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싸고 신선한 먹거리 장터, 화서시장
글/ 김애자(시인)
예로부터 시장은 사람들이 의식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손쉽게 구해 쓸 수 있었던 생활의 터전이었다. 요즘은 어디랄 것 없이 들어선 대형마트 등에게 상권을 잠식당하여 예전과 같은 성황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지금도 재래시장은 우리 서민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곳이다. 오랜 장마가 걷히고 햇살이 눈부신 날, 화서시장을 찾았다.
한때 화서동에 거주했던 필자에게는 낯선 곳이 아니었지만, 그곳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였다. 시장이 형성되기 훨씬 전부터 그곳에 살고 계신 지인과 함께 시장 초입에서 십여 년째 가게를 열고 있는 <금산인삼>의 최용오(58) 님을 만났다. 두 분의 대화를 들으며 차츰 화서시장의 윤곽이 잡혀왔다.
예와 오늘, 달라진 모습
맨 처음, 화서시장의 한 가운데로는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그 양쪽에 독립된 두 개의 건물로 세워진 당시의 시장도 요즈음의 백화점과 같은 형태로 설계되어, 밖을 향해 가게를 낼 수 있는 건물이 아니었다고 한다. 1층에는 옷가게, 한복집, 이불집, 신발가게, 철물점, 문방구, 지물포, 시계점 같은 점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하매장은 주로 식품이나 먹거리를 다루는 곳이었는데, 순대국에 소주 한잔으로 피곤을 잊어보려는 남정네들뿐만 아니라 장보러 나온 주부들이 시장기를 해결하기도 하는 정겨운 곳이었다.
그러나, 초기와 달리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경기는 쇠퇴해 가기 시작하였다. 대형 마트나 백화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생활이 점차 나아진 이들이 시장으로부터 눈길을 돌리는 경향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안쪽의 경기는 나빠져 가는데도 점포를 갖지 못한 이들이 난전에 벌여 놓은 좌판으로는 손님들이 꾸준히 모여들었다. 자연스럽게 상인들이 바깥쪽으로 벽을 트고 점포를 변형시키는 사례가 빈발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지금과 같은 형태의 시장으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2차선 도로변의 상가건물도 지금은 안쪽보다는 바깥으로 상권이 더 잘 형성되어 있다. 다른 편 건물 안에는 공산품이라면 없는 게 없이 다 갖춰져 있다는 <땡백화점>이 자리하고 있는데, 가격도 저렴하여 시장의 상권을 쥐다시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재래시장으로서의 화서시장의 매력과 중심은 복개천 위에 형성된 먹거리 장터가 아닐까.
값싸고 신선하고 풍성해요
화서시장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농산물이 풍부하고 신선하며, 값이 싸다는 것이다. 복개천 위로 상가 건물의 외벽을 등지고 줄지어 형성된 먹거리 장터는 통로가 일자(一字)로 길게 뚫려있어 한 눈에 시장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
이곳의 농산물이 특히 신선하고 값이 저렴하다고 소문이 난 것은 3~4월부터 11월까지 인근 이의동이나 비봉, 마도 등지에서 직접 가꾸고 거둬들인 농산물을 들고 나와 난전에 좌판을 벌이고 있는 노점상들이 많은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생산한 농산물임을 강조하며 건강에 절대로 필요한 무공해 식품임을 내세우면서도, 한시라도 빨리 물건을 떨이하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 때문에 웬만한 흥정이면 손사래를 치지 않는다. 게다가 인색하지 않게 덤도 한두 번 더 얹어준다.
재래시장을 이용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마수니까 많이 준다거니, 단골이니 좀 더 준다거니, 아니면 많이 샀으니 덤을 조금 더 달라느니, 이건 손질도 안했으니 다듬으면 많이 줄어들 건데 더 줘야 하지 않겠냐느니...... 이렇게 밉지 않게 서로 밀고 당기다 보면 엣수, 더 가져가슈! 그 대신 담에 또 와유~. 혹은 고마워요, 많이 파세요! 이런 덕담으로 흥정을 마무리 지으며 흐뭇하게 돌아서는 것. 이런 정겨움은 재래시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우리네 삶의 인정 넘치는 모습들인 것이다.
오세요, 반찬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오늘 저녁 식탁엔 무엇을 올려야 할까? 몸은 고달프고 주방에서 반찬거리 준비할 시간은 없고, 냉장고에 미리 준비해둔 음식도 마땅치 않아 걱정이 된다면, 화서시장엘 한 번 가볼 일이다. 이미 말했듯이 값싸고 신선한 농산물은 물론이고 생필품이며 건강식품 등에다 정육점, 치킨집, 떡집, 생선가게, 반찬가게, 과일가게, 청과물가게, 꽃집, 옷가게 등 등.....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한겨울에도 옥수수 찌는 냄새가 구수하게 풍긴다. 호떡이 군침을 삼키게 하고 김이 설설 오르는 오뎅도 입맛을 다시게 한다. 여름이면 얼음 서걱대는 식혜가 시원하게 갈증을 풀어주기도 하고......그 시장 통에는 정말 없는 것이 없다.
직장일과 가정일로 심신이 바쁘고 지친 상태로 장을 보는 겸업주부들의 눈길을 끄는 것 중의 하나가 반찬가게이다. 식재료를 깨끗이 다듬거나 바로 조리할 수 있게 손질해서 파는 것은 기본이고, 안주인이 바지런한 집에서는 방금 무쳐낸 겉절이며 깍두기, 포기김치, 온갖 종류의 밑반찬 등을 집에서 손수 만들어 내오거나 현장에서 직접 만들어 주기도 한다.
반찬은 물론아이들의 간식거리,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약주 한 잔 권하며 상에 올릴 안주거리까지 그 무엇이건 손쉽게 마련할 수가 있다. 바쁘게 사는 현대의 주부들에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장터인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 곳이 바로 화서시장이다.
숨어서 흐르는 역사
개장 당시부터라니 벌써 30여년, 화서시장에서 <서울떡집>을 하고 있는 부부 백영철, 김송자 님을 만나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67세 동갑내기인 이 부부의 증언에 의하면 화서시장은 1979년 8월15일에 개장 기념식을 가졌다고 한다. 초기부터 바로 그곳에서 장사를 해 오신 분들이어서인지 옛일을 회고하는 그들의 어조는 확신에 차 있었다.
현재 시장의 한가운데로 길게 난 통로는 지하에 토관을 묻은 것이 아니고 개천가를 따라 옹벽을 치고 그 위에 덮개를 한 것이라고 했는데, 천변엔 미나리가 많이 자생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고기 잡고 물장구치며 놀고 어른들은 모여 윷놀이도 하던 그 개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시장 건물이 있었으나, 어느 해인가 그 개천에 범죄행위와 관련된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자 그만 덮개를 씌워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팔달산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물은 화서시장을 관통하면서 동사무소 옆을 땅 속으로 지나고 기찻길도 밑으로 통과하여 서호방죽으로 흘러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장통 아래를 흐르는 물은 다시 다른 물과 만나며 서해안 쪽으로 휘돌아 나가다가 드디어는 바다에 이르게 되겠구나! 한 편의 역사소설을 읽은 듯 감회가 새로웠다.
이렇게 30년도 넘게 주민들과 함께 살아온 화서시장이 요즈음 몸살을 앓고 있다. 화서시장을 이용하는 주요 고객이었던 고등동 주민들이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이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의 세대수가 6000을 상회한다니, 화서시장으로서는 타격이 크지 않을 수가 없다. 공사가 끝나기까지의 긴 동안, 현격히 줄어들 매출을 생각하면 해당 상인이 아니라 해도 어찌 근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재래시장은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살아남아 있어야 한다.
“편온한 바다는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위기를 기회로 삼으라”는 말도 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라면 최선의 방법을 찾아 어떻게든 견뎌 내야할 것이다. 다시 환히 웃을 수 있는 날을 맞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화서시장의 상인들이 이 어려운 기간을 잘 극복해 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첫댓글 화서시장으로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