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우리가 드리는 예배?
예배는 우리가 드리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무언가 드리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예배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나누어주시고 싶은 것을 주시는 것이 예배이다. 마치 우리가 드리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지 사실은 예배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적으로 주시는 시간이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섬기시는 자리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섬겨주셨고 은혜로 풍성하게 채워주셨음을 말하는 것, 그것이 예배이다.
2. 일하시는 예수님
예배는 예수님의 일하심 때문에 시작된다.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시나? 칼빈은 구약의 세 직분을 가지고 설명했다. 선지자, 왕, 제사장의 그림으로 지금도 일하시는 예수님을 가르쳐 주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1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세 가지로 말한다.
“그분은 우리의 큰 선지자와 선생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감추인 경영과 뜻을 온전히 계시하시고,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려 우리를 구속(救贖)하셨고, 성부 앞에서 우리를 위해 항상 간구하시며, 또한 우리의 영원한 왕으로서 그의 말씀과 성신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를 위해 획득하신 구원을 누리도록 우리를 보호하고 보존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큰 선지자와 선생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감추인 경영과 뜻을 온전히 계시하신다’라고 한다. ‘계시하신다’를 현재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구속하셨고, 성부 앞에서 우리를 위해 항상 간구하신다.’ ‘또한 우리의 영원한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를 보호하신다.’ 예수님은 지금도 열심히 일하시고 계시다.
이렇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칼빈의 삼중직을 얘기하는 배경이 있다. 중세에 안셀름(Anselmus)이라는 분이 살았다. 그분이 이런 말을 했다. ‘중세의 봉건사회에서 영주와 신하들과의 관계, 혹은 백성과의 관계가 계약관계였다. 영주는 자기 영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해 주시고 군사적인 지원을 해 주고, 백성들은 영주에게 충성을 바치는 관계 속에 있었다.’ 안셀름의 그림에도 하나님과 우리와의 계약 관계가 있는데, 이 계약 관계를 충실하게 행하지 않으면 빚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영주가 충분히 보호해 주지 않거나, 충성을 바치지 않으면 빚이 발생하게 되듯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일종의 빚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으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었던 빚을 없애 주셨던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끝났다고 생각한다. 안셀름에 있어서 예수님은 빚을 탕감해 주시는 역할로 예수님의 역할이 끝났다고 말해도 된다. 그런데 칼빈은 예수님의 역할이 빚을 탕감해 주시고 끝난 것이 아니고 지금도 삼중직의 역할을 다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예수님의 역할은 끝난 것이 아니고, 지금도 예수님의 사역은 계속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성령님의 시대에도 여전히 예수님의 사역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3. 일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예배가 의미 있어
예배로 모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예배는 우리가 모여 시작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예배로 모으시는 일을 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모인 것이다. 우리가 예배드리러 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우리가 여기 올 수 없다.
다니엘 12장 4절에 보면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합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라고 나온다. 봉합하고 끝나고 떼어지는 데 요한계시록에는 ‘인을 뗀다’라는 표현이 나온다(계 5:2). 인을 떼시는 분은 어린 양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고 할 때 정관사가 다 붙는다. ‘그 길’, ‘그 생명’, ‘그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지금도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그 일을 하신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사도를 충원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은 일차적으로 사도들에게 당신 자신의 뜻을 기록하고 보존하고 증거하도록 세우셨다.
4. 직분적 섬김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1절)고 했는데 사실은 ‘계시하셨다’는 의미이다. 21장의 과정을 통해 당신 자신을 밝히 드러내 계시하셨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만인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나타내셨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그들은 사도들이다. 제자를 뽑는 조건에 ‘우리와 함께 한’ 자로 제한적이었다. 바울을 사도로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의와 노력을 해야 할 정도로 제한적이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 당신 자신을 보여 주셨다. 우리 구원을 위해 계속 일하셨다. 사도들의 핵심적인 증거는 지금 우리에게 기록되어 성경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초기에는 사도들을 제한하셔서 그들의 증거를 통해 계속해서 선지자로 일하셨고, 그 초기에 집중된 말씀이 강력하고 양도 많았고 풍성했다. 그것이 기록이 되고 정리되는 단계를 거치게 된다.
사도 이후 새로운 기록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성경의 충족성을 얘기한다. 예수님이 승천하셨지만,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 선지자 직을 계속 수행하시고 나중에는 성경을 통해(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 일하셨다.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오심으로 사도들의 말씀을 보증해 주셨고, 성경을 기록하게 하심으로 선지자 직분을 수행하고 계시다.
그 직분을 집중적으로 수행하시는 곳이 교회이다. 사도들도 교회 안에서 일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의 베드로의 고백은 결국 교회를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선지자 직분의 일이 무엇을 위해 쓰여지는가? 그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용된다. 이 그림이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온다. 고전 12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14장 12절을 보면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모든 것이 덕을 세우기 위해 하라.” 12장 3절은 문패와 같다. ‘예수님이 주시라’는 것은 문패이다. 그리고 교회를 위한 은사, 직분, 사역을 주셨다. 다양한 것이지만, 교회가 함께 예수를 주로 고백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직분이 왜 존재하느냐? 단지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기 위해 시인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모든 일들은 지금도 예수님이 선지자로 일하시는 결과이다. 성령께서 선지자 직을 잘 수행하기 위해 나누어주셨다. 은사, 직분, 일을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 은사가 여러 가지라 산만하다는 느낌이지만, 직분으로 모아져야 한다. 직분을 떠나 은사가 발휘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을 잘 정리해 주는 말씀이 12장 12-13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은사는 몸을 위해 존재한다. 14장 33절에 보면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40절에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로 정리한다. 직분, 은사, 일이 다양해 보이지만, 결국 하나로 가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다양한 일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5. 직분은 예수님의 선지자적 직분의 수행 방식
직분은 예수님의 선지자 직분이 수행되는 방식이다. 예수님이 선지자로서 일하는 것이 구체화 된 것이 직분으로 수렴된다. 하나님의 일과 은사는 직분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직분과 상관없이 은사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은사가 중요한 것은 덕을 세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각자가 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직분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직분자가 은사를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은사 받은 직분자가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인데 여기에서 선지자적 직분이 수행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선지자적 직분의 수행이 교회 안에서 은사 받은 직분자를 통해 일이 수행 될 때 거기에서 선지자적 직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직분자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말씀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이루어지는 통로이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선지자적 직분을 행하고 계시는 데 교회 안에서 직분자를 통해 복음 설교를 할 때 실현되는 것이다.
6. 설교는 성령님의 일하시는 통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5문에 보면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스도와 모든 은덕에 참여할 수 있는데 이 믿음은 어디에서 옵니까?”라고 묻는 물음에 “성령에게서 옵니다. 그분의 거룩한 복음의 강설로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며......” 아무리 많은 그리스도의 것이 있어도 그냥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일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것이 되지 않는다. [기독교 강요] 3권에 의하면 성령님의 일하심이 없으면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한다. 성령님의 사역은 무엇인가? 그분은 거룩한 복음의 강설로 우리에게 성령님께서 일하신다. 쉽게 말해, 설교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은혜들이 우리의 믿음을 일으킨다고 본다.
성부께서 거룩한 강설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그 부르심은 성부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거룩한 복음의 강설은 바로 이 성부의 부르시는 사역이다. 성자께서 선지자로서 거룩한 복음의 강설을 통해 일하신다. 성령님께서 거룩한 복음의 강설을 통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신다. 성령께서 나눠주시는 은사를 통해 우리에게 오게 하신다.
7. 그리스도의 직분적 일하심을 받는 것이 예배
이런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일과 성령님의 일하심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수많은 보화도 우리와 전혀 상관없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러 왔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기 위해 부르신 것이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 뭔가 드리러 왔다고 하지만,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고, 그저 거룩한 복음의 강설을 통해 우리는 받을 뿐이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당신이 만들어 가시는 것이 예배의 핵심이다.
8. 예배 가운데 직분자는 도구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했다. ‘십자가의 도’란 ‘십자가를 증거하는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십자가의 도를 들어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를 성령님께서 사용하셔서 믿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성경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켜 주셔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말씀’은 성령님의 사역이다.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를 말씀과 성령으로 효력 있게 부르신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창조하시는 일을 하신다. 우리는 영적으로 죽어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한다. 십자가의 도가 정보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때는 성령님께서 효력 있게 사용하신다는 의미이다. 성경 말씀은 성령의 도구이다. ‘하나님의 검’이다. 정보의 교환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령님의 사역이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십자가의 도가 전파될 때 그렇게 된다.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에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절에 “화목하게 하시며.......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했다. 이렇게 예수님은 지금의 직분자를 통해 그 일을 하신다. 직분은 물을 마시기 위한 컵과 같다. 직분자는 컵이지 물은 아니다. 직분자가 구정물을 주면 잘못이다. 그래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주신다.
고린도전서 4 장15절에서 바울은 “.......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다고 표현한다.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 가운데 나오는 ‘물과 성령으로 나고’,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의 표현은 바울에게로 오면 ‘복음으로 낳는다’고 표현한다. 베드로전서 1장 12절에 보면 우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이라.”고 합니다. 말씀 가운데 복음으로 우리는 낳는 것을 직분적 섬김을 통해 이루신다.
9. 예배에서 말씀에 대한 복창
위의 내용은 직분, 은사, 일이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한 내용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이 일이 실행되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은혜(일하심)에 대한 반응이 있다. 아멘이 찬양이고 기도이며 신앙고백이다. 예배에는 응답으로 우리 편에서 주어지는 면이 있다. 이것들은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철저하게 신앙고백, 찬양, 기도가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설교 요약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인데, 그것이 곧 찬양이다. 군대에서 ‘복창’하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이 바로 찬양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복창하는 수준이 바로 찬양이라는 것이다. 예배가 이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일하심이지만, 그러나 그 안에는 우리의 반응도 들어 있다.
우리의 반응이 가지는 의미가 무어인가?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은혜가 된다. 우리의 반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 까지도 사용하셔서 교회를 세우는데 밑받침이 되게 하신다. 고린도전서 14장 3절에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며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라고 하는데, ‘예언’은 신앙고백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일차적으로 복음의 강설만이 하나님의 일하심이지만, 반응하면서 복창하며 찬양, 기도, 고백 할 때조차도 성도들을 세우시는 은혜의 도구가 된다. 우리의 응답조차도 당신의 일을 위해 사용하신다는 의미가 있다. 이차적이지만, 찬송, 기도, 고백 가운데 우리가 반응을 하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 가운데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예배는 매우 메마르고 힘들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 일에 주목하지 않고 강설을 통해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것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예배 순서를 가져도 참된 예배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복음의 강설을 듣고 거기에 진실하게 반응할 때 그 모든 순서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를 세워주시고 또 우리 교회를 권면하시고 위로하시고 만들어 가시는 매우 중요한 통로로 사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드릴 것이 없다. 그냥 받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시간, 그것이 바로 예배이다.
[질문 시간]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53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방편이 무엇인가?” ‘말씀, 성례, 기도’가 포함되어 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인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수단으로 보는 데 오묘하다. 이 부분에서 2차적 의미의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기도마저도 붙잡아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으로 차원이 달라진다. 우리의 소원을 조아리는 의미의 기도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복창이 기도에 들어가야 하다. 성약에서 나온 책에 보면 반드시 설교 두에 기도를 넣었다. 이것까지 합해져서 복음이 된다. 기도는 복음에 대한 복창이 되어야 한다. 주기도문 내용이 있는데, 그 기도 내용을 보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복음의 내용 그 자체이다. 그런 기도를 할 때 그 기도를 통해 교회가 세워져 가는데 이차적 은혜의 방편이 되는 것으로 본다.
질문1) 직분(목사, 장로, 집사)의 역할이 예배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일어나야 하나?
<== 은사, 직분, 사역을 구분하려 한 경향이 있는데, 바울 사도는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몇을 세웠다고 한다. 은사가 있다고 다 직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 사도, 다 선지가?’ 고린도전서 당시에는 삼 직분으로 구분되지 않았다. 은사도 두 가지로 나눠지는데, ‘가르침+능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르침에 치중되어 있다. 지금의 세 직분으로 정리하자면, 사도, 선지자, 교사 가운데 ‘교사’가 복음의 강설을 행하는 것으로 집중되어 있다. 예배에 있어서 교사와 목사를 통한 복음의 강설이 지금으로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통로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장로와 집사의 직분은 권면하고 위로하고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쓴다.
질문2) 목사를 삼 중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맞는가? 오히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리스도인에게 보편적인 직분으로 설명한다.
<== 고린도전서에서 얘기하는 것은 일반 성도의 삼 중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 그리스도인의 직분을 포함하지만 더 구체적인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그러면 평신도는 무엇인가? 이것은 교회론적인 의미가 아니고,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 예배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와야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시체로 왔는데, 성령님께서 복음 강설을 통해 은혜를 주신다.
질문3) 나는 직분자가 아닌데, 나는 하나님 말씀을 읽을 수 있는가? 혼자 읽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 고민을 많이 해 보았다. 전제를 내려놓고 생각해 보자. 교회를 떠나 가정예배가 가능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는 가정예배를 예배로 본다. 그 때 아버지가 선지자, 제사장, 왕의 의미를 가진다. 개인적인 성경 묵상은 할 필요가 없는가? 개인적인 성경묵상이 가지는 우발돌발적인 점을 생각해야 한다. 교회에서 주어진 말씀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문제이다. 그것은 우리가 교회를 세우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큐티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에서 선포되는 복음의 강설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불량식품을 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CTS같은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교회 외에 많이 가 있다. 몸은 교회에 있지만, 인터넷을 통한 어떤 목사가 있는데, 이런 현상은 교회의 중요성과 하나님의 일하심에 있어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교회 없이 가정예배도 의미가 없다. 교회를 중심으로 개인의 성경읽기가 의미가 있다. 잔디밭은 누가 지정해 주는가, 그것은 직분을 통한 섬김이 이루어지는 곳일 것이다. 교회에서 주어지는 복창이 의미 있다.
김재윤 교수(국제신학대학원 교수)/http://cafe.daum.net/dawoori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