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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
김 경재 (한신대,신학교수)
1. 왜 장공이 재조명되어야 하는가?
장공 김재준(1905-1987)은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요, 한국 교회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항상 언급되지만, 의외로 그가 이룬 한국 현대사 속에서 업적과 그의 삶의 의미에 대하여 일반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는 인물이다. 그가 길러낸 제자들 중에서 도리혀 장준하, 문익환,강원룡,안병무 이름을 대면 그 이름을 알아보는 사람들도 김재준에 대하여는 잘 모른다. 그러나 장공은 단순히 한국 기독교계 안에서만 기억되어야 할 종교계 지도자 일 뿐아니라, 한국 현대사 속에서 반드시 연구 되어야 할 인물중 한 분이다.
더우기 군부 독재가 우리사회를 전횡하던 지난 1970-80년대 암울했던 시절, 대다수 언론과 지식인들이 숨을 죽이고 보신을 꾀하던 시절,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민주수호협의회 공동의장직을 맡으면서 이 나라의 자유, 민주, 정의, 인권을 위해 역사현실의 최일선에서 온 몸을 투신하여 활동한 그를 재조명하지 않고서는 한국 현대사의 총체적 재조명에 있어서 큰 블렉홀이 생기게 된다. 도대체 왜 1970-80년대 한국 사회는, 기라성 같던 재야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등이 있었을 터인데 평소에 이름도 잘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 한국신학대학 학장직을 지낸 일 밖에 없던 개신교 목사 한 사람을 역사의 전면에 추대하여 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가?
한국 근대사를 연구할 때엔 반드시 함께 연구하지 않으면 않되는 한국 개신교의 허와 실은 무엇인가? 한국 기독교계의 진보적 세력과 보수적 세력의 그 원초적 갈림길은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며, 도대체 기독교는 한국 종교문화사및 사회정치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남북의 통일을 전망하면서 기독교는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왜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하여 50년만에 이룩했다는 민주정권 지도적인물들은 누구나 장공 김재준 목사를 정신적 대부로 존경하고 어른으로 모시는 일에 있어서 다른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는가?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장공 김재준이라는 인물은 우리가 주목하고 연구할 필요와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는 진솔한 인간이었고, 자신을 비운 청렴한 성직자요, 탁월한 교육자였으며, 민족주체적 사상가요, 민주주의를 신봉한 자유인이었고, 개혁정신의 투철한 문화신학자였다. 우리는 그를 좀더 자세히 연구해보기로 하자.
2. 두만강변 고원지대에서 자라난 질박한 거목(1905-1939년까지)
장공 김재준은 1905년, 지금은 아오지 탄광촌으로 더 잘 알려진 함경북도 경흥군 상하면 속칭 창꼴마을에서 탄생했다. 부친 김호병씨는 산골에서도 '글하는 분'으로서 유교적 학문을 터득하신 분이었는데 이미 문란해진 과거에 한 번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아예 함북 깊은 산골에서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읽으며 농사를 짓던 분이었다. 그러나 유교정신으로 철저한 아버지의 영향은 장공에게 사서삼경에 통달하는 한문실력을 길러주었으며, 무엇보다도 유교적 선비정신을 부지부식간에 전해줌으로 해서 김재준이 훗날 기독교로 개종한 뒤에도 항상 그의 인격형성의 밑거름이되었고 그의 품격의 기틀이 되었다. 장공의 어머니는 함북 종성에 유배된 실학파 채향곡의 후손으로서 채동순의 딸님 채씨였다.
김재준이 태어난 1905년 같은 해에, 한국 기독교사에서 걸출한 두 인물 함석헌과 신비주의자 이용도가 태어났다. 장공(長空)이라는 호는 김재준이 30대 될 무렵 그의 신앙의 선배요 학형이랄 수 있는 만우 송창근 목사가 그의 인품을 보고 지어준 아호다. 그 인물됨이 구만리 창공처럼 높고 넓고 깨끗하며, 그의 맘이 탐욕이나 세속적 명예욕이 없이 맑고 비어 있어서 장공이라 불렀고, 사람들은 장공이란 아호는 바로 김재준을 가장 잘 표현한 아호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릇 모든 인간은 그가 태어나고 자라난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장공이라는 인물은 대기만성형의 인물이요, 깊은 산골에서 무모한 초동의 도끼질 받음없이 맘賸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자란 때묻지 않은 거목을 연상케한다. 함경북도 경흥군은 두만강변 육진과 함께, 조선초부터 개척자들의 삶의 터요, 조선조 말쯤엔 굶주림에 지쳐 간도지방으로 이주해간 실향민들의 새로운 개척신천지요, 일제시대는 독림운동가들의 경유지요 독립군의 집결지이며, 기독교 개화사상에 일찍 눈을 뜬 자유정신의 발상지이다. 일찍부터 개화바람을 타고 사립학교가 이곳저곳에 설립되어 국권회복과 민중계몽에 힘을 기울이는 지역이었다. 장공의 청소년기는 아직 기독교로 개종전이며, 엄격한 아버지의 유교적 가풍에 의해 정신적 기틀이 놓여진 것이다.
장공의 청소년 시절 교육은, 데라우찌총독의 무단정치시절, 함북 고건원 보통학교에 3학년 편입으로 졸업하고, 회령간이농업하교를 졸업하였다. 회령간이농업학교를 졸업한 청년 김재준은 회령군청 간접세과 임시 서기로 채용되어 18살이 될 때까지, 함경북도 회령군청에서 나라잃은 백성의 후예로서 비젼도 없고 나라를 다시 찾겠다는 애국열정이나 계몽 교육운동에 헌신하거나 관심도 없이 함북 변방에서 자라고 있던 무명의 청년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의식화가 늦은 김재준 청년에게 커다란 일생의 전환이 오게 된 계기는 1919년 3.1만세 사건이었다. 3.1만세 사건은 잠자던 한민족을 일깨운 거족적 민족은동이었기에 두만강변 산골에도 새로운 민족의식과 이전과 다른 새기운이 스며들게 되었다. 김재준은 이무렵 앞서말한 회령군청 직세과 서기직에서 웅기금융조합으로 전직했다. 웅기는 만주나 시베리아에 망명하는 애국지사들이 통과하는 관문이었기에,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상해독립신문같은 것을 얻어 읽을 수 있었으므로 청년 깁재준에게도 민족의식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3.1운동 다음해 1920년, 당시 20세가 된 청년 김재준에게 일생일대 운명적 만남의 사건 하나가 이뤄지고 있었다. 삶이란 만남이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 좋은 친구를 만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면 한 사람의 일생이 의미깊고 창조적으로 전환된다.
그무렵 장공이 만난 인물은 장공보다 두살 위인 당시 서울 남대문교회 전도사로 일하다가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6개월 감옥살이를 하고, 고향 땅 함북 웅산마을에 요양차 귀향한 송창근이라는 준수한 미모의 청년이었다. 웅상이라는 해변마을은 웅기에서 한 오리 떨어진 해변마을 이었지만, 일찍 기독교가 전래되어 교회가 서있는 기독교촌이었다. 교회에서 사흘동안 기독교 강연회가 있다는 광고가 나붙었지만 장공은 처음 교회집회엔 무관심 냉담했다고 한다. 그는 아직 엣 사람에 속한 혈육적 인간이었던 셈이다. 그러던 어느날, 청년전도사 송창근은 하숙방으로 청년 김재준을 방문하였고, 3.1운동 이후 나라 안밖 소식을 전하고, 웅기 구석에서 금융조합 서기같은 일을 하면서 청춘과 일생을 지내려 말고, 서울로 올라가 공부를 하고 나라와 사회가 요구하는 인물이 되어주기를 권면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송창근의 진솔한 권면은 잠자던 청년 김재준의 심령을 움직였다.
잠자는 속사람을 일깨워 부르는 어떤 내면의 소리에 응답한 청년 김재준은 이미 고향엔 결혼한 아내가 있었지만 모든 것을 정리하고, 백부님 한 분이 서울에 계시는 것을 맘의 의지처로 삼고 한양으로 올가가는 결단을 내림으로써 그의 일생 제2기가 펼쳐지게 되었다. 당시 서울은 사대문 안에 국한 된 인구 15만의 도시였는데 왕십리는 미나리밭, 동대문 밖은 초가집 시골동네요, 혜화동은 앵두밭이고 남대문 밖은 작은 늪이 고이고 서울역까지 초가집들이 다닥다닥 땅에 붙어있던 시기였다. 1920년 초 경성의 풍경이었다. 유난히 서울역전 세부란스 병원의 서양식 건물과 종로 기독청년회관(YMCA)이 신식건물로 눈에 띄었는데, YMCA는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으로 올라온 청년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있던 시절이었다.
서울에 올라온 청년 김재준은 중등중학교 고등과정에 편입하여 현 고등학교과정의 교과과정을 속성으로 이수하고, YMCA 기관을 이용하여 뒤늦은 향학열에 불을 댕기고 외국어 교육에 집중하면서 광범위한 독서를 통하여 기독교 진리에 접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 중앙 YMCA는 기독교 신앙과 사상을 접하는 사회교육 기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민중과 청년들의 개화운동, 독립사상고취, 민족문화개발과 민족의식의 고취, 그리고 종교의 사회참여를 선도하는 기관이었다. 당시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 선생같으신 존경받는 YMCA 지도자들이 맘을 합심하여 일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청년 김재준의 한양 서울 유학생활은 유학생활이라기 보다는 구도자로서 그 몸과 마음과 심령이 통과제의를 겪는 3-4년간의 기간이었다. 그의 속 심령은 서서히 진리의 빛에 의해 속사람이 회생되고 있었으며, 함경도 화령과 웅기에서 일인들의 관리 심부름꾼 노릇을 하면서 재산을 모으려던 옛날에 지녔던 청년의 꿈은 철저히 살아지게 되었다. 중세기 앗시시의 성자 성 프랜시스가 그의 수호천사처럼 느껴지며 프랜시스의 청빈과 그분의 순수한 영성을 흠ꣳ 흠모하면서 뒤늦은 학문연마에 전심전력하던 시기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내면적 심령에 혁신의 바람이 일고 있었다. 성령의 감동감화가 연일연야 그를 어루만지고, 장차 큰 그릇으로 쓰시려는 하늘의 섭리가 청년의 몸과 맘을 연단시키시고 있었다. 그는 마침네 서울 승동교회에서 김익두목사를 주강사로 삼고 열리는 장로교 연합사경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회심을 경험한다. 가슴이 뜨겁고 성령으로 말미암는 기쁨이 그의 가슴을 거룩한 정열로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청년 김재준은 성경내용이 꿀송이 처럼 달고 기도에 욕심장이가 되었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회고한다. 김재준은 같은 동급학생 김영구학생의 급작스런 병사를 경험하고 더욱 종교적이 된다. 마침네 그는 예수를 영접하여 믿는 사람이 된지 3년만에 정식적으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으로 완전히 개종하게 된다.
청년 김재준은 고향으로 돌아가 3년간 초등교사로서 봉사하면서 산촌마을의 민족들을 계몽하는데 봉사헌신한다. 그러나 김재준의 학구열은 함북 산촌마을 보통학교 교사로서 머물러 안주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더 큰 청운의 꿈을 품고 유학의 길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그의 학구열은 일본동경 청산학원신학부,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웨스턴 신학교의 유학으로 이어지게 되고 1932년 신학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게 된다. 그는 1958년 카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립대학교로부터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한국 신학계에 끼친 창조적 공헌을 높이 평가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재준은 1930년대 미국이 경제공황기에 들어갈 무렵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사와 석사를 했다. 그 무렵 송창근과 한경직도 같은 청운의 꿈을 안고 함깨 미국 유학을 하면서, 일본식민통치에 시달리는 동족을 생각할 때마다 복음으로 한민족을 새롭게 하고 섬기며 위로하자고 약속 다짐하곤 했다. 해방이후 그들은 1930년대에 미국 유학시절 다짐했던 약속 그대로 한경직은 영락교회를, 김재준은 경동교회를, 송창근은 서울 동자동에 성남교회를 개척하여 교회를 섬기게 된다.
김재준은 미국 유학시절 보수신학과 진보신학을 골고루 다 공부하였다. 그는 이미 경직되어가는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간파하고 있었고, 한국 개신교가 새롭게 거듭나서 민족을 살리는 생수의 샘터가 되려면 보수적 선교사들의 신학교육 지배로부터 자유하고 주체적이고도 열린 세계적 신학으로 훈련받은 지도자의 육성이 관건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때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었다. 김재준은 귀국 후 잠시 평양숭인 상업학교 교유로 봉직하다가 1936년 간도 용정에 소재한 용정중학교에 교유로 취임하여 젊은 인재의 양성에 몰두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1970-80년대 한국 진보적 기독교를 이끌고 가는 젊은 인재들을 가르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북간도 용정중학교는 기독교 사립학교로서, 그 당시 학생으로서 강원룡, 문동환, 안병무, 김기주,신영희,김영규,전은진 등이 있었다.
1930년대 후반, 식민통치의 단말마적인 발악이 전 한반도 지역에서 강화되고 있었다. 마침네 일본 총독부는 각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연희전문, 이화여전, 숭실전문학교및 평양신학교에 재직중인 외국인 교수들을 하나 둘 귀국시켰다. 그러한 암흑기의 어려운 시기에, 1939년 김대현 장로라고 하는 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새로운 교역자 양성의 소명을 받고 있었다. 그 분은 맘이 깨끗하고 경건한 장로로서 평생을 상업에 종사하신 장로였는데,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따로 성별하여 떼어놓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값있게 쓰여지기를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삼천리 강토가 일제의 식민통치로 신음하며 모든 고등교육기관이 문을 닫고 있을 때, 이런 떼 일수록 우리 민족교회의 지도자를 우리들의 힘으로 양성해야 한다는 주체적 신념을 지닌 창조적 소수자들이 있었다. 김대현장로, 송창근목사, 윤인구선생들이 그런 사람들이었고, 그 뒤 부통령을 지내신 함태영 목사등이 이에 동조했고, 그러한 새로운 역사의 시작점에 중심적 핵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소명받은 사람이 바로 장공 김재준이었다.
그렇게 해서 조선신학교는 1940년 개교하게 되었다. 일제 총독복 당국의 눈살이 고울리가 없었다. 그러나 모든 악조건을 무릅쓰고 장공 김재준은 조선신학교의 강단을 지켜냈다. 비록 규모는 작은 학교였으나 꿈과 이상은 높고 컸다. 한국 교회를 언제까지나 미국 선교사들의 후견아래 어린아이처럼 방치 할 수 없다는 성인 의식이 있었다. 시대가 변하고 있으므로, 한국 교회를 정신적으로,영적으로 이끌고 가야할 개신교 성직자들도 세계적 수준의 진보적 신학교육을 받아야한다는 자각과 사명감이 있었다. 신학이라는 학문도 학문인 한, 모든 비판적 연구와 학구적 태도가 용납되어야 하고, 그러한 비판적 성찰을 거쳐서 더욱 신앙도 든든한 반석위에 세워질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지성과 신앙이 함께 숨쉬는 신학교육을 장공은 원했다. 신학적 근본주의는 지성을 몰수하고, 자유한 신앙 양심을 억압하고, 학문의 자유를 불허하고, 배타적 독단과 독선을 신앙의 이름아래 강요하여 사람을 틀에박힌 종교인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장공은 생각했다.
그리하여 장공 김재준을 중심으로해서, 한국에서는 최초로 외국 선교 본부의 지배나 선교사들의 지도를 받지않는 주체적이고도 진보적인 조선인의 자율적 신학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조선신학교는 해방과 더불어 한국신학대학으로 발전하게 되고 오늘의 한신대학교라는 종합대학이 된다. 그리고 이 대학교는 한국 진보적 기독교의 산실이 되고, 민중신학의 모태가 되고, 1970-80년대 민주화투쟁의 중요한 한 거점이 된다. 그리고 그 뒤엔 항상 김재준이라는 진실한 사람 한 인격이 서 있었다
3. 자유혼을 지닌 진보적 개혁사상가로서 교육자 김재준 (1940-1960)
장공 김재준의 인격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의 아호가 상징하듯이 자유인 또는 무애인(無碍人)이다. 그의 자유정신은 동양의 도인(道人)들이 도달한 달관의 정신에서도 부분적으로 비롯되지만, 본질적으로 김재준의 자유정신은 성서적 신앙의 철저한 체득으로부터 근원한다. 김재준은 미국 유학시절 구약성서신학을 연구하여 특히 예언자들의 사상에 깊이 통달해 있었고, 종교개혁 사상가들 마틴루터나 죤 칼빈의 복음적 자유정신으로 영적 거듭남을 경험한 이후였다. 뿐만아니라 개인의 영성훈련에서 항상 모범으로 삼아 숭앙하는 인물이 자유로운 수도탁발승 앗씨시의 성자 성 프랜시스였는지라 그의 자유혼과 자유정신은 그의 일생활동을 추동하는 저항적 비판정신의 원천이 된다.
철학자 야스퍼스가 <역사의 기원과 시간에 대하여,Von Urspurung und Zeit der Geschichte> 라는 자신의 명저에서 말하는 인류뮨명사의 차축시대(주전 8세기- 2세기) 초기에 출현한 걸출한 정신적 거봉들 중에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언급했는데, 예언자정신은 히브리적 세계관과 그리스도교 사상의 핵을 이해하는데 절대적 요소가 된다. 예언자들이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앞당겨 예언한다는 신탁의 의미보다는 철저한 유일신 신앙에 근거하여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려는 일체의 '우상숭배적 행위'를 비판하는 비판정신의 발로이다. 인간은 그 무엇인가 가치있는 것, 신성한 것, 특별한 것, 위대한 것을 신성시하고 절대시하며 그러한 가치들나 존재들을 절대시하고 인간을 거기에 예속시키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고대국가에서 왕권의 절대화, 신전이나 종교적 경전과 계율들의 절대화, 국가나 민족혈통의 절대화, 사회 상급 지배계층의 절대화등이 모두 그런 예들이다. 에집트 파라호는 신적 절대자로서 군림했고,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이나 성전과 율법 절대주의는 인간들을 종교적 규범에 얽메이도록 강요해서 인간을 비인간화시켰다. 로마황제숭배나 로마제국의 절대화를 비롯하여 히틀러와 볼쉐비키 혁명과정에서 정치경제 이념의 절대화는 모두 그런 우상숭배적 속성들의 현대적 표현이다. 장공 김재준은 철저한 예언자적 비판정신을 습득한 자유혼을 지닌 비판적 개혁자였기에 어떤 형태를 띄든지간에 절대적 독단, 독재, 절대권력, 교권주의, 신학적 근본주의를 용납할 수 없었다.
종교개혁이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예언자정신의 근대적 분출이며, 비판적 자유정신의 발로였다. 중세기 봉건주의시대의 정치, 경제,사회, 종교의 체제와 이념이 역동성을 잃고 근거없는 신성권위를 휘두르면서 비판을 허락하지 않는 몽매주의로 인간을 억압할 때, 근대시민사회의 출현에 걸맞는 비판적 자유정신이 종교개혁자 루터 칼빈, 즈빙글리등을 통해 폭발해 나온 것이다. 김재준은 철저한 종교개혁정신을 습득한 인물이었다. 그는 경직된 교리주의자도 아니요 근본주의적 칼빈숭배자도 아니지만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정신, 자유정신, 비판정신을 올곧게 물려받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의 진보적 개혁정신은 당시 1930년대 이후 이미 근본주의신학 체계로 굳어져가는 몰지성주적인 한국 장로교 교단의 독단과 권위를 비판정신으로 개혁하고자 했던것이며, 1970-80년대 군부독재 권력구조에 저항하고 비판적 세력의 중심적 지도자로서 역활할 수 있었다.
한국 교회사가들은 김재준 이라는 인물이 한국 개신교에 있어서 진보적 신학자요 비판적 사회참여윤리를 제창한 대표적 사상가라는 점에 동의한다. 오늘날 한국의 일반 사회인에게 비취는 개신교의 대부분은 매우 보수적 종교단체로 보이며, 경직된 교리적 신학체계와 융통성 없는 성경절대주의에 기초한 반지정적 종교집단으로 이해되고 있다. 서율역 광장이나 전철 역 구내에서 한국의 전통종교를 배타적 태도로서 매도하며, 시한부 종말론을 퍼뜨리며, 불교나 천주교와 대화를 거절하며,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적 진리를 거절하며, 매우 분파적 종파운동을 선교정열이라는 병분아래 강행하는 개신교의 현상들은 모두 그 뿌리가 한국 개신교의 근본주의적 보수주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 개신교의 보수성은 어제 오늘에 갑자기 형성된 체질이 아니라 한국 개신교 초기부터 형성된 약 120년간의 긴 역사가 있다. 특히 한국 장로교회를 중심으로하여 한국 개신교 전반의 보수적 경향성과 그러한 체질의 뿌리는 깊다. 그러한 개신교의 보수주의를 개혁하려고 힘쓴 진보적 개신교 변혁운동의 중심 인물이 바로 김재준이다.
종교적 근본주의란 이슬람 근본주의자나 기독교 근본주의자나 어느 종파에도 있다. 그들은 대체로 비슷한 속성을 지니는데, 예들면 경직된 몇가지 '근본적 종교신념체계'나 '근본적 교리들'(Fundamentals)을 절대시하여 배타적 신앙공동체를 이루면서 다른 것들과의 타협이나 관용을 거절 한다. 한국 개신교의 보수주의는 20세기 초 평양신학교에 근거를 둔 미국선교사들의 근본주의 신학교육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20세기초 미국의 장로교회는 크게 진보 보수 두 진영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보수적 근본주의자들은 19세기 종교사학파들의 비교종교학적 연구가 기독교의 계시종교적 초월주의 신앙을 약화시킨다고 비판했으며, 진화론을 비롯한 자연과학 사상이 창세기 창조론을 부정한다고 두려워 했으며, 각종 인문주의적 자유로운 학문연구태도가 신학연구에 도입될 때 복음의 본질을 훼손시킨다고 우려하였다.
무엇보다고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은 1900-1930년대에 절정에 도달해 있었는데, 그들 신학운동의 근저에 '성경무오설'(聖經無誤說)이라는 교리가 자리잡고 있다. 다시말하면 근본주의적 보수신학의 성경무오설에 의하면 성경이 성령의 신적 영감에 의해 기록되고 편집되고 전승되었기 때문에 첫째 오류가 있을 수 없고, 둘째 성경을 문자적으로 진리라고 받아드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셋째 일체의 학문적 문헌비평 연구방법을 허락해서는 않된다는 것이었으며, 넷째 교회와 기독교 운동은 초월적 종교일에만 관심을 가져야하는것이지 사회윤리운동이나 독립운동등 현실문제에 관심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근본주의신학이 주장하는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들'(Fundamentals) 다섯가지는 문자적 성경영감,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이었다.
장공 김재준이 미국에서 신학연구를 하고 귀국한 이후, 한국 개신교를 돌아 볼 때,한국 개신교 특히 장로교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근보주의 신학으로 무장한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고, 평양신학교에서 그들 선교사들의 주입식 교육에 의해 훈련받은 근본주의적 보수신학으로 무장한 교역자들에 의해 신도들이 지도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것이다. 근본주의신학 운동을 세계 기독교 신학계 전체 지평에서 놓고 볼 때는, 미국이나 화란의 일부분에서 신봉되는 지극히 미미한 보수적 신앙운동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개신교는 그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과 신앙태도가 기독교의 전부이며 세계적 대세인양 오도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 결과, 한국 개신교 전래 초기 곧 한국 개화기에 지녔던 한국 개신교의 역동성과 창조적 소수자로서 역사개혁적 힘은 상실되고 교권주의와 경직된 교리주의가 한국 정통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김재준은 한국 장로교의 근본주의신학을 비판정신으로써 비판 해체하고, 선교사들의 후견인적 사상통제로부터 한국 기독교를 해방시켜 세계적 신학조류에 접촉하게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감을 지니게 되었다.
김재준의 한국 기독교 사상사에서 위치와 그의 존재의미는, 비록 신학교육이라는 특수영역에서 일어났고 개신교라는 하나의 종단안에서 일어난 개혁운동 이었지만, 학문연구태도에서 해방이후 지성적 양심의 자유와, 학문연구방법론의 자유로운 허용과, 외국 지배세력및 국내 보수적 반동세력에 굴복하지 않고 진리운동, 개혁운동, 사회윤리운동을 전개시켜나가는 선구자중 한사람이 되었다는데 있다. 김재준의 신앙적 신념은 조선신학교 설립과 한국신학대학에로의 발전, 그리고 마침네 한국 장로교에서 '기독교장로회 총회' 창설이라는 것으로 나타난다.
1953년 한국 장로교회는 예수교 장로교회와 기독교장로교회로 분열된다. 근본주의적 보수정통신앙을 주장하는 정통주의 장로교단이 김재준의 신앙로선과 신학교육의 신념을 이단적 행위라고 처단했다. 마침네 교단내에서 교수직을 박탈하고 그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성직자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시대착오적인 교권적 폭거를 자행함으로 인하여, 김재준의 입장을 지지하는 진보적 장로교 세력들은 저항적으로 독립하여 기독교장로회 총회를 결성하게 된다. 한국동란 이후 사회전체가 시련과 상처 속에 있을 때, 종교계의 분렬이란 어떤 명분으로든지 바람직 한 것이 못되었다. 그러나, 개신교는 종교개혁이후, 성서해석이라는 근본적 입장으로 인하여 분열위험을 언제나 그 안에 안고 있는 기독교 교파가 된 것이었다. 굳이 김재준을 지지하는 교회사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교파분열은 불행한 일이었지만, '새술은 새 가죽부대에 넣아야 둘다 보존된다'는 예수의 비유말씀대로 새로운 진보적 개혁종단의 한국사 속에서의 필요성 때문에 분열의 아픔을 무릅쓴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한국 개신교 중에서 '기독교장로회 총회'라는 창조적 소수집단은 숫자적으로는 비록 작은 교파이지만, 김재준의 자유정신, 진보적 비판정신, 사회참여적 사회윤리정신등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세계 교회협의회운동 곧 에큐메니칼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고, 1960년대 이후 한국 진보적 기독교 운동의 핵심이 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사회참여적 윤리운동에 있어서 그렇다. 도시산업선교 운동, 도시빈민 선교, 민중신학운동, 민주주의 인권운동, 통일운동에 있어서 항상 김재준의 사상영향을 받은 진보적 사상가, 신학자, 목회자가 그 현장 중심에 서 있는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예들면 장준하,안병무, 문동환, 문익환,김관석,박형규,강희남, 은명기, 이우정,황성규, 홍근수, 김상근, 손규태, 이해학, 이해동, 강신석, 박종화등 이루 말 할수 없이 그 제자들이 많다.
김재준의 성서비평적 연구방법의 자유로운 도입주장은 1950년대 한국 장로교의 보수적 상황 속에서는 매우 혁명적이어서 그를 파문하는 비극에까지 이르게 되었지만, 오늘날은 일부 극단적 보수신학 교육기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신학교육 과정에서 김재준의 비평적 성경연구방법론을 받아드리고 있다는것은 역사적 아이로니가 아닐 수 없다. 결국 한국 개신교의 보수주의 , 특히 근본주의적 보수주의란 기독교및 종교가 지닌 초월적 진리부분을 보수(保守)하려는 열정에서는 옳았으나, 그 방법론과 태도에 있어서는 잘못된 것이었다고 비판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한 진리자체'를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던 상대적 진리및 교리와 동일시 함으로서 '복음 그 자체'와 '역사적 교리'를 그들은 혼동하였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초월적 진리는 매 시대의 인간상황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여 재표현해 주어야 한다는 해석학적 과제와 신학의 변증적 과제에 태만했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의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은 독단적 도그마티즘으로 전락했다. 김재준의 자유정신, 비판정신, 저항정신은 신학교육분야와 기독교 종단의 내부개혁의 한계를 넘어 서서,1970-80년의 군사정권시대에서 다시 활화산처럼 분출하게 된다.
4. 민주주의 신봉자, 역사참여의 지성인 (1960-1980년)
김재준의 성격은 남의 앞에 나서서 사람을 조직하고 선동하는 그런 성격의 정치적 인물이 전혀 아니다. 말하자면 전형적 선비요 교육자이며 은둔적인 도인이고 조용한 서재의 학자이다. 평소엔 말수가 적어 과묵하다 못해 침묵을 영성훈련의 신조로 삼고서 살아가는 수도자같은 인물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되어서 그런 조용한 분이 역사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1970--80년대에 '3선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 위원장직을 비롯하여 '민주수호협의회' 공동의장직 같은 정치사회 운동집합체의 중책을 맡게 되었을가? 그 비밀은 두가지인데 그의 살아있는 지성인으로서 역사참여적 윤리사상과, 그의 야망없는 인품을 존경하는 주위 제자와 사회인사들의 적극 추대 때문이다.
김재준이 역사현장에 모습을 나타내고, 직접 현실 사회윤리문제에 몸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부터이며 그 첫 시작운동이 1965년 한경직목사와 함께 앞장서서 벌린 '한일 굴욕외교 반대운동'이었다. 사실 1960년 4.19 학생운동과 1961년 5.16 군사혁명을 보면서 장공은 기독교 지성인으로서 깊은 자성을 하게 되었다. 한국 개신교를 근본에서 혁신하기 위해 그가 신학교육기관과 개신교의 사상적 개혁운동에 전심하는동안 역사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고, 역사의 모순은 급기야 4.19학생 혁명과 5.16군사혁명으로 터져니오고 있었다.
5.16 구테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세력은 정권의 맛을 본 이후, 아니 첨부터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저버리고 만년집권의 야욕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절대권력이었다. 대학을 비롯한 일체의 언론, 교육, 산업기관, 경제, 정치 영역을 장악하고 군사독재 집권야욕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대학의 학장중 나이 만 60세 이상된 사람은 모두 대학에서 사퇴하라는 군사 혁명정부의 지시가 내려졌다. 대학의 자율권은 흔적도 없이 살아지고 군사정부의 명령하달이 총칼협박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장공 김재준은 5.16군사구테타가 일어난 직후 1961년 9월 26일이 만 60세가 넘으니까 졸지에 한국신학대학 학장직을 강제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김재준은 교육일선에서 물러나 좀더 넓고 깊게 역사현실을 바라보고 성찰할 수 사유지평을 얻게 되었고, 몸은 좀더 맘대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적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 장공은 비교적 조용하게 서울 수유리에 은거하면서 대한일보 논설 위원으로 위촉되어 논설도 쓰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역사현실 그 자체 속에 훨씬 가깝게 화육한 신학적 사유를 하기 시작했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이 강행한 두가지 사건이 있었으니 그 하나가 '월남파병'이요 또다른 하나가 '한일조약 제협정'이다. 박정희는 월남파병으로 미국을 잡았고, 한일협정으로 일본을 업었다. 그리고 그 뒷면에는 군사혁명 이후 정치자금의 조달이라는 돈문제가 있었다. '월남파병'과 '한일협정'이라는 민족사적인 대 사건은, 민족의 공론 협의과정과 적법 절차를 거쳐 정정당당 하게 가장 민주적으로 해결되못하고, 졸속과 탈법과 굴욕외교에 기초를 둔 군사정부의 독단적 전횡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1965년 1월8일 한국군 2,000명을 일차로 월남전에 파병하는 '월남파병' 사건은 반공투쟁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한국민의 정서에 입각해 볼 때, 그 역사적 정당성문제를 꿰뚫어 볼만한 지성이 부족한 대부분 국민에게서 반대저항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김종필과 일본 오오히라(太平)사이에 오고간 굴욕외교는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을 자극하여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이 학원가와 민간단체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게 하였다. 당시 영락교회 담임목사였던 한경직은 김재준과 가까운 신앙적 동지요 미국 유학시절부터 지기지우 관계였던 지라, 비록 지금은 '예장'과 '기장'에 몸담고 있지만 의기투합하였다. 그리하여 그 두사람은 1965년 7월 영락교회에서 회집한 '한일굴욕외교 반대 운동'을 이끌었다. 그리고 김재준은 박대통령,국회의장, 일본정부,일본국회,일본교회, 미국대통령, 국제연합본부에 보내는 성명서를 초안했고, 대회에서 채택하여 발송하였다. 이 사건은 한국 개신교가 민족의 문제에 다시 눈을 뜨게 되고 민족의 운명과 역사에 관심을 갖고 동참한다는 한국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다시 복귀함을 의미한다.
1969년은 한국 정치사에서 '3선개헌반대 법국민 투쟁위원회'가 결성되어 군사독재정권에 국민적 저항이 최초로 조직화된 중요한 역사적 시점이었는데, 여기에 김재준은 중심인물로 참여하게 된다. 민정이양을 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군사혁명을 일으킨 박정희씨는 그가 국민앞에 서약한 헌법에 따르더라도 두번이상 대통령을 못하도록 금지된 명문조항 때문에 3선 대통령 야욕을 헌법개정 없이는 할 수 없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권력의 맛을 10년 본 박정희씨로서는, 또 이미 호랑이 잔등에 올라탄 박정희씨를중심으로하는 군인 정치가 집단들로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장기집권, 군사독재체제로 치닫지 않을 수없었던 것이고, 삼선개헌이라는 초헌법적 위법행위를 강행하기로 안면몰수 한 것이다. 사이비 언론과 사이비 지식인 정치인들이 그 타당성과 지당성을 입에 침도 안바르고 아부를 떨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침묵하거나 방관하여 보신을 강구하였다.
'3선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 발족은 군사독재 철권정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국민적 저항 운동이요 국민주권의 발로행위이기 때문에 그 투쟁위원회 조직 발기인 대회자체부터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정치란 현실적인 힘겨루기 세계인지라, 각 정파와 사회단체간의 협의와 합의가 필요했다. 장공의 자서전적 기록에 의하면 발기인 대회 준비에 발벗고 나선 당시 인물로서는 장준하, 윤길중, 이철승,송원영씨등 이었으며, 의장직에 김재준을 공천하기로 뜻을 모으는데 원로로서 역할을 한분으로서는 김상돈, 유진산, 장택상, 함석헌, 이병린 제씨등이 지지후원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각 정당사회단체들이 범국민적 차원에서 조직체를 만들어 군부독재체재에 저항 운동을 벌리려는 마당에 특정 정치정당의 색체가 두드러져서도 안되고, 장차 정치권력에 야망이 있어도 일을 그르치기 쉽다고 조직 대표들이 판단한 것이다. 국민적으로 명망도가 있고, 도덕적으로 청렴하며, 민주주의에 확고한 신념이 있어서 쉽사리 군사정부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정치적 야망이 없이 맘을 비운 사람으로서 장공 김재준이 적임자라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김재준은 역사적 중책을 맡고 현실정치 한복판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김재준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서, 지성인으로서, 성직자로서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고 정치권력의 절대화는 우상숭배나 다름없다는 것을 경고하고 양심의 증언을 행동을 통해 말했던 것이다. 목사신분으로 정치일선에 참여한다고 비방하고 반대하는 소리도 많았다. 그러나, 김재준은 본훼퍼가 독일 나치치하애서 저항적 증언을 하듯이 그의 역사참여적 증언과 저항은 신앙과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 현실 속에 화육하면서 증언하는 말씀증언이요 신앙증언이요 행동적 신앙고백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기독교계 진보적 지도인물 김재준이 삼선개헌 반대운동의 선두에 서자, 기독교계의 목회자 기독자 교수들과 변호사들이 김목사의 일에 몸으로 동참했는데 박형규, 이문영, 서광선, 현영학, 이극찬, 홍동근, 서남동,안병무, 문동환, 이우정, 한승헌 제씨였다.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중심으로한 범국민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효상씨를 당시 국회의장을 중심하여 거수기로 전락한 여당의원은 광화문 국회의사당 길건너 '제3별관'이라는 장소에서 두더지들의 야반군중대회처럼 부끄럽운 의정사의 기록을 남기고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켜 버렸고, 독재자는 자신의 말로의 길을 재촉하게 되었다.
이무렵 소위 제야 민주운동 세력의 상징적 지도자 3인은 김재준, 함석헌, 이병린 이었는데, 이분들 모두가 이렇게 의기 투합하여 서로 동지적 결속을 두텁게 할 수 있었던 계기는 장준하와 계훈제씨같은 헌신적인 중간 멧신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이 되자, 김재준, 함석헌은 각각 "제3일지"와 "씨알의 소리" 라는 개인잡지를 발간하고 장기전으로 들어갔는데, 결국 민주주의가 다시 이 땅에 뿌리내리려면 깨어난 국민들의 정신적 용기와 영적 자각, 교회의 사회윤리적 참여와 그 윤리적 책임의 계몽, 지성인들의 결속과 연대등이 잘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재준과 함석헌의 개인지는 월간으로 발행되었지만, 그 잡지의 이름 자체가 매우 상징적이었던 것이다. 제3일 이라는 말 자체가 희망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이며, 민주주의가 죽지않고 부활하리라는 신념의 표현이었으며, "오늘도 내일도 나는 내길을 간다!"라는 비장한 각오가 들어있는 잡지 이름이었다.
1970년대초는 한국 정치사의 격동기였다. 박정희의 유신헌법 독재체제와 국민저항이 일전을 불사하는 팽팽한 형국이었다. '민주수호 국민협의회'가 조직되고 범 국민적 저항 운동이 전개 되었다. 장준하, 천관우, 계훈제씨등은 민주주의 투쟁을 위해 학생, 노동자 세력과 연대하여 혈전을 하고 있었다. 1972년 계엄령 아래서 유신헌법이 통과되고 박정희 종신집권을 제도적으로 마련하였다. 국제정치게는 변화되고 있었다. 1971년 박정권은 위수령을 발표하여 군대를 풀어 학원을 짓밟았다. 1972년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는데, 그 3원칙은 참으로 좋았지만 남북 정권당국 어느쪽도 실천할 의지가 없었다. 김재준은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3번 자택연금을 당했다.
이 글은 김재준의 평전을 쓰는 심정으로 쓴 글이므로 그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역사참여 활동기록을 더 이상 소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 보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김재준이라는 한 개신교의 지도자가 왜 그토록 깊숙히 정치현실 속에 뛰어들어 참여적 저항 운동과 진보적 사회윤리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는가? 그의 신념을 뒷바침하는 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릇 모든 종교와 철학의 구경적 문제는 절대적 세계와 와 상대적 세계의 관계를 어떻게 연결하느냐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말 할 수 있다.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의 관계, 무한자와 유한자의 관계, 영원과 시간의 관계, 공(空)과 색(色)의 관계, 구원사와 세속사와의 관계문제라고 표현 할 수도 있다. 그 양자관계를 포괄적으로 간단하게 표현하는것이 종교와 정치와의 관계라고 요약 할 수 있다. 그 양자관계는 유형적으로 범주화해보면 네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상호분리 관계요, 둘째는 지배적 예속관계요, 셋째는 분활통치 역할분담관계요, 넷째는 변증법적 변혁관계가 그것이다.
첫째모델인 성속의 상호분리관계는 대체로 보수적 종파에서 견지하는 태도이다. 종교는 초자연적, 초세간적, 사후세계와 영혼계를 다루는 것이므로, 현실의 역사 정치 경제 교육등 현실문제엔 오불관언 초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종교란 영혼의 세계, 사후의 세계, 초월적 세계만 관심해야하지 현세적 문제에 간섭해서는 않된다는 입장이다. 정치현실이 아무리 독재와 불의를 저지른다해도 종교인은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종교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의도는 알만하지만, 종교 또한 현실 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이기에, 그러한 초연한 태도는 자기기만이고,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대체로 보수적 우익 종교단체가 취하는태도가 이런 입장인 것이다.
둘째 모델은 성(聖)과 속(俗), 종교와 청치현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 쪽을 지배 군림하면서 다른 한쪽을 자기 속으로 예속시키는 입장이다. 종교가 세계현실을 지배하는 신정정치나 중세기 모델이든지, 반대로 종교가 현실 세계 통치이념으로 전락하여 복무함으로서 자기정체성을 상실하고 지배계급의 지배이념으로 전락하는 경우이다. 이런 모델은 양쪽 다 바람직 하지 않으므로 경계해야 한다.
셋째 모델은 분활통치, 역활분담, 정경분리주장인데, 첫째모델과 다른점은 종교가 세계현실에 관심과 책임을 지니면서도 관활영역이 다름으로 기능적으로 역할 분담하자는 것이다. 이론상으로 가장 그럴 듯한데, 독일 나치치하의 히틀러가 주장한 입장에서 보는바 처럼 현실적으로는 보수반동적 역활을 하게 된다.
넷째 모델은 창조적 변혁모델인데 김재준은 이 입장에 선 사람이다. 이 모델의 신학적 입장은 성(聖과 속(俗), 종교와 세계현실은 서로 구별되어야 하지만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현실재'의 두 차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종교는 음식 속에 소금처럼, 밀가루 반죽 속에 이스트 효모처럼 자신의 특성을 잃지않으면서 변혁시키는 힘이며, 현실을 보다 정의롭고 사랑과 자비가 살아 숨쉬는 인간적-거룩한 공동체적 삶이 되도록 '창조적 변화'(Creative transformation)를 시켜가는 책임을 감당 한다는 입장이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성육신적 영성'이며, 철학적으로 말하면 '변증법적 지양'의 논리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현실 그 자체와 동일시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역사 현실 속에서, 그것을 변화시키면서 역사를 통하여 구현되 가야 한다. 김재준의 역사신학은 바로 이러한 '창조적 변혁론' 이었던 것이다. '성속일여'(聖俗一如) 사상에다가 기독교적 역동성과 변혁이론을 가미한 셈이다. 그러므로 김재준의 역사변혁론은 역사적 낙관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역사비관주의나 몰역사적 초월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는 입장으로서 매우 변증법적인 것이다. 한국 개신교에서 위에서 언급한 네번째 입장을 '진보적 역사참여신학'이라고 부르는데 김재준이 그 중심인물 이었던 것이다.
5.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꿈꾸며 날아오르는 봉황새(1980-1987)
김재준은 1974년 카나다로 건너갔다. 국내에서의 활동은 가택연금의 연속이며, 당분간 정치적 현실비판 운동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카나다에는 그의 자녀들이 일찌기 이민을 가서 생활하던 생활터전 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몇년이면 군사독재도 끝나려니 생각했던 카나다 여행길이 10년이상이 걸렸다.그동안 박정희 씨는 피살되어 정권 담당자가 교체되었지만, 본질적으로 군사정권의 연장이 지속되었으므로, 이번에는 그의 귀국을 한국의 정권당국이 허락하지 않았다. 북민주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도 장공은 쉴사이 없이 조국의 민주화운동을 위해 일했다.
'북미주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위원장'직(1978)과 '한국민주통일촉진 국민연합 고문직(1982)등이 그의 이국에서의 조국을 향한 사랑을 웅변한다. 국제 엠네스티 한국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장공은 광주의 비극을 온 세계에 알리며 더욱 한국 민주주의의 부활을 위해 뛰었다. 1983년 김재준은 드디어 10년만에 귀국한다. 돌아온 조국 땅엔 아직 민주주의가 꽃피지 않았다. 1987년 고문 당하다가 죽은 박종철군 국국민추도회 발기인으로서 젊은이의 죽음을 애도하더니만 1987년 1월27일 87세의 나이로 타계한다.
귀국 후, 장공의 활동은 민주주의 운동과 인간화운동에 계속 정진하셨지만 그는 한국의 고대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노령에도 물구하고 전국의 사찰등과 강화 마니산 참성단등 역사적 사적지를 탐방하였다. 그는 한국 고대사와 환단고기등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의 정신지평이 기독교라는 종파문명권에 제한되지 않고, 전 우주적으로 넓혀졌던 것이다. 한국의 종교사 자체를 보다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장공의 문화신학은 한국의 수천년 종교생활과 정신 생활 속에 진리의 영으로서, 사랑과 정의의 영으로서 임재 활동하신 조상들의 '하눌님'이 곧 성서가 증언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김재준은 1960년대 중반에 이미, 토착화신학에서 진보주의적 입장을 표명했으며, 그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나 세계교회협의회에서 발표한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관계성을 언급한 것보다 한 발작 앞서서 '포용주의적 입장'을 천명하였다. '會三歸一' 이라는 말을 우리 조상들은 사랑했다. 유뷸선 삼교가 깊은 심층적 진리 안에서 만나면 서로 통하고 하나의 진리를 서로 다른 문화종교적 전통과 언어로서 말 한다는 입장 일 것이다. 장공도 근본적으로 그런 입장을 견지한다. 다만 장공은 떼이야르 샤르뎅의 창조적 진화과정이라는 우주적 지평을 받아드린다. 장공은 말년엔 '우주적 그리스도'를 사랑의 실재로서 파악하였다. 우주 전체는 사랑의 거대한 공동체로 돌아가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고백이며, 그 중심적인 사랑의 심장으로 그가 고백한 그리스도를 고백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83년 작곡가 박재훈 박사와 함께 북케나다 넓은 대자연을 돌아보다가 다음과 같은 "새벽 날개타고"라는제목의 시한편을 짓고 노래가사로서 읊었다.
이 우주는 하느님집 하늘 위, 하늘 아래 , 땅 위, 땅 아래, 모두 모두 아버지의 집.
새벽 날개 햇빛타고 하늘저편 가더라도, 천부님 거기 계셔 내 고향 마련하네.
이 눈이 하늘 보아 푸름이 몸에 베고, 이 맘이 밝고 맑아 주님 영광 비취이네.
새벽 날개 킙빛타고 하늘저편 가더라도, 천부님 거기계서 내 고향 마련하네.
땅에서 소임 받아 주님나라 섬기다가, 주님오라 하실 때에 주님 품에 옮기나니
새벽 날개 햇빛타고 하늘저편 가더라도, 천부님 거기계셔 내 고향 마련하네.
장공 김재준 목사는 예언자정신과 그리스도의 자유혼을 핵으로 간직한 진보적 기독교 사상가요 신앙인이었다. 말년엔 성령의 은혜와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에 특히 감격해 하면서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전 피조물이 사랑과 의를 누리고 실천하는 대동적 세계를 염원하였다. 그는 진솔한 교육자였으며, 청빈한 성직자였으며, 현실속에서 행동하는 양심이었고, 신앙을 삶으로 실천하는 생활신앙인 이었다. 그는 양심적 지성인으로서 역사가 방향을 잃고 방황할 때,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할 줄 아는 우리시대 예언자 였으며,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은 자유한 인격체 인간을 억압하는 일체의 우상을 용납하지 아니하는 창조적 비판자였다.
그의 신앙세계는 기독교 정통신앙의 핵심적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매우 열려진 개방성과 포용성을 지닌 우주적 종교였으므로 오늘날 현대 한국 개신교의 배타주의적 경직된 모습과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한국에 개신교가 전래된(1885) 이후, 한국 기독교 신학을 대표할 만한 한 인물을 후세 역사가가 기록에 남긴다면 아마 장공 김재준 목사는 그 몇사람 중에 반드시 기억할만한 인물일 것이다. 그리고 현대 한국 지성사및 사회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1970-1980년대 한국 진보적 기독교의 역사변혁적 운동의 원동력이 어디에서 연원하는가를 알려면 반드시 연구되어야 할 중심 인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