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이야기]<625>뢰禱爾于上下神祇라 하도소이다…
공자는 怪力亂神(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았지만 초월적 존재를 상상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 존재는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논어’ 述而(술이)편의 이 章(장)에 공자의 사유와 자세가 나타나 있다. 공자가 위독해지자 제자 子路(자로)가 기도하기를 청했다. 공자는 병나면 기도하는 일이 禮法(예법)에 나오느냐고 물었다. 자로는 “있습니다. (뇌,뢰)(뢰)에 보면 상하 신명에게 기도한다고 했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공자는 “내가 기도해 온 것이 오래되었다”고 했다. 평소의 삶이 神明(신명)의 뜻과 부합했기에 기도를 일삼을 필요가 없다고 거부한 것이다.
(뇌,뢰)는 죽은 이를 애도하는 弔辭(조사)나 輓詞(만사)다. 공적을 서술하여 기도하는 글이라고도 한다. (뇌,뢰)曰(뢰왈)은 ‘조사(만사)에 이르기를’이다. 禱(도)는 천지신명에게 비는 일이다. 사람이 죽어 갈 때 코에 솜을 대어 숨이 끊어졌는지 알아보는 屬광(속광)의 때에 기도를 했다고 한다. 爾(이)는 이인칭 대명사다. 于(우)는 ‘∼에게’이다. 神祇(신기)에서 神은 하늘의 신, 祇는 땅의 신이다. 子曰 이하는 공자의 말을 옮겼다. 丘(구)는 공자의 이름이다. 언해본은 ‘구’라 읽었지만 아무개 某(모)로 바꿔 읽는 것이 관례다. 丘之禱久矣(구지도구의)에서 주어는 丘之禱, 술어는 久이다. 矣는 종결사다.
‘주역’ 大有(대유)괘의 上九(상구) 효사에 “하늘이 도우면 吉(길)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다”고 했다. 하늘이 무조건 도와준다는 뜻이 아니다. 信實(신실)한 삶을 살면서 命(명)에 順從(순종)해야 하늘이 도와준다고 풀이한다. 성호 이익은 말했다. “命은 보탤 수도 없고 줄일 수도 없다. 생명의 한계인 大限(대한)을 망각하고 욕심 부리는 것을 君子(군자)는 부끄럽게 여긴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한자 이야기]<626>君子坦蕩蕩하고 小人長戚戚하니라
‘논어’ 述而편의 이 장은 君子와 小人을 대비시켜 君子의 삶을 살라고 권하고 있다. 군자는 自主性(자주성)을 지닌 존재다. 군자가 존경받기 때문에 군자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坦은 平坦(평탄)이니, 넓게 툭 터져 있음을 말한다. 蕩蕩(탕탕)은 걸림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형용어의 같은 글자를 둘 겹친 한자어를 疊語(첩어)라 한다. 坦蕩蕩은 外物에 의지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에 마음이 平靜(평정)하고 외모가 느긋함을 말한다. ‘대학’에서 마음이 넓고 몸이 편안함을 가리켜 心廣體반(심광체반)이라 한 것에 해당한다. 坦蕩蕩은 세상을 내리깔아 보는 오만함이 결코 아니다. 주자(주희)는 “진정한 대영웅은 두려워 조심하며 깊은 못에 임한 듯이 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는 데서 나온다”고 했다. 군자의 坦蕩蕩은 深淵(심연)에 임하고 薄氷(박빙)을 밟는 듯이 戒愼恐懼(계신공구)하는 자세에서 우러나온다.
長은 항상, 늘이란 뜻이다. 戚戚(척척)은 근심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첩어다. 부귀에 汲汲(급급)하고 가난에 戚戚하는 것을 아우른다. 長戚戚은 영구히 마음속 근심이 떠나지 않음을 말한다. 소인은 외물에 휘둘리고 命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늘 불안하다. 戒愼恐懼하기에 조심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自主性이 없기 때문에 불안해한다.
목은 李穡(이색)은 “근심 없는 이가 성인이요, 근심을 해소하는 이가 현명한 사람이요, 근심 걱정으로 일생을 마치는 것이 소인이다”라고 했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올바른 이념을 지켜 홀로 우뚝하여 煩悶(번민)이 아예 없는 존재가 성인이다. 번민은 들지만 거기에 빠지지 않고 그것을 해소해 가는 존재가 현명한 사람이다. 이에 비해 名利에 집착해서 근심 걱정으로 삶을 허비하는 사람은 소인이다. 나는 누구인가? 누구를 닮으려 하는가?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