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철학이 하나 있다. 좀 얄팍한데, 그래도 뭐 나름 진지하게 신봉하는거다. 한 문장으로 다듬자니 이렇게 써진다. ‘인생이란 특정한 장소에 특정한 정서를 남긴다.’ 생긴거랑은 영 다르게, 제법 센티한 구석이 있는 나로서는 절절한 격언이다. 혹시 독자들께서는 그런 경험 없으셨는지. 우연처럼 모종의 장소를 지나거나 할 때, 잠궈둔 소화기가 일순 뿜어지듯, 옛 기억과 감각들이 순식간에 되돋는 듯한. 나는 많았다.
얼마전, 안국동 어느 길목에서는, 그 옛날 몇몇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시민운동 하자며 도원결의하던 치킨집을 만났다. 가게는 여전했지만, 뭔가 기억 너머에서 눅눅한 치킨 냄새가 밀려오는 듯 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이상(理想)과 정의감으로 불타오르던 어떤 코흘리개의 모습. 종일 낯뜨거운 추억을 외면하느라 고역이었다. 그런가하면 몇일 전 병문안으로 찾은 세브란스 병원에서는, 병동 예배당을 지날 때, 갑작스레 가슴이 아리듯 조이는 기분을 느꼈다. 결혼을 앞두고, 아내가 중병으로 아팠던 몇 년 전. 이 곳 어둑한 예배당을 채운 내 절박한 기도의 단어들이 물감처럼 생생히 마음에 번져오더라. 무슨 얘기를 꺼내려고 서론이 이리 긴거냐고? 절대 대단한 얘기는 아니다. 다만, 내 나름으론 제법 소스라치게 놀랐던 어떤 일화 한토막을 풀어보련다. 흠흠. 때는 얼마 전. 장소. 강원도 한탄강.
일반 기업체 멤버십 트레이닝처럼, 학교에서도 교직원들 대상으로 학기말이면 뒷풀이겸 단체 교사 연수 같은 걸 한다. 대개 방학식을 하고, 학생들 다 귀가시킨 후에 1박을 겸해 하는데, 주로 근교의 저가형 콘도를 간다. 요새는 좀 다르다지만, 그래도 교사집단은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무난하고 얌전스러운 ‘착실이, ‘범생이’의 모임이다. 이들의 연수는 항시 조촐하고 무난하다. 얼마전 교사 연수도 그랬다. 교육신문에 글도 기고하시는 점잖은 선비 풍의 교장선생님과 함께 한지라, 유독 잔잔하고 담백했다. 그저 테이블의 삼겹살만 격정적으로 지글지글. 노래방 반주로 쿵덕쿵덕하는 옆 방의 아재들처럼 ‘비 내리는 호남선..’을 괴성을 섞어 부르는 일도 일절 없다. 저만치 창가에는 여선생님들이 핸드폰으로 애들 안부를 물으며, 눈치껏 이른 귀가를 준비하신다. 아. 물론 술 마실 줄 모르는 나는, 구석에서 또래 선생들을 규합해 준비해 간 보드게임을 하고 놀았다. 세상에 이보다 무난하고 범상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다음 날은 체육교사 주도로 수상스포츠란걸 해보게 되었다. 레프팅이라던가. 큰 고무보트에 열댓명씩 나눠 타고 계곡 물살 위에서 노를 젓는건데. 야. 제법 신이 나더라. 한탄강 수변의 깎인 절벽 사이를 강줄기 타고 하낫둘 하낫둘 복창하며 일사분란하게 밀어가는 느낌. 특히나 뱃전에서 올려다보는 풍경이 마치 중국 계림의 기암괴석 못지않다. 딱 신선놀음이다. 절벽에 한그루 기이하게 자리잡은 소나무는 또 어찌 그리 기이한지. 바로 그 때였다.
‘어. 가만. 언제봤더라.’
보트에서 올려다보는 절벽 위 풍경이 어딘가 낯이 익다. 익숙한 풍경의 석조건물도 보인다. 아슬아슬한 절벽의 경계에서 텃밭을 가꾸는 등굽은 여인들의 풍경도 처음이 아니다. 언제 봤더라 여길. 당황한 나를 태우고 보트는 하류로 흘러간다. 절벽 위의 건물은 차츰 작아져간다. 절벽 위를 산산히 오가는 사람들이 그런 우리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분명하다. 나 언젠가 저 위에 있어본 적이 있다. 저 벤치에 앉아, 물놀이꾼들을 내려다본 적이 있다. 바로 저기서!
꽉꽉 엮어둔 기억 틈에서 답을 찾은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기 절벽 위, 그러니까 강변의 기독교 수도원에 남 몰래 은거해있던 건, 내가 선생이 되기 전이었다. 열 서너 해는 족히 된 옛날. 개인적으로 내 신앙적 경로가 파국을 맞고, 인생 설계가 리셋된 경험이 세번 쯤 있었는데, 내가 저 절벽 위에 있던건 그 두번째 추락의 때였다. IMF 구조조정이 마무리 되던 본격적인 저성장의 초입. 그 와중에도 남들은 어찌어찌 취업하던데, 나만 홀로 인생 기획이 와르르 틀어진 듯한 시기였다. 때마침 어디가서 꺼내놓기에도 남사스러운, 서툰 연애도 실패했다. 나름 티 안내고 자부했던 내 삶에 관한 신뢰와 믿음이 와해된 시기이기도. 교회 출석도 짜증스럽고 괴로웠다. 인생에 뭐하나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만성화된 좌절과 널부러진 우울의 풍경. 내 청춘은 한마디로 남루했다. 더는 궁색함을 견디질 못하고 이끌리듯 찾은게 바로 강원도 두메 산골의 수도원이었더랬다.
인생이 만만했던 나이브(nive)한 청춘 신자. 교회 카페에서 수다떨 때, 주워들은 몇마디 학술용어로 다루어지던 ‘신앙’이, 삶 최초로 절박한 실존의 문제로 다루어졌다. 절벽 위 예배당, 사연많은 신자들 틈에서 나는 매일같이 통곡하며 기도했다.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 살았는지, 절박하게 내 인생의 잘잘못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파산 선고의 날. 실토하듯 하나님께 토해낸 말은 ‘살려주십시오’였다. 눈꼬리의 눈물이 흘러내려 콧물과 합류해 낙하하다가 마침내는 입가의 침과 뒤범벅 되어 뚝뚝 떨어졌다. 기분 탓일까. 설교자께서는 청년이 어째 짠해보였는지, 내 어깨에 안수해주는 시간이 왠지 더 길게 느껴졌다.
한탄강은 기도원을 굽어져 두르며 연신 흘렀다. 그 강자락에 은거한건 일주일 정도였다. 낮시간에는 성서를 읽거나 수도원 체류자들이 밥값 대신 가꾸는 텃밭에 있었다. 절벽위 상추 밭에서 내려다보는 강물에는 가끔씩 청춘남녀들을 실은 보트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하하호호. 깔깔깔. 하나같이 근심없어 보이는, 멀찍이 생중계되는 어떤 인생들의 풍경. 그 화사함이 콘트라스트처럼 내 처지를 더 시커멓고 남루하게 채색시켰다.
인생이란 특정한 장소에 특정한 정서를 남긴다. 그저 오래 잊고 있을 뿐. 우연은 오래된 청동거울처럼 까마득한 시절의 자아를 마주하게 한다. 세상 다 잃은 듯한 표정으로 절벽위 텃밭에서 호미를 들고 있던 15년 전의 내가, 보트 위에서 노를 움켜쥔 15년 후의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시절 그리도 부러웠던 물 위의 여행객이 되어 나는 강의 하류로 도도히 떠내려간다.
나는 왜 잊은걸까. 그 괴롭고 가난하던 ‘영혼의 밤’을.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잊은게 아니라 잊고 싶었던 건지도. 마치 내 인생은 본래부터 말끔하고 잘 정비되었던 것처럼, 기억을 편집하고 재구성해온 건지도. 마치 한번의 파산도 없이, 늘상 봄날이었던 듯. 내 오랜 이상과 자부심의 파산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회복하고자 발버둥치던 그 시절이, 나는 어쩌면 수치스러웠던 건지도.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새까맣게 잊을리가 있겠나.
유쾌한 교직원 연수. 신이 나서 노를 젓다가 대뜸 십수년전의 찌질하고 고통스런 내 이십대를 마주하게 된 어떤 경험. 굳이 우연을 가장해 내 기억에서 그 아픈 시간들을 꺼내신 하나님의 본 뜻. 알 것 같다. 하는 것마다 안되고, 꿈꾸는 것마다 좌절하며, 남 몰래 무시해온 사람들의 모습 그대로 추락해버린, 존재론적 낙하(落下)를 다시 떠올리게 하신 까닭. 알 것도 같다. 내 삼십대 후반의 인생을 향해 힘껏 던지시는 하나님의 몸쪽 꽉찬 돌직구. 그의 짧고 묵직한 경고장. ‘너.인.생.똑.바.로.살.아.라.’
나는 대답삼아 탄식처럼 읇조렸다.
“죄송합니다. 하나님. 똑바로 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