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데 가문(박상대 신부)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는 예수를 자신이 목 베어 죽인 세례자 요한이 소생한 것으로 여겼다.(마태 14,2 참조)
신약성경을 읽다 보면 자주 '헤로데'를 만나게 된다. '헤로데'라는 이름은 신약 성경에 모두 58회 등장한다. 하지만 헤로데가 다 같은 헤로데가 아니기 때문에 성경을 이해하는 데 다소 어려움이 따른다. 누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헤로데 가문의 족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원전 538년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여 종교 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기원전 333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의 침입으로 이스라엘은 헬레니즘의 정신적이고 정치적인 지배를 받게 되고, 그리스 제국) 알렉산더 대왕, 프톨로메오 왕가, 셀레우쿠스 왕가가 다스린 이후 일시적으로 유다인)하스모네오 왕가가(하스모네오 왕가는 구약성경 마카베오기 가문의 또 다른 이름이다. 기원전 167년경부터 시작하여 시몬 때 강한 독립국이 되었다가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BC63년 로마에 의해 완전 멸망되었다.)차례로 팔레스티나 지역을 다스린다. 기원전 64년 로마제국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점령하고 제국의 속주로 삼았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에 로마 제국의 역사가 펼쳐진다.
이를 틈타 헤로데 가문의 안티파텔이 등장하여 BC 55년부터 AD 93년까지 정치권력을 갖는다. 헤로데 가문은 유다가 아닌 이두매아 출신이다. 이두매아 사람들은 원래 유다 왕국 남쪽에 인접한 에돔 사람들이었지만, 하스모네오 왕가의 통치시절에 유다에 합병되면서(130년경) 유다 백성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안티파텔은 로마 제국과 황제들에 대한 충성으로 신임을 받아 시민권을 얻었고, 이어 총독에 임명된다. 그는 모든 정치적 영향력을 동원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힌다. 안티파텔은 자신의 두 아들, 파사엘에게 유다와 베레아 지역의 통치권을, 헤로데에게 갈릴래아 지역의 통치권을 넘겨주고 암살된다. 아들 헤로데는 이를 기회로 삼아 권력을 잡는다. 헤로데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도움과 원로원의 결정으로 유다의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헤로데 대왕이다.(재위 BC 37년~AD4년 통치)
헤로데 가문에서 유일하게 왕으로 불리는 그는 다섯 명의 아내를 거느리면서 왕실을 튼튼히 하고, 제국에 충성하며,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의 조화를 시도하면서 자신의 왕위를 굳건히 한다. 그는 로마 제국의 원로원으로부터 '유다와 사마리아의 왕'이라는 존칭을 받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막대한 조공 비용이 필요했고, 비용 조달을 위하여 무자비하게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백성들은 생활고에 허덕이게 된다.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 팔레스티나는 그의 세 아들이 다스린다. 이들 셋은 모두 이복 형제들로서 아르켈라오는 헤로데 대왕이 주로 다스리던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을 물려받아 기원후 6년까지 다스리다가 로마로부터 파면당하였다.(마태 2,22) 필립포스는 북동부 요르단 지역을 34년까지 통치하였다. 그리고 헤로데 안티파스는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서, 요르단 강 동서쪽인 베레아와 갈릴래아 지역을 39년까지 다스린다.(루카 3,1) 그는 세례자 요한을 잡아들여 목 베어 죽였고, 나중에 빌라도 총독과 함께 예수를 심문하기도 했다.(루카 23,8-12) 헤로데 안티파스 역시 39년경에 파면되어 이후 팔레스티나는 로마 총독 관할 통치구역이 되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또 다른 헤로데(사도12,1)는 아르켈라오의 아들로서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인데 사도행전 12장~23장까지 15번 거론된다. 사도행전 25장~26장에 '아그리파(사도25,13)'라는 이름으로 12번 등장하는 사람은,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의 아들인 '마르코스 율리우스 아그리파 2세'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