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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①의 '기승밥'은 모를 내거나 김을 맬 때 논둑에서 먹는 밥을, '잿밥'은 부처 앞에 놓는 밥을 이른다. ② '입쌀밥'은 흰쌀로, ⑥의 '조팝'은 맨 좁쌀로 지은 밥을 각각 뜻한다. 그리고 ③의 '맨밥'은 반찬을 갖추지 않은 밥을, ④ '눈칫밥'은 남의 눈치를 보아가며 얻어먹는 밥을, ⑤ '사잇밥'은 끼니 밖에 참참이 먹는 음식 즉 샛밥을 말한다. ⑦ '첫국밥'은 해산 후 산모가 처음으로 먹는 미역국과 흰쌀밥을, ⑨ '중둥밥'은 식은 밥에 물을 조금 치고 다시 무르게 끓인 밥을, ⑧ '턱찌끼'는 먹다 남은 음식, '대궁'은 먹다 남은 밥을 이른다. 그럼 ⑩의 '숫밥'은 어떤 밥일까. '다른 것이 섞이거나 더럽혀지지 않고 본디 생긴 그대로'라는 뜻을 지닌 접두어 '숫'과 그 말이 덧붙은 '숫처녀·숫총각·숫보기' 등의 말과를 상호 연관지어 생각해 볼 때 이 말은, '하나도 손대지 않고 솥에서 처음 그릇에 담은 그대로의 밥', 다시 말해서 남이 손대지 아니한 밥임을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2002년 오늘도 우리는 주위에서 위에 열거한 밥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열 개의 밥 이름 중 우리가 실제 말하고 듣는 '밥'은 몇 개나 될까? 물론 시대가 변하여 여러 가지 음식의 이름이 그저 '밥'을 대신하는 이름으로 쓰인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위에 열거한 10 개의 밥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살려 쓸 수 있는 것들이다. 다만 그렇게 쓰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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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몇 가지 재미있는 표현을 보자.
우리는 흔히 하루를 시간대로 나눌 때 아침·점심·저녁·밤 등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여름철의 오후 9시~10시를 저녁이라기에는 너무 늦고 그렇다고 한밤중이라 하기에는 좀 이르다. <임꺽정>에는 이같은 '잠들기 전의 그다지 늦지 아니한 밤'을 뜻하는 '밤저녁'이란 말이 무려 20여 회 이상 나온다. 그러니 <임꺽정>을 읽은 사람은 바로 '잠들기 전의 그다지 늦지 아니한 밤'을 '밤저녁'이라 말할 수 있다. <임꺽정>이란 소설이 우리에게 잊혀진 우리말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다음을 보자.
흔히 나이를 들먹이며 '어디다 반말이야?'라거나, '맞먹지 마'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이렇게 서로 반말을 하는 사이, 나이가 좀 차이가 나도 서로 맞먹는 사이 즉, '서로 너니 나니 하고 부르며 터놓고 지내는 사이'를 뜻하는 말이 곧 '너나들이'이다.
평소 행동이 얄미운 사람이 불행이나 잘못되는 일을 당하게 되면 속으로 고소하게 여기며 '쌤통이다'라고 흔히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비속어이고 바른말은 '잘코사니'다.
팻말이 연이어 넘어지듯이 어떤 현상이 인접 지역으로 파급되는 것을 우리는 흔히 '도미노'라고 한다. 그러나 이 '도미노'는 외래어이고 바른 우리말이 '장기튀김'이다. 즉 한군데에서 생긴 일의 영향이 다른 데에 잇달아서 미치게 되는 것을 '장기튀김'이라 한다. 이런 어휘들이 <임꺽정>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온다.
<임꺽정>에 담겨 있는 아름다운 우리말은 이것만이 아니다. 그 중에 오늘날 되살려 씀직한 순우리말의 예를 몇 개만 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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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에는 단순히 아름다운 우리말 단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즐겨 쓸 수 있는 의태어 즉 중첩어들이, 소설을 읽는 맛을 살려 인물들의 행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은 물론이요 그 분위기까지 살리고 있다. 다음의 예를 보자.
단지 위에 열거한 것만이 아니다. 필자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임꺽정> 단 한 편의 소설 속에(물론 대하소설이지만) 대략 590여 종의 중첩어가 나온다. 그 중 특이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렇듯이 <임꺽정>은 다양한 중첩어, 의태어를 시의 적절하게 요소 요소에 배치함으로써, 명료한 의미전달은 물론 미묘한 어감을 잘 살려내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어휘들이, 식민지 시대, 일제가 우리말을 말살하려고 한 시기에 자연스럽게 문학 작품에 표현되고 그것을 쉽게 읽고 썼을 어휘들이, 왜 요즈음의 우리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지냐는 것이다. 분명 4·50년 전에 우리들이 또렷하게 썼던 어휘들이기에 그 안타까움은 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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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지적했듯이, 오늘날 우리말은 서구 외래어의 무분별한 유입과, 사이버 공간에서의 왜곡된 언어 사용으로 심각하게 오염되어 언어 정체성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한 단서를 이 <임꺽정>에서 찾을 수는 없을까. 벽초는 우리 민족을 말살시키려는 일제의 흉계를 간파하고 <임꺽정>을 통해 우리의 말과 얼의 수호를 위해 노력하였고, 그렇기에 그의 작품 <임꺽정>은 우리말의 보고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아름다운 우리말에 얼마만큼 친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4·50년 전에는 자연스럽게 말하고 들었을 아름다운 우리말이 어떻게 해서 이렇듯 외국어처럼 낯설게 되었을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밀물처럼 들이닥친 외래 문물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오히려 6·25라는, 우리 민족의 비극이 남긴 것이기도 하지만,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 우리말의 보물창고라 할 <임꺽정>이 월북한 홍명희의 작품이라는 이유 하나로 근 40년 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면 필자의 억측일까. '빈대 미워 집에 불놓는'격으로 이들 작품을 독자들과 철저히 유리시킴으로써 아름다운 우리말을 사어화(死語化)하는 결과를 빚게 된 것은 아닐까.
세계인의 잔치라는 월드컵을 핑계 삼아, '뷰티플 코리아'니 '다이나믹 코리아' 같은 외국어를 남발하는 세태를 보면서, 통일 문학의 지평을 열 벽초의 <임꺽정>에 나타난 아름다운 우리말을 생각하며, 우리 젊은이들이 이 작품을 읽고 우리말을 살려 쓸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을 갖는 것은 필자 혼자만의 욕심일까.
첫댓글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꼭 읽어야겠습니다. 좋은 글 고마워..지현아 ^^
열심히 봐 주시니 제가 고맙지용 ^^
저도 봤어요.
ㅋㅋㅋ 선배님도 감사합니당~매 주 열심히 봐 주셔서요 ^^
예쁜 우리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