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은 평소보다 일찍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중생 시 의義(은혜)의 주입과 칭의 시 의義의 전가”를 이야기했던 저와 닉네임 님과 청교도 목사님은 적군이 되고 이를 반대하신 카리타스 님은 아군이 돼 버렸네요. ㅠㅠ
칼빈 선생님께서 자유의지를 반대하실 때, 타락해 부패한 인간에게는 악을 향한 의지만 있고 선을 향한 의지는 없는데, ‘타락한 인간에게도 선을 향한 자유의지가 남아 있다. 선을 향한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우리 본래의 의義다.’는 로마교 주장을 반대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박건택 편역 {칼뱅 소품집 제1권} (서울: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6)’ 914쪽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피기우스 자유의지론을 논박함}에 있는 글입니다.
나는 의지는 영구히 우리 본성 안에 남아있다는 것, 의지의 악한 상태는 그 본성의 부패로부터 나온다는 것, 그리고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으로 악한 상태가 교정되고 그 같은 방식으로 의지가 악 대신에 선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가르쳤다.
칼빈 선생님께서는 {기독교 강요 제3권} [제6장] <2항>에서 “의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 마음속에 주입되고”1)라고 하셨는데, 로마교에서나 칼빈 선생님에게서 ‘의義의 주입’은 ‘은혜의 주입’을 뜻합니다. 다음은 로마교 트렌트 회의 [칭의에 관한 법규(Canon) 제1항~제33항]에서 <제11항>입니다. “인간 심장에 부어진 은혜와 자비”가 바로 ‘의義(은혜)의 주입’을 뜻하는 말입니다.
만일 누군가 인간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전가를 통해서만 혹은 죄의 제거를 통해서만 의롭게 된다 해, 성령에 의해 인간 심장에 부어진 은혜와 자비를, 그리고 그들 안에 본래 속하거나 혹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은혜 또한 오직 하나님의 선한 뜻임을 제외한다면, 그 자에게 저주가 임하리라.
조나단 에드워즈 저격수가 ‘조나단 에드워즈 이신칭의론’을 {페북}에서 문제시할 때 그 까닭은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을 연구하신 신학박사 정부홍 목사님께서 {페북} 자신의 담벼락에서 ‘조나단 에드워즈 이신칭의론’을 다루면서 쓰신 “의義의 주입”, “내재하는 의義”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의義(은혜)의 주입”, “내재하는 의義”는 로마교만의 전매특허 용어인 줄 알고 문제시한 것입니다. ㅡ참고로, 조나단 에드워즈 저격수는 이 이후에 프란시스 튜레틴 목사님께서 ‘주입’이라는 용어를 쓰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의義의 주입’은 로마교만의 전매특허 용어가 아닌 개혁 신학 용어임을 알게 돼 ‘의義의 주입’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합니다. ㅡ 다음은 ‘정부홍 편역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신칭의} (서울: 그리심, 2019)’ 52쪽~53쪽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제가 배경색을 칠한 “이중 은혜”는 칼빈 선생님 가르침대로 당연히 ‘중생(성화) 시 의義(은혜)의 주입과 칭의 시 의義의 전가’를 뜻합니다.
에드워즈는 개혁주의 교리로서 칭의를 재확인하고 스콜라주의적이며 칼빈주의적 교리로서 칭의를 재확인한다. 나아가 스콜라주의적이며 칼빈주의적 관점에서 주입 교리를 회복한다. 그에게서 주입은 죄인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활동이며,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전가와 분리될 수 있는 사역이 아니라고 믿는다. …(중략)… 어거스틴, 칼빈, 그리고 에드워즈는 동의하기를 그리스도의 이중 은혜는 칭의와 성화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구별할 수 있고, 불가분의 것이며 동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의심의 여지 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믿는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와 주입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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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s://cafe.daum.net/reformedvillage/D3MR/124
첫댓글 이 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카리타스님께 “이건 좀 다르누부분이다” 아굴님께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 밝힌 이유 입니다.
카나리아님께서 조금 못 마땅 하실 수도 있지만, “중생한 성도는 선을 행할 자유가 있다.” 를 이끌어낸 웨민정신(?) 정도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그리고 말씀 하신대로 “은혜의 주입”이라는 표현이 좋을거 같습니다. 여러 오해의 문제도 있구요. ^^
칼빈선생은 칭의와 중생에 대해 구분을 하되 분리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로마 트렌트회의 때 칭의와 중생 및 성화를 분리하고 칭의가 부족해서 의를 주입하여 협력을 통한 의의 완성을 주장했지요.
이에 반박한 칼빈선생은 그리스도가 소유한 의의 유일성을 주장하며 오직 은혜를 강조하고 의의 전가를 설파합니다.
인간 본성 자체는 중생한 자라도 부패해 있고 변화되지 않는데, 로마교회는 의의 주입을 통한 변화를 주장한 것이니 이에 대한 용어를 사용하면 안됩니다
칭의와 성화 아닙니까?? ^^
인간의 본성 자체는 항상 그대로 이지요. 그러나 본성의 상태는 변합니다.
@puritan2r 본성 상태의 변화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카리타스 “인간 본성의 4중 상태”를 확인해 보시길요~~
인간 본성이 무엇인지 부터…
@puritan2r 네, 부패한 본성에 그리스도를 옷입는 거죠. 새사람을 입는 거고 결국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어도 옷입은 걸 말합니다.
옷입기 위해서 즉, 벌거벗지 않기 위해서 날마다 매순간 주님을 의지하고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카리타스 부패한 본성.
본성은 그대로 이나 부패한 상태이다. :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상태
원죄 : 죄책과 오염
의의 주입과 은혜의 주입은 다른 의미로 보여질수 있기에 의의 주입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게 유익할것 같습니다.
카톨릭의 의의주입개념을 인정하지 않는게 개혁주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