그는 식빵을 찾았다 때마침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며 소방차 가 지나갔다 궁굼해진 그는 창문가로 갔고 미스마더는 순간 묘안이 떠올았다 바로 식빵 안에 갓 배달된 버터를 듬뿍 발라 마음을 전하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바로 실행에 옮겼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빵을 건넸다 그림을 그리다가 시장기를 느낀 그는 빵을 꺼내겠지 한입 베어 무는 순간 부드러운 버터 맛 을 느끼며 나를 떠올릴거야 그렇게 온종일 상상하던 그녀는 그만 얼굴을 붉혔다
그때였다 두 사내가 가게로 들어왔다 한 사람은 낯선 젊은 남자였고 또 한사람은 바로 그 화가였다 화가는벟겋게 상기된 얼굴로 미스 마더를 행해 소리쳤다 "이 할망구야 당신이 무슨일을 저질렀는지 알아? 같이 온 청년이 말렸지만 쇼용 없었다 "당신이 내 일을 망쳐 놓았다고! 이 주제 넘은 할망구야." 탕,탕 탁자까지 내리치며 소리치는 그를 겨우 문밖으로 끌고 나간 청년은 계산대로 돌아와 말했다 저 친구는 블럼버거입니다 건축 설계사지요 그는 지난 석 달 동안 공모전에 응모할 새 시청의 설계도를 그리는 데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마침내 잉크로 그리는 작업을 마쳤지요 처음설계도를 그릴때는 연필로 밑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잉크로 덧대어 그린뒤 딱딱한 식빵으로 연필 자국을 지워 나가지요 그 런데 오늘 당신이 준 그 버터가 든 빵 때문에...그..빵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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