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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자손 중의 한 사람인 삭개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알리심 -
누가복음 19장 1-10절 /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알려주시는 것에서 있는 일임
본문은 아브라함의 자손 중의 한 사람인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해 주시는 것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마지막 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이것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왜 세상에 오셨는지를, 무엇 때문에 세상에 오셨는지를 말입니다.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께서 들르신 여리고성은 어떤 곳인가?
예수님은 이것을 여리고를 거쳐 지나가시는 길에 들러 세리장인 삭개오를 만나고 그에 대해 말씀해 주시는 것에서 하십니다. 예수께서 들르신 여리고는 구약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약속 받은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으로, 이스라엘에게 정복당한 첫 성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것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땅이 하나님의 구원에 있음을 나타내시는 것으로 이곳에 기생으로 있는 라합과 그의 집을 이스라엘이 섬기는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구원을 바라보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3. 예수께서 여리고성을 들르신 것은 의도된 일임
그러한 여리고에 예수께서 들르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께서는 여리고를 거쳐 지나가시게 되었는데,“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라는 문구는 예수님에 의해서 의도된 여리고 방문이신 것을 알려 줍니다. 이 문구에서‘들어가다’라는 말은‘그(예수)가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본문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을 때는‘(여리고에) 가까이 이르셨다’는 것에서입니다. 이것의 사용은 앞서 사용된 용례를 따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지나가시더라’는 표현이 모두 9번 사용되는데, 본 절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움직여 간다는 행적을 이어가기 위하여 배경을 설정하고 있는 것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처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점점 예수께서 올라가고자 하는 예루살렘에 다가와 가까이 이르시는 것에서 여리고에 들르시는 일을 하시게 됩니다. 이는 이곳에서 예수께서 의도하신 한 가지의 일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3-1.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남에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되어진 일임
예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실 때,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자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 나아옴에 있은 것은 삭개오의 마음에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우연히 일어나서 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남에 있게 하는 섭리를 행하신 것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준비된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에 따라서 삭개오는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에 그곳에 나와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지 보고자 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기만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삭개오가 올라가 있는 돌무화과나무 앞을 예수께서 지나가시게 되었으며, 자신을 보려고 애쓰는 삭개오를 보고서는 그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만난 삭개오는 키가 작았으나, 로마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장이요 부자였습니다. 삭개오가 부자인 것은 그의 직업을 세리장이라고 말해주고, 그 삭개오가 예수님에게 한 말과 관련하여서 알 수 있습니다. 8절에서“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세리장의 직무와 권한을 이용하여서 부당하게 가난한 자의 재산을 착취하여 부를 쌓음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삭개오는 그의 지위와 부를 이용하여 여리고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였을 것이란 사실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게 합니다.
그 삭개오가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시는 길에 들르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여 사람들이 몰려드는 거리에 그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모여든 인파가 워낙 많다보니 정상적으로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키가 작았습니다. 그러니 인파에 가리고 파묻혀 더욱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할 수 없어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길목에 있는 돌무화과나무에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예수님을 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삭개오가 올라가 예수님의 모습이라도 보고자 하는 돌무화과나무 앞을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삭개오가 올라가 있는 돌무화과나무 앞에 이르러서는 그 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보고 있는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삭개오를 보시는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급히 나무에서 내려와 크게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맞아들여 모셨습니다. 이 일을 놓고 군중은 예수님을 비난하는 말로 수군거렸습니다.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 머무신다고 말입니다. 군중들이 이처럼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세리장으로서 가난한 백성들의 원망과 원성을 듣는 때문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매겨진 과한 세금에 허리가 휘며 고통을 겪고 있는데 삭개오는 세리장의 직위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돌보아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 직위를 이용하여 부당하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불의하게 재물을 모으는 때문에 그는 가난한 백성들의 재산을 부당하게 착취하는 자로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는 그의 이름이 지니고 있는‘깨끗하다/무죄하다’는 뜻과는 전혀 다른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세리장이요 부자인 삭개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를 죄인으로 멸시하였습니다. 그러한 삭개오를 예수께서 부르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머무시자, 군중은 예수님을 비난하는 말로 수군거림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들르시며 이곳에서 삭개오를 만나시는 것은 군중들의 이러한 수군거림을 통하여 그들이 어떠한 자로 있고자 하는지의 실체를 들춰내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세리와 그리고 죄인들과는 같지 않다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이죠. 본문 앞에 있는 18장 1절에서“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에서 보는 것인 자기들을 의롭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바리새인들과 견주어지고 있습니다. 이들의 가르침과 본을 따름에 있는 백성들 또한 다를 바 없이 자신들을 의롭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3-2.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선포하신 구원
그러한 군중들 앞에서 예수께서는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포하심으로써 자신들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것에 있는‘자기 의’, 곧‘사람의 의’에는 있지 않은 구원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예수께 있음을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오늘 이 집이 구원을 얻었다”라고 구원을 선포하심으로써 세리장이요 부자인 삭개오를 죄인들과 같이 죄인으로 여기는 죄로부터의 구원에 있음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처럼 죄인의 죄를 사하여 주실 수 있는 권능 있는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선포하실 수 있는 죄 사함의 구원을 예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이 죄 사함의 구원을 주시는 권능 있는 하나님이심을 군중 들 앞에 드러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의와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과 본을 따르는 백성들의 의와는 다른 의로운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로 오신 분이십니다. 바리새인의 의요 사람의 의는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것에 있는 것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에게 구원을 주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할 뿐이요 또한 자신이 정죄될 뿐입니다만, 예수님에게 있는 하나님의 의는‘세리들과 죄인들’모두를 그들의 죄에서 용서하여 죄로부터의 구원에 있게 합니다. 그러한 이들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통해“내가 의로우니 너희도 의롭다”는 의롭다 하심을 얻음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구원 얻는 의를 가지고 세상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로 있는 자들을 찾아 부르시는 일을 하실 것에서 삭개오를 만나시는 일을 하십니다.
4. 예수님이 선포한 구원을 얻음에 있는 삭개오에게 있는 믿음에 대한 이해
4-1. 삭개오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주님이심을 알고 시인하는 믿음에 있었음
예수께서 삭개오에게“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라고 선언하신 것은 그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한 것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을 위하여 베푸신 믿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 집에 들어와 머무시자 주님 앞에 일어서서 말하기를,“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삭개오가 말한 바인‘주여 보시옵소서’에서 보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을 주님으로 호칭하였습니다. 이것은 18장 35-42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바인 예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예수님을 찾아 나온 한 소경이 예수님을‘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구한 것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인 삭개오가 예수님을‘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헤롯 왕과 유대 대제사장 및 서기관들 간에 가진 대화(마 2:4-6)에 있는 내용인“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 라고 하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는 때문입니다. 따라서 삭개오가 예수님을‘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불리는 것을 자신도 듣고서 그렇게 부르는 것에 아무 이해 없이 따라하는 성격에서가 아닙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주님이 되심을 시인하는, 그래서 주님 속으로 들어가 주님의 사람이 되고자 함을 예수께 알리고 있으며, 그에 따라서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섬기며 주님을 따르고자 함을 드러냈습니다.
4-2.“너는 나를 따르라”는 제자의 길을 따름에 있을 것의 표명에서도 알 수 있슴
이는 다음에서 하고 있는 말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삭개오가 말하고 있는‘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는 것에서의‘소유의 절반’은 문자적인 「재산의 반」이라는 뜻이기보다는, 18장 22절에서의‘네게 있는 것을 다(모두)’에서 보게 되는「‘모든 것’보다 적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으로, 삭개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의 일부이지만 재물을 가난한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들에게 베풀겠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또한‘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토색한 것이 있으면 - 네 갑절이나 갚겠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주님이신 예수님을 만나 따를 마음을 갖기 이전에 세리로서 그들에게 부당하게 대하고 불의한 일을 함으로써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서 네 배로 배상하겠다고 하였는데, 삭개오가 이처럼 배상하겠다는 것은 출애굽기 22장 1-4절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배상을‘배(곱/갑절)’에 한정해서가 아니라, 그 이상인‘네 배’로 갚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배상의 범위를 적용할 수 있는 한도에서는 가장 광범위하게 넓히고 있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이 세리로서 백성의 재산을 부당하게 빼앗는 불의를 행한 것에 대해서는 단지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소유하고 있는 것에서 피해자에게 배상하는 정도(갑절)에서가 아닌, 그 소나 양을 잡아 죽여 먹어 치웠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아 넘겨 부당한 이득까지도 챙긴 것의 죄악으로 확대하여서 배상하는 것(소의 경우는 다섯 배, 양의 경우는 네 배)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섬기고 주님을 따르는 것에서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그것은“네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상응하는 자기 표명에 있는 것입니다. 즉,“주님, 제게 있는 모든 것을 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삭개오는 이러한 말을 하는 것에서 자신의 마음에 채워져 있으며,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입니다. 이제까지 소유해 온 재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 7-9절에서 말한 바인“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에서 보게 되는 그리스도만을 가장 존귀히 여겨 섬기며 그분을 따르고 있는 것에서입니다. 이렇게 삭개오의 인생은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그의 주님으로 들어와 계시면서 전혀 다르게 바뀌었습니다. 삭개오의 인생에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삭개오의 주가 되셔서 그와 함께 하시는 변화가 있은 것입니다.
5. 예수께서 선언하신 구원으로 아브라함 자손 중의 한 사람이 된 삭개오
이처럼 예수께서 삭개오의 주님이 되신 새로움의 변화가 있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예수님은 말이죠. 세리장인 삭개오를 죄인들과 동일하게 보고 멸시하며 그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하여 수군거리는 사람들 앞에 삭개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그와 함께 하신‘오늘’일어난 일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는“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말씀하여 삭개오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있는 하나님의 언약적 관계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구원, 곧 아브라함과 그리고 그의 자손 대대로 지킬 영원한 약속으로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계승에 삭개오가 있음을 사람들 앞에서 분명히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삭개오도 하늘의 뭇별을 가지고 약속하신 것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삭개오와 동족인 유대인들은 삭개오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들과 다르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삭개오가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이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유대인들과 다른 것은 세리로서 백성들을 억압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삭개오의 이런 삶의 방식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가 자기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토색한 것을 배상하는 등의 따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요 분명 좋은 일이요 분명 선한 일입니다만,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지위에 있는 요인이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은 등은 그가 불의에 있어온 것입니다만,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는 요인이 되지도 않습니다.
예수께서“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라고 말씀하시며,“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요인은 그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그분의 뒤를 따르는 것에 있었습니다. 삭개오가 자신이 불의에 있어온 행동들을 진정으로 깨닫고 이를 뉘우쳐 자신의 전재산을 이웃에, 사회에, 국가에 기부하고 헌납할지라도, 그래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 나눠주고 자신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가난한 자로 일생을 마감할지라도 그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지 않고 그분을 따름에 있지 않다면, 그는 그의 선행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지위를 가져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지위에 있는 유일한 요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며 그분을 따름에 있습니다.
6. 삭개오를 구원하심에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알리신 예수님
예수님은 말이죠. 삭개오가 자신을 주님으로 섬기고 자신을 따르는 믿음에 있게 하기 위하여 그를 찾아오시는 것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여리고를 들르시는 섭리를 행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마지막절인 10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를 행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6절과 15장 24절에서 보게 되는‘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의 한 사람으로서 삭개오는 하나님의 현재적인 구원 사역에 있는 예수님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은혜 안에 있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며, 자신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름에 있겠다고 하는 것은 이처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있게 하고자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름에 있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통해서 이스라엘 집으로 불러들인 양인 한,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유대인들의 멸시와 이스라엘 무리로부터 배제시킴은 삭개오를 결코 이스라엘 집 밖에 있게 하지 못하며, 그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지위를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에서 10장 28절, 17장 12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자를 단 한 사람도 빼앗기지 않습니다. 이는 그에게 주어진 영생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까지 빼앗김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손에 굳게 붙잡혀 있으며, 참으로 견고하게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에 있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일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수를 충만케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하신 다윗을 왕으로 세워 그를 하나님의 백성의 목자가 되게 하심으로 흩어진 자들을 한데 모아 하나님의 의로움의 통치에 있게 하실 것에서 종말적인 예언을 주심으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실 목자, 곧 구주를 약속으로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7. 삭개오와 예수님, 그리고 우리와 예수님의 대비
이 이야기를 해 주시는 본문을 통해서 삭개오와 예수님, 그리고 우리와 예수님이 대비가 됩니다. 맞대어 비교 되는 것에서 확연한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으로 있는 우리를 이스라엘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에서 찾아내어 이스라엘 집에로 들이시고 목자의 보살핌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어디로 가든지 그 뒤를 따름에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것이 이것에서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것인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지 않고자 하면 그분을 믿는 믿음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부인하고 주님을 따름에 있는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말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몸이 세상에서 재물을 소유하고 세상 임금의 통치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만, 이 모두가 다 쓰잘 데 없다며 다 내려놓고, 주님만을 인정하며 바라봄에 있고자 하는 마음에 있다면, 그런 마음이 점점 더 강해지며, 더욱더 간절해진다면 참으로 주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