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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제 61장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 이는 바벧론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
성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이사야가 공식적으로 위임받는 대목으로 이해도리 수도 있다
(Gesenius, Rosemnuller).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메시야에 관한 언급으로 해석되
어지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 근거는 예수께서 본절을 자신에 관한 예언으로 명
시하셨다는 사실이다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
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으니라"(눅 4:18-21). 예수께서 공생애를 처
음 시작하신 순간에도 그 사역의 공적 인정을 위하여 성령이 임하신 바 있다(마 3:16;
요 1:32).
기름을 부으사( , 마솨흐) - 이 용어에서 '메시야'란 단어가 유래된다. 이
스라엘의 왕(삼상 16:13), 제사장(출 30:30), 선지자(왕상 19:16) 등은 그들의 중요
직책을 위해 구별될 때 그 머리 위에 기름 부음을 받았다(삼상 16:1-5 주제 강해, '기
름 부음의 영적 의미' 참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구별해 세우신 것을 암
시하기 위해 본 표현이 사용되었다. 메시야를 언급하려고 이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한
것은 시 45:7;히 1:9 등에도 나온다.
가난한 자( , 아나윔) - 원래 이 용어는 상처나 억압으로인해 고통당하는
자를 뜻하며, 여기서는 1차적으로 낙담 중에 있었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을 뜻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는 이 용어는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이
보낼 메시야를 고대하며 사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가리킨다고 봄이 더 정확하겠다(마
5:3). 이 말은 시편에서 개인적 재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고대하였던 신실해 자들
을 가리키는 용어로 종종 사용되었다(시 9:12,18). 예수께서는 자신의 지혜를 의지함
으로 말미암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신 자신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한 마
음이 교만한 자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라고 풍자하셨고 반대로 그를 알아본 자들
을 '어린 아이들'이라고 부르셨는데 이자들이 바로 가난한 자들이다(눅 10:21).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 1차적으로는 포로 귀환을, 더나아가서는 죄와 죽음으로부
터의 구원을 예언하는 내용이다. 또한 본 표현은 희년의 때에 모든 종된 자에게 선포
되는 자유를 동시에 연상케 한다(레 25:10;렘 34:8,9).
갇힌 자에게 놓임 - 원문상으로는 '갇힌 자의 감옥문을 여는 것'이란 뜻이다. 여
기서 '여는 것'이란 메시야의 도래와 연관지어 볼 때 죄와 사망의 올무로부터의 해방
(롬 6:18;7:24,25;히 2:5) 혹은 영적으로 장님되었던 자가 영의 눈을 뜨는 것을 가
리킨다(Ewald). 눅 4:18은 본절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본절에는 없는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이란 구절을 첨가함으로써 후자의 뜻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 , 쉐나트 라초 라훼) - 문자거
인 뜻은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해'이다. 이것은 나팔이 올리고 온 이스라엘 땅에 자
유가 선포되었던 희년의 때를 연상시키는 표현이다(레 25:9,10). 희년의 때와 마찬가
지로 메시야의 때도 '해방'이란 이미지를 내포한다. 메시야의 도래의 때는 온 세계
인류를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키는 때인 것이다. 메시야의 도래로 시작된 해방
의 때는 은혜의 때라고 불리기도 한다('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
다', 고후 6:2).
하나님의 신원의 날 - 문자적인 뜻은 '하나님의 보복의 날'이다. 1차적으로 이날
은 바벧론으로부터의 포로 귀환의 날을 가리킨다. 그런데 바로 이날을 '복수의 날'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만하다. 바로앞에 언급된 바 '여호와의 은혜의 해'의
대비적 표현으로 본 표현이 언급된 것은, 이스라엘에게 '은혜의 해'가 되는 때가 그
대적에게는 '복수', 곧 '심판'의 때가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마지막 심판날에 하나님이 대적들을 멸하시는 보응은 곧 성도들에게는 영광을 얻는 결
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요 12:47;고전 15:52;고후 4:17;계 21,22장).
=====61:3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 원문 직역은 '아름다움을 주어 그재를 대신하며'
이다. '아름다움'에 해당하는 '페에르'( )는 본래 여자들이 머리에 쓰던 아름답
고 화려한 관을 말하며, '희락의 옷', '찬송의 옷'과 함께 즐거운 축제 때를 연상시킨
다(G.W. Grogan). 이제 여호와의 구원과 은혜의 때가 이르면 슬픔의 표로 뒤집어 썼
던 재를(에 4:1,3;렘 6:26) 털어내고 대신 아름다운 관을 쓰고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
다.
희락의 기름 - 당시는 기쁨의 축제 때 특히 초청한 귀빈의 머리 위에 향내나는 값
비싼 기름을 붓곤 하였다(시 23:5;45:7;암 6:6). 그외 성경은 축제 혹은 기쁨 그 자
체를 뜻할 때 '기름'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57:9). 공적인 재난 혹은 슬픔의 때
에는 결코 기름을 사용하지 않았다(삼하 14:2).
찬송의 옷 - 절망에 빠진 자를 삼베옷을 입은 것에 비유하는 대신, 찬송과 감사를
드리고있는 자는 밝은 채색옷을 입은 것에 비유한다.
의의 나무( , 엘레 하체데크) - '나무'에 해당하는 '엘레'(
)는 팔레스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상수리나무를 뜻한다. 이 나무는 굵고 튼튼하
여 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한다(이런 맥락에서 탈굼역, 제롬역, 시리아역 등은 이을
'강한 것' 혹은 '힘센 것'으로 번역했음). 본문의 '의의 나무'는 한때 죄악으로인해
넘어졌으나 은혜로 말미암아 회복되어 굳건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주의
백성을 가리킨다. 그들이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것은 정원사가 나무를 심듯이 하나님
이 친히 그들을 구원하여 세우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영광을
열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세움을 받는 사실은
주님이 사용하신 비유에도암시도이가 있다 : "예쑤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
나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 15:13).
=====61:4
대대로 무녀져 있던 것들 - 유다가 바벧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 유다 본국
팔레스틴 땅과 성읍이 황폐해졌던 사실을 가리키며(렘 20:6;28:6), 나아가서는 본장
전체의 문맥상 메시야의 도래가 있기 전 혹은 메시야를 영접하기 이전의 상태를 나타
낸다.
=====61:5,6
이는 새로이 회복될 이스라엘이 이방 가운데서 제사장 나라로서(추 19:6) 우뚝서게
되며 이방인들로부터 물적 조력을 받을 것을(60:10)가리킨다고 해석되기도 하나, 여기
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더 나을 것 같다. 즉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편
입된 이방인들 가운데서, 마치 아론의 후손이 이스라엘 중에서 감당했던 것과 같은 위
치에 서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Delitzsch). 그러나 이방인들 중에서도 제사장과 레
위인을 택하리라고 하신 말씀(66:21)이나 특히 이방인과 유대인 간의 벽이 완전히 허
물어질 복음 시대(엡 2:14)의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이는 문자적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사도 바울의 언급에서 찾을 수 있겠다 :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은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15:27).
=====61:7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 바벧론에서 당한 고통에 비교해볼 때 메시야 왕국의 도
래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누릴 축복은 더욱더 엄청나게 크고 값진 것이 될 것이라
는 말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당한 고통과 메시야 사역으로 인한 축복을 단순히 비교
한다는 의미보다는 메시야의 구원 사역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누릴 축복이 그
무엇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1차적으로는 포로지의
이스라엘에게 큰 위로를 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 여기 '능욕'에 해당하는 '켈리마'(
)의 문자적인 뜻은 '혼돈', '혼란'이지만 바로 앞 구절과 동의적 평행을 이
룸을 고려할 때 '수치', '슬픔' 등으로 번역함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분깃'도 메시
야의 구속 사역으로 얻게 될 구원의 축복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한편 원문에 보면
앞 구절과는 달리 본절의 주어는 2인칭에서 3인칭으로 바뀌어 있는데, 이것은 본서 저
자가 자주 사용하는 화법의 일종이므로 큰 의미없이 동일한 주체를 의도하고 있는 화
법으로 보면 되겠다.
=====61:8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 '대저'는 '키'( )로서 앞절에 진술된 바벧
론 포로 생활로고통받은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이 배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사실의 이유
를 밝히는 접속사이다. 하나님이 그같이 하실 이유는 그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방의 손을 빌어 그의 백성을 심판하신 것도 공의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절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바벧론의 교만과 불의의 강탈에
대한 분노로 나타난다.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며( , 세네 가젤 베올라) - 본문
에 대한 번역은 구구하지만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견해가 이처럼 둘로 나뉘는 것
은 '베올라'( )의 '베'( )를 그대로 두고번역하느냐 아니면 '베'를 빼고 대
신 접속사 '와우'( )를 삽입하여 번역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먼저 후자의 경우를
따르면 '나는 강탈(혹은 약탈)과 범죄를 미워한다'가 된다(시리아역, Lowht, Noyes).
그러나 이 번역은 받아들일 수없다. 왜냐하면 본 번역의 경우 필요 이상의 원문 수정
을 가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자의 경우를 따르면 '나는 번죄에 수반되는 강탈(혹은
약탈)을 미워한다'가 된다. 이는 바벧론이 유다 백성을 압제하고 강탈하는 등 필요
이상으로, 월권 행사를 도모한 사실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그 영적 우매 때문에 하
나님의 징벌을 이방이라는 수단을 통해 받았다. 그러나 수단으로사용된 이방 세력은
본연의 임무인 징벌의 집행 외에 과도한 불의를 저질렀다. 바로 이 사실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의해 체크되었던 것이다.
=====61:9
알리리니 - '구별되게 하리니' 혹은 '명예롭게 하리니'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시
67:2;76:1;79:10등의 용례들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참자녀들이 세상나
라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방은 자들임을 완전하게 인정받는 때는 구원 역사의종말,
곧 재림의 때이다. 그러나 그때가 이르기 전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여호와께 복 받
은 자손이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 인정을 받을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
올려진다(마 5:16). 인정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
해야 한다(마 5:13-15).
=====61:10
의의 겉옷 - '겉옷'은 입은 옷 위에 걸쳐 몸 전체를 가리다시피하는 느순한 망토
따뤼를 가리킨다(시 132:9;계19:8). 이 땅토는 추위 또는 외부로부터의 침해 따위로
부터 몸을 보하하는 구실을 한다. 여기서 이 망토가 의미하는 바는 '의'이다. 이
'의'는 이스라엘의 자격, 능력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덧입히신 그 무엇으로
메시야의 구원 사역의 결과로 야기된 것이다. 원래 이스라엘은 스스로 영적 파멸로부
터 구원하거나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스라엘 역사가 그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아들 메시야를 보내시고 그로 구속 사역을 이루게
하시어서 그 사역을 근거로 그들을 보호하는 영적인 옷을 입히셨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였다. 따라서 영적 이스라엘, 교회는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61:11
땅이 싹을 내며 - 본서 저자가 여러 차례 사용한 이미지(45:8;55:10,11)로, 의미하
는 바는 적시에 내린 단비로 촉촉해진 땅에서 새싹이 움트듯이, 메시야가 오시면 진리
와의가 돋아 자라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그의 택한 백성을 그곳으로 모으시는 목적은 그의 백성들로부터 찬양을 받기 위함이
다. 본절에서의 찬양은 교회가 세상과는 다른 구별적, 거룩한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칭송을 듣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사야 제 62장
=====62:1
나는...잠잠하지 아니하며 - 본절의 화자(話者)를 누구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의견
이 구구하다. 먼저는 저자인 이사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경우 본절이 의미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그 영광이 의미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그 영광이
온 땅에 드러나기까지 이사야는 그의 수고와 중보 기도를 중단하지 않겠다는 것이 된
다(Calvin, Gesenius). 한편 하나님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경우 본절은 구속
사역을 성취하기까지는 그의 백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각오를 실은 구
절이 된다(Delitzsch, Grotius). 이외에도 유대인, 신약교회 성도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유력한 견해는 아니다. 이중에서 본장의 전반적 흐름을 고려할 때, 본 화자는
1차적으로 이사야 선지자를, 더 나아가서는 위대한 중보자이신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
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영적 회복을 맛볼 때까지 그 백
성과 하나님을 향한 그의 중보 사역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가 특히 하나님을 향해 중보 기도를 드린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침묵 및 그의
백성의 불평이 전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오랜 포로생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시행되지 않자 백성들은 불평을 하고 그 불평을 들은 이사야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대목이 전제되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경우를 64:12; 시 28:1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57:11; 65:6등에서는 오랜 침묵을 깨고 응답을 약속하는 하
나님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 앞의 '공의가 빛같이'의 동의적 평행구이다. '횃
불', '빛' 따위는 그 특징이 그 주위를 향해 빛을 발산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제
이스라엘에게 비롯된 구원이 마치 아침태양이 가까운 언덕, 들, 그리고 더 높은 산을
향해 그 빛을 펼쳐 나가듯이 온 세상을 향해 그 영향력을 펼쳐 나갈 것을 의미하기 위
해 사용되고 있다. 저자는 나타날 구원이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열방에도 미칠 것을
암시하는 셈이다.
=====62:2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 - '새 이름'은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 용어이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 후 그곳에서 살게 될 자들을 언급할 때 바로 이 호
칭을 사용하고 있다(계 2:17; 3:12).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이 회복된 상황
을 표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현재 수치와 가난, 압제로 대
변되는 삶의 상황 속에 처해 있다. 그러나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하면 번영과 영광으로
삶의 상황이 바뀌게 될 것인데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을 새 이름을 얻을 것으로 묘사하
고 있는 것이다.
=====62:3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 원문직역은 '여호와의 손안에 있는 영광의 면류
관'이다. 본문은 해석하기 힘든 구절로 알려졌는데 그 이유는 면류관이란 머리에 쓰는
것이 상식인데 여기서는 그 면류관이 손안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
기 '면류관'을 축제 혹은 결혼식 따위 때에 손에 들고 행진하던 화환, 꽃다발 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본절은 면류관 자체보다 하나님 손안에 있다는 사실에 강조
점이 있는 내용으로 보고 해석되어야 할 것같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
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음을 가리킨다(신 33:3). 그리고 후 문맥은 하나님이 다시는 이
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보호하실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하나님의 보호
를 받게 될 이스라엘을 강조하는 구절로 봄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영광의
'면류관' 혹은 ' 왕관'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될 수는 없다. 특히 '왕관'은
'체니프'(* )로서 '둥글다', '굴곡을 이루다'는 뜻을 내표하는 말이며 가장자리
에 보석 따위가 박힌 둥근 면류관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왕관은 모든 사람 앞에 드러
나는 영광의 상징이다. 이 사실을 중시할 대 본절은 이스라엘이 이방 세계 앞에 두드
러질 것을 암시한다고 간주될 수 있다. 앞 문맥은 사실 이것을 지지한다.
=====62:4
헵시바(* - , 헤프치 바) - 문자적인 뜻은 '나의 기쁨은 그녀 안에 있
다'이다. 말하자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겠다는 것이다. 물론 예루살
렘이 그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자신의 무엇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한편 히스기야 왕의 아내가 '헵시바'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에(왕하
21:1) 착안하여, 히스기야 왕은 메시야의 모형으로 언급되기도 한다(32:1 참조).
쁑라(* , 베울라) - 문자적인 뜻은 '결혼한 자', '결혼한 부인'이다. 그러
나 이 용어는 결혼했다가 이혼 당한, 말하자면 버림을 받은 여인에게 사용되는 용어이
다. 여기서는 한번 버림을 받았으나 다시 용서함 받은 이스라엘의 신분을 암시하는 의
미로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근동에서는 한 왕이 다른 왕으로부터 왕권, 곧 통치
권을 받았으면 그는 그 왕국과 혼인 관계에 들어갔다고 흔히 말한다(Robert). 또 성경
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그의 교회를 신부로 비유하곤 한다(요 3:29; 계
21;2,9). 저자는 다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을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로 이 결
혼 이미지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62: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 한번 버림을 받은 여인과 같은 이스라엘과 재결
합하는 이미지가 소개되는 문맥에서 본 비유는 좀 낯설다. 일반적으로 청년이 과부나
한번 결혼했던 여인과 결혼하는 경우는 쉽지 않다. 물론 왕실이 또 다른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을 때에는 그 정략적인 목적 때문에 그 같은 경우가 흔히 생기기는 했다. 여
기서 하나님이 한번 버림을 받았던 이스라엘과 재결합하는 사실을 청년과 처녀의 재결
합 이미지로 묘사하는 저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완전히 사하셨다는 뜻을
보이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 같다.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본문의 해석은 상당히 난해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로 나뉜다. (1)'아들들'을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나타내는 복수형 칭호로
해석하는 견해. (2)' 네 아들들'에 해당하는 '바나이크'(* )를 '건축자'란 뜻
의 '보네크'(* )로 읽어, 예루살렘의 건축자이신 하나님을(시 147:2) 가리킨다
고 보는 견해(Whybray). (3) '취하겠고'의 히브리어 '바알'(* )이 '결혼하다'는
뜻 외에 '다스리다', '관할하다'(26:13)는 뜻도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본문을 '네
자녀들이 네게 거하겠고'로 해석하는 견해(사해 사본, 벌게이트역, 70인역, 탈굼역),
세 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하리라 본다.
=====62:6
파숫군을 세우고 - '파숫군'이란 대적의 침입을 살피거나 소식을 가지고 오는 전령
을 확인하기 위하여 성벽 망대를 지키던 자이다(52:7,8). 그러나 여기서는 그 백성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임무를 맡았던 자들을 가리킨다(겔 3:17;33:7).
잠잠치 않게 하였느리라 - 이것은 시간을 알리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이 임무에 충
실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동방의 파수꾼들이 망대를 순회할 때마다 큰소리를
지르던 관습을 연상케 한다. 여기서는 백성을 가르칠 책임이 있는 자들, 특히 종교 지
도자들이 그들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 하마
즈키림 에트 야훼) -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를 기억하게 만드는 자들'이다. 여기서
'하마즈키림'(* )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 혹은 예배 의식 따위에 적용되
는 용어로서(시 45:17; 102:12) '기억하다'로 번역되는 '자카르'(* )에서 온 단
어이다. 따라서 본 용어는 여호와를 기억나게 하기 위하여 예배에 봉사하는 자 혹은
여호와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그 백성에게 그의 이름, 곧 그의 전사역을 통해 드러
난 하나님 존재 그 자체를 찬양 및 선포하는 자로 해석될 수 있겠다. 여기서는 후자로
해석됨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1절에서 암시되었거니와 본절의 종교 지도자들의 임무란
다름 아닌 메시야를 통한 구원 사역을 계획하고 수행하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선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62:7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 이것은 1차적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포로로부터 돌아와 이전의 특권을 회복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완
전한 성취는 주의 재림 때에야 되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본 예언은 영적 예루살렘
인 신약 교회에도 적용된다. 신약 시대 성도들 중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은 교회가
우주적인 존경과 기쁨의 대상이 될 재림의 날을 준비하며, 이스라엘의 국교지도자들이
그랬듯이 끊임없이 인내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눅 18:1,7 참조).
=====62:8
여호와께서...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 고대에는 맹세의 방법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하늘을 행해 손을 드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다(신 32:40). 하나님은 그
맹세를 드릴 상대가 없는 분이므로 하나님의 맹세의 경우 그 자신에게 드려졌다
(45:23). 여기서 하나님은 그의 오른손을 들고 맹세하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특히
여기서의 오른손은 그의 백성을 이방의 압제에서 구원하실 권능을 나타낸다. 이제 그
의 강력한 오른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후 하나님은 결코 그 백성을 이방에게 다
시 넘겨주지 않으실 것이다.
네 곡식을...식물로 주지 아니하겠고 - 여기 곡식은 문자적으로 '옥수수', '곡물'
을 뜻한다. 오늘날 옥수수는 동물의 먹이로 많이 사용되지만, 당시 팔레스틴에서의 옥
수수란 중요한 식물(植物)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은 단지 옥수수뿐 아니라 이
스라엘이 취하던 모든 양식이 앞으로는 결코 이방의 손에 들어가지 않으리라고 약속하
고 계신 셈이다. 그러나 이 약속 후에도 이방은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그들의 양식을
탈취한 바 있다. 그렇다면 본 약속은 종말론적 성격을 띤 약속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
이다. 이제 주의 재림 이후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될 때 그 백성은 결코 사단의
위험이나 공격으로 인해 탈취당하지 않을 것이다.
=====62:9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수고한 것을 즐기게 된다는 말씀
인데, 이 같은 결과는 안전의 상태가 조성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 자신의 수고한 것
을 먹는다는 것만큼 안정 속에서 누리는 자유와 번영을 강력히 암시하는 표현도 드물
다(Barnes).
나의 성소 뜰에서 마시리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규례를 따라 성전에서 먹
고 마시곤 하였는데(레 6:16; 신 12:17,18; 14:23). 그때 그들이 보여 준 가장 큰 특
징은 기쁨이었다. 그들로 기쁨을 느끼게 한 것은 그 모든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는 자각이었다. 본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모든 축복의 결과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식하고 기쁨으로 낙을 누리게 될 것을 암시한다.
=====62:10
본절은 본서 저자인 이사야(1절)와 파수꾼들로 호칭된 종교 지도자들(7절)의 중뵈
도, 그리고 계속 이어진 하나님의 엄숙한 약속(8,9절)이라는 문맥의 연장선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선지자 이사야와 종교 지도자들이 중보기도한 내용은 1차적으로 다름 아
닌 바벧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귀환이었다. 이제 그 귀환이 하나님의 약속대
로 성취될 것인데 그 성취를 묘사하고 있는 곳이 바로 본절이다.
기를 들라 - 이것은 한 군대가 행진을 재개할 때를 연상케 한다. 행진 중 어느 곳
에 쉬다가 충분한 휴식 후 행진을 재개할 경우 깃발은 높이 쳐들어서 행렬을 재정비하
라는 신호를 내곤 한다. 그와 유사하게 오랜 포로 생활로 이곳 저곳에 흩어졌던 이스
라엘은 정한 지도자를 앞세우고 전열을 정비하듯 한데 모여 본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
이다.
=====62:11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 여기 '구원'은 1차적으로 바벧론 포로로부터의 귀환을 뜻
한다. 그러나 문맥적으로 그리고 보다 먼 조망에서 볼 때는 메시야를 가리킨다. 그래
서 대부분의 유력한 역본들은 본 '구원'을 '구세주'로 번역하고 있다(70인역, 벌게이
트역).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 여기 '그'란 바로 메시야를 가리키
며 '상급이 그에게 있고'란 구원이 그 손안에 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메시야께
서 구속 사역을 완수하실 것을 암시한다.
=====62:12
4절에 이어 다시 한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 반복 강조되
고 있다. 그 같은 결과는 메시야의 구속 사역에 근거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여기 '여
호와의 구속 하신 자'란 '대속적 피에 의해 그 죄를 씻음 받고 죽음에서 해방된 자'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이름만큼 아름다운 이름은 없다.
이사야 제 63장
=====63:1
에돔...보스라 - 전자는 근접해 있는 까닭에 유다와 끊임없는 적대감을 가졌던 국
가이며 후자는 위치상으로는 모압에 가까우나 이두매, 곧 에돔의 주요 도시 중의 하나
였던 곳이다. 이 두 곳은 본서 저자가 세상의 모든 유다의 대적을 의미할 때 언급한
곳이다(34:6).
홍의를 입고...오는 자 - 여기 '홍의를 입고'는 '하무츠 베가딤'(*
)이다. 그런데 '하무츠'(* )는 '(맛이) 신', '(색깔이) 얼룩덜룩한' 어떤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하마츠'(* )에서 유래한 용어로서 자줏빛, 주홍색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용어는 원래 자줏빛으로 염색한 혹은 피가 그 옷자락에
튀어 피색으로 물든 용사의 망토를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본절이 묘사
하고 있는 어떤 인물은 이 사실과 뒷문맥을 고려하여 볼 때에 승리를 쟁취하고 귀환하
는 큰 용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용사의 정체에 관한 견해는 다양하다. 그러나 그
중의 대표적인 두 견해는 메시야 혹은 하나님으로 보는 견해이다. 62장과의 문맥적 연
결 면에서 그리고 본절이 그려내는 용사의 모습이 대적들을 정복한 승리자의 모습이라
는 점에서,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이 많다(Calvin, Delitzsch, Gesenius). 그
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거에 입각해볼 때, 오히려 전자의 견해가 더 나을 것 같
다. (1)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상황은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상 일어날 일이라기보다는
마지막 보응의 날과도 관계된다. 이런 점에서 에돔 등은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은 물론
이고 나아가 메시야와 성도들을 대적하는 사단의 모든 세력까지 상징한다. (2) 피묻은
옷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대속을 암시한다(계 19:11-14). (3)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패배의 십자가가 아니라 도리어 죄와 사망과 사단의 세력을 파하신 승리의 십자가였다
(골 2:15).
화려한 의복 - 문자적인 뜻은 '그 의복에 있어 영광스러운'이다. 이것은 고위직에
있는 고대 용사들의 영예롭고 눈부신 군복을 가리킨다.
큰 능력으로 걷는 자 - 두말할 나위 없이 이 표현은 그의 대적을 완전히 섬멸한 사
실을 드러내듯 승리의 정복자로서 당당한 보무로 입성하는 용사에서 따온 이미지이다.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 지금까지는 제삼자가 화자(話者)였다면 본 구절부터
는 메시야 자신이 화자가 되고 있으며, 본 화자는 앞선 화자의 의문에 대답을 주는 모
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 '의'는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
는 용어이다.
=====63:2
본절은 메시야가 그 대적을 진멸하신 사실을 포도즙 짜는 모습을 통해 표현하고 있
다. 당시 포도즙을 짤 때에는 먼저 큰 통에 포도를 넣고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밟았
다. 한 시간 정도 밟으면 질이 좋지 않은 포도는 맨 위로 떠올랐으며 그후 계속해서
30분 정도를 더 밟으면 향기 좋은 포도즙이 각 송이에서 흘러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 더 밟으면 신 포도까지 터져 전체 포도즙의 맛은 좋지 않게 된다고 한다
(Burder). 본절은 이같이 포도즙을 짤 때 그 즙이 튀어 옷에 몰은 어떤 사람을 연상하
여 말하고 있다. 성경은 피를 포도즙에 비유해 언급하곤 한다(신 32:14). 어떤 학자는
여기서 저자가 피를 포도즙에 비유하고 있는 까닭은 1절에 언급된 '보스라'라는 지역
이 포도 산지로 유명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Calvin). 이 경우 '보스라'가 포도
산지인 줄 알고 있던 유대인들은 더 실감나게 본절의 의미를 파악했을 것이다.
=====63:3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 본절은 2절에 묘사된 바 포도즙 틀을 밟다가 그
즙이 옷에 묻은 것과 같은 데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63:4
원수 갚는 날 - 여기 '원수 갚는다'는 표현은 공의에 입각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에돔 혹은 이두매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오랫동
안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다. 성경은 에돔 자손이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까지 파괴할 정
도로 악했고 이스라엘을 괴롭혔다고 진술하고 있다(시 137:7). 이 같은 대적들은 하나
님의 징벌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방(사단의 세력)이 징벌받는 이 날은
역으로 이스라엘(모든 성도)의 구원의 날이다(34:8;61:2 참조).
=====63:5
도와 주는 자도 없고...없으므로 - 아무도 메시야의 구원 사역을 조력하지 않으며
조력할 수도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말은, 메시야께서
감당하시는 인류 구원의 대업(大業)은 메시야 자신의 대속 사역으로써 충분하다는 의
미도 내포하고 있다.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 이 표현은 59:16의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를
연상시킨다.
=====63:6
그들을 취케 하고 - 혹자는 본절을 3절 하반절의 반복적 유사 평행구로 보고 본문
의 히브리어 '아솨크램'(* )을 '쳐부수다'는 의미의 '아솨브램'(* )
으로 수정하고자 한다(탈굼역, Whybray). 그러나 굳이 원문 수정을 하지 않더라도, 본
문은 메시야의 진노의 공포 아래 있는 자가 만취한 자처럼 자제력을 잃고 땅 위에 엎
드러져 있는 상황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시 75:8 참조).
=====63:7
내가 - 본절에서부터 화자가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는(1-6절) 화자가 주로 메시야
이셨다면 이제부터는 대적의 진멸을 통하여 그들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스라엘이며(7-14절) 그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선지자가 직접적 화자로 나서고 있다.
그런데 여기 대적의 진멸이란 1-6절에 서술된 내용이 아니라 과거 이스라엘 역사속에
수차례 반복된 이방으로부터의 이스라엘 구원 역사를 가리킨다. 하나님 찬양으로 시작
되는 본절로부터 14절까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15절부터 64:12까지의 큰 단락은
이스라엘의 억압과 파멸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자비를 탄원하는 이스라엘의 기도를 그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63:8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 이것은 언약 관계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
님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가리킨다.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 - 이것은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를 맺었을 때 하나님이
가지셨던 기대를 표현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언약 관계에 신실할 것을 기
대하셨다. 아울러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그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반
역과 거짓의 역사를 되풀이해 왔지만, 하나님께서 그 크신 은총을 따라 택하신 백성을
회개시켜 새로이 회복시키시리라는 암시도 담겨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도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암시를 주는 구절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63:9
) - 짧지만 번역하기 난해한 구절이다. 그 이유는 '...이 아니다'의 뜻을 지닌 '로'
(* ) 때문이다. '로'를 생략해버릴 경우,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 부합하는
번역이 가능하다:'그들의 모든 고통의 때에 하나님도 고통하였다'(In all their
affiction he was afflicted, KJV, LB, RSV). 그러나 원문의 단어 자체를 생략하는 이
같은 번역은 수용하기 어렵다. 반면 '로'를 그대로 두고 문자적 번역을 하면 '모든 그
들의 고통의 때에 하나님은 고통하지 않으셨다'라는 다소 애매한 내용이 되어버린다.
이 난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뒷문맥을 고려하고 본 구절 자체에 어떤 용어가 생략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일이다. 그 같은 경우 다음과 같은 번역이 가능하다:'모든 그들의 빈
궁의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그의 선하심에 있어) 빈궁하지 않으셨다'
(Houbigant). 여기 '빈궁'은 '고통'으로도 번역될 수 있음을 고려할 때, 이 같은 번역
이 가장 무난하다고 본다.
자기 앞의 사자 - 이 사자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구원하였던 적이 있다
(출 32:34;33:2;민 20:16). 따라서 천사로 보는 것이 가능해지는데 구체적으로 가브리
엘(눅 1:19), 미가엘(단 10:13-21)로 보는 견해가 있다(Clark, Jarchi). 그런데 이 용
어는 오실 메시야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데 실제로 메시야로 보지 않으면 해석되지 않
는 부분에서 이 용어가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출 14:19;23:20, 21). 따라서 본 용
어는 1차적으로는 천사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메시야를 예표하는 용어로 정리하면
되겠다.
드시며 - 그의 양떼를 모든 목자 혹은 그의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 혹은 새끼를 날
개 아래 품는 독수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출 19:4;신 32:11, 12). 여기서
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광야의 연단 중에서 보존하시고 결국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이신 것을 가리킨다.
=====63:10
성신(* , 루아흐 카데쇼) - 어떤 학자는 이것을 '선지자들의 말씀'
(갈대아역 등) 혹은 '하나님'으로 각각 번역한다(Grotius, Gesenius, Rosenmuller).
그러나 신약에 비추어 볼 때 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갱신시키고 거룩하게 만드시는 삼
위(三位) 중 성령 하나님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물론 당시 히브리인들이 이 용어를 하
나님에게 적용시켰다는 사실과, 오늘날의 성도들과 달리 삼위의 독립된 존재 양식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용어
가 '성령'을 지시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시대에 있어서 인
간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동일하게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성부,
성자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계셨듯이 성령 하나님도 영원 전부터 계셨다.
=====63:11
백성이 옛적 모세의 말을 추억하여 가로되 - 원문 직역은 '그가 모세와 그의 백성
들, 옛날을 기억하셨다'이다. '기억하셨다'는 '이즈코르'(* )로서 3인칭 단수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인칭 복수로 바꾸어 번역하려는 시도가 있는데(NIV), 굳이 그
렇게 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 시도의 이유는 이어지는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
원(의문)처럼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은 백성의 탄원(의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탄원(의문)을 그대로 묘사하는, 말하자면 그들의 의문을 그대로
인용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이즈코르'의 인칭 문제는
해결된다. '이즈코르' 곧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뜻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보호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반역은 징벌을 받아 마땅한, 심
지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지키지 않으셔도 될 만한 악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들을 용서하고 계속 그 약속에 신실하셨던 것이다. 이 신실함은 모세와 그의 백성의
시대 곧 광야 시대 때 나타났었다. 이제 그 후대 이스라엘은 바로 그 신실하심의 결과
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고통의 현실에 대하여 동일한 신실함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하였는데, 본절에서 14절까지 하나님은 그들의 의문을 직접 인용하시면서
그들의 현실의 고통에 대한 궁극적 결과를 알려주고 계신다.
바다 - 의심의 여지없이 이스라엘이 탈출하여 나왔던 애굽을 가리킨다. 홍해 사건
은 12절에 나온다.
성신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궁극적 목적은 그들을 다른 민족보
다 승한 거룩한 민족이 되게하기 위함이었다(출 19:4-6). 그런데 그 목적에 도달하게
끔 역사하는 힘은 그들 가운데 보내신 성신으로 말미암았다.
=====63:12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고
광야에서 인도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만이 참신이신 것을 이
스라엘과 온 세계에 알리는 데 있었다. 애굽은 당시 세계에서 모든 과학, 문명의 중심
국가라 할 만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연구되어진 혹은 발생되어진 사건, 결과 등을 쉽
게 온 세계로 퍼져 나갔다.
=====63:13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 여기 '광야'는 그 여러 특성 중 그 여정에 장애물이 없
는 평평한 곳이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63:14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 높은 언덕 위로부터 비옥하고 물이 많은 골짜기로 내려
가는 가축의 떼를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시 23:2). 이들 가축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성
령은 지친 광야의 방황 이후 이스라엘을 약속하셨던 땅에 들여보내사 그들로 하여금
안식하게 하셨다. 본절은 과거의 회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고통 중에
있는 그 후손 이스라엘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한 은혜를 베푸실 것을 암시한다.
=====63:15
주여 하늘에서...보옵소서 - 본절에서부터 현재의 재난과 역경의 문제에 하나님의
은총이 개입되기를 원하는 이스라엘의 탄원이 시작된다. 그들의 탄원은 하나님이 자신
들을 그의 자녀로 택하신 사실과 과거 그의 조상들을 동일한 어려움에서 구원하셨던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간곡한 자비(* , 하몬 메에이카) - '하몬'(* )은 빗소리와
같은 소리(왕상 18:41), 노랫소리(겔 26:13), 무리의 떠드는 소리(삼상 4:14;14:19)
등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나, 여기서는 '풍요', '풍부' 정도의 의미로 보면 무난하겠
다. 그리고 '메에이카'(* )는 '부드럽다'는 뜻의 사용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
한 말로 '복부' 혹은 상징적으로 '동정심'을 뜻한다. 이 같은 사실을 근거로 할 때 본
구절의 뜻은 '풍부한 자비' 정도가 되겠다.
=====63:16
아브라함은...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하
나님은 이스라엘 그들을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대비적 표현
이다. 여기 나오는 '아브라함' 그리고 '이스라엘'(야곱)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자들이다. 한편, 본문은 49:15을 생각나게 한다:"여인이 어찌 그젖 먹는 자식을 잊겠
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
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63:17
어찌하여...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 인간이 냉소적으로 그리고 완고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때 하나님께서는 은혜 베푸는 일을 멈추고 그들로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신다. 이때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에게로 돌아올 수 없게 되는데, 이
경우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들을 완전히 버리신 것으로 판단하고 불평하게 된다.
본 구절은 바로 이스라엘의 그 같은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Keil & Delitzsch). 그러나
16절에서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 구속자로 고백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
구절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소원해진 사실을 고백하
는 역설적 표현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64:5).
=====63:18
주의 거룩한 백성 -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졌었다(62:12;신 7:6).
=====63:19
본절은 그 의미를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원문과 문맥에 충실하면 의미 규
정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핵심은 개역 성경의 '우리는 ...같으며' 부분을 정확히 규
정하는 일인데 원문은 이렇다:'하이누 메올람 로 마솰타 밤'(*
). 이것의 문자적 의미는 '우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영원 전부
터, 당신은 그들을 다스리지 않았읍니다'이다. 바로 앞절에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가
나안을 점령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그 언급 후 바로 이어지는 '영원 전부터, 곧 옛
적부터 우리는 당신의 것'이라는 고백은 대적이 그들의 본토를 점령한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가능한 추론은 옛적부터 하나님이 택한 백성,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이니 그것을 근거로 그 대적을 본토로부터 몰아내달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고백은 자신들의 본국 귀환의 근거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같은 맥
락에서 볼 때 '그들을 다스리지 않았다'의 '그들'이란 이스라엘의 대적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본국 귀환의 또 다른 근거로서, 그 대적은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
는 민족이라는 사실이다. 그 같은 민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할 것은 당연하
다. 이상의 소고를 정리할 때 본 절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서인 사실과 그의 대
적이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민족인 사실을 근거로 자신들의 본토로의 귀환을 호소하는
탄원으로 볼 수 있다.