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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24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승리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도록 하신 까닭이 무엇이겠느냐?
본문 : 사무엘상 4장 2~3절
블레셋 사람이 전열을 갖추고 이스라엘 사람을 치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스라엘은 이 싸움에서 블레셋에게 졌고, 그 벌판에서 죽은 이스라엘 사람은 사천 명쯤 되었다. 이스라엘의 패잔병들이 진으로 돌아왔을 때에, 장로들이 말하였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가 블레셋 사람에게 지도록 하신 까닭이 무엇이겠느냐? 실로에 가서 주님의 언약궤를 우리에게로 모셔다가 우리 한가운데에 있게 하여,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하여 주시도록 하자!” <사무엘상 4장 2~3절, 새번역>
지나간 한 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하나님의 평안으로 안부를 전합니다.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었지만, 다시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는 코로나의 확진과 여러 가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아예 생각조차 못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오늘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평안이 있고, 은혜가 있는 쉼과 휴가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쉬는 것도 충분히 행복한 시간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7월의 4번째 주일 저희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에 주시는 말씀은 사무엘상 4장 2~3절을 본문으로 하여 ‘승리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도록 하신 까닭이 무엇이겠느냐?’ 라는 제목의 말씀입니다. 승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패배를 허락하신 이유에 대해서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새번역으로 된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전열을 갖추고 이스라엘 사람을 치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스라엘은 이 싸움에서 블레셋에게 졌고, 그 벌판에서 죽은 이스라엘 사람은 사천 명쯤 되었다. 이스라엘의 패잔병들이 진으로 돌아왔을 때에, 장로들이 말하였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가 블레셋 사람에게 지도록 하신 까닭이 무엇이겠느냐? 실로에 가서 주님의 언약궤를 우리에게로 모셔다가 우리 한가운데에 있게 하여,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하여 주시도록 하자!” <사무엘상 4장 2~3절, 새번역>
저는 개인적으로 ‘야구’라는 스포츠를 참 좋아합니다. 그리고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열심히 참여해서 뛰고 있기도 한 운동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다보니 좋은 기회에 사회인야구팀 감독을 맡아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감독으로 시즌을 보낼 때 주변 사람들이 제게는 이상한 행동이 있다고 자꾸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그렇듯이 시즌 중에는 당연히 승리하는 경기가 재미가 있긴 하지만 저는 이상하게도 패배한 경기가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팀원들에게 매번 지고나면 진지하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늘 왜 진걸까요?’ 그래서 팀원들이 저를 이상한 감독이라고 자꾸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경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게 되면 더욱 더 오랫동안 패배한 원인에 대해서 곱씹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패배의 원인을 찾아내야만 다음 경기에서는 패배가 아닌 승리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원인을 찾아내고, 고쳐가면서 승리를 맛보았을 때 더욱 ‘야구’라는 스포츠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이긴 경기보다는 패배한 경기가 더 기억에 남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원인을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너무 답답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비단 ‘야구’라는 스포츠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가다 보면 역시나 원인을 잘 모를 때가 참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실패를 경험하게 되었는지, 삶이라는 전쟁터 속에서 왜 매일매일 승리는커녕 얻어터지기만 하고, 매번 지고 있는지 원인을 잘 모를 때의 답답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실상 그 원인이라는 것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제가 제 3자의 입장이 되어서야만 깨닫게 됩니다. 그 원인 모를 문제 안에 갇히고 휩싸여 있을 때는 도저히 원인이 보이지 않다가 한걸음만 뒤로 물러나보면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마치 지난 야구 게임에서 패했던 이유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감독의 잘못된 '게임운영'이었다는 것을 한 걸음 뒤로 물러나니 발견한 것처럼 말입니다.
사무엘상 4장을 펼쳐보면 이스라엘에 큰 위기가 찾아온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모여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곧 이스라엘과 블레셋간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였을까요? 그렇게 기대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백성 4000명이 죽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대패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 전투에서 겨우 몇 명의 군사들만이 목숨을 건지고 살아서 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패잔병들을 바라보면서 장로들이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패잔병들이 진으로 돌아왔을 때에, 장로들이 말하였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가 블레셋 사람에게 지도록 하신 까닭이 무엇이겠느냐?” <사무엘상 4장 3절A, 새번역>
‘지도록 하신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블레셋 군대가 강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질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패배의 원인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도록 하신 까닭을 찾아야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장로들이 전쟁의 승패에 대한 핵심을, 패배의 원인을 잘 이해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번 전쟁이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전쟁이 아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한다는 내용이 등장하면 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전개입니다. 하지만 장로들의 다음 행동은 예상하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전혀 예상 밖의 전개가 펼쳐집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찾기 시작합니다.
실로에 가서 주님의 언약궤를 우리에게로 모셔다가 우리 한가운데에 있게 하여,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하여 주시도록 하자!" <사무엘상 4장 3절B, 새번역>
모두가 이런 장로들의 말에 동의했기 때문일까요? 일사천리로 언약궤가 있는 실로로 사람을 보냈고, 당장 주님의 언약궤를 메고 진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같이 온 인물들이 있습니다. 이 인물들을 보자 무엇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을 복선으로 보여주고 있는 성경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실로로 사람들을 보냈다. 그들이 거기 그룹들 사이에 앉아 계시는 만군의 주님의 언약궤를 메고 왔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올 때에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함께 왔다. <사무엘상 4장 4절, 새번역>
제사장이었지만 제사장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제사장들, 여러 가지 비리로 물들어 완전히 타락했던, 철저하게 하나님을 무시한 채 살고 있던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바로 그들입니다. 이 둘의 이름이 등장하는 여기서부터 무언가 결론을 알듯 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요? 이들이 같이 왔다는 것은 분명 이상한 낌새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우려에 빠진 저와는 다르게 주님의 언약궤가 진으로 들어올 때 마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듯이 그 곳에 있던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땅이 진동할 정도로 크게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당연했습니다. 주님의 언약궤는 전쟁터에서 주님의 임재를 상징했기에 당연히 소리 높여 환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셨으니 이제는 이긴 전쟁이로구나!’ 다른 성경 속에서도 이런 모습을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산을 떠나 사흘 길을 갔다. 주님의 언약궤를 앞세우고 사흘 길을 가면서, 쉴 곳을 찾았다. 낮이 되어 그들이 진을 떠날 때면, 주님의 구름이 그들 위를 덮어 주었다. 궤가 떠날 때에 모세가 외쳤다. "주님, 일어나십시오. 주님의 원수들을 흩으십시오.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을 주님 앞에서 쫓으십시오." 궤가 쉴 때에도 모세가 외쳤다. "주님, 수천만 이스라엘 사람에게로 돌아오십시오." <민수기 10장 33~36절, 새번역>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너의 손에 붙인다. 너희 가운데서 전투를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은, 엿새 동안 그 성 주위를 날마다 한 번씩 돌아라. 제사장 일곱 명을, 숫양 뿔 나팔 일곱 개를 들고 궤 앞에서 걷게 하여라. 이레째 되는 날에, 너희는 제사장들이 나팔을 부는 동안 성을 일곱 번 돌아라....(중략)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었다. 그 나팔 소리를 듣고서, 백성이 일제히 큰소리로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백성이 일제히 성으로 진격하여 그 성을 점령하였다. <여호수아 6장 2~20절, 새번역>
하지만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지 못하고 있던 것, 크게 착각한 것이 있습니다. 사실 전혀 염두에 두지 않으며 살아왔기에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해서 성경은 정확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온 것이지, '하나님'을 모시고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언약궤를 들고 와서는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론이 만들고 하나님이라고 말했던 황금송아지를 떠올려 보시면 됩니다.
아론이 그들에게서 그것들을 받아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드니, 그들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출애굽기 32장 4절, 새번역>
절대 하나님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첫 번째 제사장 아론으로부터 마지막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까지 이 가문에 속한 이들은 어쩜 이리도 똑같은지요! 하나님의 임재에 가장 민감해야 했던 제사장들이 무너졌으니, 많은 이들의 타락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를 거치면서 사무엘상 초반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하나님'없이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이었는데, 전쟁에서 패배하고 나니, 마치 그동안 '하나님'을 잘 믿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분명하지만 지금은 껍데기뿐이었기에 그런 언약궤를 가지고 온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언약궤를 믿었고, 그 언약궤는 그들에게 한낱 부적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언약궤는 아무 쓸모도, 의미도 없습니다. 그건 그냥 하나의 '궤'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 껍데기뿐인 언약궤를 믿고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당장에라도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그 환호하는 소리를 듣고 "저 히브리 사람의 진에서 저렇게 환호하는 소리가 들리는 까닭이 무엇이냐?" 하고 묻다가, 주님의 궤가 진에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무엘상 4장 6절, 새번역>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함성을 듣게 된 블레셋 사람들은 예전부터 들어오던 '언약궤'에 대한 명성을 떠올리며 초긴장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면서 말하였다. "이스라엘 진에 그들의 신이 들어갔다." 그래서 그들은 외쳤다. "이제 우리에게 화가 미쳤다. 일찍이 이런 일이 없었다. 우리에게 화가 미쳤는데, 누가 저 강력한 신의 손에서 우리를 건질 수가 있겠느냐? 그 신들은 광야에서 온갖 재앙으로 이집트 사람을 쳐서 죽게 한 신들이다. <사무엘상 4장 7~8절, 새번역>
차라리 이 때 블레셋 군대가 완전히 겁을 먹어서 자기 나라로 서둘러 돌아갔다면 좋으련만! 이상하게도 그들은 두려워하며 움츠러들기는 했지만 블레셋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전투에 나설 준비를 합니다. 오히려 블레셋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는 말들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참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약궤가 있는 이스라엘 진영이 아니라 블레셋 진영에 하나님이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아, 대장부답게 힘을 내어라! 그렇지 않으면, 히브리 사람이 우리의 종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그들의 종이 될 것이다. 너희는 대장부답게 나가서 싸워라!" <사무엘상 4장 9절, 새번역>
이 말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마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용기를 북돋우실 때 쓰는 말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응원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은 비단 저 혼자뿐일까요? 여러분들도 비슷한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이어서 나오는 이 두 번째 전쟁의 결과가 그런 착각을 한 저를(제발 착각이기를 바랐지만) 더 확신에 차게 만들었습니다. 빈껍데기 허울뿐인 '궤'를 의지한 이스라엘 백성은 대장부답게 힘을 낸 블레셋 군대에게 완전히 패하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 블레셋 사람이 전투에 임하니, 이스라엘이 져서 제각기 자기 장막으로 달아났다. 이스라엘은 이때에 아주 크게 져서, 보병 삼만 명이 죽었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이 때 전사하였다. <사무엘상 4장 10~11절, 새번역>
이건 정말 하나님이 블레셋 군대를 이용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신 것이 확실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더 이상 블레셋 사람들조차 두려워했던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더욱 더 인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전쟁은 블레셋의 완전한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달려 있음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어떠한 방법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빈껍데기뿐이었던 언약궤를 의지했던 이스라엘의 패배는 너무도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놀라운 점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홉니와 비느하스도 이 전투에서 한 날 한 시에 같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한 날에 죽을 것이며, 이것은 내가 말한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사무엘상 2장 34절, 새번역>
또한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모시고 온 '언약궤'마저도 블레셋에 빼앗기게 되는 수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 순간 저는 아이성 전투를 마치고 난 후에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던 여호수아가 떠올랐습니다. 당시의 장로들은 이 여호수아의 기도를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왔을 때 여호수아는 오늘 블레셋과의 전투와 같이 한낱 '궤'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습니다. 그 때와 지금 이 순간이 왜 이렇게 오버랩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패배는 같았지만 반응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여호수아는 슬퍼하면서 옷을 찢고, 주님의 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저녁때까지 있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도 그를 따라 슬픔에 젖어,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썼다. <여호수아 7장 6절, 새번역>
하지만 이스라엘의 어떠한 그 누구에게서도, 엘리에게서도, 홉니와 비느하스에게서도, 이 여호수아와 같은 마음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담당했던 제사장들마저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들 멋대로 행했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철저히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살아가던 이스라엘의 안타까운 현실을 오늘 사무엘상 4장 본문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동역자 여러분, 여러분들은 사무엘상 4장의 이야기가 어떻게 다가오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것일까요? 오늘 설교의 제목이 되었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가 블레셋 사람에게 지도록 하신 까닭이 무엇이겠느냐?" <사무엘상 4장 3절B, 새번역>
장로들이 말한 이 질문 자체는 결코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 다음에 당연히 이어져야 할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도록 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았다면, 안 것에 머물지 말고, 깨달은 다음에 따라 나와야 하는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을 반드시 행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이 아닌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으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사람의 생각으로 행동한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 듯 보이지만, 하나님께 승패를 맡긴 듯 보이지만, 그들 안에 이미 하나님이란 존재는 없었음을 그들이 한 행동으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것일까?"
"하나님 도대체 왜 저는 이렇게 실패만 해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 도대체 안 풀리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요즘 이런 질문들을 신앙생활 중에 하고 계신다면, 이런 질문들만 계속해서 나오는 순간을 보내고 계신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질문 다음 반드시 해야 할 행동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찾으셔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절대 하나님과 비슷한 것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추억 속에 존재하는 어떤 영광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방법을 떠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사람에게서 답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는 결코 하나님이 아닙니다. 목사의 말은 권면일 뿐 절대 하나님의 음성일 수 없습니다. 지금 직접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찾으셔야 합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수많은 질문들의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 없는 빈껍데기 '궤'를 찾는다면 저 질문은 더 큰 좌절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 전투에서는 ‘4천명’이 죽었지만, '궤'가 들어온 다음엔 승리가 아닌 ‘3만명’의 죽음이었음을 우리는 민감하고 예민하게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신앙은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냥 허공에 대고 답답한 마음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던진 그 질문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도록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질문을 던져놓고 사람에게 답을 구하지 마십시오. 어떤 책에서 답을 찾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질문을 드렸다면, 하나님이 대답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을 찾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들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은 하나님께 질문을 드리고, 하나님께 응답을 받는 삶의 연속이 되어야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빈껍데기뿐인 '궤'를 의지한 채 들고서 수많은 문제들의 원인을 모르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 '궤'만을 의지하고서 하나님은 찾지 않는 자신이 문제의 원인입니다. 이런 문제를 벗어나는 방법은 아주 쉽고 간단합니다. 의지한 채 들고 서 있는 그 '궤'를 내버리고, 그 궤가 상징했던 하나님을 찾으시면 됩니다. 간절히 소망하기는 나의 확신을 믿는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시면 됩니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7장 7~8절, 새번역>
주님께서 오늘 나에게 이렇게 행동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이렇게 질문을 드리고 있는 당신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길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잊지 마십시오. 질문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찾으시길! 결코 질문에 빠져 계시지 않으시길! 그렇게 되시길 소망하며 축복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찾으실 때 주어지는 축복은, 문제 해결은 아래에 나오는 말씀과 같이 당신에게 임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설교를 끝내며 선물로 드립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6장 33절,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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