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해마다 12월 3일이 되면 즉위를 가능하게 한 일등 공신들을 불러 위로 모임을 가졌는데 이름하여 동덕회 입니다.
주요 멤버는 영조 시대에 정조를 위해 총대를 메고 상소를 올렸던 서명선, 정조의 사부 김종수 등이었지만, 최고중의 최고는 홍국영 이었습니다.
조선의 영조,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사극에서 짧지만 크게 활약한 인물로 늘 등장하는 인물, 그가 바로 홍국영입니다.
정조에게 홍국영은 마음이 통하는 벗이자 최고의 참모였고 믿음직한 경호실장이었습니다.
홍국영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눈치가 빠르며 수완이 좋아 임기응변에 능했고, 글재주도 매우 뛰어났습니다.
성격이 호방하여 술과 친구들을 좋아했고, 장기와 같은 잡기와 시조, 창에도 능했기 때문에 집안 어른들이 그를 질책할 때가 많았고, 명문가에서는 홍국영과 교류하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홍국영은 자라면서 주변 친구들에게 “천하 모든 일이 내 손아귀에 있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 장담하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홍국영이 그렇게 자신감 넘칠 수 있었던 요인에는 가문적 배경도 있었습니다. 본관이 풍산인 홍국영 가문은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서울에 깊이 뿌리 내린 가문이 었었습니다.
홍국영은 1772년(영조 48) 25세 때 과거에 급제한 뒤 왕 가까이서 일하는 예문관원(사관)이 되고 동궁을 보좌하는 춘방사서가 되었으며, 영조는 홍국영을 아끼며 ‘내 손자다’ 라고까지 했습니다.
정조가 홍국영을 신임하게 된 것은 충성심에다 빠르고 정확한 정세 판단 등 정치적 능력 외에도 당쟁에 물들지 않고 파벌을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 있었습니다.
또한 홍국영은 궁궐 밖 세상의 실상을 정조에게 알려주는 역할에도 충실했습니다. 말하자면 정조의 대국민 소통 창구가 바로 홍국영이었던 것입니다.
홍국영은 정조의 기대와 신임에 부응하여 외척인 홍인한과 정후겸 세력에 맞서 정조의 대리청정을 성사시키는 등 고비마다 정조를 보위하고 역할을 기꺼이 감당했습니다. - 경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겠는가.
홍국영은 정조가 즉위한 후 도승지, 숙위대장, 훈련대장, 금위대장 등을 맡아 국정의 주요 사안은 홍국영을 거치지 않으면 정조에게 보고되기조차 힘들 정도였습니다.
정조는 즉위 직후 ‘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에 대한 두터운 신임을 거리낌 없이 밝혔습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입니다.
담에 이어서~
<조선왕조실록(126)> 정조 7 - 정조의 분신 홍국영(2)
정조의 훌륭한 동지 홍국영은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도세자에 대해 불경했으며 정조의 즉위를 방해했다는 죄를 물어 숙청했고, 정조의 외척 홍봉한 집안도 정치적 으로 재기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 제거했으며, 정순황후의 친동생 김귀주도 유배시키고 그 세력을 무너 뜨리면서 권력의 정점에 섰습니다.
홍국영은 외척 세력을 배격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조의 뜻을 충실히 실행했으나, 결국 자신이 스스로 외척이 되면서 위기를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정조는 혼인한 지 16년이 되도록 후사를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비가 후사가 급하다는 이유로 빈을 간택 하도록 하였습니다.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를 빈으로 밀었고 결국 간택되었으니 이가 바로 ‘원빈’입니다.
원빈이 아들만 낳는다면 홍국영의 영화는 영원히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지만 홍국영의 기대와 달리 원빈은 불과 1년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홍국영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결국 두어서는 안 될 무리수를 두고 말았습니다.
홍국영은 원빈이 죽은 후 새로 빈을 간택하자는 신하들의 의견을 힘으로 누르고,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 인 상계군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았으며, 더 나아가 상계군을 완풍군으로 봉하여 정조의 후계로 삼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 것입니다.
완풍군의 ‘완’은 전주 이씨, ‘풍’은 풍산 홍씨의 본관을 뜻 하는 것으로, 왕손에 자신의 가문 본관을 들이밀었다는 데에 그 야심이 묻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홍국영은 누이 원빈이 세상을 떠난 후 정조의 비 효의왕후를 근거없이 의심했고, 원빈이 독살 당한 증거를 찾는다며 궁궐의 나인을 비롯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문초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보던 정조가 드디어 나섰습니다.
1779년(정조 3) 9월 26일, 정조는 홍국영에게 입조를 명 했습니다. 이 날은 7년전 정조와 홍국영이 처음 만난날 로서 홍국영도 정조의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습니다.
말 없는 정조와 한 참을 마주한 홍국영은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 오늘은 신이 전하와 길이 헤어지는 날 이옵니다. - 신이 한번 금문 밖으로 나간 뒤에도 세상에 뜻을 둔다면 이는 나라를 잊은 것이니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입니다.
정조는 홍국영의 사직상소를 받아들인 후 ‘봉조하’ (은퇴하는 원로대신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직함)라는 직함을 내렸고, 그날로 홍국영은 그렇게 도성을 떠났습니다. 정조가 홍국영에게 내린 마지막 은혜였다면 은혜였습니다.
외척 세력을 철저히 배격하고자 했던 정조로서는, 그러한 원칙에서 벗어나 왕위 계승에까지 개입하려는 홍국영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홍국영의 행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배신이자 정조 에 대한 배신이었으며, 정조의 정치 구상과 행보에서 치워내야 할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서른의 나이에 세상의 정점에 섰던 사내, 서른둘에 봉조하라는 기록을 세운 홍국영. 그는 그 이듬해인 정조 5년, 생을 짧고 굵게 그러나 참으로 허무하게 마감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