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강 정철의 생애와 문학 세계
김덕우
Ⅰ. 서론
송강(宋江) 정철(鄭撤)은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다양한 정치활동을 통하여 그의 이름을 드높이는 데 그치지 않고, 당대의 국문학과 한문학에 심취하여 인구에 회자되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는 국문시가로서 사설시조인 <장진주사>를 포함한 시조 88수, 가사 4편 및 760여편의 한시가 전해지는데, 그의 문학 작품은 우리말이 서전적인 표현이나 사실적 표현에 있어서 얼마나 적합한 언어인가를 보여주는 국문학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다.1)
본고에서는 송강문학이 갖는 국문학적 가치와 그의 탁월한 문학 세계를 탐구하는데 있어, 송강 문학 형성의 배경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송강문학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문학이 어떤 시대적 배경과 자연적 배경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논술하려 한다. 그리하여 H. Gardner가 “작품이 생애의 총화(總和) 속에 놓일 때 의미 있다.”2)고 말한 것과 같이, 송강문학을 송강 생애의 총화의 산물로서 이해해 보고자 한다. 그것이 작품의 현장을 찾아가는 문학기행에 뒷받침이 되는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Ⅱ. 송강문학의 시대적 배경
정철의 자(字)는 계함(季涵)이며, 호(號)는 송강(松江)이다. 부친 유침(惟침)과 모친 죽산(竹山) 안씨(安氏) 사이에서 4남3녀 중 넷째 아들로 중종31년(1536)에 서울의 장의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10세 되던 해 을사사화3)가 일어나자, 정순붕, 허자 등이 매형인 계림군 유(瑠)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서 죽이니 화가 정씨일가에게도 미쳐 큰형인 정랑공 자(玆)는 체포되어 매를 맞고 귀양을 가는 도중에 죽었으며, 부친 판관공(判官公) 역시 구금되었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관북 정평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연일(延日)로 귀양지를 옮겼다. 이때까지 송강은 생활의 안정을 얻지 못하고 학문을 하지도 못하였다.
부친은 그로부터 5년후(명종6년)에 왕자 탄생의 은사(恩赦)로 석방되어 선친의 산소가 있는 전남 창평 당지산하에 거처하게 되었는데 송강도 부친을 따라 27세(명종17) 문과에 합격할 때까지 여기서 지냈다. 송강은 이 때에 송강반(松江畔)의 기암누정(奇巖樓亭), 성산번반(星山번畔)의 죽총(竹叢), 명봉산상(鳴鳳山上)의 군학(群鶴)들과 벗 삼으면서 작가적 소질을 키웠고, 또 이 무렵부터 당대의 유명한 문장가와 유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우고 교유하였다.
문과 별시(別試)에 장원하여 파란만장한 관로(管路)에 오르며, 그 후 서인(西人) 영수(領袖)로 정쟁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觀察使)가 되었다.4) 그 뒤 예조 참판, 형조,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가 동인(東人)의 논척(論斥)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은거 생활을 하면서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가사(歌辭)와 단가(短歌)를 지었다.5)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사림(士林)이라고 불리우는 정치세력이 등장하여 중앙의 훈구파 세력과 정치적 갈등을 일으켜 몇 차례의 사화(士禍)를 초래했다. 사화로 사림은 큰 타격을 입었으나 그 세력은 점점 커져서 사림 정권이 성립되었다. 사림이 정치적으로 승리하자 사림 사이에 분열 대립이 생겨났으니, 이것이 당쟁의 시작이었다. 사회적으로 사림이 득세하여 향교(鄕校)를 중심으로 한 관학(官學) 교육이 쇠퇴하고, 사림들이 설립한 서원이 번창하기 시작하였다.6) 문화적으로는 사회 및 국제적으로 평화적인 분위기가 지속되면서, 철학적 사색이 깊이 침잠(沈潛)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이 시대의 철학적 조류는 경험적 세계를 중시하는 주기파(主氣派)와 원리적 문제를 중시하는 주리파(主理派)로 나뉘었는데, 이러한 학문적 조류는 당쟁을 전개하는 이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7)
한편 이 시대의 문학은 경학(經學)을 치중하고 사장(詞章)을 배격하였기 때문에 저조할 수밖에 없었는데, 불우한 일부 지식층이나, 중인․부녀자에 의하여 뛰어난 문학 작품이 창작되었다. 형식으로는 시조(時調)․가사(歌辭)․패설(稗說)․소설(小說) 등 다양하였고, 작품의 주제도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과 자연 속에 파묻힌 은일(隱逸)적인 생활의 즐거움 그리고 사림 유학자의 위선(僞善)을 풍자한 것 등 다양하였다. 송강의 생존시대에 뛰어난 작가로는 황진이․허난설헌․이옥봉․등 여류작가와 송순․조식․백광홍․최경창․임제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문학 장르인 가사의 경우, 사화(士禍)로 인하여 정치에서 밀려난 양반들이 허탄(虛誕)한 심정을 자연에 기탁하여 표현하는 문학 형태로 자리를 잡아, 사림파 문학의 대표적인 장르로 성장해 갔다.8) 또한 기대했던 태평성대의 환상이 쉽게 깨어지고 권력투쟁이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자리잡은 것이 시조였다. 시조를 통하여 양반들은 자연을 들어 정차에 반격하는 경향도 나타내었고, 정치에다 도학(道學)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강호가도(江湖歌道)표방하는 새로운 방향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시조는 붕당(朋黨) 및 서원(書院)에서 서로 교류하며 면면히 이어져 가단(歌壇)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형성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영남가단과 호남가단이다.9)
Ⅲ. 송강문학의 지리적 배경
자연 환경은 지․간접으로 작가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한 작품의 사상성이나 정조(情調) 및 이를 표출하는 형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영향을 끼친다. 우리 문학에 있어서 송강의 시대의 경우를 보더라고 영남가단과 호남가단이라는 두 대조를 보이는 것도 이와 같은 지리적 자연 환경의 요인이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송강문학의 자연적 배경은 크게 그의 정치 무대였던 한양(漢陽), <훈민가><관동별곡>의 창작무대인 강원도(江原道) 지방, 부상(父喪)․모상(母喪)을 당하여 묘막(墓幕) 생활을 한 경기도(京畿道) 고양(高陽) 지방 및 송강의 대부분의 문학 작품의 산실인 전남(全南) 담양(潭陽)의 창평(昌平)지방을 거론할 수 있다.
창평은 호남가단의 본류인 성산가단(星山歌壇)의 중신지로서, 송강의 서정문학을 형성하는데 적절한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서민적 멋의 총아인 판소리, 만고(萬古)의 비색 청자(靑瓷)의 예술미 탄생한 호남은 대체로 평야가 비옥하고 기후도 온난하고 강우량이 많아 농산물이 풍부하였다.10) 이러한 자연환경 속에서 청년 시절을 보낸 송강은 자연히 서정적 기조의 노래를 부를 수 밖에 없었고, 다정 다감하고 섬세한 정감을 곁들여, 서민적인 풍취까지 물씬 풍기는 문학을 창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성산(星山)은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속칭 지실)에 있는 산으로 창평읍에서 남동쪽으로 20리 안팎에 위치한 장원봉(壯元峰)11) 남록(南麓)을 일컫는 것이다. 창평현의 진산인 장원봉의 남쪽 언덕이 성산 또는 별뫼이고 봉명산(鳳鳴山)이라고도 한다. 성산의 봉명산 언덕의 대나무 숲 사이로 노송의 봉우리가 보이고 그 사이에 있는 정자가 식영정(息影亭)12)이다. 이 산록(山麓)에는 식영정을 비롯해서 서하당(棲霞堂), 환벽당(環碧堂)13), 소쇄원(瀟灑園)14) 등의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모두 풍광이 수려하기로 이름났으며, 송강은 이 정각을 출입하면서 여러 시객들과 시작을 즐겼다.
송강은 16세 때, 창평에 내려와 우거하게 된 이래, 27세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할 때까지 10여 년 간 성산 기슭에 있는 식영정과 환벽당에서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를 비롯하여 당시 도학(道學)의 사종(司宗)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에게서 학문을 닦고 시를 익히며, 시문으로는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과 시가문학의 선구자인 면앙정(俛仰亭) 손순(宋純)에게 사사하는 천운을 얻었다. 실로 창평은 송강 문학의 요람이며, 동서(東西) 붕당(朋黨)의 와중에서 부침하며 은거할 때마다 송강의 안식처였다. 그의 가사 성산별곡(星山別曲)은 이러한 성산의 4계절을 노래한 것이다.
창계(滄溪) 흰 믈결이 정자 알패 둘러시니 천손운금(天孫雲錦-은하수)을 뉘라셔 버혀 내여 낫난닷 펴티난닷 헌사토 헌사할샤. 산중의 책력(冊曆)업서 사시(四時)랄 모라더니 눈아래 헤틴 경(景)이 의의이 졀로 나니 듯거니 보거니 일마다 선간(仙間)이라.
송강은 청년시절을 이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 이 곳의 4계절의 변화를 훤히 알고 있었다. 송강이 조정에서 물러나 성산에 돌아와 은거하며, 성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면서 4계절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울밋 양지편의 외씨랄 삐허 두고 매거니 도도거니 빗김의 달화내니 청문(중국 한나라 장안성의 문. 방초(芳草)향기로운 풀) 고사랄 이제도 잇다 할다. 망혜(芒鞋)랄 배야신고 죽장(竹杖)을 흣더디니 도화교(桃花嬌) 시내 길히 방초주(芳草洲)예 니여셰라. 닷봇근 명경중(明鏡中) 절로 그린 석병풍(石屛風) 그림재 벗을 삼고 새와로 함 가니 도원(桃源)은 여긔로다 무릉(武陵)은 어디메오. <봄>
하라밤 비 기운의 홍백연(紅白蓮)이 섯거 피니 바람 업시셔 만산(萬山)이 행긔로다. 염계(송나라 주돈이의 호)랄 마조 보와 태극을 못잡난닷 태을진(선인)이 옥자(玉字)랄 헤혓난닷. 노자암(식영정에 있는 바위 이름)건너보며 자미탄(별 이름.여기서는 여울 이름) 겨태두고 장송(長松)을 차일사마 석경(石逕-돌길)의 안자하니 인간 유월(六月)이 여긔난 삼추(三秋)로다. <여름>
오동 서리달이 서경(四更)의 도다오니 천암만학(千巖萬壑)이 낫인달 그러할가. 호주(湖洲)수정궁(오나라 왕 합려가 지은 부용원의 궁전)을 뉘라셔 옴겨온고 은하(銀河)랄 건너 뛰여 광한전(달 속에 있다는 궁전)의 올랏난닷. 짝마잔 늘근솔란 조대(釣臺)예 셰져두고 그아래 배랄띄워 갈대로 더져두니 홍료화백빈주(붉은 여뀌꽃이 피고,흰 마름꽃이 떠 있는 물가)어나 사이 디나관대 환벽당(環碧堂)용의 소(연못)히 뱃머리예 다핫셰라. <가을>
공산(空山)의 싸힌 닙흘 삭풍(朔風)이 거두부려 떼구름 거나리고 눈조차 모라 오니 천공(天公)이 호새로와 옥으로 곳찰 지어 만수천림(萬樹千林)을 꾸며곰 낼셰이고. 압 여흘 가리 어려 독목교(獨木橋)빗겻난대 막대 멘 늘근 볕이 어내 뎔로 갓닷말고. 산옹의 이 부귀랄 남다려 헌사마오. 경요굴(아름다운 옥으로 만든 굴.여기서는 성산의 아름다움) 은세계(銀世界)랄 차잘이 이실셰라.<겨울>
<성산별곡>의 소재가 된 성산, 서하당, 식영정, 서석봉, 창계, 환벽당, 독목교, 용소, 노자암 등과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경관과 분위기 그것은 바로 송강의 심미 의식(審美意識)을 키워준 모태가 된 것이다. 또한 송강의 아호(雅號)가 원강리(院江里) 죽록(竹綠) 평야에 흐르는 하천인 죽록천의 별칭인 송강(松江)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보아도 송강의 창평에 대한 애착은 대단했음이 분명하다.
송강은 50세 때에, 양사(兩司)의 논척(論斥)을 받고 창평에 물러나 54세까지 가장 긴 심고를 겪는 4년간을 노냈는데, 이 때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을 비롯한 걸작들을 창작하였다. 즉 성산은 개인적으로는 꿈 많은 청소년 시절을 보낸 곳이며, 정치 생활에서 실의에 빠졌을 때 언제나 찾던유일한 안식처였으므로, 송강의 성산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음이 분명하다.
한편 송강에게 경가도 고양 신원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상심한 날들을 보냈던 곳이다. 효심이 지그했던 송강이 양친의 상을 거듭 당하면서 이곳에서 2회에 걸쳐 4년 여 동안 묘막(墓幕) 생활을 하였고,, 장남도 이곳에 장사지내야만 했던 곳이다.
새원 원쥐되여 시비(柴扉)랄 고텨닷고
유수청산을 벗사마 더뎠노라
아해야 벽제(碧蹄)예 손이라커든 날나가다 하고려.
세상의 모든 명리를 버리고 유수와 청산을 벗삼고자 하는 심정을 노래한 작품이지만, 종장에서 나타나듯이 시류에 대한 배척과 자신의 고립의식이 잠재해 있어 완전한 자연합일은 보이지 않는다. 생과 사의 오락가락한 황망함 속에서, 번거로운 인사(人事)를 아예 잊고, 체념과 고독에 싸인 모습을 여실히 나타내 주고 있다. 숱한 당쟁의 다툼질 속에서 인생이 죽음으로 돌아가면 모든 수고가 헛되며 속절없다는 것을 고양 신원의 자연과 함께 느꼈을 것이다.
<훈민가>와 <관동별곡>의 배경이 되는 강원도 지방은 송강 문학의 지리적 배경의 주요 장면이다. 송강은 45세 되는 나이에 강우너도 관찰사(觀察使)에 제수되어 원주(原州)에 부임한 후, 관내(官內) 순시(巡視)와 함께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한다. 이 시기는 송강의 정치 생활의 득의의 시대이었으니, 송강의 그러한 사고가 잘 나타난다.
"소양강 나린 믈이 어드러로 든단 말고 고신거국에 백발도 하도할샤.
동주밤 계오 새와 북관정의 올나하니 삼각산 제일봉이 하마면 뵈리로다.
태백산 그림재랄 동해로 다마가니 찰하리 한강의 목멱의 다히고져"
임금을 떠나 관찰사로 봉직하는 가운데서도 항상 임금을 그리워하는 정과 나라 걱정은 도처에 나타난다. 뿐만아니라 자연 속에 살고 싶은 속내를 여기저기에 나타내기도 한다.
"명사길 니근말이 취선을 빗기시러 바다할 겻태두고 해당화로 드러가니 백구야 나디마라 네 벗인 줄 엇디아난."
명사십리 해당화 속으로 들어갈 때의 광경으로 자신을 취선에 비겼다. 술과 자연에 도취되어 비스듬히 말에 실려 비틀대면서 갈매기를 보고 벗을 하자고 말하지만 갈매기는 벗이 되어 주지 않는다.
"뉴하주 가득부어 달다려 무론 말이 영웅은 어대가며 사선은 귀 뉘러니, 아모나 만나보아 넷긔별 뭇쟈하니 선산 동해예 갈길도 머도멀샤."
뉴하주를 가득 부어 마신 다음 흐뭇한 기분으로 영웅과 사선의 기별을 묻는 송강의 풍류적인 면모가 드러나 있다. 송강은 남이야 뭐라던 스스로 진선(眞仙)을 자처하는 호기(豪氣)로 자연에 몰입하여 나날을 살았다. 자연에 담긴 거룩한 기운을 호흡함으로 그 아름다움에 무릎을 치면서 뱉어낸 문구는 바로 자연의 재생인 동시에 자연의 활용이었다. 송강은 자연을 뜻대로 도려내어 그 미를 활자화하고, 그 활자로서 국문학의 폭과 깊이를 높인 시인이었다.
Ⅳ. 결론
송강 정철의 문학 세계는 당대의 자연적, 사회적 환경과 사우(師友)의 영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송강은 을사사화로 말미암아 15세까지는 거의 학문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가 16세 되던해 부친의 귀양살이가 풀려, 부친을 따라 선조의 묘소가 있는 호남 창평으로 내려와서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27세 문과에 급제할 때까지 이곳에서 다감한 소년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성산의 기슭아래 우거진 죽총(竹叢), 송강(松江), 창계(蒼溪)의 기석(奇石), 구렁 위의 누정(樓亭), 이른 봄의 설중매, 겨울이 오면 언제나 볼 수 있는 명봉산 위의 학의 무리, 이러한 자연의 풍경은 그의 뇌리에 깊게 인상지어져 〈식영정 이십영〉<성산별곡〉〈전후미인곡〉등의 국문 시가와 수 많은 한시 창작의 모태가 되었다. 이러한 자연 환경과 당시에 처한 사회상이 그의 선천적 재능과 어우러져 일찌기 시심(詩心)이 싹텄고, 여기에 사우의 영향이 더하여져 문학관이 형성되었다.
결론적으로 송강은 우리말의 구사에 뛰어난 조선문학의 1인자이다. 송강 문학은 우리 시가의 전통의 맥을 면면히 이어오면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가장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 국문학의 금자탑이다.
1)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지시산업사. 1989. 306면
“정철에 이르러서 국문시가 작품 수 , 표현기교, 취급방식에서 한시에 못지 않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관동별곡>에 와서 전에 볼 수 없었던 국토예찬이고, 능란한 수법의 진경산수화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국문시가의 표현능력이 오히려 능가한다는 것을 입증한 성과 또한 대단하기에 뒤의 사람들이 두고두고 감탄하며 칭송했다. <속미인곡>에 와서 유식한 고사라고는 하나 없으며 한시 체험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민요 같은 것을 매개로 해서 여인네들이 흔히 하는 푸념을 살리면서, 사랑과 이별의 미묘한 감정을 아주 잘 나타냈다. 한문투로 엮지 않고는 수식할 수 없었던 사대부(士大夫)의 국문시가가 이런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김갑기. 『송강 정철 연구』. 이우출판사. 1985. 18면(재인용).
3)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尹元衡)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몰아내어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 1498년(연산군 4) 이후 약 50년간 관료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대옥사(大獄事)는 을사사화로서 마지막이 되었으나,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세력에 의해 붕당(朋黨)이 형성되었다.
4) 이 때 <관동별곡>과 <훈민가> 16수를 지었다.
5) 송강이 살았던 16세기(1536~1593)는 조선이 건국되어 150년이 경과된 중종(中宗)․인종(仁宗)․명종(明宗)․선조(宣祖) 왕대로 훈민정음이 창조 반포(1446년)되고 100여년이 지난 시기이다.
6)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후 소수서원)이 최초인데, 그 시기는 중종 36년(1543년)이다.
7) 이황(李滉)으로 대표되는 주리철학은 주기철학에서 주장하는 경험적 세계의 현실 문제보다는 도덕적 원리에 대한 인식과 그 실천을 중요시하여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 도덕 규범의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이이(李珥) 등으로 대표되는 주기철학은 관념적 도덕 세계를 중요시하면서도 경험적 현실세계를 동시에 존중하는 철학체계였다.
8) 사대부들의 가사에는 은일사상(隱逸思想)과 긍정적 자연관, 연군(戀君)과 군은(君恩)의 염원이 가득 차 있다.
가사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려 속요 또는 경기체가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설, 4음보의 연속체 교술 민요가 기록문학으로 전환되면서 이루어졌다는 설, <용비어천가>나 <월인천강지곡> 등 악장의 형식이 그 기원이라는 설, 시조 기원설 등이 있지만, 아직까지 정설로 인정되는 주장은 없다. 가사의 발생에 대해서 역시 기원에 대한 견해들과 같이 많은 주장들이 있는데, 조선조 초기 정극인의 <상춘곡>을 효시로 보자는 입장과 고려말 나옹화상의 <서왕가>를 효시로 보자는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상춘곡>을 효시로 보자는 입장이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3.4조 또는 4.4조를 기본으로 한 4음보의 연속체 운문이며, 마지막 구절이 시조의 종장과 유사하게 끝나는 것을 정격가사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구가 음수율의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을 변격가사라고 한다.
가사의 성격에 대해서는, 가사가 시가와 문필의 중간 형태로 시가 문학에서 산문문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장르라는 주장이 있는 이래로 많은 학설들이 제기되었다. 가사가 율문으로 된 수필이라는 주장, 율문으로 된 교술문학이라는 주장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가사의 전개 과정:가사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양반이 가사의 주요 담당층이었던 조선전기, 평민과 부녀자층이 새로운 담당자로 부상한 조선후기, 개화기의 가사 등의 세 시기가 그것이다.
조선전기의 가사는 양반층이 창작을 주도하였던 만큼 시조와 비슷한 내용을 주로 하고 있다. 즉 이 시기의 가사는 송순, 정철 등과 같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자연에 묻혀 살아가는 생활을 주로 담고 있으면서, 임금의 은혜를 잊지 못하는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의 성격을 지닌다. 특히 정철의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십분 살린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조선후기의 가사는 대체로 산문적인 경향을 띠며,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경험이 직설적으로 표현되는 양상을 띤다. 임금으로서의 '님'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으로서의 '님'에 대한 연정이 표현되기에 이르렀고, 규방에 대한 갑갑함을 하소연하는 부녀자들의 가사나 지배층에 대한 비판을 내용으로 하는 가사가 창작되기고 했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와 같은 장편 기행가사가 만들어졌다.
9) 김종석. 『송강문학형성의 배경고』. 1994. 고려대학교
“이현보를 중심으로 한 영남가단은 시문보다는 도학을 더욱 존중하여, 시조를 짓되 심성을 닦아 도의를 실천하는 자세를 앞세우는 취향을 나타내었다. -중략- 송순․정철로 대표되는 호남가단은 자연으로 돌아가는데 대한 자기 합리화나 설명을 늘어놓지 않고 작품을 통해 감회를 나타내는 것으로 만족했으며, 도리는 따지지 않은 채 풍류를 자랑했다.”
10) 정익섭. 『개고 호남가단 연구』. 민문고. 1989. 7면
“기후가 온난하고 토질이 비옥하며 생산물이 풍부한 자연환경에 사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양성적이어서 명랑하고 낙천적인 기질이 있다. 따라서 이에서 표출된 문학 예술은 서사적(敍事的)인 것보다 서정적(抒情的) 경향이 짙어 대체로 시가문학이 우세하다.”
11) 장원봉은 이 마을에서 장원급제(壯元及第)한 인물이 많은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12) 명종15년(1560), 지금 식영정이 있는 곳 아래쪽에 서하당을 세우고 지내던 김성원 (1525~1597)은 새로 이 정자를 지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1496~1568)에게 드렸다. 임억령은 해남 출신으로 1525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을사사화가 나던 1545년에 동생 임백령이 소윤 일파에 가담하여 대윤의 선비들을 추방하자 그는 자책을 느끼고 금산 군수직에서 물러나 해남에 은거했다. 나중에 다시 등용된 후 1557년에는 담양 부사가되었다. 임억령은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고 청렴했으며 시와 문장에 탁월했지만 관리로 일하기에는 부적당하다고 당대 사람들은 말하였다. 그런 임억령인지라 정자 이름을 짓는 데도 역시 시인다운 남다름이 있었다. 식영정이란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하는 뜻이다.
식영정은 달의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뜻으로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우며 수많은 문인과 학자들이 드나들었던 곳이다. 대표적으로 송순, 김윤제, 김인후, 기대승, 양산보, 백광훈, 송익필, 김덕령 같은 쟁쟁한 문인들이 이곳에서 대자연의 흥취에 한껏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식영정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정철의 '성산별곡'이다. 성산별곡은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성산 주변의 풍경과 그 속에서 노니는 서하당 김성원의 풍류를 그리고 있다.
정자 앞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오라는 팻말이 있으므로 식영정 안으로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다. 안에 들어가면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며 환담을 나누기 좋다.
식영정의 부속건물로 부용당, 성산별곡 시비가 1972년에 건립되었다. 식영정 옆에는 1973년에 송강집(松江集)의 목판을 보존하기 위해 만든 장서각이 있다.
식영정은 성산의 한끝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뒤로는 곰실곰실한 소나무가 가득한 성산 봉우리가 섰고 앞으로는 광주호가 내려다보이며 그 건너로 무등산이 언제나 듬직하게 바라다보인다.
13) 어느 날, 김윤제가 환벽당(環碧堂)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조대 앞 물에서 용 한 마리가 승천하는 내용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김윤제가 급히 조대로 내려가자 그곳에서 한 소년이 미역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소년의 용모에 반해서 외손녀를 그 소년에게 시집 보냈는데 바로 그 소년이 정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비가 환벽당 마당에 있지 않고 조대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시비에는 <성산별곡> 중에서 조대와 소(沼), 그리고 환벽당이 나오는 부분을 새겨 놓고 있다. 지금은 수량이 풍부하지 않지만 송강이 살았던 시절에는 배를 띄워 낚시도 하고 미역을 감을 정도로 물이 깊었으며, 갈대가 우거져 강호의 풍경이 아기자기했을 듯싶다. 환벽당은 담양군과 광주광역시 접경 지역에 있는데 엄밀하게는 광주시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14)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에 있는 소쇄원은 소쇄옹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에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조선 중기의 대표적 별서정원 (別墅庭園)으로서 전라남도 사적 제 30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규모는 약 1,500평 정도이다. 무등산 자락의 성산(별뫼)아래 가사문학 권역에 자리잡은 이 소쇄원은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도에 있는 고산 윤선도의 부용동 원림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대표적 원림으로서, 광주광역시에서 가깝고 도립공원인 무등산과 광주댐의 광주호를 끼고 있어 주변의 풍광이 빼어나 사시사철 어느 때를 막론하고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감탄을 불러 일으키고 있으며 연중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입구에 들어서면 죽향 담양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청량한 맹종죽 대나무 숲이 나오고, 운치있는 이 길을 따라 오르면 아름드리 나무로 이루어진 숲과 계곡이 나오는데, 오랜 세월의 연륜이 느껴지는 이 나무들과 정자 건물 그리고 계곡을 흐르는 시원한 물소리가 찾는 이의 마음을 한 순간에 사로잡는다.
이 곳 소쇄원은 사람이 사는 주거와의 관계에서 보면 집 뒤에 있는 후원(後園)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원의 구조는 크게 애양단(愛陽壇)을 중심으로하여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광풍각 (光風閣)과 계류 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쇄원의 앞쪽 전원(前園)은 대봉대(待鳳臺)와 상하지(上下池), 물레방아 그리고 애양단(愛陽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곡에의 계원(溪園)은 오곡문(五曲門)곁의 담아래에 뚫린 유입구로 부터 오곡암 폭포 그리고 계류를 중심으로 여기에 광풍각(光風閣)을 곁들이고 있다. 광풍각의 대하(臺下)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었다. 이 계류구역은 유락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특히 여름철에 비가 오게되면 금방 수량이 풍부해져 오곡문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물이 순식간에 불어나 폭포를 이루어, 보는 사람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안쪽의 내원(內園)구역은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으로서 당(堂)과 오곡문(五曲門) 사이에는 두 계단으로된 매대(梅臺)가 있으며 여기에는 매화, 동백, 산수유 등의 나무와 기타 꽃나무가 심어졌을것으로 생각된다. 오곡문(五曲門)옆의 오암(鼇岩)은 자라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또 당 앞에는 빈 마당이 있고 광풍각 뒷편 언덕에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도오(桃塢)가 있다. 당시에 이곳에 심어진 식물은 국내종으로 소나무, 대나무, 버들, 단풍, 등나무, 창포, 순채 등 7종이고 중국종으로 매화, 은행, 복숭아, 오동, 벽오동, 장미, 동백, 치자, 대나무, 사계, 국화, 파초 등 13종, 그리고 일본산의 철쭉, 인도산의 연꽃 등 모두 22종에 이르고 있다.
소쇄원은 1530년(중종 25년)에 양산보가 꾸밀 당시에는 제월당(霽月堂), 광풍각 (光風閣), 애양단(愛陽壇), 대봉대(待鳳臺) 등 10여 개의 건물로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몇 남아 있지 않다. 제월당(霽月堂)은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으로 이 곳 소쇄원의 주인을 위한 집으로써 정면 3 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광풍각(光風閣)은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으로 손님을 위한 사랑방으로써 1614년 중수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역시 팔작지붕(지붕 위까지 박공이 달려 용마루 부분이 삼각형의 벽을 이루고 처마끝은 우진각지붕과 같으며, 맞배지붕과 함께 한식 가옥에 가장 많이 쓰는 지붕의 형태)인 한식 전각이다. 도가적(道家的)인 색채도 풍겨나와 오암(鰲岩), 도오(桃塢), 대봉대(待鳳臺) 등 여러 명칭이 보인다. 제월당에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쓴「소쇄원사십팔영시(瀟灑園四十八詠詩)」(1548)가 걸어져 있으며, 1755년(영조31년)에 목판에 새긴「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 있어 소쇄원의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무등산 자락 성산의 아름다운 계류를 끼고 있는 이 소쇄원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때 찾아도 정말 아름답고, 색다른 느낌을 주는, 정말 고풍스러운 옛 정원으로서 앞으로도 변함없이 이 곳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