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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성씨의 유래 ★
고 (高) 고씨 양씨 부씨와 함께 본래 탐라(제주)의 지배씨 족으로서 이들 세성의 시조 탄생에 대하여는 삼성혈 전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제주목건 치연혁 조에 의하면 '본 탐라국 ···· 초유칭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 삼인 분처기지····' 했다하고 굴초에는 사람과 만물이 없었는데 삼신인(고을라, 부을라, 양을라)이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에서 솟아나왔다고 한다. 이들 삼신은 사냥으로 피와 육식하고 살았는데 하루는 동쪽으로부터 상자 하나가 바다로 떠 내려 와서 건져 열어보니 그 속에는 세 미녀와 오곡종자와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삼신은 세 미녀를 배필로 맞아 목축과 농사를 짓고 살았으니 이것이 곧 탐라개국설화로 전해 오는 것이다. 그중 고을라가 고씨의 연원을 이루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고씨의 발상지 제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그후 후손들의 번창으로 세거지 또는 조상의 작호에 따라 15개본으로 분적되었는데 시조 을라의 45세손 자견왕의 태자 말로(제주고씨) 말로의 증손자 공익(청주고씨) 말로의 증손 령신(개성고씨) 말로의 10세손 복림(장흥고씨) 말로의 후손 종필 (연안고씨) 말로의 16세손 옹섭(안동고씨)를 중조 1세로 하여 각각 분관되었고 이외에 용담, 옥강, 횡성, 담양, 의령, 고봉, 금화, 회령, 안동 등 제고씨가 있었으나 다 같은 혈손이라는 신념 으로 대동 단합 고을라를 도시조로 하고 제주 고씨 로 환적하였다. 각 파계를 망라하여 고씨중앙 종문회를 구성한 대동 합보를 편찬했다.
구 (具) 구씨는 문헌에 32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릉성 창원 두본을 제외하고 나머지 30본은 미고이다. 릉성 구씨는 구존유를 시조로 하고 있으며 창원 구씨는 본래 창원 (具)씨 였으나 이조 정조때 구씨로 사성받아 창원 구씨가 되었다
[ 교림계 ] 시조 교림은 중국 명나라 사람으로 기주자사를 지냈다. 임진왜란때 우리나라에 원군으로 와서 귀화하여 대구에 정착하여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하고 고향인 두릉을 본관으로 하였다.
☆ 4,837명이 있다.(1985년)
국 (鞠) 시조 국양은 중국 송나라 사람이라고 하나 우리나라에 들어온 사실은 알 수가없다. 국양이 고려때 벼슬이 병부상서에 이르렀고 담양에 살면서 본관을 담양으로 하였다.
☆ 14,858명이 있다.(1985년)
국 (菊) 1960 년도 국세 조사때 비로서 나타난 성씨로서 본 관과 유래는 미상이다. 분포는 경기도, 강원, 충북, 충남, 전북 등지에 몇 가구씩 산재하고 있다. 시조 신수(愼脩)의 선조는 중국 송나라 개봉부 사람이다. 그는 고려 문종때에 우리나라에 귀화했으며 학식이 풍부하고 의술에 능하여 1075년(문종29)에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벼슬은 숙종 때 수사공우복야참지정사에 이르렀다. 아들 신안지 가 지수주사가 되어 수원 신씨라고 한적도 있었으나 그후에 후손들이 거창에 대대로 살았기 때문에 본관을 거창으로 하였다.
★ 40,013명이 있다.(1985년)
권 (權) 권씨는 문헌에 56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안동 예천 2본을 제외하고 54본에 대하여는 미상이다. 안동권씨 시조 權幸(권행)은 원래는 신라 종성인 김행이었다. 고려창업에 수훈을 세우고<능병기달권>하다는 뜻으로 권성을 하사받아 권행으로 되었고 예천권씨는 원래의 성은 昕(흔)씨였는데 고려충목왕의 휘가 흔이여서 국휘를 범한다 하여 나라에서 외가의 성을 따르게 했다. 예천권씨의 시조 권섬(權暹)의 부 흔승단은 안동권씨 권백서의 사위임으로 모성을 따라 개성하게 되었다 한다.
길 (吉) 시조 길당은 당나라 사람으로 고려 문종때 우리나라에 귀화한 8학사의 한 사람이다. 그는 고려때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으며 해평(선산)백에 봉해 짐으로써 본관을 해평으로 하였다. 그후의 세대는 알 수 없으며 후손인 시우(성균관 생원)를 1세 조상으로 하고있다.
☆ 23,057명이 있다.(1985년)
김 (金) 김씨의 본관은 <조선씨족 통보>에 623본으로 나타나있다. 그러나 본서에는 112본만 수록하고 나머지 성씨에 대하여는 미고이다. 김씨는 이를 크게 나누어 가락국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수로왕계와 신라왕실의 박, 섭, 김 3성중의 하나인 김알지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근원이 다른 김해 김씨가 있다. 임진왜란때 왜장 가릉청정의 좌선봉으로 왜병 삼천명을 이끌고 왔다가 조선의 문물을 흠모한 나머지 우리나라에 귀화한 김충선(본 성명은 사야가)를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를 말한다. 김충선은 기화한후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때 전공을 세우고 자헌대부에 올랐으며 권율장군의 진청 으로성명을 하사받았다.
수로왕계의 김해김씨는 유구한 역사를 가졌으면서도 분적된 사례는 없으나 분파된 수는 본서에 기록된 것만도 155파에 이른다. 김알지계 알지계는 경주 김씨를 주종으로 하고 신라 고려 이조에 걸쳐 600여 본관으로 분적되었으나 본서에는 110본을 기록하고 나머지 본관에 대하여는 미고이다. 1930년 국세 조사에 따르면 김씨의 호구수는74만 9190세대로서 제 2위의 이씨보다 22만 2716세대나 많다. 제 3위는 박씨로서 26만 1357세대 제 4위가 최씨로17만 1262세대 제 5위는 정씨로 10만 6082세대 였었다. 흔히 명문을 말할때 연안이씨 광산김씨 대구서씨 순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이는 그 많은 김씨 가운데서 광산김씨가 으뜸가는 명문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밖에도 김관자가 서말이라는 안동김씨(세칭장김)를 비롯하여 청풍김씨 연안김씨 경주김씨들도 지난날 쟁쟁한 명문벌족 이었다.
강 (姜)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고구려조에서 도원수를 지내면서 많은 전공을 세운 공신이다. 597년(고구려 야양왕, 신라 진평왕 19)에 수나라 문제가 침략의 야욕으로 무례한 국서를 보내오자 왕은 군신을 모아놓고 이에 회답할 것을 논의할 때 그는 이와 같은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 할 것이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이 이에 수긍하고 곧 싸울것을 명하자 그는 도원수로서 정명 5만을 인솔하고 임유관을 정벌 수나라 군사 30만을 단번에 격퇴하고 개선했다. 603년에 수나라 양제가 다시 200만 대군으로 쳐들어올 때 중신회의에서는 역시 중과불적인 만큼 요동 일부를 떼어 주고 강화할 것을 논의했으나 그는 이에 반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고 다시 수나라와 대전 요동성 살수(청천강)등지의 싸움에서 수군을 크게 격파했다. 그리고 그의 후손인 진이 진양(진주)후에 봉해짐에 따라 본관을 진주로 하게되었다.
☆ 묘소는 번향현 원수림(지금 만주 봉길성 원수림 역전)에 있으며 진주시 상봉서동 봉산사 에서 매년 음력 4월 10일에 제사 지낸다.
*어사공파- 후손 5파가 모두 도원수(이식)를 시조로 하고 있으며, 그중 박사공파 *관서대장군공파- 시중공파 *은렬공파, 인헌공파- 어느대에서 분파되었는지 밝히지 못하고 인헌공파를 제외한 4파는 관행을 진주로 하고 있으며 각 파조를 기 1세로 하고있다. 그러나 인헌공파는 이식의 후손이지만 본관을 긍천으로 그를 기 1세로 부르기도 한다.
강 (康) 시조 강후(康候)는 중국 주나라 무왕의 아우 강숙봉의 둘째 아들로 기원전 198년에 기자와 함께 평양에 들어와 왕실의 교화를 조성한 공으로 기자가 그의 위적을 가상히 여겨 관정대훈공신에 책록하고 그의 아버지인 강숙의 강자를 사성함으로써 모든 강씨의 득성 시조가 되었다. 그의 67세손인 호경은 태조의 외조이며 고려건국의 기반을 닦는데 많은 공을 세워 국조대왕에 추재되고 가세를 크게 번창시켰다. 또한 후의 80세손인 지연이 신천에 세거하면서 고려 명종때 신성부 원군에게 봉해지면서 부터 후손들이 본관을 신천으로 하게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강씨는 후를 득성 시조 호경을 중시조 지연을 득관조로 분류하고 있다.
☆ 북제주 조천서원에 제향.
곽 (郭) 시조 곽원의 선조는 신라 헌강왕 때 시중을 역임 한 곽상인데 이후의 내력은 알 수 없다. 그후 후손인 곽원(시호는 문성)이 고려 성종때 등과하여 형부상서를 역임했으며, 곽원의 10세 후손인 곽연준(시호 충헌)이 개성부윤 등을 역임하고 청원군에 봉해진 후 청주에 살면서 본관을 청주로 하였다.
☆ 24,451명이 있다.(1985년)
나 (羅) 나씨는 문헌에 46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금성 나씨 와 나주 나씨를 제외한 그 나머지 44본에 대하여서는 미고이다. 금성 나씨는 나총례 를 시조로 하고 나주나씨는 나부를 시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노 (魯) 노씨는 문헌에 64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본서에는 강화, 광주,함평, 밀양등 4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에 대하여는 미상이다. 노씨는 본래 중국 주 나라 때 백리가 노에 봉해짐으로써 그 후손들이 노를 성씨로 삼게 되었다 한다. 강화 노씨는 고려 명종때 이부상서를 지낸 노용신을 시조로 하고 광주노씨는 노필상을 시조로 하며 밀양노씨는 노중연을 함평노씨는 노목을 시조로 하여 각각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남 (南) 남씨는 문헌에 57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남충을 시조로 하는 영양. 의령. 고성 3본을 제외하고 나머지 54본에 대하여는 미고이다. 남충은 본래 당나라 현종 때의 중원 하남성 봉양부 여남 사람으로서 형주자사를 지냈다. 755년(신라 경덕왕14년, 당나라 현종)에 안염사(安廉使)가 되어 당의 사신으로 일본을 다녀오는 도중에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신라 유린지(有隣地, 지금의 영덕군 축산면)에 도착하게 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이를 알고 당나라에 통보 하였으나 당나라 천자가 김충의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경덕왕이 영양군(지금의 경북 영양군)에 봉하며 여남(汝南)에서 왔다며(혹은 남쪽에서 왔다고) 성을 남(南)씨로 하고 민첩하다하며 이름을 민(敏)으로 함으로써 남씨가 시작되었다. 그후 고려 충렬왕 때에 김충의 후손인 홍보, 군보, 광보 세명의 형제가 공을 세워 남홍보는 영양군, 남군보는 의령군, 남광보는 칠성(고성)군에 봉해져서 각각 세 본관의 중시조가 되었으며 중시조를 1세 조상으로하고 대를 이어오고있다.
도 (都) 도씨는 문헌에 15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서제 성주 전주의 3본을 제외한 나머지는 미고이다. 서제 도씨는 문헌에는 찾아 볼 수 없는 성씨로서 경북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에 25세대가 살고 있을 뿐이며 성주도씨는 중국에서 동래 귀화한 씨족으로서 도순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고 전주 도씨는 강원도 홍천군 주익면 남당리에 25세대가 살고 있을 뿐 그의 유에 대하여는 상고하지 못하였다.
두 (杜) [ 경령계 ] 시조 두경령은 중국 송나라 두릉 사람으로 송나라 태종때 병부상서로 진종의 옹립을 반대하다 실패하여 소주자사로 좌천되자 둘째 아들인 두지건을 데리고 정처없이 배를 타고가다 풍랑을 만나 우리나라 궁지현(만경)에 도착하였다. 고려 목종이 이를 알고 좌사관의 벼슬을 내리고 궁지를 식읍으로 하사하고 두릉군에 봉하였다. 후손들이 그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본관을 두릉으로 하였다. 묘는 전북 부안군 하서면 석불산에 있다.
[ 교림계 ] 시조 교림은 중국 명나라 사람으로 기주자사를 지냈다. 임진왜란때 우리나라에 원군으로 와서 귀화하여 대구에 정착하여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하고 고향인 두릉을 본관으로 하였다.
☆ 4,837명이 있다.(1985년)
류 (柳) 류씨는 문헌에 131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주요 본관 은 고려 동합삼한익찬공신 류차달을 시조로 하는 문화류씨 고려조에 좌우위상장군으로 진강부 원군에 봉해진 류정을 시조로 하는 진주류씨 신라말에 국운이 쇠퇴함을 예견하고 고흥으로 낙향하여 고려에 불복하고 호장을 지낸 영을 시조로 하는 고흥류씨가 주측을 이루고 있다. 그외에 문화류씨에서 분적한 풍산, 서산, 전주, 진주 등 류씨가 있었으나 모두 문화류씨와 동원분파이므로 이 책에서는 문화류씨의 한 파로 다루었고 그 외의 류씨는 미고이다. 문화류씨는 연안차씨와 이성동족으로 같은 조상의 혈손이라고 한다. 시조 류차달은 차무일의 38세손으로 그의 6세손 차승색이 신라 애장왕때 좌상으로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된 헌덕왕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유주 구월산에 은거 하면서 조모의 성인 楊(양)씨 를 모방하여 류씨라고 변성하였다.
☆ 941,087명이 있다.(1985년)
모 (牟) 시조 경은 중국 관서지방 홍농사람으로서 송나라 흠종때 이부상서를 지내고 대사마 대장군에 올랐다. 고려 인종 4년(1125년)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난을 평정 하는데 공을 세워 일등공신에 서훈되었으며, 그대로 고려에 머물러 평장사의 직책과 모평(함평)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함평이라 하였다.
☆ 15,531명이 있다(1985)
민 (閔) 민씨는 본래 공자의 10제자중의 한명인 자건의 후손이 우리나라에 왔다가 여흥(경기도 여주)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시조 민칭도(閔稱道)는 고려때 벼슬을 했으며 고려 충숙왕(27대)때에 수정승을 지낸 학자인 민지를 시조로하는 '문인공파'와 같은 시기에 대제학을 지낸 민적을 시조로하는 '문순공파'로 나뉘어 진다.
☆ 137,314명이 있다.(1985년)
문 (文) 문씨는 문헌에 131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평, 감천, 정선 3본을 제외한 128본에 대하여는 미고이다. 감천 문씨의 시조 문원길의 선대에서 중국 에 들어갔다가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문성을 사성 받아 문씨로 개성했다 한다. 남평문씨는 신라 20대 자비왕 때의 사람인 문다성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다성의 출생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전남 나주군 남평면 동쪽에 장자지란 큰 못이 있고 그 못가에는 큰 바위가 솟아 있다. 하루는 당시의 도주가 그 바위 아래에서 놀고 있는데 그 바위 위에서 갑자기 오운이 감돌면서 문득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이상히 여긴 군주는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 위에 올라가 보니 석함이 놓여 있는데 그 속에 피부가 백설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 아이가 들어 있었다. 이에 그 군주가 거두어 기르니 나이가 불과 5세에 무사에 저절로 통달하고 무략이 뛰어날 뿐 아니라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 총기가 있는 있는지라 문을 성으로 삼게 하고 이름을 다성이라 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전남 나주군 남평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3마장쯤 가면 장자지라 불리는 큰못이 있고 그 곁에는 우뚝 솟은 바위가 있어 남평 문씨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바위 높이는 6미터쯤 되는데 바위 위에는 그 후손들이 문암이라는 비석을 세워놓아 문씨 시조의 탄강 지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곳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장자지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는법이 없고 못가에 있는 문다성을 모신 장연서원에서 매년 음력 9월에 향사한다. 정선문씨의 시조 문림간은 본래 전씨였는데 중국에 들어가 문명을 날리므로써 문성을 사성받고 문씨로 개성했다 한다.
맹 (孟) 신창 맹씨의 시조는 맹자(孟子)이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맹자의 50대손 우현이 고려 원종때 국자감을 지냈고 그의 세째아들 맹리가 시중을 지내고 신창백에 봉해졌으므로 본관을 신창으로 하고 맹리를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 맹리의 향사일은 음력 10월 1일 이다.
배 (裵) 경주 배씨의 기원은 박혁거세 탄생 전설에 나오는 신라 6부 촌장중의 한 사람인 금산 가리촌장 (金山 加利村) 지타(只他)가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고 총재태사에 올랐다. 그후 32년(유리왕 9년)에 금산 가리촌을 한지부로 고치고 성을 배씨로 하사하였다. 후에 한지부가 경주로 이름이 바뀌어서 본관을 경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의 후손은 기록이 없으며, 배현경(裵玄 慶)을 중시조로 하고있으나 배현경은 원래 이름이 성이 없이 백옥(白玉)이었으며 나중에 성을 배씨라고 했다고 한다. 중시조 배현경은 담력이 크고 용맹하며 지략이 뛰어나 궁예가 고구려에서 태봉이란 나라를 세울 때에 이를 도와 행오에서 출발하여 기장에 이르렀다. 그러나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 년만에 처자식을 살해 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당시 동료 기장이었던 신숭겸, 복지겸, 홍유등과 함께 궁예를 추출하기로 하고 왕건에게 왕창근, 송합홍 등 점술가의 예언을 설명하면서 거사를 권하여 왕건을 고려태조로 옹립하고 개국 일등원훈에 서훈되었으며 '고려사'에 고려 개국 4공신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919년(고려 태조2년)에 도읍지를 송도로 옮길때 개주 도찰사가 되어 새 도읍을 건설하는데 공을 세우고 궁예의 잔당을 소탕하는데 공을세워 대상행 이조상서 겸 순군부령도 총 병마대장에 이르렀다.
936년(태조 19년) 그가 병으로 위독하자 태조가 친히 문병하며 '경의 자손이 있으니 그들을 잊지 않겠노라' 하고 나가자 죽었다. 왕이 부음을 접하자 가마를 멈추고 통곡하였다. 995년 (성종15년)에 평산 태백성에 태사사를 세워 매년 봄, 가을에 향사한다.
우리나라 배씨는 모두 지타(태사공)의 후손이었으 나 자손이 번성해짐에 따라 본관과 파가 나뉘어져 분성 배씨, 성산 배씨, 달성 배씨, 흥해 배씨, 협계 배씨, 화순 배씨, 함흥 배씨 등이 있으며, 대동보를 부정하고 다르게 족보를 만 든파도 있다.
☆ 경주 배씨는 90,027명이 있다.(1985년)
박 (朴) 기원전 69년 이들 여섯 촌장들이 아들을 데리고 알천의 언덕위에 모여서 백성을 다스릴 임금을 추대할것을 의논을하고 있었다. 이때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에 있는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에 오색영롱한 빛이 비치고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이보였다. 그곳에 가서 보았더니 박같이 생긴 알이 있어서 알을 깨어보니 그곳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아이를 혁연히 세상에 나왔다고 해서 혁거세(赫居世)라고 하고 박에서 나왔다며 성을 박이라고 해서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정이라는 우물에 용이 나타났는데 왼쪽갈비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나왔다. 얼굴과 입술이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아서 월성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 가 떨어졌다. 사람들이 이 아이가 나온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알영(閼 英)이라고 했다. 기원전 57년 이 두 아이가 13세가 되자 박혁거세는 왕이되고 알영을 왕비로 삼았으며 나라이름을 서라벌(신라)이라고 했다.
이 때부터 신라 왕실의 56왕은 박(朴), 석(昔), 김(金)의 3성에 의하여 교체 반복되었는데, 그 중에서 박씨 왕은 시조왕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모두 10명이다. 박씨는 여러 본관 중 단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다고 하며, 모든 박씨는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끼리는 되도록 혼인을 피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씨의 세계는 박혁거세의 증손인 파사왕(신라 5 대)과 일성왕(신라 7대)에서 갈라졌는데, 파사왕계는 뒤에 영해, 면천,강릉 등으로 분관했고, 비안, 우봉 (牛峰), 이산(尼山), 해주(海州)등도 파사왕의 후손 이라 한다. 한편 일성왕계는 그의 25대손인 경명왕(신라 54대)과 경애왕 (신라 55대)대에서 다시 갈라졌는데, 경명왕계는 아들 9형제에서 각기
·첫째 아들 박언침의 밀성대군파(密城大君派) : 밀양, 반남,진원 박씨등 ·둘째 아들 박언성의 고양대군파(高陽大君派) : 고령 박씨 ·셋째 아들 박언신의 속함대군파(速咸大君派) : 함양,삼척 박씨등 ·넷째 아들 박언립의 죽성대군파(竹城大君派) : 죽산, 음성,고성 박씨 ·다섯째 아들 박언창의 사벌대군파(沙伐大君派) : 상주, 충주 박씨 ·여섯째 아들 박언화의 완산대군파(完山大君派) : 전주,무안 박씨 ·일곱째 아들 박언지의 강남대군파(江南大君派) : 순천,춘천 박씨등 ·여덟째 아들 박언의의 월성대군파(月城大君派) : 경주 박씨의 8대군파와 ·아홉째 아들 박교순(朴交舜)의 국상공파(國相公派) : 울산 박씨로 분파 되었다.
한편 경애왕계는 계림대군파(鷄林大君派)를 이루었다. 박씨는 다른 씨족과는 달리 역대 세계가 비교적 분명한것이 특징이다. 특히 밀성대군파의 밀양 박씨가 주류를 이루어 박씨 인구의 70∼80%를 차지하고 있는데, 밀양, 반남, 고령, 함양, 죽산, 순천, 무안,충주 박씨를‘8박’ 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 8본이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김씨, 이씨와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한국의 3대성의 하나이다.
박씨는 옛문헌에 314본관이 있었지만 현재는 127 개의 본관이 있으며 이중 46개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에 대한 유래는 알 수 가 없다. 1960년 국세조사에 36만 7271가구에 인구 2,112,076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3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인구는 3,435,640명으로 전국 가구 구성비 8.5 % 순위는 275성 중 역시 김씨,이씨, 다음으로 제3위였다.
방 (方) 중국 염제 신농씨의 13세손인 방뢰가 중국 하남지 방에 살때 방씨란 성을 받았다. 온양 방씨의 시조인 방지는 방뢰의 134세손이며, 당나라에서 한림 학자로서 황제의 명을 받고 669년(신라 문문왕 9년) 신라에 와서 설총과 함께 육례 구경의 대지를 밝힌 동방유학의 한사람이다. 그후 상주에 정착하여 살았기 때문에 상주란 본관을 사용했고 그후 방운이 온수(온양)군에 봉해짐에 따라 온양으로 개관하게 되었다. 시조인 방지로부터 방운 까지는 문헌이 없어져서 방운을 1세 조상으로 하고있다 상주 방씨, 신창 방씨, 군위 방씨는 모두 온양으로 합본되었다.
☆ 75,265명이 있다.(1985년)
백 (白) 시조 백우경(白宇經 - 시호는 문경)은 중국 소주 사람으로 황제 헌원의 16세손인 을병의 후손이다. 그는 780년(신라 선덕왕1년) 우리나라에 와서 계림의 자옥산 아래에 정착하여 살면서 신라때에 좌사공대사도에 이르렀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경명왕(신라 54대)때에 중랑장을 지낸 백창직을 중시조로 하며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본관의 유래는 중시조 백창직의 증손자인 명휘가 고려때 대사마대장군으로 수원군에 봉해졌다는 설과 백창직의 9세손인 백천장이 중국에서 이부상서를 거쳐 우승상으로 수성백에 봉해지고 고려때 수원백에 봉해져서 수원으로 하였다는 두가지의 설이 있다. 이밖에 염포 백씨, 부여 백씨, 대흥 백씨도 모두 수원 백씨에서 갈려나간 성씨다.
☆ 시조의 묘는 경북 월성군 안강읍 옥산동에 있으며 향사는 양력 5월 첫째 일요일에 한다.
변 (卞) 변씨는 원래 중국 주나라 문왕의 여섯째 아들이 처음 조(曺)로 봉해졌다가 후에 노나라 변읍에 봉해 지자 성을 변이라 했다. 그후 후손 변원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예부상서에 오르고 8학사의 한 사람으로 '효경' 한질을 가지고 신라 경덕왕때에 사신으로 와서 정착하여 살았으나 그후의 대는 알 수가 없었으므로, 고려 성종때 문하시중을 지내고, 팔계(초계)군에 봉해진 변정실(卞庭實)을 시조로 하여 대를 잇고있다. 초계 변씨에서 본관을 나누어 고려때 국자진사가 되고 밀양에서 대대로 살아 온 변고적을 1세 조상으로 하는 밀양 변씨도 같은 변정실의 후손으로 대종회를 같이하고 있다.
☆ 초계 43,669명, 밀양 17,228명이 있다.(1985년)
변 (邊) 변씨는 문헌에 67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변안열 (邊安烈)을 시조로 한 원주 변씨와 변경을 시조로한 장연변씨 그리고 변여를 시조로한 황주변씨 이외에는 미상이다. 또한 이상 3본의 인구수를 보면 원주 변씨가 거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서 (徐) 서씨는 문헌에 165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본서에 기록된 성씨는 11본에 불과하고 나머지 142본에 대해서는 미고이다. 그러나 모든 서씨는 이천서씨 의 시조 서신일의 후손으로 짐작된다. 전설에 의하면 고대 기자 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 이 위만에게 쫓겨 지금의 이천땅 서아성에 자리 잡은 것이 서씨의 시조라고 한다. 우리나라 서씨 가운데서 기자에 연원을 두고 있는 성은 서씨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 행주기씨 등이다. 서씨는 대종이 이천 서씨이지만 명벌로 빼어난 집안은 대구 서씨이다. 삼대 정승에 삼대 대제학을 지낸 집으로는 대구 서씨를 비롯하여 청송 심씨 청풍 김씨가 있을 따름으로 그중에서도 6대에 걸쳐 삼정승 삼대제학을 낸 집안은 대구서씨 뿐이다.
소 (蘇) 요임금의 후손인 기곤오가 소성의 하백에 봉해지고 기원전2266년 소성이 단군조선에 영속되었으며 기씨를 소씨로 고쳐서 소씨가 생겼다고 한다. 소곤오(기곤오)의 후손이 신라 6부 촌장중의 한사람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라고 한다. 소벌도리의 25세손인 소경(577년 출생)은 후손이 없었는데 꿈에 소벌도리가 나타나 진주 도사곡 (저동)으로 이사를 하면 9저를 얻을 것이라고 하여 660년 3월 3일(신라 무열왕 7년)에 지금의 진주시 상대동(저동)으로 이사를 한후에 9대에걸쳐 9명의장군(9저 즉 아들, 복서 : 청주총관, 손자 억자 : 한주총관, 증손 후준: 상주총관, 고손 검잭 : 웅주도총 6세손 상영 : 청주도총 7세손 목 : 청주도총 8세손 은 : 웅주도총 9세손 송 : 강주도총 10세손 격달 : 대장군)을 낳게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소벌도리를 원조로하고 진주를 본관으로 하였으며 소경을 중시조로 하였다. 소경은 관직이 각우에 이르렀고 나라에 공을세워 656년(무열왕 3년)에 왕이 그의 조상인 소벌도리를 문열왕에 추봉하였다. 묘는 진주시 소경 임좌에 있고 양력 3월 마지막 토요일에 향사한다.
☆ 38,854명이 있다.(1985년)
신 (辛) 신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당나라 사람 신시랑과 엄시랑(영월 엄씨의 시조로 엄임의라고 한다)이 사신으로 신라 35대 경덕왕때 우리나라에 파락 사라는 사신으로 들어와서 그대로 머물러 살면서 엄씨와는 서로 종씨라 부르며 혼인도 하지 않고 의좋게 살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름과 후대를 알수가 없어서 고려 인종때 금자광록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냈던 신경(辛鏡, 시호는 정의)을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본관은 중간에 영산, 영월로 분관이 되었는데 최근에 발견한 신경의 4세손인 신몽삼의 묘비에 '태사공영주신지묘'라고 되어 있어서 원래는 영주 신씨였음을 알게되었다.
★ 영산 56,301명, 영월 49,676, 영주 29,907명이 있다.(1985년)
신 (申) 신씨는 문헌에 155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고령, 아주, 평산 3본을 제외한 152본에 대하여는 미고이다. 신씨 가운데 평산신씨는 전체 신씨의 70%이상을 차지하고 고령신씨가 20% 차지한 것으로 추산된다. 신씨는 이조때 대표적인 명벌의 하나로서 고령신씨는 이조 전반기에 평산신씨는 이조 후반기에 크게 세를 떨쳤다. 그리고 평산신씨 시조 신승겸은 고려 왕건 태조의 익재 공신으로 공산동수에서 태조의 위급을 구출코자 대신 전사, 죽음을 애통히 여긴 태조는 달성군 공산면에 지묘사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했다고 한다.
★ 51개의 본관과 620,950명이 있다.(1985년)
신 (愼) 시조 신수(愼脩)의 선조는 중국 송나라 개봉부 사람이다. 그는 고려 문종때에 우리나라에 귀화했으며 학식이 풍부하고 의술에 능하여 1075년(문종29)에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벼슬은 숙종 때 수사공우복야참지정사에 이르렀다. 아들 신안지가 지수주사가 되어 수원 신씨라고 한적도 있었으나 그후에 후손들이 거창에 대대로 살았기 때문에 본관을 거창으로 하였다.
★ 40,013명이 있다.(1985년)
석 (石) 석씨는 문헌에 85번으로 나타나 있으나 충주(홍주) 석씨와 해주 석씨를 제외한 나머지는 미상이다. 충주(홍주)석씨는 고려 의종때 랑장으로서 두 경승과 함께 조위총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상장군이 되고 이어 서북병마사를 지낸 석린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해주석씨는 본래 중국의 동명 사람으로 명나라 목종 때 병부상서를 지낸 석성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총 17개의 본관과 40,387명이 있다.(1985년)
충주(홍주)석씨 시조 석린(石隣)은 고려 18대 왕인 의종때 랑장으로 두경승과 함께 조위총란을 평정한 공으로 상장군이 되고 서북병마사를 지냈으며 약성(충주)군에 봉해졌다. 그의 7대 손인 석천을에게 두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첫째아들 석수명의 후손들은 본관을 홍주로 하였고, 둘째아들 석여명의 후손은 본관을 충주로 하여 본관을 나누었으나 본관을 충주로 하여 전국 대종회를 구성하였다.
해주석씨 시조 석성(石星)은 중국 동명 사람으로 1559년 진사 이과에 급제하고 명나라 명종을 직간하여 파직 되었다가 다시 등용되어 병부상서에 이르렀다. 그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돕는데 공을 세웠으나 심유경으로 인하여 투옥당했다. 그후에 복관되어 그의 아들 석단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해주에 정착하여 살자 왕이 그를 수양군에 봉하고 땅을 하사했으며 본적을 해주로 하게 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해주로 하였다.
선 (宣) 조선 씨족 통보에 의하면 보성 선씨의 시조 선 윤지(호:퇴휴당)는 중국 노나라 대부 선백의 후손으로 명나라 때 문연각 학사로서 1382년 (우왕8) 사신으록 고려에 왔다가 귀화 전라도 안염사가 되어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우거하는 도이를 격퇴하고 민심을 안정 시켰으며 유교의 발전과 인재 양성에 힘썼다. 그후 조선이 개국되자 절의를 지키고 보성에 은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보성으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그리고 동성동본으로 고려말에 예의 판서 우문각 대제학 등을 지내고 조선개국 후 에 보성 백이산 남록도 촌방으로 은거한 선원지를 시조로 하는 또한 계통이 있으나 같은 혈손으로서 곤계 관계는 분명하지 않으나 양파사이에 합보를 하였다.
성 (成) 성씨는 원래 중국 성씨로 주나라 문왕의 일곱째 아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 자손이 나라 이름인 성(成에 읍변이 붙은 것)을 성씨로 삼았으나 초나 라에게 나라가 망하자 읍변을 떼어버리고 成씨 라고 하였다. 그후 당나라 때에 학사 성경이가 우리나라로 건너왔고 백제에는 성충, 신라에는 성저라는 사람이 있었으나 우리나라의 성씨와 어떤 견관이 있는지 상고할 수 없고, 창녕 성씨보에는 시조 성인보의 아버지는 성숙생으로 신라 대관 성 저의 후예라고 한다. 성인보는 창녕에서 대대로 살아온 선비이며 창녕에서 호장중윤을 지냈다. 삼국 말기에는 호걸이 각주군에 할거하고 있어 고려 태조는 관원을 파견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였는데 당시 장민자를 호장이라 하고 장병자는 장교라고 하였다 한다. 그 후손들도 창녕에 정착세거함으로써 창녕을 본관으로 삼았다. 묘소는 창녕군 대지면 맥산에 있고 향사일은 음력10월 1일이다.
☆ 총 13개의 본관과 163,513명이 있다.(1985년)
손 (孫) 손씨는 문헌에 118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7본을 제외한 나머지 111본은 미고이다. 삼국 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가 국가로 성립되지 전의 원시 부족사회인 사로(서라벌)는 6촌(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자산, 진지촌, 무산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으로 이루어 졌는데 그 6촌장이 각각 孫, 李, 崔, 鄭, 裵, 薛로 사성 받았다고 한다. 때는 신라 제 3대 유리왕 9년(32)이었다. 이것이 손씨의 시조이며 손씨로 사성받은 무산 대수촌장의 이름은 구례마 이다 . 또한 손씨는 모두 구례마의 후예라 하겠다. 그러나 일직 손씨만은 계보를 달리하고 있다.
★ 1998년 현재 87,995가구에 368,717명이 있다.
송 (宋) 송씨는 문헌에 172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15본을 제외한 나머지의 유래는 알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모든 송씨의 도시조는 중국 당나라에서 호부상서를 지낸 송주은이며 우리나라에 귀화한 연대와 경위는 알 수가 없다. 송주은의 7세손인 송순의 후손 송자영이 세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송유익(宋惟翊)은 여산 송씨의 시조, 둘째 송천익은 은진 송씨, 셋째 송문익은 서산 송씨로 나뉘었다. 이밖에도 많은 본관이 있으나 모두 위의 3파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 1985년도 현재 131,891가구에 557,137명이 있다.
심 (沈) 심씨는 문헌에 63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4본을 제외한 나머지 59본에 대하여는 미고이다. 심씨는 이조 500년동안 정계를 주름잡은 10대 문벌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심시 중에서도 청송 심씨는 상신이 13명이나 되는데 그중 영의정이 9명이나 되어 전주 이씨의 영의정 11명에 비해 버금가는 것이다. 그리고 심은 심회는 부자 영상인데 심은의 부 심덕부를 넣으면 삼대가 상신을 지낸 셈이다. 역사상 3대가 상신이 된 집안은 대구서씨 청풍김씨와 함께 단 세집뿐이다.
★ 16개의 본관과 219,737명이 있다.(1985년)
이 (李) 이씨는 증보문헌비고에서 451본 <조선씨족 통보>에는 546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100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에 대해선 미고이다. 이씨는 신라 6부 촌장의 한 사람으로서 32년(유리왕 9)에 이씨로 사성받은 알평계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계, 중국에서 기화한 고성 이씨계, 당나라에서 신라로 기화한 연안 이씨계, 김수로 왕의 둘째 아들로 모성을 따라 허씨로 했다가 현종으로 부터 이씨로 사성받은 이허겸계, 원나라에서 귀화한 이지란계, 등이 있고 그 외의 재령, 아산, 가평 등 대다수의 이씨는 경주에서 분적되었다.
★ 240개의 본관과 1,418,945가구 5,985,554명이 있다.(1985년)
어 (魚) 어씨는 문헌에 19본이 나타나 있으나 함종 충주 2본을 제외한 17본은 미고이다. 충주 어씨는 본성이 지씨였는데 시조 어중익의 겨드랑 밑에 비늘이 있다해서 고려 태조가 이를보고 어씨를 사성하였다고 하며 함종 어씨는 원래 중국인인데 남송 때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 강능에 들어와 살다가 함종(현평남 가서군)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함종이라 하였다고 한다.
★ 4개의 본관과 15,349명이 있다.(1985년)
여 (呂) 여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주나라 무왕이 강태공 망을 여나라에 봉하고 호를 여상이라고 하자 후손들이 성을 여씨라고 했다. 그의 후손 여불위의 아들 여영은 중국을 통일한 진시왕이며 진시왕의 아들 여부소와 여호해가 있었으며 여부소는 아들 여몽과 여자앵이 있었다. 여몽의 후손 여어매는 중국 래주 사람이었는데 당나라 희종 때 황소의 난을 피하여 877년(신라 헌강왕 7년) 신라에 들어 와서 전서를 지내고 벽진(성주)에 대대로 살았다. 그의 후손으로 여임청, 여광유 형제가 있었다. 여임청의 후손으로 여양유, 여자열, 여자장, 여자혁이 있었는데 여양유와 여자열은 본관을 성주로 하였고, 여광유의 계통과 여자장, 여자혁은 본관 을 함양으로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모두 합본하여 여씨 전국종친회를 구성하였다.
★ 성주 15,722명, 함양 25,103명이 있다.(1985년)
오 (吳) 오씨는 문헌에 164~210본이 있으나 16본을 제외한 나머지의 유래와 시조는 알 수가 없다. 오씨 성의 기원은 고대 중국 양자강 부근 오나라에 차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손자 류양이 천자로 부터 오씨성을 하사 받고 오나라의 왕이 되어 이때부터 오씨가 생겼다. 우리나라 모든 오씨의 도시조는 류양의 46세손이며 500년(신라 지증왕 1년)에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온 오첨(吳瞻)으로서 그는 함양에서 22년간 살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때 두아들 중에 둘째 아들 오응이 그대로 함양에 남아서 살았다고 한다. 그후 오응의 12대손 오광우가 다시 중국에 들어가 살았는데 후손 오연총 (吳延寵, 오첨의 18세손)이 고려 문종 30년에 다시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하여 살면서 우리나라 오씨의 중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오연총의 6 세손 오수권(吳守權)이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1216년(고려 고종 3년) 계단을 토평한 공으로 큰아들 오현보(吳賢輔)는 해주군에 봉해져서 해주 오씨의 시조가 되고, ( 나주, 울산, 락안, 고창, 함평, 평해로 분관) 둘째 아들 오현좌(吳賢佐)는 동복군에 봉해져서 동복 오씨의 시조가 되고,( 군위로 분관) 셋째 아들 오현필(吳賢弼)은 보성군에 봉해져서 보성 오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화순, 함양, 장흥, 흥양로 분관)
★ 69개의 본관과 147,127명이 있다.(1985년)
우 (禹) 시조 우현은 중국 하나라 우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우현이 고려 때 우리나라에 와서 단양에서 살면서 1014년(고려 현종 5년) 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정조호장을 지내고 문하시중평창사에 추증 되었다. 그의 10세손 우현보가 고려 공양왕 때 단양 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본관을 단양으로 하였다.
★ 152,298명이 있다.(1985년)
유 (兪) 유씨는 문헌에 97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8본을 제외 하 나머지 89본은 미고이다. 그러나 유씨는 모두 신라 때 아손을 지낸 유삼재를 비조로 한 동원에서 분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기계유씨가 대종으로 유씨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이조에서 상신 3명을 배출했는데 기계 유씨의 많은 인물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유옹부는 장군이며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 30개의 본관과 168,078명이 있다.(1985년)
유 (劉) 유씨는 원래 중국 제요의 후손이 유땅에 봉해지면서 유씨로 성을 받은 것이다. 그후 수천년을 지나 초한 시대에 이르러 유방(한고조)이 중원을 통일하고 한제국을 창건하면서 유씨가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나라 유씨의 도시조인 유전(劉筌, 시호는 문양)은 한고조의 41세손으로 도학과 문장이 뛰어났고 송나라에서 벼슬이 병부상서에 이르렀다. 그는 1082년(고려 문종 36년) 8학사의 일원으로 고려에 들어온 후 경북 영일군에 정착하여 살았으며 고려 공민왕 때에 이르러 특명으로 그를 위한 사우가 건립되고 고려 태조와 함께 7왕을 모신 숭의전에 배향되고 있고, 유전의 첫째 아들 유견규가 거타(거창)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거창으로 거창유씨라 하고 유전의 12세손인 유창이 조선개국공신 2등으로 옥천(강릉) 부원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강릉으로 강릉유씨라 하고 유전의 8세손 유국추가 백천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백천으로 백천 유씨라 한다. 유전의 묘소는 경북영천군 영천읍 녹전동에 있다.
★ 강릉 161,634명, 거창 32,790명, 백천 8,910명이 있다.(1985년)
유(庾) 300년경 한나라 말기에 중국의 유순유가 사신으로 우리나라에와서 산천이 수려함을 보고 우리나라에 정착하여 살면서 우리나라의 유씨가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의 후대는 고증 할 수가 없다. 그의 후예 검필(시호:충절)이 황해도 평주(평산의 고호)사람으로 고려 개국 초기에 정서개장군, 정남대장군, 도총대장군 등을 역임하면서 견훤의 후백제를 치고 통합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통합삼한 익찬공신으로 태사에 추중되고 식읍을 하사 받았으므로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평산이라 하여 세계를 계승하였다. 그 후 5세손 록숭이 문종때 은청 광록대부로 숙종 때 태자소보삼지정사, 정승 등을역임하고 무송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무송에 세거하면서 록숭을 1세조로 하고 평산유씨에서 분적 본관을 무송으로 하여 각각 세계를 계승 하였다. 그러나 근자에 1조의 혈통란 신념으로 합본하였고 본관을 무송으로 대종보를 편제하였다. 득시조 록숭의 묘소는 전북 고창군 성송면 삼대리 에 있다.
위 (魏) 시조 위경은 중국 당나라 관서 홍농 사람으로 신라 선덕여왕이 당나라 태종에게 도예지사를 청하자 보내준 8학사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신라에 들어와 벼슬이 아랑상서 시중에 이르렀으며 회주 (장흥)군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본관을 장흥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의 기록이 없어져서 신라 말에 대각관 시중을 지낸 위창주를 중시조로 하고 1 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 22,724명이 있다.(1985년)
안 (安) 본관은 문헌에 109본이 전해지나 주요 본관은 순흥(順興)·광주(廣州)·죽산(竹山)·탐진(耽津)·공산(公山)·충주(忠州)·동주(洞州)·안산(安山)·제천(提川)·안강(安康)·주천(酒泉) 등 10여 본이다. 그 중에서도 순흥·광주·죽산의 3본이 대본이며, 특히 순흥안씨는 전체 안씨 인구의 과반수를 상회한다.
광주안씨의 시조는 고려의 대장군 방걸(邦傑)로 그는 광주 지방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대장군에 오르며 광주군에 봉해져 광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성씨를 갖게 된 유래는 당시에 성씨가 없었으나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 한 후 지방 유력자들에게 성씨를 갖게 하는 정책에 따라 안(安)씨 성을 갖게 되었다.
순흥안씨의 시조는 자미(子美)로 그는 고려 신종 때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지냈으며 후에 신호위상호군(神號衛上護軍)에 추봉된다. 순흥안씨는 자미의 세 아들 영유(永儒:一派)·영린(永麟:二派)·영화(永和:三派)를 파조로 하는 3파로 대별된다.
죽산안씨는 구죽산과 신죽산의 두 파가 있는데, 구죽산의 시조는 당나라 출신 이원(李瑗)의 장남 안방준(安邦俊)이다. 이원은 신라 애장왕 때 건너와 정착했으며 그에게는 지춘(枝春)·엽춘(葉春)·화춘(花春)의 세 아들이 있었다. 이들은 경문왕 때 왜구를 무찌른 공으로 안씨 성을 하사 받았으며 지춘은 방준으로 개명하고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다. 신죽산의 시조는 고려의 시중(侍中) 원형(元衡)이다.
탐진안씨의 시조는 원린(元璘)으로 그의 아들 우(祐)가 홍건적의 침입을 막은 공으로 오성군(鰲城君 탐진의 옛이름)에 봉해진 뒤 탐진을 본관으로 하였다.
안씨는 조선에서 총 227명의 문과 급제자, 상신 2명, 문형(대제학) 1명, 청백리 5명과 많은 공신을 배출했는데, 벼슬의 열력에서는 순흥안씨가 으뜸간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6만 1009가구에 인구 34만 6126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18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13만 1850가구로 전국 가구구성비 1.3%, 순위는 274성 중 역시 제18위였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63만 7786명, 가구수 19만 7668가구, 286성 중 제17위로 전체인구의 1.4%를 차지한다.
양 (楊) 양씨는 문헌에 47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6본을 제외한 나머지 41본에 대하여는 미고이다. 양씨는 청주양씨와 중화양씨의 주종설이 양씨간의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이는 청주양씨의 세보에 의하면 시조 양기는 중국 원나라에서 도첨의 시중을 지내다가 1352년(공민왕 즉위)에 노국국대 장공주를 배종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세거 하면서 당당(청주의 고호)백에 봉해지고 그의 제 6자 양포가 중화양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중화양씨의 세보에 의하면 시조 양포는 고려 고종때 정승으로서 당악(중화의 고호)군에 봉 해 졌으며 양포의 장자동무가 김방경장군의 휘하에서 진도 삼별초난을 토평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상고하여 보면 상당백이 노국대장공주를 배종한 연수 1352년 보다 82년이나 앞선 1270년(원종 11)의 일인데 당악군이 상당백의 6자라 함은 어불성설이라 하고 오히려 상당백 양기가 당악군의 장자 동무의 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뭏든 양씨는 모두 동근동조라 생각하고 있는바 후일 해명할 날이 올 것으로 믿어지는 바이다.
★ 10개의 본관과 81,267명이 있다.(1985년)
양 (樑) 196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온 성씨로 당시에 16명이 있었다.
★ 1개의 본관과 700명이 있다.(1985년)
왕 (王) 왕씨는 문헌에 15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여기서는 고려조의 왕족인 개성 왕씨와 성은 같으나 근본 이 다른 제남와씨로 크게 나누어 다루었으며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미고이다. 개성왕씨는 고려 500년 동안 번영을 누려왔으나 이태조가 조선을 창업하면서 멸문지화를 당해 숱한 왜화와 비극을 남기고 몰락해 갔다. 이러한 환란중에 도생지책으로 변성하여 타성으로 행세하던 왕씨들이 다시 환적하는 데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거의가 환적하여 다시 왕씨 일문을 이루고 있다.
윤 (尹) 윤씨는 문헌상에 149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10본을 제외한 나머지 139본에 대하여는 미고이다. 윤씨는 이조의 대표적인 명벌로서 손꼽히고 있다. 그중에서도 파평윤씨는 고려 때부터의 세족으로서 이조 개국 이후에는 왕비와 훈신 학자를 배출하여 거의 이조 전기에 걸쳐 세력을 크게 떨쳤다. 파평윤씨 대종회측의 주장에 의하면 해평, 무송, 칠원, 해남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은 모두 파평윤씨에서 분적되었다고 하며 남원, 함안, 야성, 신령 등은 이미 파평으로 환보했다고 한다. 그리고 무송 윤씨는 윤양비를 시조로 하고 양주윤씨는 윤덕방, 영천윤 씨는 윤공생, 예천윤씨는 윤충, 칠원 윤씨는 신라 태종 무열왕 때 태자태사를 지낸 윤시영 해남 윤씨는 윤존부, 해평 윤씨는 고려 원종 때 수사공상서, 좌복사, 판공부사를 지낸 윤군정을 각각 시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 44개의 본관과 834,081명이 있다.(1985년)
원 (元) 주나라 성왕의 근친에 元喧이 있었는데 그의 본성은 희씨였으나 성왕이 원으로 사성하고 위나라 대부를 봉하니 이로써 중국에서의 원성이 비롯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진한에서 신라로 상계 입상한 원훈 원훤의 두 원성이 삼국사기에 도현 되었으나 원훤과 관련이 있는지는 고증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원훤은 거금 약 3000년전 사람이며 원훈 원훤은 약 2000년전 사람이므로 그들이 동래한 원훤의 후손 일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뒤로 당나라 태종 때에 8학사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파견되어 온 원경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가 우리나라 원씨의 도시조인 듯하다. 그런데 원씨계보 중에서 경을 시조로 하는 홍암 운곡계는 계대가 되어 있고 그 나머지는 계대가 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원씨는 관향이 원주 단본으로 그중 4파가 있는데 경을 시조로 하는 홍암 운곡계가 그파요 극유를 시조로 하는 원성백계가 그 2파이며 익겸을 시조로 하는 시중공계가 그 3파요 충갑을 시조로 하는 충숙공계가 그 4파이다.
★ 102,748명이 있다.(1985년)
엄 (嚴) 시조 엄임의(嚴林義)는 원래 중국의 당나라 사람으로 신시랑(영주 莘씨의 시조)과 함께 사신으로 신라 35대 경덕왕때 우리나라에 파락사라는 사신으로 들어와서 그대로 머물러 살면서 엄씨와는 서로 종씨라 부르며 혼인도 하지 않고 의좋게 살았었다고 한다. 엄임의가 고려 때에 호부 원외랑을 지내고 첫째 아들 엄태인이 군기감을 지내고 영월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엄임의의 묘소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동산에 있다.
★ 114,191명이 있다.(1985년)
염 (廉) 염씨의 시조는 중국 황제의 후손이다. 헌원씨 때 는 공손씨라 했다가 희수지방에 이주 하면서 희씨로 성을 바꾸었다. 희창의의 아들 전욱의 증손이 대염씨라고 했다가 다시 왕보씨로 성을 바꾸었다. 그의 후손이 중국 하동으로 이주 하면서 염씨로 성 을 바꾸었다. 그후 삼한공신으로 벼슬이 대사도(호조판서의 별칭)에 이르렀던 교명이 후당시(신라말기)에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 봉성(파주고호 )에 들어와 잉거하게 됨으로써 염씨의 동래 시조가 되었고, 그의 후손인 염제신(시호 충경)은 1304년(고려 충렬왕) 30)에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11살에 원나라에 들어가 고모 부 말길(관직평장사)의 집에서 10년간 공부를 하고 정동성중이 되었다가 어머니 병환으로 귀국한 후 고려 충목왕 때 수성익재공신으로 삼사우사도첨의평리, 찬성사를 역임하고 공민왕 때에 좌우 정승을 거쳐 도첨의 문하시중에 이르러 곡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30여년 동안 많은 공적을 남겨 공민왕이 그의 공적을 가상히 여겨 친히 유상을 그려주었는데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염씨의 본관은 처음에는 봉성이었으나 중시조 염제신이 곡성부원군에 봉해지자 곡성으로 한 후 지명이 바뀌자 단원, 파주로 바뀌었다. 염씨는 기록에는 70여개 본관이 있으나 모두 같은 혈족으로 생각하고 있다. 제신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강남면 대곡원해좌이며 나주의 금강서원 보성의 청계영당 자인의 구연사 재령의 청수사 옥천의 용강서원 단천의 송산사 보령의 수현사 함양의 반계영당 대덕의 호평영당 영월의 추원사 등에 제향 되었다. 이밖에 담양, 용담, 개성, 순창등 70여본이 나타나 있으나 모두 파주 염씨와 동근동원이며, 파주염씨 단본으로 알고 있다.
★ 51,143명이 있다.(1985년)
육 (陸) 시조 육보(陸普)는 신라 경순왕의 부마이다. 본래 중국 절강성 소흥부 사람으로, 당선공(唐宣公) 육지(陸贄)의 후손이다. 927년 당나라 명종이 신라 에 유교를 전파하기 위해 8학사를 파견하였을 때, 홍은설, 정간 등과 함께 우리나라에 왔다. 그중 육보가 문장과 공적이 뛰어나, 경순왕의 총애를 받아 부마가 되고 관성(옥천)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후의 기록이 없어서 고증할 수 없으므로 고려 충렬왕 때 주부를 지낸 육인단(陸仁端)을 중시조로 하고 1세로 하였다. 육인단의 증손 5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4파를 이루었다. 다섯째 육태귀(陸台貴) 는 공양왕 때 1품벼슬에 올랐으나 자손이 없는 것 으로 전한다.
★ 옥천 육씨 18,023명, 관성 육씨 460명이 있다. (1985년)
임 (任) 임씨는 문헌에 120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장흥, 풍천 2본을 제외한 나머지는 미고이다. 장흥임씨의 시조 임호는 원래 중국 소흥부 사람이다. 그는 일찌기 중국에서 이부상서를 지내다가 국난이 일어나 자정안(장흥의 별호) 현 천관산 아래 임지도에 망명 하여 그 곳에 세거하게 되었고 그의 손자 원후가 고려 인종 때 문하시중에 이르고 정안 부원군에 봉해 짐으로써 본관을 장흥으로 하였다고 한다. 풍천임씨는 중국소흥부 사람인 임온의 6세손 임주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왕으로 부터 관향을 하사받아 풍천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장흥 임씨는 풍천임씨와는 달리 고려조에서는 대대로 명신을 배출했는데 이조에 들어와서는 정계와 절연한 감이 있다.
★ 24개의 본관과 147,694명이 있다.(1985년)
임 (林) 임씨는 문헌에는 216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나주 평택을 제외한 나머지 본에 대하여는 미고이다. 나주 임씨는 고려 대장군 임비를 원조로 하고 있으며 그 후손 임탁이 해남현무로 있다가 이성계가 개국 하자 사직하고 회진으로 돌아가 세거하면서 본관을 회진으로 하였다가 그후 회진이 나주에 속해짐으로써 본관을 나주로 하였다. 평택 임씨는 임씨의 도시조 임팔급을 시조로 하고 있다. 임팔급은 당나라 문종 때 학림학사로서 동래하여 팽성(평택의 별호) 용주방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평택으로 하였고, 그 후 유구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조양, 선산, 은진, 호성, 장흥, 진주, 옥강, 익산, 울진, 예천, 부안, 순창 , 경주, 회양, 밀양, 안의, 임천, 임파, 전주, 보성, 안동, 임하, 등등으로 분적 되었으나 다같이 임팔급 의 후예라 하며 현재 환적을 서두르고 있다. ★ 90개의 본관과 672,755명이 있다.(1985년)
은(殷)
행주은씨의 시조이신 장양공(定襄公)의 이름은 은홍열(殷洪悅)이시다. 시호(諡號)는 정양이시며 공은 학덕을 겸비한 당(唐)나라 석학으로 신라(新羅) 문성왕(文聖王)의 요청에 따라 당 선종(宣宗)의 천거로 서기850년(唐선종5년) 동래한 八학사 殷(은)氏, 洪(홍)氏, 奇(기)씨, 吉(길)씨. 奉(봉)씨. 陸(육)씨. 房(방)씨, 魏(위)씨 중의 한분으로 학문과 예악을 가르치고 신라조에서 벼슬이 태자태사에 오르고 학식과 덕망이 일세를 풍미하였으므로 고려조에서도 그 위덕을 기려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화시랑 보문각대제학(壁上三韓三重大匡 文化侍郞 寶文閣大提學)으로 추봉되었다, 공이 말년에 행주에 전거하니 후손들이 행주를 본관으로 삼아 행주 은씨가 되였고 본관은 행주 은씨 단일본이다 역사상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조 문종때 문화시중(文化侍中)을 역임하고 학문이 뛰어나 세상에서 12공도라 칭하고 사숙(私塾)을 열어 많은 후진을 길러낸 8세손 휘 정(鼎)이 유명한 학자였으며, 충정왕조에서 보문각대제학을 지내신 16세손 휘 신윤(莘尹) 양열공(襄烈公)께서는 총명하시고 문학에 탁월한 학자 이였으나 충성심이 강하여 태종이 누차 불렀으나 불응하신 고려충신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두 분 모두 고려통일대전 공신각에 봉향 되셨다 조선조에서는 18세손 행주은씨의 중시조인 이조판서 정양공 휘 여림(汝霖)이 뛰어났다, 정양공은 예조참의를 역임한 휘 장손(長孫)의 아들로 1396년 (태조5년)문과에 급제하여 영천군수,우헌납, 진주목사.경주부윤 등을 거쳐 세종조 1420년(경자) 에 이조 판서에 오르셨으며 세 아드님을 두시어 제1자 휘 현(顯)은 통헌공파의 파조이시고 제2자 휘 보(輔)는 판관공파 파조이시고 제3자 휘 익(翊)은 진사공파의 파조가 되셨다, 그 외 현종과 숙종 때의 학자로 이름난 30세손 휘 정화(鼎和)는 최서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으신 일명 백계(柏溪)선생으로 전북 정읍시 칠보면에 용계서원(龍溪書院)을 세워 후학을 길러 오늘날에도 유림들이 시사를 봉행하고 있으며 백계선생 문집이 보전되어 있다 恩(은씨) 시조(始祖): 은원리(恩元理) 유래(由來): 은씨(恩氏)는 중국 원구(苑邱)에서 계출된 성씨(姓氏)이며, 청(淸)나라 덕종(德宗:제11대 왕, 재위기간:1875~1908)때 사관(事官)을 지낸 은원리(恩元理)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은씨(恩氏)는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때 평남 강서군 쌍룡면 기리(平南 江西郡 雙龍面 基里)에 1가구가 살고 있었다.
陰(죽산음씨) 본관(本貫): 죽산(竹山) 시조(始祖): 음준(陰俊)
유래(由來): 음씨(陰氏)는 본래 중국(中國) 시평(始平)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음씨(陰氏)의 본관(本貫)은 죽산(竹山)·괴산(傀山)·경주(慶州)·여주(驪州)·충주(忠州)·음성(陰城) 등을 비롯하여 24본(本)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죽산 음씨(竹山陰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죽산 음씨(竹山陰氏)의 시조(始祖) 음준(陰俊)은 원(元)나라 예부 시랑(禮部侍郞)으로 공민왕 비(恭愍王妃)인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종(陪從)하고 고려(高麗)에 들어와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으므로 이때부터 우리나라 음씨(陰氏)의 연원(淵源)을 이루었으며, 후손들이 죽산(竹山)에 세거(世居)하면서 관향(貫鄕)을 죽산(竹山)으로 삼게 되었다고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다. 應(응씨) 본관(本貫):
시조(始祖): 응첨(應詹)
유래(由來): 응씨(應氏)는 중국 여남(汝南)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아들이 제후에 봉해진 지명(地名)을 따서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 된다고 하며, 한(漢 : 후한)나라 환제(桓帝 : 제11대 왕, 재위기간 : 기원전 147 ∼ 167) 때 무릉 태수(武陵太守)를 지낸 응봉(應奉 : 字 世叔)의 후예인 응첨(應詹)이 남평 태수(南平太守)를 역임했다는 기록이 사기(史記)에 나타나있다. 우리 나라 응씨(應氏)는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신당리 (京畿道高陽郡漢芝面新堂里 : 현 서울특별시 신당동)에 1가구가 살고 있었다. 지 (池) 시조 지경(池鏡, 903~1003, 시호는 선의, 자는 자운, 호는 암곡)은 중국 송나라 중원 홍농 사람으로 960년(고려 광종 11년)에 귀화했다. 당시 태학사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여 벼슬이 금자 광록대부 태보, 평장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경의 6세손인 지종해(池宗海)가 충주에 살았으며 고려때 문하시랑평장사로 충주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충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또 본래는 충주지씨였다가 고려 태조에게 충주어씨로 성을 하사 받은 어중익(魚重翼)도 충주지씨 6세이다. '충주지씨대동보'는 시조 지경의 아들에 지해관(海貫, 찬성사), 지도관(道貫, 평장사) 형제가 있고, 지해관의 아들에 지윤(胤, 안렴사), 지영(瀛, 부원수) 형제가 있으며, 지영의 아들에 지득상(得尙, 평장사), 지응 상(應尙, 찬성사)이 있어 지득상의 손자가 지종해 (평장사)이고 지응상의 손자가 지중익, 즉 어중익(평장사)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조 지경의 묘는 평안도 중화 당악산 화산정에 있다.
★ 118,410명이 있다.(1985년)
조 (趙) 조씨는 문헌에 210본으로 나타나 있다. 조씨는 이조에 명성을 떨쳤으며 명문벌족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중에서도 풍양, 한양, 양주, 평양, 임천, 백천, 함안, 옥천, 횡성조씨 등이 대본이다. 조씨는 동성동본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동계혈종이 아닌 이본 일지라도 통혼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조씨의 210본 중 조맹(고려조 문하시중 평장사)을 시조로 하는 풍양조씨를 비롯하여 15성씨를 제외 한 나머지 195성씨에 대하여는 미고이다.
조 (曺) 시조 계용은 신라 진평왕의 여서이다. 그의 모친은 창녕현 고암촌에서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로 태어 났는데 그녀가 자라서 혼기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에 청용질을 얻어 백약이 무효하자 학사가 크게 염려하던중 어느 신승의 말에 따라 화왕산 용담에 가서 목욕기도를 마치고 돌아온 후 신기하게 병은 완쾌되고 태기가 있었다. 어느날 밤 꿈에 금관을 쓰고 옥대를 두른 한 남자가 나타나 웃으며 말하기를 이 아이의 아버지는 동해 용왕의 아들이니 이 아이를 잘 길러라 크면 공후가 될 것이며 자손도 번영할 것이다 라고 하며 떠났다. 그후 십삭이 지나서 진평왕 48년에 생남하니 용모가 준수하고 겨드랑이 밑에 『曺』자가 붉게 씌어져 있었다. 이것을 본 학사는 크게 이상히 여겨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자 왕도 신기하게 여기며 성은 조, 이름은 계용 자는 린경이라 특사하고 뒤에 부마를 삼음으로써 창성 부원군에 봉해지고 벼슬이 보국대장군상주국대도 독총지휘제군사 금자광록대부태자태사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그의 후손들은 계용을 시조로 하고 창녕은 그의 세거지이기 때문에 본관을 삼게 된 것이다. 시조의 묘소는 경북 안강읍 노당 이리에 있다.
★ 299,642명이 있다(1985년)
주 (朱) 신안주씨는 원래 중국 전욱씨의 후예인 조협을 주무왕이 주국(현산동성 제남부)에 봉하였던 바 그후 초국에 병합됨에 따라 변을 떼고 『 朱 』로 성을 삼았다. 시조의 유래를 살펴보면 전욱씨의 후예인 주희(주자)의 증손 잠(호 청계)이 동래하여 우리나라 신안주씨의 시조가 되었고 본관에 있어서는 시조가 동래한 후 후손들이 700년간에 걸쳐 각지에 사거하는 동안 그 세거지를 본관으로 삼아 릉주, 나주, 전주, 함흥 등 많은 본관을 써오다가 1902년(고종 39) 문의에 의해 의정부찬정 석을 대표로 상소를 하여 조칙을 받음으로 부터 잠의 후손들은 본관을 모두 신안으로 통합하게 되었다.
★ 142,590명이 있다.(1985년)
전 (全) 전씨는 문헌에 178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중 18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의 시조 및 유래는 전해오지 않는다. 모든 전씨의 도시조는 백제 개국공신 전섭이다. 그는 고구려 동명왕(주몽)의 세째 아들 온조(溫祚)가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할때 오간(烏干), 을음(乙音)등과 함께 온조를 도운 10 명의 공신(십제공신)중의 한사람으로 후에 환성군 (歡城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삼국통일의 전란속에 전섭의 후손에 관한 기록은 7세에 걸쳐 소멸되었다. 신라통일 이후 8세손 전선이 성덕왕 22년 당나라에 입국하여 중국의 문물을 국내에 소개한 인물로 후에 벼슬이 전법(典法)판서에 오르고 정선군(旌善 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전섭을 시조로 하고 전선을 득관중시조로하고 있다. 전씨문중은 정선 ,천안,성산 등 18본으로 분관되지만 모든 전씨는 전섭을 도시조로 하고 정선을 대종으로 하며 전국 전씨대동보를 편찬하여 정선파, 천안파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 66개의 본관과 430,055명이 있다.(1985년)
전 (田) 전씨는 문헌에 142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5본을 제외한 나머지는 미고이다. 남양전씨는 중국에서 한림학사를 지내다가 옥책오서로 해동에 유배되어 고려조에서 남양군에 봉해진 전충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담양전씨는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고 좌복사 참지정사에 이르러 담양군에 봉해진 전득시를 시조로 하고 있다. 연안 하음전씨는 담양전씨에서 분적되었고 영광전씨는 고려 개국공신 전종희를 시조로 하고 있다. 남양전씨는 전흥, 전림, 전우치가 유명했고, 담양전씨에서는 전록생, 전우, 전유추, 전귀생, 전조생 등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 39개의 본관과 146,662명이 있다.(1985년)
장 (張) 우리나라 각관 장씨의 기원은 중국으로 부터 도래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고려 왕건태조 창업초 개국공신인 장정필 (태사공)은 신라말에 덕수장씨 시조 선무장군 장순 용은 고려 고종연대에 원나라 제국공주 출래시 시종관으로 절강 장씨 시조 장해빈은 조선 선조 조정유난 당시에 각기 중국으로 부터 입국하여 이 3인의 자손이 현재 전국에 산거하고 있다 한다. 이외에도 신라 및 백제 태봉 발해시대에 장보고, 장웅, 장변, 장건영, 장빈, 장분, 장희암, 장무, 장일, 장문휴 같은 명장 거유가 삼국유사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들의 출생지 및 관향 계통과 유래는 알 수 없다. 또한 장견은 중국관서 흥농인으로 대광공주 출래시 시종신인 8학사중의 한 사람으로 고려초에 입국하여 광종무오(고려개국 40)에 김자 광록대부시중상서를 역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역시 계보를 알 수 없고 고려사에 의하면 신라말에 장유는 피난차 중국 오나라에 건너가 화어를 습득하고 귀국하여 고려 광종 때 광평시랑을 지냈고 아들 연우는 현종 때 호부상서 좌복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흥성과 흥덕장 씨는 장유를 시조로 하였고, 봉성, 옥강, 옥천, 결성, 단양, 목천, 려흥, 순천등 제장씨는 장유가 장경의 아들이며 장정필의 10세손이라고 하엿으나 장유가 신라에서 생장했는지 중국에서 귀화했는지 확실치 않다. 어쨌든 우리 나라 장씨는 덕수와 절강장씨를 2제외한 인동(옥산) 안동, 순천, 구례, 봉성, 단양, 목천, 울진, 결성, 흥성, 흥덕, 하산, 려흥, 부안등 제장씨는 장정필의 혈손으로서 그를 도시조로 하고 있으나 각 관계보간에 연대의 차이가 있으니 박고정정함이 좋을 것으로 안다. 도시조 장정필은 본래 중국 절강성 소흥부용흥 사람이다. 888년에 출생하여 5세 때 난을 피하여 아버지 원을 따라 동래하여 강원도 강릉에서 경북 인동 노전으로 옮겨 살았다. 18세 때 사신을 따라 입당 24세 때 대과에 장원 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입산하여 수천제자에게 성현의 도를 가르치니 덕비강유하고 행의효우와 문장 학행이 중화에서 뛰어나 시인이 당세부자라고 하였다. 천자가 그의 현준함을 듣고 소명근강 하였으므로 나아가 이부상서를 지내면서 병화로 학교가 황폐되자 성균관을 창건하여 조의로 의관문물 혼상제례를 그의 제도로 준행하니 당시의 이주이여라 하였다. 소인각로 김남석의 무고로 기관 귀국하여 인동 노전에서 제가 수백인에게 예의를 강학하고 조두지례를 제정하니 세인이 석서대현이요 금동(고려)부자라 약전약후동방일인이요 동방천재지종사라 하였다. 930년(고려 태조13) 김선평 권행과 함께 향병을 모아 안동에서 후백제 견훤을 토벌하여 병산대첩의 공을 세웠고 935년에 신라를 공략하여 삼한통합에 공이 컸으므로 삼한 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 태사령운사, 고창군에 옥산부원군이 더해지고 록 권을 하사받았다. 후세 사람들이 그 공덕을 추모하여 인동에 노전서원을 세워 제향하고, 안동에 삼태사공 신묘를 세워 삼태사를 숭배하고 매년 춘추에 향사한다.
★ 63개의 본관과 810,231명이 있다.(1985년)
정 (鄭) 정씨는 문헌에 210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30본을 제외한 나머지는 미고이다. 우리나라 정씨의 원조는 삼국유사에 저하는 신라 6촌중 자산 진지촌의 촌장인 지백호이다. 그리고 정씨는 서산 랑야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백호의 후손이며 경주정씨가 큰 집이라는 데는 반론이 없는 것 같다. 서산정씨는 중국 금화부 포강현절강인 정옹중의 증손 신보가 우리나라에 망명하여 서산에 정착세거 하였는데 그의 아들인 인경을 시조로 하고 있다. 정씨는 1930년 통계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106,082세대로서 전국 성씨 중 5위를 차지하는 대성이다.
★ 122개의 본관과 1,780,648명이 있다.(1985년)
정 (丁) 시조 덕성(德盛)은 원래 당나라 사람으로 당나라 문종때 대승상을 지냈고 무종 때 대양군에 봉해졌다. 당나라 선종 때 군국사로 직소하다가 853년(신라 문성왕 15)에 압해도(현 무안군 압해면)에 적거되면서 부터 우리나라 정씨의 시조가 되었다. 압해는 곧 우리나라 정씨의 발상지가 되며 다음 각 파는 모두 대양군 덕성의 후손으로 정씨대동동안보에는 본관을 압해로 통일 되어 있다.
★ 55,893명이 있다.(1985년)
진 (秦) 진씨는 문헌에 47본으로 나타나 있다. 진씨는 공자의 제자로서 문묘에 배향된 상을 시조로 하고 진욱이 고려조에 박사로서 진주군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진주로한 진주진씨와 신라의 원병으로 백제 평정에 참가했다가 귀화한 필명을 시조로 하는 풍기 진씨를 제외한 45본에 대하여는 미고이다.
★ 14개의 본관과 16,435명이 있다.(1985년)
천 (千)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천씨가 97개의 본관으로 나타나 있으며, 현재도 30개의 본관이 있으나 모두 영양 천씨의 세거지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조 천암(千巖)은 명나라초에 조신을 지냈고 그 후손이 영양에서 살았다고 하며 원래 중국 성씨이다. 중시조 천만리(千萬里)(시호는 충장)는 명나라 말기에 문과에 장원하고 태청전수위사 겸 총독 오군수를 역임하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때 영량사 겸 총독장으로 아들 천상, 천희 형제와 함께 우리 나라에와서 군량수송을 담당 하였고 평양, 곽산, 동래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후 정유재란때에도 직산, 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우고 우리나라에 귀화 하자 조정에서 가상히 여겨 자헌대부에 봉하고 화산군에 봉했고, 숙종때 그의 전공을 길이 빛내기 위해 대보단을 설단하여 종향케 했고 전국 10여개 서원에 향사되었다. 천만리의 묘소는 전북 남원군 금지면 방촌리에 있다. 경남 고성군 동해면 강좌리 호암서원에서 음력 8 월 1일에 향사한다.
★ 83,990명이 있다.(1985년)
최 (崔) 우리나라 최씨의 기원은 박혁거세 탄생 전설에 나오는 신라 6부 촌장중의 한사람인 돌산 고허촌(突 山高墟村)의 소벌 도리(蘇伐都利)로 하늘에서 형산(兄山)으로 내려 왔으며, 32년(신라 유리왕 9) 최씨로 성을 하사 받은 것으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소벌도리가 정(鄭)씨의 조상으로 되어있으며 진주 소(蘇)씨도 소벌도리를 시조 로하고 있다. 그러나 최씨의 실질적인 시조는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이며 소벌도리의 24세손인 최치원(崔致遠)이며 최치원의 윗대에서 개성, 삭녕, 동주(철원), 전주(최군옥) 등의 본관으로 나누어지고 최치원을 1세 조로 하는 경주최씨에서 최치원의 첫째 아들 최승로(崔承老)의 후 손에서 함양, 청주, 충주, 영흥, 용강, 수원, 부안, 강릉, 강화, 화순, 통천, 양천, 원주 등으로 분관이 되었고 지손에서 해주, 진주, 탐진, 전주(최균) 등으로 분관했다. 최씨는 경주 최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해주 최씨, 우봉 최씨 등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전주 최씨와, 동주 최씨 도 상당한 세력을 펼쳤으나 최씨는 조선시대보다 신라, 고려시대에 세력을 떨쳤다. 그밖에 김씨에서 최씨로 성을 하사 받은 수성 최씨와 중국의 귀화 성씨인 충주최씨가 있다. 최씨는 문헌에 326본으로 나와 있으나 현재는 125개의 본만 전한다.
★ 최씨는 김씨, 이씨, 박씨 다음으로 인구가 많으며 191만 3,322명(1985년)이 있다.
탁 (卓) 시조 탁지엽(시호는 문성)은 고려 선종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한림학사를 거쳐 태사에 이르고 광산 (광주)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광산으로 하였다. 묘소는 전남 광주시 지산동에 있다.
★ 광산 15,196명, 광주 1,057이 있다.(1985년)
풍 (馮) 시조 풍삼사는 중국 산동성 임구현 사람으로 선조는 주나라 문공의 열다섯째 아들 필교가 진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위나라 후가되고 풍성을 식읍으로 받아서 성을 풍이라고 했다. 풍삼사는 명나라 태학으로 1645년(조선 인조 23년) 봉림대군(후에 효종)과 같이 심양에서 명나라 광복을 도모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9의사와 같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하여 살면서 고향인 임구를 본관으로 하였다. 묘소는 양주군 구리면 양노리에 있다.
★ 361명이 있다.(1985년)
편 (片) 시조 편갈송(片碣頌)은 중국 명나라 신종 때 사람 으로 1592년(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군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서 경주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그의 선조는 절강사람으로 고조 할아버지 편지(片址)는 명나라에서 태자태사를 역임 했으며 원래는 당나라 황실의 이(李)씨의 종친이었으나 임금에 대한 충정을 인정받아 일편단심의 편자를 성으로 하사 받았으며 증조 할아버지 편일은 절강백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고향인 절강을 본관으로 하였다.
★ 10,901명이 있다.(1985년)
표 (表) 시조 표대박은 오계시대에 후주의 이부상서로 있다가 960년(고려 광종 11년) 장, 방, 위, 변, 윤, 진, 감, 황보 등 8성씨를 이끌고 황해를 건너 우리 나라에 들어와 귀화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의 기록은 없어서 알 수가 없고 그의 후손 표인여가 고려 충숙왕 때 합문기후를 지내고 좌리공신으로 신창백에 봉해져서 표인여를 중시조로 하고 본관을 신창으 로 하였다.
★ 23,606명이 있다.(1985년)
하 (河) 진주 하씨의 시조는 고려 현종때의 향사공신이며 문종때에 상서공부시랑동 평장사에 추증된 하공진으로 1010년(현종 1)계단의 성종이 왕을 폐위한 강조를 문책한다는 핑계로 고려를 침범하자 강화교섭사로 적진에 들어갔다가 인질로 잡히게 되어 성종의 친국을 받을때 여러가지로 회유를 받았으나 완강히 거절하고 화를 입었다. 그런데 하년(문효공)이 1451년(문종1) 처음으로 족보를 내면서 그 서문에 세계가 전함이 없고 고려사에 홀로 하시랑 공진이있어 들기에 기쁘나 동원이면서 분파가 확실치 않다고 한것과 같이 진주하씨의 세계는 계통을 대지 못하는 세파로 갈려져 있다. 시랑공파 - 하공진을 시조로 함사직공파 고려 정종때 사직을 지낸 하진을 시조로 함단계공파 고려때 주부를 지낸 하성을 시조로 함. (단계는 그의 8세손으로 사육신인 하위지의 호) 본관을 진주로한 연유는 본래 시조 하공진이 진주태생이며 그의 11세손 하윤(문충공)이 진산부원군에 추봉되었고 하진의 9세손 하접(원정공)이 진천부원군 10세손 하윤원이 진산 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진다. 진산이나 진원은 모두 진주의 별호이다.
★ 148,208명이 있다.(1985년)
한 (韓) 한씨는 문헌에 131본으로 나타나 있다. 한씨는 우 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이른바 삼한 갑족이라 하겠다. 한씨는 중국 송나라 팔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려 희종2년에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곡산 부원군에 봉해진 한예를 시조로하는 곡산 한씨와 기자의 후예로 알려진 청주 한씨로 구분할 수있다. 청주한씨는 종전에는 여러본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근세 이르러서는 거의 환적되었고 나머지 몇본에 대하여는 중앙종친회에서 전체 연원을 찾아 단일화 할 것을 추진하고 있다. 131본중 이 두 성 씨를 제외한 나머지 129본에 대하여는 미고이다.
★ 40개의 본관과 628,388명이 있다.(1985년)
허 (許) 허씨는 48년 가락국 수로왕비인 보주태후(普州太 后) 허황옥이 아유타국(인도의 한 나라) 군주의 공주로서 16세때 배에다 석탑을 싣고 지금의 경남 창원군 능동면 용원리에 있는 부인당으로 들어와 정박을 했는데 김수로왕이 왕비로 맞이하였다. 수로왕은 10남 2녀가 있었는데 왕비가 자신이 죽은 후 에 성씨를 전하지 못함을 슬퍼하자 두 아들이 모성을 따르게 하여 우리나라 허씨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하여 황태후의 35세손 허염의 후손은 김해 33세손 허강안의 후손은 하양 30세손 허선문의 후손은 양천 30세손 허사문의 후손은 태인허씨로 각각 분관하였으나 동원이고 나머지 55본은 미고이다. 허씨는 김해 김씨, 인천 이씨함께 같은 혈족이다하여 종친회명을 '가락중앙종친회'로 만들어 이에 속해있다.
★ 30개의 본관 264,228명이 있다.
함 (咸) 시조 함규(시호는 양후)의 고려의 통합삼한익찬 개국공신으로 광평시랑 평장사를 지내고 몽고군 침입시 대사마대장군을 지냈다. 그의 선조는 당나라 에서 병부상서 평장사를 역임하고 우리나라에 귀화한 함혁이라고 한다. 함혁은 익화(양근)자사 재직시 선정을 베풀었고 그가 쌓은 석성의 둘레가 2만 9천 5십 8자나 되었다고 한다. 함혁의 후손 함신이 호부상서를 지내고 785년(신라 원성왕 1년) 김주원 (강릉 김씨 시조)을 따라 강릉에 가서 살게 됨으로 본관을 강릉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후의 기록은 없으므로 함규를 시조로 하고 있다.
★ 강릉 54,973명, 양근 6,437명이 있다.(1985년)
황 (黃) 황씨는 문헌에 163본관이 전하나 현재는 55개의 본관이 있다. 우리나라 황씨의 시초는 중국 후한 때 유신(儒臣) 이었다는 황락(黃洛)으로 전해진다. 그는 서기 28년(신라 유리왕 5년)에 장군 구대림(丘大林, 평해 구(丘)씨의 시조)과 함께 교지국(交趾 國, 옛 월남의 한지방)에 사신으로 가던중 폭랑을 만나 평해에 도착하여 청착하여 살면서 황장군이라고 하면서 우리나라 황씨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평해(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越松) 지역에는 황장군의 묘가 전해지며, 구(丘)장군이 살았다는 곳을 구미진(丘尾津)이라 부른다. 일설에는 황락의 후손에 갑고(甲古), 을고(乙古), 병고(丙 古) 3형제가 있었는데 각각 기성(현 평해)군, 장수군, 창원백에 봉해져서 각각 본관을 평해, 장수, 창원 황씨로 하였다고 한다. 현재 전하는 제안, 항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황씨는 이 3본에서 분관 되었다고 한다.
※ 황락과 구대림이 우리나라에 온것은 서기 28년 (중국 후한)에 월남으로 가는 도중이라고 하나, 평해 구씨의 기록은 663년(중국 당나라)에 일본으로 가는 도중이라고 한다.
★ 55개의 본관과 564,256명이 있다.(1985년)
독고(獨孤) 시조 독고신(자는 성의)의 선조는 고려중엽 중국 하남에서 8학사의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던 독고공순이며 그의 손자 독고 향이 고려 충숙왕때 원나라에 가서 공주를 모셔온 공으로 남원군에 봉해졌으나 그후의 기록은 없다. 독고신은 이름난 학자로 남원군에 봉해져서 그를 1세 조상으로 하고 본관을 남원으로 하였다.
☆ 674명이 있다.(1985년)
제갈(諸葛)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갈공명의 아버지 제갈규가 시조이며 그의 5대손 제갈충이 13세때 신라 미추왕때 귀화하여 지리산 아래에서 살았다 (제갈규의 20세손 제갈공순이 신라 덕흥왕때 귀화하여 살았다는 설도 있다). 그후 고려 고종(일설은 현종)이 33세손인 제갈홍(諸葛泓), 제갈형(諸葛瀅) 두형제를 불러 형은 제씨(칠원)로 남양군에 봉하고, 아우는 갈씨 (남양)로 량아군에 봉하여 성을 나누어 사용하였다
그후 구한말에 일부는 남양 제갈씨로 환원하였다고도 한다.
선우(鮮于) 우리나라 선우씨의 성원은 기자가 기자조선을 세우고 그의 장자 송이 2대 장혜왕으로 즉위 하면서 아우 중을 우산국에 봉하여 나라를 세우게 하였으므로 조선과 우산국에 있는 자손들이 조선의<선>과 우산의 <우> 2자를 취하여 다같이 선우라고 성을 삼았고 본관을 태원이라고 함으로써 비롯 되었다. 그 뒤에 41대왕 애왕(준)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천하여 금산군(현익산)에 마한을 세웠는데 10대계왕에 이르러 백제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그때 원왕에게 아들 3형제가 잇었는제 그중 량이 용강 오석산으로 들어가 황용국을 세우고 왕으로 즉위하여 선우씨의 세계를 이어왔고, 하나는 청주 한씨 하나는 행주기씨가 되었다. 량의 10세손 병에 이르러 나라를 고구려에 빼앗기고 서민으로 태원 선우씨의 세계를 이어 왔으나 고증과 문헌이 없어 소목 계통을 밝히지 못하고 원손으로 고려 문종 때 중서주서를 지낸 정을 1세조로 하여 계세하고 있다.
☆ 총 1개의 본관과 3,032명이 있다.(1985년)
남궁(南宮) 남궁씨는 원래 중국 주나라 문왕 때 남궁자의 후예 로서 고조선 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았다. 그후 991년(고려 성종 10년)에 남궁원청이 대장군으로서 여진족을 백두산 이북까지 몰아낸 공으로 감물아(함열의 옛이름)백에 봉해짐으로써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함열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청 이후의 세계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의 후손인 남궁득회를 1세조로 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충남 보령군 청라면에 있다.
동방(東方) 시조 동방숙은 1792년(조선 선조16년) 문과에 급제하고 전적을 지냈으며, 원래 동방씨는 중국 고대의 복의씨의 후예라고 한다. 1930년 국세조사당시 50여 가구가 있었으나 대부분 북한지역에 살고 있었다.
☆ 99명이 있다.(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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